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문병길/문화관광해설사
관리자 | ch2300@hanmail.net
승인 2021.05.21 13:42:04
서원(書院)이란?
조선시대에는 유교적인 윤리관을 기본으로 삼았기에 유학교육에 힘썼다.
그래서 성균관과 향교는 1895년 갑오개혁 이전까지 공립교육기관으로 운영했고, 각 지방 서원에서는 인재를 양성하고 선현을 배항하며 유교 향촌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발휘하였으나 1864년에 집권한 흥선대원군이 왕권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1868년 서원철폐령을 시행하여 교육기능이 없어져버렸다.
우리나라 서원(書院)시초는 1542년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시대 성리학(신유학)을 소개한 안향(安珦,1243~1306)선생 옛 집터에 사당을 짓고 제사지냈고, 강당에서는 선비 자제들을 교육했던 백운동서원이다.
예양서원(汭陽書院)
1612년에 정명열(丁鳴說:1566~1627, 유호인 선생의 제자 반곡 정경달 아들)이 선현(先賢)을 향사(鄕祀:고을에서 지내주는 제사)하자는 의논을 주창했고 위정훈(魏廷勳:1578~1662,유호인 선생의 제자 청계 위덕의 족하)이 주도하여이승(李昇:1556~1628), 선세기(宣世紀:1572~1636) 등 수십여명이 강당과 사당을 짓기로 합의했다.
그 당시 장흥부사(府使:종3품직)에게 허락받고 전라도 순찰사에게 보고하고 허락받아 유덕(遺德)을 기리기 위해 17년간 유배생활하면서 장흥지방 민속(民俗)을 순화시켰던 영천(靈川) 신잠(申潛:1491~1554)과 당대의 장흥 성리학 선구자였던 천방(天放) 유호인(劉好仁 1502~1584)선생을 배향했던 사우당(祠宇堂)은 현재까지 장흥에서 최초로 창건된 서원이다.
1653년에 월봉(月峰) 김광원(金光遠 1478~1550), 1664년에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 1681년에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을 추가로 배향하여 제향(祭享)해오다가 1869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당했으며, 1927년에 강당을 중건해 단(壇)으로 다시 모셨고 1975년에 신실(神室)을 중건(重建)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향사일은 매년 음력 9월 9일이며 제수(祭需)단자(單子)는 4변(籩-껍질 안 벗긴 밤. 어포. 말린 대추. 쇠고기 육포)과 4두(豆-미나리. 쇠고기 생간. 부추. 생조기)이다. 건물 신실은 3칸이며, 강당은 4칸, 제숙사(祭宿舍)는 4칸이다.
예양서원 암각문
해동 암각문연구회(회장 홍순석)에서 조사했던 암각문은 예양서원(汭陽書院)강당에서 신실 숭현묘(崇賢廟)로 올라가는 길 쪽 암벽에 새겨져 있는데 바위 앞면에 해서체로 쓴 네 글자를 한문으로 「秋江祠宇」라고 음각하였다.
글씨 총 규모는 가로 80cm×세로 135cm이고, 글씨 하나크기는 가로 30cm×세로 27cm이다. 좌측에 「歲在戊寅孟冬上院」 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무인년(戊寅年:1668년)겨울 초순에 서원을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좌측 하단에는 작은 글씨로 예양서원의 재임(齋任) 이시휘(李時輝:1621~1708), 백익군(白瀷珺)등 이름이 3행 종서로 새겨져 있어 예양서원 5현(五賢)배향(配享)시기를 파악할 수 있으며 글씨 하나 크기는 가로 6cm ×세로 7cm이다.
「五賢遺風山高水長」은 성헌(惺軒) 김승식(金承植1896~1979, 장흥읍 건산리 태생, 제2대(1950년~1953) 장흥향교 전교)선생이 글씨를 새겼다.
예양서원 배향인물
◆이색(李穡:1328~1396)
본관은 한산(韓山), 자(字)는 영숙(穎淑),호는 목은(牧隱)이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1367년(공민왕 13년)에 성균관 대사성(현재 서울대학교 총장)이 되어 성균관 학칙을 제정하고 정몽주, 정도전, 김구용, 이승인 등을 학관(교수)으로 채용하여 새로운 유학인 성리학 보급과 발전에 공헌하였다.
그는 성리학을 수용하고 유교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면서 유교와 불교 통합으로 폐단을 시정하려고 하였다.
유배된 이유는 공민왕 곁에서 재상(宰相:임금을 보필하는 최고책임자)으로 정치를 하면서 직언을 가리지 않고 떳떳하게 공론하여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기에 이성계 세력에 의해 이성계가 왕으로 즉위된 지 3일째 되던 날 유배되었다.
1392년 7월30일부터 1393년 1월1일까지 현재 장흥읍 원도리 부근에서 유배생활하면서 장흥지방 민속(民俗)을 교화하고 사문(斯文:유학자를 높여 부름 또는 유교문화)을 크게 진작시켜 1681년에 주벽(主壁)으로 배향했다.
◆남효온(南孝溫:1454~1492)
본관은 의령(宜寧), 자(字)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이고,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굉필(金宏弼), 정여창(丁汝昌) 등과 함께 수학하였으며, 생육신(生六臣)의 한사람이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1471년 젊은 나이에 세조 임금에 의해 물이 흐르는 냇가에 이장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少陵)복위(復位)를 주장했으나 당시 국정을 맡고 있던 도승지와 영의정 저지로 좌절되자 세상을 등지고 유량생활을 하였다.
