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인(人) 한자(漢字) 5개를 칠판에 적어 놓은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질문하셨다.
얘들아. 이것이 무슨 뜻인지 해석해 볼 사람, 손들어 봐요.
人人人人人
어리둥절해 하는 학생들에게 선생님은 이렇게 해석해 주셨다.
사람(人)이면 다 사람(人)이냐?
사람(人)이 사람(人)다워야 사람(人)이지!
처음 선생님께 그 설명을 들었을 때
참 신기했다.
저렇게 하니 말이 되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그 글들이 주는 교훈의 무게감이었다.
정말 사람다움이 무엇일까?
정말 신자(信者)다움이 무엇일까?
정말 성도(聖徒)다움이 무엇일까?
며칠 전 뉴스에 “엄마 살해하고 "난 촉법이야!"‥'자신만만'
중학생의 최후”라는 제목의 기사가 떴다.
충북 청주시의 한 아파트. 당시 중학교 2학년생이던 A군은 자신에게
이웃을 배려하며 살라는 좋은 교훈을 한 47살 어머니에게
자신을 야단친다고
흉기를 20여 차례 휘둘러 살해한 사건이다.
더욱 끔찍하고 충격적인 사실은
죄책감이나 잘못을 느끼는 마음 하나없이
되려
“나는 촉법소년이라 빨간 줄 안 그어진다,
정신감정에서 심신미약 판정을 받으면 감형되는 것 아니냐“
라는 소리를 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무너지는 인간의 도덕성의 한계일까?
가장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관계마저도
이렇게 잔혹하게 난도질당해도 되는 것인가?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천사와 같을 수도 있고,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잔혹하여
짐승보다 더한
악마와 같을 수도 있다.
성경속에 나오는 야곱의 12아들의 이야기 중에도
진정 사람다움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교훈이 담긴 이야기가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들의 자랑스런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보는 야곱 때에 12아들이 되고,
그 아들들이 12지파가 되면서 한 가문에서 한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야곱의 12 아들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단, 납달리, 갓, 아셀, 요셉, 베냐민.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디나는 레아가 낳고,
단, 납달리는 빌하가 낳았다.
갓, 아셀은 실바가 낳았고,
요셉, 베냐민은 라헬이 낳았다.
장자인 르우벤은 마땅히 장자의 3가지 특권을 누려야하지만
장자가 장자답지 못함으로
그 3가지 특권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 3가지 특권이란
첫째, 가족 제사장의 특권
둘째, 재산의 두 몫을 차지하는 것
셋째,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특권이다.
르우벤은 왜 장자의 특권을 잃었는가?
끓어오르는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르우벤은 계모를 취하는 극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창 35:22에서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야곱은 그의 임종전 자식의 장래를 축복하는 시간에
르우벤에 대한 가슴 아픈 울분을 토한다.
“[3] 르우벤아 너는 내 맏아들, 내 힘, 내 정력의 첫 열매라, 너무 우쭐하고 세차구나. [4] 터져 나오는 물줄기 같아, 걷잡을 수 없는 홍수 같아, 끝내 맏아들 구실을 하지 못하리라. 제 아비의 침상에 기어들어 그 소실마저 범한 녀석!”(창 49:3-4, 공동)
“진정한 교육은 전인적(全人的)이다. 그것은 자아(自我)를 바르게 활용하도록 가르쳐 준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뇌와 뼈와 근육과 육체와 정신과 마음을 최선껏 사용할 수 있게 해 준다. 정신적 능력이 보다 높은 능력으로서 육체의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선천적 식욕과 정욕은 양심과 영적 애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치료, 398)
둘째와 셋째인 시므온과 레위도 덕스러운 성품을 가지지 못했다.
여동생 디나가 외출을 했다가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자,
그 소식을 듣고 몹시 흥분해서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야곱의 아들, 시므온과 레위는
하몰과 세겜을 속여서 할례를 받게 한 뒤,
그들을 급습하여 그 종족의 모든 남자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해온다.
