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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3강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말씀 / 마가복음 2:1-17
요절 / 마가복음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핵심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돕는 과정에서 죄 사함의 권세자임을 직접 나타내 보이십니다. 또 죄인 취급받던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심으로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러 오셨음을 말씀하십니다. 중풍병자나 세리 레위는 죄 사함을 필요로 하는 우리 인생들을 대표합니다. 이 시간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죄 사함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의 집에 계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집에 계신다는 소문을 주워듣고 구름 떼 같은 인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집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도’ 즉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때였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옵니다. 스스로는 움직일 수 없는 중증 환자였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온 목적은 단 한 가지입니다. 중풍병을 치료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오자마자 장애물에 부딪힙니다.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에게로 나아가는 길이 모두 막혔습니다. 대개 이런 상황이면 사람들은 포기하고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죽는 병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음으로 미루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기도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나아갈 길을 알려주소서!” 기도하는 가운데 번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것은 바로 지붕이었습니다. 지붕을 예수님에게로 나아가는 길로 만듭니다. 팔레스타인의 지붕은 나무로 된 대들보에 갈대나 지푸라기 같은 것을 엮어 덮고 그 위에 진흙 반죽을 한 층 덮어 덧칠하여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구조입니다. 그곳에서 뭔가 작업을 하거나 창고, 열매 말리기 등으로 이용되었고, 더운 여름밤에는 사람들이 거기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지붕은 외부로 난 계단으로 쉽게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네 사람은 중풍병자의 침상을 메고 지붕으로 올라갑니다. 흙을 파내고 갈대나 지푸라기 등을 걷어 옆으로 치워놓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가옥의 지붕이 쉽게 뚫리겠습니까?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풍병자를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갈 생각에 힘든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집 안의 사람들의 머리에는 천정에서 흙이 쏟아져 내립니다. 사람들은 지붕과 하늘 문이 열리고 천사가 내려오는가 생각했는데, 한 사람이 침상에 누워 대롱대롱 매달려 내려오는 장면이라니, 얼마나 어이없겠습니까?
『무례한 기독교』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다원화 사회 속에서 어떻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독단성과 과격성을 벗어나 정중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 방향을 제시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무례함을 종종 혼돈하며 과격한 십자군식 승리주의에 대한 환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너무 자기네 중심적이고 무례합니다.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남의 집의 기물을 파손하고 말씀 집회를 방해하고 순서를 지키지 않고 반칙을 썼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경찰서로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분명 여기에 대해서는 윤리적, 사회적, 법적 책임을 감당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물론 보상도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을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사람들의 비난보다도 그 친구들의 행동 이면에 있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믿음을 보셨다는 것은 그들의 믿음에 큰 감동을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와! 정말 대단한 믿음의 친구들이구나!”
그들의 행동은 지금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창조적이고 파격적인 방법입니다. 그들의 방법은 정해진 방법, 익숙한 방법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해보지 않은 방법, 전통에 없는 방법입니다. 그들이 상식과 원칙과 전통을 파괴한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입니다. 어찌하든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면 어떤 병자도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비난과 두려움과 사람들의 이목보다는 예수님에게 집중하게 합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능력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통로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일하시게 만듭니다. 우리도 믿음이 있을 때 예수님을 찾을 수 있고 예수님에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의 그들은 성경에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공관복음, 세 복음서에 모두 기록될 만큼 믿음의 영웅들입니다.
