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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21: 18-25
18.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하나가 돌이나 주먹으로 그 적수를 쳤으나 그가 죽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가
19. 지팡이를 짚고 기동하면 그를 친 자가 형벌은 면하되 기간 손해를 배상하고 그로 전치되게 할찌니라
20. 사람이 매로 그 남종이나 여종을 쳐서 당장에 죽으면 반드시 형벌을 받으려니와
21. 그가 일일이나 이일을 연명하면 형벌을 면하리니 그는 상전의 금전임이니라
22.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
23.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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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시내 산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도덕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을 주신 데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회생활을 할 때 지켜야 할 시민법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지난주일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준수해야 할 시민법 중 사형에 해당되는 네 가지 죄악에 대하여 살펴보았는데,
1)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2)부모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3)사람을 유괴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4)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형에 해당되는 네 가지 죄 중에서 두 가지는 부모에게 불효한 죄인 것을 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모 공경을 더욱 잘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부모들에게 자녀를 양육하고 훈육하며 다스릴 권한을 부여하셨고, 그 권위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일을 통해, 위에 계신 하늘 아버지께 복종하고 순종하는 삶을 배우도록 하신 것입니다.
또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사람의 생명을 어느 누구보다 존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살인한 자들을 향하여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고 함부로 살상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단호히 응징하여 살인죄가 성행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자들은 영웅이나 위인의 반열에서 반드시 제거해야 할 것이며, 많은 사람들을 무고하게 죽인 통치자들 역시 인류의 양심 법정 도덕 법정에서 반드시 정죄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 다른 점에서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 적용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음주 운전 같은 것은 간접적인 살인죄나 마찬가지인 줄 알아서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러한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불량식품이나 인체에 치명적인 농수산물을 재배하거나 판매하지 말아야 하고, 그리고 태아 살해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살인과 관련해서 “옛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대하여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라는 주님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육체적인 살인은 물론, 형제에 대하여 노하고 미워하는 마음의 살인도 하지 않고 살게 되시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시민법 중 오늘의 본문은 육체적인 상해를 입힌 자에 대한 보상 규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해 보상법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은 바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해 보복법(同害 報復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법을 선포하심은 물론 죄인에 대해 반드시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잘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여기에서 한 차원 더 높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동해 보복법’이 범죄자에 대한 복수의 개념이 아니라, 형벌을 통해 범죄의 재발을 방지하고 그로 하여금 보다 큰 범죄에 빠지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율법은 처음부터 범죄자에 대한 형벌의 개념이 아니라, 구원으로의 인도를 목적으로 한 사랑의 개념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18, 19절을 보면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하나가 돌이나 주먹으로 그 적수를 쳤으나, 그가 죽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가 지팡이를 짚고 기동하면 그를 친 자가 형벌은 면하되, 기간 손해를 배상하고 그로 전치되게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규정은 서로 싸우는 도중에 감정이 극렬해져서 상대방을 돌이나 주먹으로 친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는 미리 준비한 연장이나 무기를 사용하는 경우와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얼떨결에 휘두를 수 있는 주먹이나 싸우는 도중에 주변에서 쉽게 취할 수 있는 돌로써 상대방을 치는 경우는 우발적인 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길거리에 흔한 돌이나 주먹으로 상대방을 때렸다는 것은, 처음부터 상대방을 해칠 의도가 없이 순간적인 감정에 의해 일으킨 행동임을 말해 줍니다. 