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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다시 보는 호남의 역사
호남의 고대사
우리는 역사 시간에 백제는 신라에게 멸망했다고 배웠다. 이것이 올바른 역사 인식일까? 백제는 군사력이나 경제력으로 신라에게 망할 수 없는 나라였다. 백제는 신라에게 망한 것이 아니고 당나라에게 망한 것이다. 당과 백제의 전쟁은 지금의 미국이 이란이나 이라크와 싸운 전쟁과 같은 것 이었다 . 백제의 멸망은 세계사적인 국제전쟁의 결과였다. 당나라와 일본, 고구려, 신라가 참전한 국제전쟁에서 패한 것이다 .신라는 지금의 경상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나라다. 부산, 김해를 중심으로 발전한 가야를 병합함으로서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 가야는 당시 철기문화의 최첨단을 달리던 나라였다. 또한 가야는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문명국 이었다. 삼국통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김 유신은 신라가 아닌 가야 출신 이었다. 호남이 백제의 중심이라고 알고 있지만 백제는 충청도와 경기도를 실질적인 주무대로 활동했다. 또 호남지역을 과거 마한으로 알고 있지만 이것도 확실한 것이 아니다. 마한이라는 말은 중국의 인류학자가 "위지동이전" 에서 호남지역에 마한이라고 하는 작은 마을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다는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을 뿐 구체적인 사실은 알 수 없다.
호남지역에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미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여기저기 고문명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구석기시대 문화의 흔적은10만 년 전까지 발견되고 있다. 거석문화인 고인돌은 선사시대 무덤의 하나다. 호남에는 한 군데에 수십에서 수 백 개의 고인돌 군이 있는 곳이 2천 개가 넘고, 약 2만개 이상의 고인돌이 발견되고 있다. 고인돌 문화는 세계적으로 한반도가 가장 융성한 발전을 했는데 호남이 그 중심에 있다. 고인돌이 큰 것은 몇 십 톤이 되는데 이것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삼백 명의 인력이 필요하다. 이는 호남 지역에 독자적인 족장 세력이 일찍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호남 지역에 대한 보다 포괄적이고 다양한 고고학적 개념 설정이 필요함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호남은 역사상 중앙에서 권력을 행사해 본 적이 거의 없는 지역이다. 딱 한 번 있는데 그것은 후백제의 견훤이 수도를 광주로 삼았을 때다. 견훤은 892년 지금의 광주인 무주에 수도를 정하고 8년 후에는 지금의 전주 완산으로 천도를 했다. 이후 호남은 권력의 변방으로 한 번도 권력의 중심에 서지 못했다.
호남의 중심, 나주
옛날에는 수로가 지금의 고속도로 역할을 했다. 영산강이 흐르는 영산포가 옛날에는 대단한 곳 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상선이 빈번하게 드나들고 물산이 풍부한 곳 이었다. 영산포에서는 개도 돈을 물고 다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영산강을 끼고 있는 나주는 옛날부터 천년 목사골 이라고 했다. 천년 동안 목사가 거주하던 곳으로 광주보다 더 상위에 있던 지역 이었다. 나주는 영산강 뱃길을 이용해 중국, 일본과의 무역을 활발히 했고, 예성강을 이용한 개경, 강화 등과도 연합 세력을 형성했다. 나주의 복암리 고분과 반남면 신촌리 9호분에서는 금동관이 출토 되었는데,이는 이 지역이 독립된 거대한 정치 세력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찬란한 왕관이 이 지역 고대 세력의 위상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나주 사람들은 후백제의 견훤에게 복속을 하지 않고, 고려를 세운 왕 건과 연합을 하여 후백제를 멸망시키고,고려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왕 건은 나주의 오씨와 결혼을 하여 제 2 대 임금인 혜종을 낳고, 고려의 장화 왕후가 된다. 고려 8대 국왕인 현종은(1009-1031) 제2차 거란 침입 때 나주로 몽진을 온 적도 있다.이와 같이 나주와 고려 왕조는 대단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왕 건이 훈요십조에서 호남인을 쓰지 말라고 했다는 것은 날조된 허위다. 이것은 박 정희 시대 인위적으로 조작된 영호남 대립 감정의 소산일 뿐인 것이다.