야곱은 그들의 잔혹함을 보며
그들의 미래의 아픔을 이렇게 예언한다.
“[5] 시므온과 레위는 단짝이라, 칼만 잡으면 사나워져 [7] 저주받으리라. 화가 나면 모질게 굴고, 골이 나면 잔인해지는 것들! 내가 그들을 야곱의 자손 가운데서 분산시키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흩뜨리리라.”(창 49:5, 7, 공동)
그래서 시므온과 레위는 이스라엘 백성중에 흩어지는 운명이 된다.
결국 장자다움, 아니 사람다움은
자신을 이기는 것이다.
자신의 충동, 식욕과 정욕, 분노, 복수심, 화
이런 충동들을 성령의 주관하심안에 다스릴 수 있을 때
사람은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잃어버린 장자권의 특권을 누리게 된 3지파는
참 장자다움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레위지파는 비록 그들의 잔혹함으로
이스라엘 중에 흩어지는 운명이 되었지만,
하나님 앞에 신실함으로 저주를 복으로 변하는 복을 얻게 된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숭배할 때 레위는 하나님편에 서서
순결을 지키며,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어 악을 제거한다.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 32:29)
레위지파는 하나님앞에 신실함으로 제사장 지파가 된다.
요셉은 2몫을 받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1]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대상 5:1-2)
그래서 12지파에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들어오게 된다.
요셉은 어떤 성품의 특징으로 장자의 두 몫을 차지하게 되나?
창세기 후반부의 대부분은 요셉의 생애가 차지한다.
무엇이 요셉의 자랑인가? 그들의 형들의 잘못을 용서하고 사랑한 예수님을 닮은 품성,
그것이야 말로 참된 장자됨, 하나님의 백성됨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축복은 유다가 차지하게 된다.
도대체 유다가 그런 축복을 누릴 자격이 있을까?
그런데 막내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오고
베냐민이 죄인으로 애굽에 묶여 형벌을 받아야 할 때
그가 한 말이 메시야의 구속적 사명의 성취를 담고 있다.
“[30]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31]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32]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33]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34]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창 44:30-34)
죄가 드러난 베냐민은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주의 막내둥이 지구와 우리의 운명이다.
그런데 그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운명을 대신하여 유다, 곧 주님께서 대신 담보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다 담당하게 하고,
베냐민, 곧 죄인된 우리는 용서받고 회복되어 아버지께로 천국으로 가게 해 달라는
주님의 심장, 보혈을 담보로 하신 주님의 고백이다.
그런데 더 의미심장한 복음중의 복음은 이것이다.
““[30]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31]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죗된 우리, 하루살이보다 못한 우리의 생명과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이 하나로 묶여있다는 이것,
동일시 되었다는 이 표현은 우리의 살이 떨리는 감동을 안겨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라는 말인가?
우리가 천국에 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우리가 없음을 보고 죽으시겠다니....
아버지의 심정, 하나님의 그 심정
그 마음, 그 심정을 누가 알랴!
모리아산의 아브라함은 그 마음을 알아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었던 것인가?
우리의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을 동일시 하신 곳
아니 우리의 죽을 운명을 하나님께서 대신하시고
우리를 살려주신 곳
그곳이 바로 십자가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십자가는 당신 자신을 주셨을 뿐 아니라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주신 것이다.
예수안에
십자가안에 우리의 사모하는 모든 것이 있는 것이다.
아!
형용할 길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여!
그 위대한 사랑만이 사람답지 못한 우리를
사람답게 하시고,
하늘 가족이 되게 하신다!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10)
https://youtu.be/6szx_SSMb4g
https://youtu.be/v4VtxtEFcNk
https://youtu.be/wo1UTgLRiJI?list=PLhE8-floJ6vQ7YynrDrnJLrpCH1JeBGB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