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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새벽 기도를 드리고 난 후 집에 가서 꿈을 꿨어요. 말씀드렸지만 저는 꿈을 잘 꾸지는 않는데 꿈에 많은 성도들이 우리 교회 오겠다는 거예요. 여러분 꿈이라도 좀 기뻐하셔야 되는데 너무 기쁜데 그래서 잠을 일찍 깼어요. 원래 좀 자는 시간이 있는데 훨씬 짧게 자고 제가 일어났습니다. 꿈이라도 기분이 되게 좋더라고요. 옆 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꿈이라도 좋습니다.
얼마 전 제가 존경하는 선배 목회자와 대화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존경하는 분이기도 하고 제가 섬기는 기도 학교의 대표이기도 하신 분입니다. 대화 중에 요즘 목회자들이 자존감이 너무 낮다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따지고 보면 지금의 목회자들은 이전 선배들보다 학벌도 좋고요. 재능도 훨씬 더 많아요. 그리고 훨씬 더 부유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감이 되게 낮다는 거예요. 심지어 자신의 교회가 큼에도 불구하고 늘 자신의 교회가 작다고 생각하고 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까 저도 약간 그런 게 있더라고요. 은연 중에 제가 섬기는 교회가 좀 작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고 또 그리고 뭐 어떻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좀 내가 좀 부족한 사람입니다. 이걸 자꾸 밝히려고 하는 모습이 제 안에 있는 것을 그 대화 중에 제가 발견을 했습니다.
근데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 교회는 최소한 우리나라에서 30% 안에 드는 교회이고 최대치로 봤을 때는 10% 안에도 들 수 있는 교회가 교회예요. 그러니까 우리 교회는 작은 교회가 아니라는 의미죠. 그런데도 작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겸손해서 그런 말을 할 수도 있다 이 생각도 들어요.
그렇지만 정말 겸손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저나 목회자들이 할까요?
좀 나쁘게 생각해 봤더니 그 목사님의 말씀이 맞는 거예요. 자존감이 너무 낮은 거예요. 문제는 낮은 자존감은 불필요한 생각을 하게 하고 불필요한 해석을 하게 하고 불필요한 말을 하게 하고 불필요한 행동을 하게 해요. 이게 낮은 자존감의 문제인 거예요.
우리가 자존감이 높지 않고 자존감이 낮으면 부부 사이에나 목회자나 성도 사이나 동료 사이에서 굳이 할 필요 없는 생각과 해석과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 특징 중에 하나가 오늘 말씀 제목인 자기에게 나쁜 말을 합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기에게 좋은 말을 하는 반면에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기에게 나쁜 말을 해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남에게도 좋은 말을 하고 자신에게도 좋은 말을 해요. 반면에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남에게도 나쁜 말을 하고 자기에게도 나쁜 말을 합니다. 사람들이 나쁜 말을 해요. 나쁜 말을 하는 이유가 이 나쁜 말을 듣고 상대방이 좋아질 거라 생각해서 나쁜 말을 합니다.
그렇지만 나쁜 말을 할 때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게 있어요. 그 소리가 내 귀에도 들리고 그 소리가 상대방에게도 들리고 그 소리가 주변 사람들에게도 다 들린다는 거예요. 내가 왜 나쁜 말을 그게 자기에게 하든 남에게 하든 나쁜 말을 왜 조심해야 되냐면 그거는 자기 귀에도 들리고 상대방의 귀에도 들리고 남의 귀에도 들리기 때문인 거예요. 나쁜 말은 상대방의 가슴에도 박히지만 내 가슴에도 박히고요. 그 소리를 들은 주변 사람들의 가슴에도 박혀요. 그래서 우리는 남에 대해서 또 자신에 대해서 나쁜 말 하는 것을 경계하고 주의하고 조심해야 됩니다.