조선시대의 호남
요즈음 드라마에도 소개되고 있는 정 도전(1342-1398)은 반원친명 발언으로 재상 이 인임의 노여움을 사 나주로 귀양을 왔다. 당시의 귀양 생활을 알려주는 글이 "소재동기"와 "답전보“등을 통해 전해진다. 삼봉은 나주 유배 생활 중에 부곡 사람들과 생활을 하면서 서민들의 애환을 체험했다. 나주 백성들로부터 중앙에 대한 항거정신을 알게 되고, 토지 개혁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것이 후에 삼봉이 새로운 왕조를 세우게 된 계기가 된다. 삼봉은 맹자의 역성혁명 사상을 적극 수용하였고,이것이 호남 민중의 혁명 사상과 결합하여 조선 왕조를 디자인하고 건국하는 정신적인 기반이 되었다. 나주의 민중이 조선 왕조를 세우는 정신적인 씨앗이 된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이 순신은 주로 경상도 앞 바다에서 전투를 했으나, 전투에 필요한 배는 모두 완도와 여수에서 건조되었다. 특히 완도는 배를 만드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 이었다. 옛부터 호남인은 조선술과 항해술에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또한 호남에는 배 건조에 필요한 좋은 목재가 많이 생산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이 순신이 서남해안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호남인의 실력과 희생이 절대적 이었다. 많은 호남의 장인들이 동원되어 거북선을 건조했고 ,수군에 직접 참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당시 바다 뿐만 아니고 육지에서도 광주의 김 덕령 장군, 고 경명 장군 등 수많은 호남인들이 , 자발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국난 극복에 앞장을 섰다. 김 덕령 (1567-1596)장군은 광주출신 문인으로, 시호는 충장 인데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혁혁한 공을 세우지만 모함에 의해서 죽었다. 지금의 광주 충장로는 그의 시호에서 따온 것이다. 고 경명 장군 같은 분은 광주 대촌면 출신으로, 3부자가 모두 의병활동 중에 희생을 당했다. 호남은 임진왜란 당시 전국적으로 의병이 가장 많이 일어난 곳이다. 곡성군 옥과에서 탄생한 월파 유팽로는 1579년(선조 12)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옥과현에서 살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달려가 순창에 집결한 500여 명에 이르는 불량배 무리를 설득하여 4월 20일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을 일으켜 담양에서 궐기한 고경명(高敬命)의 군사와 합세하였다. 여기에서 고경명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는데, 유팽로는 고경명 휘하의 종사(從事)가 되었다. 호남의병들은 처음에 근왕(勤王)을 목적으로 북상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이 전주를 침입하려 하자 금산에서 적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전투에 앞서, 적의 수만의 병력을 오합지졸인 아군으로써는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험한 요지에 분거(分據)하였다가 적이 교만하고 나태해지기를 기다려 공격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이 싸움에서 패전하였다.
유팽로는 일단 탈출하여 고경명이 아직도 적진 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적진에 뛰어들어, 고경명을 일단 구출하고는 끝내 전사하고 말았다. 당시 일본은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곡창지대인 호남을 공략 하려고 했으나, 해상으로는 이 순신에 가로막혀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에 육상으로 우회하여 호남지방을 공략하려고 했다. 만일 고 경명이 이끄는 의병대가 금산에서 일본군을 저지하지 못했다면 호남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이 순신의 해군도 위험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 순신이 남해에서 연전연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육로로 호남을 공격하려고 했던 일본군에 맞서 시간을 끌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이었다.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유 팽로는 대사간에 추증 되었으며, 후에 고 경명과 함께 광주(光州) 포충사(褒忠祠)와 금산 종용당(從容堂)에 제향되었다.