5b절을 보십시오.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기 때문에 이 말에 크게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에게 이 말은 가히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언하신 것은 병자를 일종의 죄인으로 간주하는 당시 세계관 때문입니다. 탈무드에는 랍비 히야의 어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병자는 그의 죄가 사함 받기까지 그의 질병으로부터 치유된 것이 아니다.” 유대교의 많은 문헌들은 중풍병을 죄의 결과로 이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중증 환자들의 질병을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질병에 걸린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았다는 죄의식과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에서 오는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이러한 세계관 속에 있는 사람에게 병에 대한 치유의 경험은 곧 죄 사함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질병을 고침받기 이전에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인간의 근본 문제가 죄 문제이고, 이 죄 문제 해결이 질병의 치료보다 더 시급한 문제임을 가르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구약에서 일반적인 죄 사함의 방편은 제사 제도를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제사 제도는 죄 사함을 위한 방편일 뿐이지,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그 자체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고유한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하는 사람은 그가 미친 사람이거나, 하나님이거나 해야 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을 도저히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성 모독으로 몰아붙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8,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어느 것이 쉽습니까? 둘 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맥락에서는 당장 검증될 수 없는 죄 사함에 대한 선언보다, 검증이 수반되어야 하는 치유 선언이 더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서기관들이 논증할 때 사용하는 논리를 써서 설명합니다. 이는 가벼운 차원의 진리를, 무거운 차원의 진리와 대비시켜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강조하기 위한 논리입니다. 예수님은 현상적 검증을 수반해야 하는 ‘일어나 가라’라는 어려운 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이심으로 ‘죄가 사하여졌다’라는 쉬운 말도 이루어졌음을 입증하는 논리 방식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11,12a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예수님의 즉각적인 치유의 능력을 통해 예수님이 죄 사함을 주시는 분임이 증명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제사 제도를 통한 죄 사함의 전통적인 방법이 아니라 이 땅에 직접 죄 사함을 선포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죄 사함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죄 사함의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는 말씀으로 죄 사함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후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통해 이를 믿는 자마다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 새로운 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이 같은 예수님의 죄 용서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죄 사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이 맺어져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 믿음으로 나아오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영접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한 그 사랑을 깊이 영접하므로 우리 심령에 죄 용서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믿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평강과 기쁨과 자유를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의 용서의 사랑 때문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은혜들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죄 용서를 통한 자유함 가운데, 우리 영혼이 치유되고 회복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힘차게 일어나 걷는 인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이번엔 전망이 탁 트이고 시원한 바닷가에 나가시자, 많은 무리가 몰려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도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이 그러다 누구를 만납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당시 세리들은 노예나 창녀에게서 난 사생아보다 못한 가장 멸시받는 계층입니다. 세리에게 딸을 출가시키는 것은 짐승에게 딸을 주는 것과 같이 악한 일로 여겼습니다. 세리는 재판정에서 증인이 될 수도 없었고, 회당에 나와 예배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세리들과 물건을 사고파는 상거래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미쉬나’에서는 세관에 있는 세리에게 구제금을 받는 것까지도 금합니다. 그 돈은 불법적으로 얻은 돈으로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랍비들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세리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허용될 수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로마 시대 세금은 사람과 땅에 대해 중앙 정부와 통치자들이 거둬들이는 직접세와, 매매나 무역, 통행 등에 대해 개인이 거둬들이는 간접세로 구분됩니다. 세리는 일반적인 세리와 통행료 징수원, 이렇게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일반적인 세리는 인두세와 재산세를 걷는 직업이고, 통행료 징수원은 판매세, 관세 및 도로 통행료를 징수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특히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했던 세금은 수입 상품에 대한 관세였는데, 이는 로마가 지역민이 낼 관세를 징수 맡은 이들에게 미리 받아 갔으므로, 징수원들은 자신들의 이윤을 챙기기 위해 과도한 세금을 사람들에게 부과했기 때문입니다. 레위는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통행료 징수원이었습니다. 이런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습니다. 그가 앉아 있는 징수원, 세리의 자리는 모든 유대인이 침을 뱉고 손가락질을 하는 자리입니다. 원래, 레위는 ‘순결, 정의’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그는 돈은 많이 벌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기보다는 동족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공공의 적이 된 현실을 볼 때 “내가 이러려고 세리가 되었는가?”하며 깊은 자괴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세관을 벗어나 하나님을 예배하며 진정으로 동족을 위하는 삶을 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물질이 가져다주는 안정된 삶으로 인해 이런 생각들은 묻혀버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를 예수님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외로움과 고독,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며 애처롭게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여러분!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첫째, 구원의 음성입니다. 그는 죄인으로 낙인찍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세상은 그를 버렸지만, 예수님은 절망에 빠진 그를 거기서 건져주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셨습니다.