정말 최악으로 봤을 때 나쁜 말을 계속 들으면 그 사람은 이상해져요. 마음의 상처가 많은 사람들의 특징이 어려서부터 나쁜 말을 너무 많이 들은 거예요. 부모로부터 친구로부터 선생님으로부터 듣지 않아야 될 나쁜 말을 너무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게 그 사람의 생각과 그리고 정신 뇌를 병들게 만들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쁜 말을 많이 들은 사람이 결국 시간이 지나면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이 돼요. 여러분 최악의 말을 들은 사람이 최악의 말을 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결국 들은 말을 사람들은 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좋은 말을 들어야 좋은 말을 하는 거고 나쁜 말을 들으면 나쁜 말을 하고 최악의 말을 들으면 최악의 말을 해요.
여러분 저는 이렇게 목회자지만 좀 경험이 많아요. 근데 이 경험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더라고요. 왜냐하면 제가 그걸 경험했다는 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제가 다 들었다는 의미인 거잖아요. 저도 아주 기분이 나쁘고 좀 성격이 폭발하면 이 나쁜 말을 자꾸 하려고 하더라고요. 하면 안 되는 말이에요. 목사 입에서 나와서도 안 되는 말인데 내가 이미 들은 말이에요.
어린 시절 일하면서 사회생활하면서 배웠던 그 말들이 들었던 말들이 고스란히 내 안에 있고 어느 순간 사람과 대화할 때 누군가를 이기려고 할 때 누군가를 누리고 할 때 그 말들이 내 입에서 톡톡 튀어나오려고 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사회가 이상하다는 것은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예요.
여러분 우리 사회가 점점 더 나쁜 사회로 변해가고 있죠. 왜 그럴까요?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래요. 저는 뭐 이렇게 해외 여행을 많이 가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간접적으로 이제 해외 여행에 대한 자료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는 여러분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많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좀 좋지 않은 나라에 가보면 특징이 말이 나빠요. 인권이 보장되지 않고 도착하자마자 핸드폰을 소매치기 당하고 뭐 이렇게 계약과 관련된 일을 사기를 치고 이런 게 빈번한 나라일수록 말이 좋지 않아 악한 말을 쓰는 거예요.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될 것은 우리 사회가 점점 더 나쁜 사회로 변해간다는 거예요. 이 사실은 나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누가 누가 나쁜 말을 많이 하냐를 경쟁하듯이 나쁜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좋은 말을 들어야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말을 해야 좋은 사회가 돼요. 지금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내와 남편, 자녀와 이웃 동료들에게 혹 나쁜 말을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고리의 권사님들 중에는 찰지게 욕하는 분들도 있어요. 찰지게 왜냐하면 힘든 삶을 살다 보니까 여기 귀에 들리고요. 남편에게 들었을 수도 있고 일하시다가 공장이나 아니면 직장에서 들었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들이 교회에서는 안 나와서 다행인데 교회를 벗어나면 정말 찰지게 욕을 하는 분들이 있어요. 우리가 한 번쯤 돌아봐야 돼요. 저도 그렇지만 내가 세상에서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과연 좋은 말인가?
돌아가신 어머니가 많이 그립습니다. 근데 어머니가 그리운 이유를 한번 생각해 봤더니 어머니 얼굴이 보고 싶다 이런 게 아니에요. 어머니가 저에게 해주던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없어져서 어머니가 그리운 거예요. 제가 가난하지만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정말 자주 들었던 말은 해봐라예요.
한 번 해봐라 한 번 해봐라.
여러분 제 주변에 있어 보면 알겠지만 저도 그래서 자녀든 주변의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해봐라라고 권면해요. 왜냐하면 제가 어려서부터 늘 들었던 소리고 이 소리가 자존감이 약한 저를 일으켜 세워주고 뭔가를 도전하게 만들고 뭔가를 시도하게 만들었어요.
