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산 정양용(茶山 丁若鏞) 선생님
18세기 초반부터 조선의 운명을 바꿔놓을 개혁의 인물로 개혁군주 정조(正祖)와
실학파 다산 정약용선생과 정약전을 비롯한 그 형제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하늘은 조선이 행복해 지는 것을 원치 않았는지
개혁의 중요한 시기에 正祖를 하늘로 불러올렸다.
따라서 이제 막 날개를 달아 일생의 포부를 조선의 개혁에 펼치려던 다산 선생의 날개도 꺾여
전남 강진으로 장장 18년의 유배길을 떠난다.
개인적인 역사관이지만 오늘날 허리가 잘린 반신불수의 한반도의 불행은
인조때 개혁의 기치를 내건 세자 소현세자 (昭顯世子 :1612년~1645년)의 죽음과,
정조의 이른 승하(昇遐)에 이어 고종의 무능과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실패로
개혁 개방의 기회를 놓쳐버려 열강의 먹잇감이 된데에 기인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한반도의 남북분단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국론분열(國論分裂)' 이다.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은 명치왕(明治王) 때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의 막번체제(幕藩體制)를 무너뜨리고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이룩한 국가 변혁이다.
결국 막번체제가 양보를 하고 명치유신이 성공하여 오늘날 일본은 세계 강대국의 반열에 서게 된 것이다.
일본의 명치유신이 1868년부터 1880년대에 마무리 되었으니까,
개혁군주 정조(正祖)(1752~1800)와 다산(1762~1836)의 생(生)이 끝날 때가 일본의 명치유신과 비슷한 시기다.
일본은 선진국으로 시작하는 때에 조선은 안동김씨 대원군 민비 등의 권력다툼으로 패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다산선생이 강진 유배 중에 쓴 책이 무려 천여 권,
그중에서 “경세유표(經世遺表)”라는 책은 참고자료에서 기존 제도들의 모순에 대한 뼈아픈 통찰과
지적을 남기며 당시 조선의 현실에 맞도록 정치, 사회, 경제 제도를 개혁하는 부국강병을 이루는데
목표를 두자는 내용의 국정개혁을 담은 중요한 책이다.
일본은 선진국의 깃발을 달고 대륙을 넘볼 때에 조선은 권력 다툼으로
다산을 강진으로 귀양 보내 앉은뱅이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사
람은 큰 슬픔을 당하면 슬피 운다. 울음으로도 견디기 어려운 더 큰 슬픔을 당하면
헛웃음이 나온다 하여, 허~ 허! 혼자 웃는다.
다산초당(茶山艸堂)은 단순히 강진만 바다가 넓게 펼쳐진 아름다운 관광 유적지라 생각하면 안된다.
한 인생의 당찬 포부가 당쟁으로 무참히 짓밟힌 한맺힌 곳이다.
그렇다고 '구천(句踐)이 오(吳)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와신상담(臥薪嘗膽)'을 할 수 있는
다산초당 (茶山艸堂)도 아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고향인 경기도 광주(廣州)<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마재>에 '실학박물관'이 있다.
여기에 다산의 생가 당호(堂號)를 '여유당(與猶堂)'이라 했다.
다산 선생이 강진 귀양이 풀리고 바로 고향으로 가서 '여유당(與猶堂)'이라 당호를 붙이고
돌아가실 때까지 '숨도 크게 안 쉬고 살았다'고 한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與猶堂'은 老子 도덕경의 한 구절로 마치 코끼리가 살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 산다는 뜻이다.
이렇게 한 시대의 위인(偉人) 이 사라져 갔다.
이 땅의 지겨운 당파 싸움, 좌우대립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허~허~허~ 언제나 정신 차리려나!
犬糞食衛(견분식위 : 개똥이나 쳐먹어라) 개똥이나 쳐 먹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제발 더 이상 국민 팔지 말라! 후안무치도 정도가 있어야지!
파렴치한(破廉恥漢) 어둠의 자식들은 제발 정치판을 떠나거라.
수신제가(修身齊家)부터 하라.
다시는 아예 정치판에 나설 생각 말라. 민심이 곧 천심임을 깊이 새겨라!
썩은 정치인, 쓰레기 언론사, 함량미달 기레기 언론인도 이 땅에서 하루 속히 사라져야 한다.
오늘 2월 첫 주일을 맞아 쓴 입맛 다시며 허~허~허! 웃어본다.
<유승환 님이 주신 카톡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