이때 한 사람이 순간적인 감정을 못 이겨 폭력을 행사하게 된 것에는, 그로 하여금 그런 감정 상태에 이르게 한 상대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쨌든 잘못된 폭력으로 상대방에게 해를 입힌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금전적인 배상만을 하게 함으로, 다시는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방지함과 동시에, 싸움에서 양자간의 공동 책임을 인정하여 형벌은 면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 계명 속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다툼은 어느 한쪽만의 잘못이 아니라, 다투는 사람들 서로의 잘못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싸움은 다툼에 참여한 사람들의 공동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하루에도 크고 작은 다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가 상대방을 비난하고 있지만 둘 다 잘못하고 있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가깝게는 가정에서 부부간에 벌어지는 다툼도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지만, 사실은 서로가 다툼의 원인을 제공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심지어 거리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자동차 접촉 사고 때에도 서로가 큰 소리치고 상대방을 비난하지만, 많은 경우 서로의 과실로 인해 발생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다툼은 어느 한쪽만의 잘못이 아니라 쌍방간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툼이 발생했을 때 상대방을 원망하고 비난하기에 앞서, 먼저 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다툼의 원인을 상대방이 아닌 나에게서 먼저 찾으려고 할 때, 세상은 보다 화목한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20, 21절을 보면 “사람이 매로 그 남종이나 여종을 쳐서 당장에 죽으면 반드시 형벌을 받으려니와, 그가 일 일이나 이 일을 연명하면 형벌을 면하리니 그는 상전의 금전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법에 대해서 우리는 “종이 하루나 이틀 더 살고 죽었다고 해서 금방 죽게 만든 것과 무엇이 다른가?”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주인이 종을 때릴 때 매로 때렸다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훈계하기 위해 매로 때리듯이, 종의 잘못에 대해 질책하고 바르게 훈계하기 위해 때렸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당장 죽을 때까지 때렸다는 것은, 주인이 훈계보다는 종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으로 매질을 했으며, 명백한 살해 의도를 지니고 있었음을 증거 합니다. 때문에 상대가 아무리 주인의 재산으로 여겨지는 종이라 할지라도, 주인은 형벌을 받게 한 것입니다. 반면 매질을 하고 하루나 이틀 후에 죽었다는 것은, 주인이 처음부터 종을 죽일 의도 없이 단지 훈계를 위해 매질을 하였으나 죽게 된 지경인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과도한 매질을 하여 종을 죽였음을 의미 합니다. 따라서 주인은 자신의 재산인 종이 죽음으로 이미 자신의 실수에 대해 물질적으로 이미 응당한 대가를 치렀으므로, 더 이상의 형벌은 받지 않게 한 것입니다.
이 계명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바로 모든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동기’라는 것입니다. 즉 나타난 결과는 종의 죽음이라는 동일한 결과이지만, 동기가 악했는가? 혹은 악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에 따라 주인이 형벌을 받느냐 안받느냐가 결정되었듯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판단하실 때에도 나타난 결과보다도 그가 어떤 동기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였느냐를 더 중요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결과가 좋다고 해도,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못한 것이었다면 결코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반면에 비록 결과는 좋지 않을지라도, 그 동기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것이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겉으로 나타난 결과로 판단하려고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모두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결과에 앞서 이미 그 마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무슨 일을 하고자 할 때는 어떤 결과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과연 바른 목적으로 이 일을 하고자 하는 가를 항상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성도 여러분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을 받고 성공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벌금을 내게 하였습니다. 고의가 아니라 실수였기 때문에 형벌은 당하지 않지만,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상대가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피해자의 요구가 지나치지 못하도록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보상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공평한 율법은 가해자보다는 피해자의 입장을 우선적으로 배려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의 권리나 주장이 지나치게 확대되거나 축소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 최종적인 판결만큼은 피해자의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입장에 있는 재판장의 판결을 따르게 한 것입니다. 이는 상대의 약점을 이용하여 부당하고 과중한 이득을 취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해도 그 사람의 약점을 이용해서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를 돌아보면, 상대방의 약점과 잘못을 이용해 부당한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않은지 모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발견하고는 상대방을 협박해서 물질을 빼앗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가 물질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이용해서 부당한 고리 대금을 취하거나, 부당하게 노동을 착취하는 일이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또한 상대의 잘못이나 어려운 처지를 이용하여,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사회나 직장에서의 위치를 자신이 차지하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이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해서 부당한 이득을 취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23-25절에 보면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찌니라.”고 했습니다.