여러분 저는 지금도 뭔가를 시도해요. 이게 조금만 더 있으면 이제 앞자가 6자로 바뀌는 나이인데도 저는 뭔가를 도전하고 뭔가를 시도해요. 가만가만 돌아봤더니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저의 한 말 해봐라 이 말이 여전히 제 귀와 제 마음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그 소리를 매일 저 스스로 하고서 하는 거죠.
해봐 해봐.
마치 어머니가 그 소리를 나에게 하는 것처럼 제가 그 소리를 저 자신에게 늘 하면서 살아가고 다행히 감사한 것은 아내도 저희 어머니와 성향이 약간 비슷해요. 그래서 제가 뭔가를 하려고 할 때 방해하거나 하지 말라는 말들을 거의 하는 경우가 없어요. 저는 제가 지금까지 만난 두 명의 여인이 저에게 늘 해보라고 권면했기 때문에 저는 이 소리를 많이 들은 사람인 거죠. 그래서 제가 이제 나이가 좀 들어감에 의해서도 뭔가를 또 시도하고 또 시도하고 또 뭔가를 또 해보려고 해요.
여러분 이런 삶이 되게 행복해요.
이게 끝이다. 이젠 끝났어. 난 아무것도 아니야 이렇게 저 자신에게 말하는 것보다 뭐 해보자 할 수 있다.
이렇게 저에게 말할 때 제 삶이 훨씬 더 행복하다는 거예요. 제 기억에 남는 좋은 선생님은 저에게 좋은 말을 한 선생님이에요. 저는 지금도 그림을 잘 못 그려요. 근데 미술 선생님이 그림을 못 그리는 저에게 오셔서 그림을 너무 잘 그린다고 거짓말을 하신 거예요.
여러분 실제로 제가 그림을 그려서 실기를 만점이 맞은 적이 있어요. 그림을 못 그리는데 저는 지금도 그림을 못 그려요.
근데 그 소리가 그 소리가 그림에 좀 집중하게 만들었고, 아마 제가 꼼꼼하다 보니까 사실화를 다른 사람보다 좀 잘 그렸던 것 같아요. 그때 그게 사실화였는데, 그래서 제가 실기에 만점 맞은 적이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아내가 좋은 이유도 어머니다음으로 저에게 좋은 말을 하기 때문이에요. 가끔 아내가 하는 좋은 말을 들으려고 아내 주변을 좀 이렇게 맴돌 때가 있어요.
여러분은 제가 집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잘 상상이 안 되죠. 제가 아내 옆에 붙어 있으려고 엄청 애를 물론 혼자 이제 제 방이 단독이 있어서 거기 가서 있는 시간도 있지만 아내 주변을 이렇게 맴도는 시간이 많아요. 왜 맴도냐 하면 어떻든 뭐 좋기도 하지만 아내가 하는 따뜻한 말, 좋은 말이 가끔은 그리워요. 그래서 그 말 한마디 들으려고 아내의 주변을 이렇게 맴돌 때가 있어요. 다행히 저에게는 두 분의 어머니가 더 있어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한 분은 이제 우리 아내의 어머니 장모이고 한 분은 제가 이게 박사 과정까지 다 마치도록 도와준 이제 권사님이죠. 우리 교회 권사님은 아니시고 그 두 분을 이제 어머니처럼 여기고 살고 있습니다.
근데 이제 가까이 안 있죠. 멀리 있지만 되게 그리워요. 왜냐하면 이분들도 저에게 좋은 말을 하신다고 만나면 힘들지 어렵지 않아요. 이거 뭐 몸 아프진 않아요 늘 이렇게 묻고 생각해 주는 그게 너무 고마워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립기도 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자신감이 좋은 말을 들으면 자신감이 생겨요. 자신감이 생기면 자존감이 높아져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좋은 말을 하고 좋은 일을 할 수 있어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좋은 말도 못하고 좋은 일도 못해요.
그런데 저에게 좋은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저의 좋지 않은 모습 때문에 좋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을 수도 있어요.