장흥에 머무르면서 예양강 독취정 앞에 낚시터(釣臺)를 만들어 놓고 김물(金勿), 이침(李琛), 윤구(尹遘: 귀양왔던 연산군 외삼촌)와 시를 읊으면서 즐겼던 곳에 조대기(釣臺記)가 새겨져 있다.
공을 예양서원에 배향할 때 서인(소론)의 우두머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성리학자가 유교절차에 의거 고유(告由)를 했다.
◆신잠(申潛:1491~1554)
본관은 고령(高靈), 자(字)는 원량(元亮), 호는 영천(靈川)이며, 신숙주선생의 증손자이다. 조광조 문인으로 장흥지(長興誌)인 관산록(冠山錄)을 남겼다.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檢閱:정9품)이 되었으나 기묘사화(1519년에 조광조 세력확장과 위훈삭제 원인으로 남곤, 심정 등 신진사대부 핵심인물을 몰아내고 유배한 사건에 휘말려 공도 직책에서 파직되었다. 1521년 송사련(宋祠連:1496~1575)과 그의 처남 정상(鄭鋿)이 공모하여 안처겸(安處謙:1486~1521)등 주요 관료들을 제거하려고 안처겸의 모친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이 역모했다고 송사련이 신잠 선생을 거짓으로 밀고한 신사무옥(辛巳誣獄)사건에 연루되어 장흥으로 유배되어 17년간 머물렀다.
1543년에 관리로 재임용되어 태인현감, 상주목사(牧使:정3품직)를 역임했다.
장흥에서 17년동안 생활하면서 기봉(岐峯) 백광홍(白光弘: 1522~1556, 한국기행가사 효시 ‘관서별곡’을 비롯한 시 172수 작품이 전함) 학문의 길을 잡아주었고 태인 현감으로 재직할 때 일제(一齋) 이항(李恒:1499~1576, 사단칠정론을 형성한 성리학자)의 제자로 소개해줬다.
◆김광원(金光遠:1478~1550)
본관은 영광(靈光), 자(字)는 언명(彦明), 호는 월봉(月峰)이며, 이조참판 김필(1582~1619)선생의 손자, 헌납(獻納) 김괴(金塊)선생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우효신(禹孝新)의 딸이다.
조광조 문인으로 총애를 받았으며 1867년(고종4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를 문절공(文節公)이라 받았다.
1521년 신사무옥의 송사련 밀고문서에 승문원(承文院) 이문습독관(吏文習讀官)이었던 공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어 해남으로 유배되었다.
당시 조정은 조광조 일파를 몰아내고 남곤(南袞:1471~1527), 심정(沈貞:1471~1531) 등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불만을 가진 안처겸은 권전(權磌:1490~1521)등과 함께 간신들을 제거하여 정권을 바로 잡아볼 것을 논의하는 말을 듣고 송사련 등이 밀고하였다. 그 뒤 1533년에 유배에서 풀러나 고향 장흥으로 돌아와 도덕과 절의를 지키면서 학문에 힘써 존경을 받았으며 후진교육에 힘썼다.
◆유호인(劉好仁:1502~1584)
본관은 강릉(江陵), 자(字)는 극기(克己), 호는 천방(天放) 또는 산당(山堂)이다.
1570년 선생나이 68세 때 노구를 이끌고 34세 연하인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1536~1584)를 찾아가 성리학에 뜻을 두고 스승과 제자 관계를 맺고, 학문탐구에 전념하여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통달했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 장흥지방에서 반곡(盤谷) 정경달(丁景達:1542~1602), 청계(聽溪) 위덕의(德毅:1540~1613), 용호(龍湖) 문희개(文希凱:1550~1610) 등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는 등 후진양성에 힘썼다.
1574년(선조 7년)여름에 가뭄이 극심하여 제단(祭壇)을 쌓고 분신자살(焚身自殺)할 결심으로 장작더미를 높이 쌓고 그 위에 정좌(正坐)하여 기우제를 지내려고 장작나무에 불을 지르자 갑자기 큰비가 내렸다고 한다. 왕이 그 마음을 가상히 여겨 천방(天放)이라는 호(號)를 내렸다.
예양서원 향토문화재 지정 검토
우리 장흥은 예로부터 도학문장(道學文章)과 충효절의(忠孝節義)를 숭상하여 경모(敬慕)하는 선비정신이 충만하여 문림의향(文林義鄕)고장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예양서원의 신실 숭현묘(崇賢廟)에는 유교의 소목지서(昭穆之序)에 의거 중앙에 목은(牧隱) 이색(李穡)선생 위패를 주벽(主壁)으로 봉안하고, 좌측(동쪽)에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영천(靈川) 신잠(申潛), 우측(서쪽)에 월봉(月峰) 김광원(金光遠), 천방(天放) 유호인(劉好仁) 위패를 모시고 있다.
예양서원이 건립된 이후에 창건된 우리고장 서원(사우:祠宇)가운데 전라남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곳은 연곡서원, 강성서원, 반계사, 만수사, 영석재, 월산재, 회주사, 해동사, 죽천사 등 9개소이다.
2022년까지 예양공원 주변에 조성될 “역사향기 숲 테마공원”에 우리군 서원 가운데 최초로 창건된 「예양서원(숭현묘, 암각문 포함)」을 장흥군 향토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도록 적극적인 검토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