호남의 민중들은 바다와 육지에서 풍전등화의 나라를 지켜냈다. 이를 이순신은 "약무호남, 시무국가"라고 했다. 만일 호남이 없었으면 나라도 없었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 말을 지금의 위정자들도 잘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사미인곡을 지은 정철(1536-1593)이라는 사람이 있다. 정철은 서울 출생으로 사화로 인해 담양 창평으로 이주를 한 사람이다. 그는 당시 대학자인 김 인후와 기대승의 문하생이 되었다. 김 인후는 장성 출신으로 해동 18현의 한 분이고 사림파의 거두였다 .당시 정철은 대표적인 서인 정치가로 정 여립(1546-1589) 모반 사건의 진상조사(현재의 특감반장)를 주관 하게 된다. 정 여립 모반사건은 지금까지도 ,학자들 간에 정치적 음모설이 강하게 제기 되고 있다. 정 여립이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자살을 했다고 기록 되어 있으나, 정적에 의한 타살 의혹이 제기 되고 있는 것이다. 정 여립은 우리나라 최초로 주권재민 사상을 주장했고, 능력에 따라 임금도 바꿀 수 있다는 맹자의 역성혁명 사상을 갖고 있었다. 정 여립 모반 사건은 조선조의 광주사태와 유사한 "기축옥사"를 불러 온다. 이 때 호남의 뛰어난 인재 천여 명이 몰살을 당한다. 이로써 정철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세력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고 호남의 인물들은 거의 살아남지 못했다. 즉 조선 중기 이후 호남인맥은 임진왜란과 기축옥사를 거치면서 점차 씨가 말라갔다. 독립운동사에서 상해 임시정부 등에 호남인이 잘 보이지 않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동학혁명
1894년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반발하여 민란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1차 동학혁명이다. 조 병갑은 민비 일가의 매관매직에 의해 벼슬을 사서 고부군수로 내려온 사람이다. 이어서 전 봉준에 의해서 2차 동학혁명이 일어나는데 이 때 민 비는 혁명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지원군을 요청 한다. 당시 일본은 천진조약에 의해서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면 자동적으로 여기에개입하도록 되어 있었다.이 때 한반도에 진입한 일본군이 동학혁명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망한 호남의 동학혁명군이 30-40만 명에 이른다. 동학은 경주 사람 최 제우에 의해서 창시되었고 ,반봉건 반외세를 표방하고 일어난 최초의 대대적인 민족 운동이었다.동학혁명은 노비문서를 불태우는 갑오개혁을 불러왔고 ,청일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혁명군의 하부 구조는 상당수가 뒤이어 일어난 의병운동에 참여하여 반봉건, 반외세 운동을 계속해 나간다. 임진왜란 당시의 호남 의병 인맥과 ,구한말 호남 의병은 구조적인 연속선상에 있다.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조상으로 둔 후손들은, 구한말에도 항일 의병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1909년 일본은 전남 지역의 항일 의병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워, 양민을 학살하고 잔인한 살육과 방화를 저질렀다. 이때 죽은 의병장만 103명에 이른다. 당시 항일 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일본군의 작전명은 "남한폭도 대토벌 작전" 이었다. 이 때 일본군은 부안, 하동, 해남으로 포위망을 구축하고 전남의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이때 또 다시 전남의 쓸 만한 인재가 거의 몰살되었다. 이로써 다시 한번 호남 인맥이 끊어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광주학생 운동
이후 1929년 11월, 광주로 통학을 하던 광주고보의 나주학생들과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 학생들 간에 집단 패싸움을 하는 사건이 발생 한다. 한국 여학생 광주여고보 3학년 박 기옥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박기옥의 사촌 동생 박 준채가 일본 중학생들과 충돌을 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된다. 이 때 일본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학생 편을 들어 한국학생들을 구타했다. 이 사건은 결국 항일 저항운동으로 발전하여 광주농업, 광주여고보, 광주사범 학생들의 시위와 집단휴교로 이어지고, 순식간에 경기고, 경복고, 중동, 경신, 보성, 중앙, 배재 ,이화, 휘문고 등 전국으로 확산 된다. 이어 전국 주요도시 194개의 학교가 이 운동에 참여하고 ,참여 학생 수가 54,000명에 이르렀다. 당시의 학생 수 89,000명에 비추어 볼 때 전국 60%의 학생이 참여한 대대적인 학생 항일운동 이었다. 또한 해외에서도 중국 , 미국 , 연해주 등에서 연대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1,600명의 학생이 구속되고, 580명이 퇴학, 2,330명이 무기정학을 당했다. 이것이 이른바 광주학생운동 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은 3.1만세 운동 이후 가장 큰 대규모의 항일운동 이었다. 구한말 호남의 항일정신과 광주학생운동은 역사적으로 그 맥을 같이 한다. 광주고보는 후에 광주일고가 되었고 교정에는 지금도 이 사건을 기념하는 학생탑이 우뚝 서 있다.