근데 우리가 좀 기억해야 될 게 하나 있어요.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없을 때가 온다는 거예요. 사람이 완전히 무너지면 완전히 무너지면 그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외적으로 최악의 상태가 되면 좋은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 좋은 말을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가 이렇게 분석해야 돼요. 저분이 지금 최악의 상태에 있구나. 어머니 아버지가 나에게 나쁜 말을 하면 지금 엄마 아버지의 상태가 최악이구나 이걸 깨달아야죠.
성도가 나에게 나쁜 말을 하면 저 성도의 지금 영적인 상태가 최악이구나라고 우리가 깨달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최악의 상태에 처해 있기 때문에 최악의 말을 하는 거죠.
오늘 본문을 보면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 10명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정탐한 땅도 자기 자신들도 최악으로 봐요. 그러니까 최악으로 봤으니까 최악의 결정을 내리고 최악의 결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게 된 거죠.
민수기 13장 32절, 33절을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오.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내 피의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는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신명의 정탐꾼들은 그들이 정탐한 땅에 대해서 최악의 말을 했지만 자신들에게도 최악의 말을 한 거예요. 이런 거죠. 남에게 최악의 말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에게도 최악의 말을 한다는 거예요. 이 10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에서 혹평을 했어요. 최악의 말을 했어요. 그래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도 최악의 말을 했던 것입니다.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지 않고, 거주면을 삼키는 아주 나쁜 땅, 악한 땅이라고 했어요. 10명의 정탐꾼들은 자신들을 메뚜기로 봤어요. 그러니까 메뚜기라는 단어에 지들의 정체성이 다 담겨 있는 거예요.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싸워도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없는 존재, 우리는 아무리 싸워도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존재, 우리는 정말 가장 값어치 없는 존재 이렇게 여긴 거예요. 그래서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고 광야 40년을 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존감 때문에 자존감이 낮기 때문에 가나안 땅을 포기했던 거죠. 하나님이 자기의 아버지라는 것을 하나님의 자기의 왕이라는 것을 이들이 잊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자기를 메뚜기처럼 여긴 거죠. 그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도 악평을 했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도 메뚜기라고 취급하고 여기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 결과 가나안 땅을 차지하지 못한 채 40년간 광야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자신들의 비전인 자신들의 사명에 관한 정보를 포기한 것은 이들의 자존감이 너무 낮았기 때문인 거예요.
왜 사람들이 비전을 포기하고 비전을 잃어버릴까요?
왜 비전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스스로에게 최악의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인 거죠. 우리가 비전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삶이 어려워서가 아니에요. 시대가 어려워서도 아니에요. 자기에게 최악의 말을 하는 낮은 자존감 때문인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난한 정벌을 눈앞에 두고 무너진 것은 낮은 자존감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에 교회가 형편없어지는 것도 성도들의 자존감이 낮은 거예요. 하나님께 구원받은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이잖아요. 하나님의 자녀이잖아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예배자들이잖아요.
근데 우리는 그를 그렇게 보지 못하는 거예요. 자기를 형편없이 봐요. 교회가 이루어질 사명도 망각하고 꿈도 사 망각한 채 많은 성도들이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낮은 자존감은 신앙생활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줍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인 자신에게 나쁜 말을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결국 하나님에 대해서도 나쁜 말을 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하나님이 만드신 나에게 나쁜 말을 한다는 건 나를 만드신 하나님에 대해서도 결국 나쁜 말을 하는 거죠.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낮은 자존감, 그러니까 자기에게도 나쁜 말을 하고 교회에 대해서도 나쁜 말을 하고 자기 가정에 대해서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온전한 예배자가 될 수 있냐는 거예요.
자신과 자신의 주변과 교회와 주변 사람들에게 나쁜 말을 하는데 여러분과 제가 드리는 예배가 온전해질 수 있을까요?