둘째, 제자로의 부르심입니다. 레위는 그대로 두면 계속 로마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동족으로부터는 미움을 받고 괴로워하며 살다가 인생을 마감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새로운 인생 방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인류 구속역사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어떻게 하면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더 뜯어낼 수 있을까 하는 연구를 하기보다는, 예수님의 성품을 배우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사람들을 구원하고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후 그는 실제 예수님의 성품과 삶을 배웠습니다. 예수님과 말씀 공부도 열심히 해서 아름답고 힘 있는 마태복음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비천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택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어부와 세리는 우리 생각에 메시아가 선택하리라고 생각할 만한 제자들이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쓰시기에 대부분 부적합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창세기의 노아는 120년 동안 가족 외에 한 명도 회심시키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대중 앞에서 말을 잘하지 못하고 가끔 욱하고 화를 냈습니다. 다윗은 간음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너무 감정적이고 잔걱정이 많고 징징거리길 잘합니다. 베드로는 행동보다 말이 빠르고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삶의 요령도 부족해 보이고, 외모도 초라하고 너무 길게 잠 오게 설교합니다. 예수님이 세리 레위를 의도적으로 제자로 선택한 것은 그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관념에서 어긋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레위와 같은 세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대상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제자 공동체의 수준을 현격히 저하시키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당시 사회적인 관념과 전통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자격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오직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 레위는 어떻게 했습니까? “일어나 따르니라(14).” 레위는 예수님의 사랑과 소망에 감격했습니다. 자기 같은 속물에게 관심 가져주시는 것에 대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는 많은 재산, 몰래 관리해 온 비자금, 골프 콘도 회원권 등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15절을 보면, 레위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동안은 혼숙, 혼밥족이었는데 예수님을 따르는 기쁨이 너무 커 많은 돈을 들여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평소에 연락도 하지 않던 라이벌 세리들까지 다 초청했습니다. 레위는 비로소 베푸는 기쁨,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행복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이 모습을 보며 비방합니다.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랍비 문헌에는 세리가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있는 모든 것이 부정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는 핵심은 ‘함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대화를 하거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저하하는 행위였으며, 불경건한 태도였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17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은 종교를 말하기를, 물건이든 음식이든 사람이든 자신을 더럽힐 만한 모든 것에서 엄격히 분리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을 멸시하며 예수님도 자신들과 똑같이 하기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핵심은 분리가 아니라 변혁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셨는데, 이는 방어벽을 치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스며들어 그것을 변혁시키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벽을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 세상에 은혜와 변혁의 메시지를 가져가야 합니다. 의사가 문을 잠그고 진료소 안에 숨어만 있다면 환자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위대한 의사이신 예수님은 영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에서 ‘부르러’라는 용어는 잔치로 초대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에게, 죄로 인해 고통하는 자들에게 자신과 함께 잔치에 참여하여 함께 먹고 마시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 의사이신 예수님이 누구에게 필요한 걸까요? 예수님은 세리나 죄인 같은 상종 못할 인간들에게만 필요하고, 날이 갈수록 고상하고 의롭다고 생각되는 우리에게는 조금만 필요한 것일까요? 요즘 국회의원 선거철인데, 정치인들은 서로 경쟁상대를 향해 맹비난을 퍼붓고, 반면 스스로에 대해서는 온갖 정의로운 말들을 다 갖다 붙이며 합리화합니다. 상대방을 향한 잣대와 자신을 향한 잣대가 다릅니다. 각기 다른 잣대로 평가하는 정치인들처럼, 인간은 각자 나름의 잣대로 의인과 죄인을 가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는 의인과 죄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거스틴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과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자기를 의인으로 착각하는 죄인이며, 레위는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죄인들을 불러 천국 잔치에 초청하고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는 제자의 삶을 살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바리새인처럼, 서기관들처럼 되기 쉽습니다. 항상 자신을 의인이라고 착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죄인의 자리에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하려 합니다. 우리는 의인의 마음, 높아진 마음을 버리고, 늘 죄인의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죄로 병든 나, 고침받아야 할 병자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내가 바로 회개해야 할 죄인으로 여겨야 합니다. 늘 죄인된 모습을 발견하고 회개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건강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통해 내면이 치료받고 건강해지면 나를 통해 내가 속한 공동체가 달라집니다. 그러면 내가 속한 가정, 교회, 사회 공동체가 레위의 집과 같이 기쁨의 잔칫집이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우리 자신은 죄로 병든 자라는 것을 깊이 인정합니까? 또 예수님이 우리의 영적인 주치의가 되신다는 것을 인정합니까?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죄로 병든 자라는 것을 깊이 인정하고 우리의 영적 주치의가 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죄 사함의 권세자이신 예수님께 나아가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아뢰고 치료해 주시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럴 때 주님은 죄로 병든 내면을 치료해 주셔서 건강한 인생을 살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일꾼으로 귀하게 써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며 진정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