호남의 현대사
박 정희 집권 이후 거의 한 세기 동안 진행된 정치, 경제, 사회적인 호남인에 대한 음해와 따돌림은 우리 호남인들에게 깊은 좌절과 상처를 안겨주었다. 사회 전반에 걸쳐 호남인들에 대한 인사차별과 푸대접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공무원, 군대, 은행, 심지어는 일부 기업에서까지 호남은 비주류였고 차별대우를 받았다. 경제개발 과정에서도 모든 산업이 경상도 지역에 집중되고 ,호남에는 변변한 공장 하나 들어서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로 포장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1,300년 역사에서 호남은 언제나 비주류였던 것이다. 끊임없는 광주의 저항정신은 1980년 5월 18일 5.18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1979년 10월 26일 18년간의 장기집권을 누려오던 박 정희 대통령이, 김 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사망함으로서 유신체재는 마침내 그 막을 내린다. 이후 전 두환을 중심으로 등장한 신군부 세력은 12.12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했다. 서슬 퍼런 유신독재 치하에서 숨죽이고 살았던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화산처럼 분출했고, 이 민주화의 봄은 1980년 5월까지 이어졌다. 권력 장악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던 신군부는, 1980년 5월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단행했다. 계엄 확대와 동시에 신군부는 계엄사령관 이희성 명의로 계엄포고 제10호를 발령하면서 정치활동 금지·대학교 휴교령·언론보도 사전검열 강화·집회 및 시위 금지 등의 조치를 내렸다. 이는 헌법에 규정된 국회 통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계엄군을 동원해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한 채 벌인 불법조치였다. 5월 18일 새벽 2시 신군부는 국회를 점령한 뒤 무력으로 봉쇄했고, 헌정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한편 비상계엄이 확대되기 직전, 보안사에서 예비검속을 통해 김대중, 김종필을 비롯한 주요 정치인 26명을 합동수사본부로 불법 연행하고 학생·정치인·재야인사 2,699명을 체포했고, 신민당 총재 김영삼 역시 가택연금 처분내리는 정치 탄압을 감행했다.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인해 국회와 정부에 의해 진행된 개헌 논의가 중지됐다. 이로써 서울의 봄은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에 따라 '전국 보안 목표'에 계엄군이 투입됐다. 92개 대학에 계엄군 병력 중 93%인 22,342명이 배치됐다. 반면 보안 목표는 109개 목표에 2,395명만 배치됐다. 이는 신군부 세력이 대학가의 시위를 잠재우려는 의도에서 계엄군을 배치했음을 보여준다. 5월 18일 오전 전남대 학생 수백여명이 학교 정문 앞에서 계엄령 확대와 휴교령에 반발하는 시위를 했는데,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대검과 곤봉으로 구타하는 등 잔혹하게 진압했다. 작전명령 "화려한 외출" 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전 두환 정권은 일본군 보다 몇 배 잔인한 짓을 호남인들에게 저질렀다. 군대가 선량한 자국민을 상대로 헬기에서 기관총까지 난사한 것으로 확인 되었다. 국가의 공권력인 특수부대에 의해 불의에 항거하는 민주시민들이 무차별적으로 돌육된 참상이 빚어지고 말았다.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잔인무도하고도 천인 공로할 만행이 자행된 것이다.도저히 잊혀 지지 않는 사건이고 절대로 잊어서도 안 되는 사건이다. 이른바 5·18 민주화 운동(五一八民主化運動), 광주민중항쟁(光州民衆抗爭)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이었다. 5.18로 확인된 사망자 수는 191명,부상자는 852명에 이른다. 이러한 참극은 수괴 한 사람에 대한 처벌로 해결될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역사에 길이길이 새기고 이 땅에서 이와 같은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경계 해야 한다 . 우리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각인 시켜 밝은 미래를 열어 나가도록 해야 한다 . 국난 앞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호남인의 호국정신,불의 앞에서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호남인의 기개와 결기가 우리의 피속에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
"우리는 정의 앞에 피 끓은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자랑스러운 호남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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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영석 ,졸업연도 1968년 (43회),금호석유화학 근무
주소;서울 강서구 화곡로 13길 화곡3동 화곡푸르지오 115-401
e-mail; ysgo49@naver.com 전화; 010 5406 5361
<내장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