아니라는 거예요. 온전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의 자녀로 건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배해야 돼요.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 예배를 받으시는 거죠. 그럼 우리의 무너진 우리의 낮은 자존감이 다시 회복되어야 됩니다.
그렇다면 이 낮은 자존감을 어떻게 회복할까요?
제가 깨달은 건 두 가지예요. 두 가지 첫 번째로는 기도해야 낮은 자존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좀 이런 생각하는 분들 있어 목사님이 기도가 만능인가요?
아니 자존감이 기도한다고 회복이 될까요?
아니요. 여러분 알아야 될 게 있어요. 제가 기도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어요. 기도할 때 내가 들어야 될 최고의 음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내 귀에 들린다는 거예요.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있잖아요. 들으면 위로가 되고 평안이 되는 그 말이 있잖아요. 그 말을 내가 언제 듣냐 이렇게 봤더니 기도할 때 들리더라고요. 음성으로 들리는 게 아니라 나의 내면에 정말 깨달아지도록 너무 선명한 하나님의 음성이 내 내면에 들려요. 그래서 기도하고 나면 자존감이 회복이 돼요. 기도의 시간이 길면 길수록 자존감이 더 많이 회복되는 거죠.
우리가 낮은 자존감을 해결하기 위해서 해야 될 첫 번째 일은 기도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낮아지는 건 사람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인 거예요. 사람의 소리.
근데 하나님은 나를 만드신 이잖아요. 만드신 이의 소리를 들으면 하나님이 만드신 이가 처음 만들었을 때 인간으로 우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거죠. 범죄하기 전 아담과 하와의 모습으로 조금조금 가까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늘 기도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런 거예요. 기도하면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요. 비전이 없을 때 내 마음에 비전을 심어주기도 하고요. 사람에 대해서 낙심하고 있을 때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보게 해 주시기도 하고요. 나쁜 말을 듣고 낙심해 있을 때 이 실망한 마음을 기도할 때 하나님이 다 회복해 주세요.
또 기도할 때 상처난 마음도 회복이 돼요. 그러니까 세상에 듣지 못한 음성을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내 마음에 들려주셔요. 이 소리를 듣기만 하면 내 낮은 자존감부터 상처와 많은 연약한 문제들이 내 내면화에서 해결되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성도는 기도해야 될 뿐만 아니라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의 내면에 하신 말씀을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돼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분이에요.
특별히 기도하는 시간에 나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사상에 듣지 못한 소리를 들으면 치료의 속도가 빨라져요.
여러분 제가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요. 하나님의 말씀과 내 제 말이 비교가 될까요?
제가 여러분을 아무리 권면을 해도 저의 권면과 하나님의 말씀이 비교가 될까요?
비교되지 않는 거죠. 그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권면을 내가 언제 들을 수 있어요?
기도할 때 들려진다는 거예요. 신기하게 더 크게 나는 부르짖는데 내 마음에 더 선명하게 들려요.
할렐루야 이런 기도의 재미를 누려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막 소리 질러 기도하잖아요. 내 마음에 더 큰 음성이 들려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형제도 내게 하지 못했던 음성이 들려요. 저는 가끔 뭐 이렇게 예언한다 이런 분들 있잖아요. 제가 좋아하지도 않고 잘 믿지도 않지만 그분이 늘 하는 말이 첫 번째 하는 말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거예요. 제가 어느 날 생각해 봤어요. 진짜 그럴까? 근데 가만히 생각해 봤더니 그럴 것 같아요.