타인의 신체 기관을 상하게 한 자는 피해자의 다친 신체 기관에 상응하는 부분에 대해 똑같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법을 가리켜 소위 ‘동해 보복법(同害 報復法)’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동해 보복법’은 범죄자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법을 주신 본래의 의도는 죄 범한 자를 심판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보다 더 크게는 보복의 악순환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법에는 오히려 사랑의 정신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복수는 꿀보다 달다’고 한 건 호메로스였습니다. 저 유명한 ‘일리아드’에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복수는 인류 역사의 원시시대부터 계속하여 이어져 온 피의 도덕이었습니다. 종족에 대한 가해를 막고 핏줄이 살아남기 위해 복수는 불가피했습니다. 가해자 침략자를 복수하는 것은 핏줄에 대한 도리요, 의무이며 미덕이었습니다. 야곱에게 ‘디나’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그 딸이 세겜 성에 들어가서 구경을 하다가 성폭행을 당하게 됩니다. 디나의 오빠들은 여동생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절대로 가만히 둘 수 없다는 생강에서 세겜 성에 있는 남자란 남자는 전부 다 칼로 찔러 죽여 씨를 말려버렸습니다. 여동생이 성폭행 당한 것을 가지고 세겜 성에 있는 남자들의 모든 생명을 맞바꾼다는 것은 보복 치고는 너무나 잔인한 보복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중국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기(禮記)에 나오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이란 부모 죽인 원수와 하늘을 같이 이고 살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곧 죽여 복수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피살자의 원한 불명예를 씻는 복수를 게을리 하는 것은 살아남은 자의 오욕이었습니다. 역사의 페이지를 넘겨보십시오. 피로 물들인 역사, 피가 피를 부르고,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는 비극들이 연속되는 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을 보면 그렇게 피의 보복을 일삼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난 미국 무역 센터 테러 사건과,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이어진 미국과 이락크의 전쟁을 위시해서, 아랍과 이스라엘의 피의 보복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부산물인지 박찬욱 감독이 만든 '복수는 나의 것'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는 모두 복수를 주제로 한 것이라고 합니다. 근본적으로 부패하고 악한 마귀의 심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은 보복을 오히려 미덕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피의 보복을 금하기 위해서 주어진 법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해 복수법’이란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찌니라.”
이 규정은 언뜻 보기에는 매우 잔인하고 원시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법을 잔인한 복수의 법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법은 결코 하나님께서 복수를 명령하신 법이 결코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복수를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규정은 당시 근동 지방에 횡횡했던 지나친 복수를 막기 위한 법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리 상대방에게 해를 끼친 악한 사람이라도 그를 보호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정신이 이 법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잘못하면 피해를 가한 것보다 더 엄청난 벌을 받든지 고통을 당할 수 있기에, 그 악한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잘못한 것만큼만 벌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자비의 정신이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과 용서의 법으로 완성되고 승화되었습니다. 즉 예수께서는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미국에서 노예를 팔고 사던 시절, 어느 집에 주인의 신임을 받는 '조'라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은 몇 명의 노예를 더 사려고 ‘조’와 함께 노예시장을 갔습니다. 그 때 조는 유난히 늙고 힘없어 보이는 노예를 보더니 그를 사자고 했습니다. 주인은 "저 노예는 너무 늙어서 쓸모가 없을 것 같다. 오히려 네게 짐만 될 것이다"고 거절하였지만, 사랑하고 신뢰하는 ‘조’의 간절한 청원 때문에 할 수 없이 늙은 노예를 샀습니다. 집에 돌아온 ‘조’는 그 늙은 노예에게 온갖 정성을 다하며 유별나게 보살폈습니다. 그러한 ‘조’를 이상히 여긴 주인이 그를 불러 이유를 물었습니다. "혹시 네 아비가 아니냐?" "아닙니다. 그는 제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원수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그가 나를 유괴해 노예시장에 팔았습니다. 그런데 노예시장에서 뜻밖에 그를 보게 되었고 순간 '너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지금의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제 신분 때문에 그를 사랑하고 돌보는 것입니다."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함이 기독교요,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은 용서할 수 없는 사람 앞에서 실험되고 검증이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미술가 '루오'가 남긴 재미있는 제목의 판화가 한 점 있습니다. 그 판화의 제목은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날에도 향을 묻힌다.”입니다. 괴롭히고 아픔과 상처를 주고 죽음까지도 주는 도끼날일지라도 독을 묻혀주지 않고 오히려 향을 묻혀주는 향나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분이었습니다. 자신을 비방하며 멸시하고 죽이려는 자들 앞에서 오히려 그 원수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며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고 기도하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타는 목마름을 견디며 고통으로 인하여 모든 뼈를 셀 수 있을 정도였지만, 원수들을 사랑으로 용납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찍으려는 수많은 도끼날들이 사방에서 번뜩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도끼날에 찍히더라도 오히려 내 속에 있는 주님의 사랑을 나누어주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릴 수만 있다면, 그는 참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용서는 사랑이요 사랑은 용서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알지 못했을 때의 나로서는 내가 용서의 사람일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그 크신 용서의 사랑을 받은 지금의 나는 용서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용서하지 못함은 악을 행한 사람 때문에가 아니라, 용서하지 못하는 나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못함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나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불신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는 자들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그들이 못하는 것을 행하고, 그들이 행하는 것을 안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인간의 감정,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그러한 사람을 용서하고 오히려 축복을 빌어주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