하나님이 우리 여러분과 제가 힘들고 연약해져서 기도의 자리에 있을 때 가장 먼저 어떤 말을 하실 건가 생각해 봤더니 그냥 저한테 오셔서 나 목사 내가 너를 사랑해 이 말씀하실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많이 그렇게 나름 연언한다는 분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게 나름 조금은 이해가 됐어요. 우리가 왜 기도의 자리에 있어야 되느냐 세상에 들을 수 없는 음성이 내 마음에 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우리가 귀로 들을 수도 있지만 마음으로 들을 수 있어요. 근데 기도할 때 마음의 소리가 들려요. 이 소리를 들으면 없던 비전도 생기고요. 좌절과 절망에 있다가 힘도 생기고 막 용기도 생겨요. 그래서 목회자들이 문제만 생기면 기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세상에 듣지 못하는 소리를 기도의 자리에서 듣거든요. 그 소리 들으면 다시 힘이 되어서 목회 현장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 그래서 기도원에 가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의 자리에 가는 거예요. 그 소리를 들으려고 무쪼록 우리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외침의 소리가 더 커져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리도 더 커지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드릴 때도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마음으로 다 들으십시오. 두 번째로는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는 겁니다. 시편 119편 50절에 보면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에 이루어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합니다. 여기서 고난이란 말은 고통, 가난, 비참, 억울이라는 단어의 의미예요. 시편 기자는 극심한 고통 중에 있었지만 말씀이 율법이 하나님에게 나온 말씀이 말들이 하나님께 발설하신 것들이 자기를 살렸다는 거예요. 너무 고통스러운데 이 고통을 살린 것이 하나님께 나온 생명의 언어였다는 거예요. 그 소리를 들어서 자기가 살 수 있었다는 거예요. 성도가 사는 비결 하나님의 소리예요. 교회가 사는 비결 하나님의 음성이에요. 우리가 귀로 들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내 내면으로 이 소리만 들을 수 있어도 교회도 살아나고 인생도 살아나고 가정도 살아나고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 20절에 보면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말씀은 공동체를 힘 있게 하고 영혼을 힘 있게 하고 인생을 강하게 해요. 그래서 우리가 힘 있어지려면 강해지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야 되는 거죠.
특별히 여러분이 나쁜 말을 하는 습관을 고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여기고 이 말씀을 절대적으로 여기셔야 돼요.
저는 축구하고 싶어요. 여러분의 입술에 나쁜 말을 하는 습관이 고쳐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주변에 나쁜 말이 돌 때 여러분의 인생이 최악이 되는 거예요.
교회가 언제가 최고가 될까요?
교회 안에 좋은 말이 돌 때예요. 좋은 말이 돌 때 히브리서 4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자위의 날은 어떤 건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이게 어떤 의미냐 하면 말씀이 수술하지 못할 공간이 없다는 거죠. 그 말씀은 마음도 수술하고요. 말씀은 잘못된 기억도 수술하고요. 말씀은 암울한 미래도 수술하고요. 말씀은 절망적인 삶도 수술한다는 거예요.
근데 기도와 말씀이 우리를 그런 자리로 이끌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이 생명의 언어로 좋은 말로 가득 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귀에, 여러분의 마음에 이 생명의 말씀이 날마다 들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입술을 통해서 사람을 살리는 언어들이 세상을 향해서 내뱉어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제가 한 주간 말씀을 준비하면서 되게 열심히 세상을 향해서 이렇게 좀 걸었어요. 주변에 여러분이 하도 전도를 안 해서 제가 전도하려고 한국어 동아리도 만들었고, 이제 구미대에 어떻든 주변에 또 제가 헬스를 하니까 헬스 하는 친구와 친해지려고 막 어떻든 좀 작업도 하고 이런저런 일들을 한 주간 이 직간접적으로 하면서 이렇게 살아서 그 사람들이 왜 교회를 올까요?
생각했더니 남들에게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으면 이 사람들이 교회에 올 것 같은 거예요. 여러분 우리 교회가 좀 다른 교회에서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새로운 성도들은 다 들어요. 들어올 때부터 소리에 다 듣고 있어요. 밥 먹을 때 다 듣고 있어요. 여기서 밥을 먹지만 옆에 뒤에서 어떤 말을 하는지 다 들어요. 그 소리를 다 듣고 성도들이 교회를 결정하는 거죠.
우리 교회가 정말 생명의 언어가 들리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