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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83
6월6일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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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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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oOyh-LgbhnM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79747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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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우리 인생의 핵심 주제, 성체성사>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신자들 얼굴을 마주보게 됩니다. 한 명 한 명 얼굴을 쭉 한번 훑어보면 천차만별입니다. 미사가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는 승리의 잔치, 구세주 하느님께서 죄 많고 부족한 우리 인간에게 오시는 감사의 축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구원의 전례이기에 당연히 행복에 겨워야 함에도 그렇지 않은 얼굴들도 많습니다.
주일미사가 의무라니, 빠지면 귀찮게 고해성사를 봐야하니 어쩔 수 없이 오셔서 '제발 좀 빨리 끝나라'는 표정들도 눈에 띕니다. 더 심한 분들은 도대체 의욕이 없는 분들입니다.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소가 닭 바라보듯이 멀뚱멀뚱 바라봅니다. 심드렁한 표정입니다. 흥미도 반응도 없습니다. 때로 연옥벌이라도 받는 것 같은 모습의 신자들도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다'는 표정도 눈에 띕니다. 진지한 얼굴, 단정한 자세, 미사 전례의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표정,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마음에 간직하려는 경건한 모습입니다. 마치도 이 세상에서 드리는 마지막 미사인 듯 정성이 지극합니다.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성체성사는 속죄의 제사, 희생의 제사, 십자가의 제사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기쁨의 축제입니다. 따라서 미사가 거행되는 시간은 환희의 순간입니다. 감사의 순간입니다. 은총의 순간입니다. 부족한 죄인들이 천상잔치에 참여하니 너무도 기쁜 나머지, 너무도 감사하고 은혜로운 나머지 감격에 겨워 눈물이 흐르는 은총의 순간이 미사입니다.
'성체성사의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분이 한 분 계십니다. 만년에 이르러 그 힘든 상황에서도 죽기까지 성체성사와 끈을 놓지 않으셨던 분, 그래서 그분께서 세상에 보낸 마지막 편지 역시 성체성사가 핵심주제였습니다.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해지고 마음이 따뜻해져오는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그분께서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신 지가 벌써 꽤 지났네요. 만년에 이르러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셨지요. 위급한 순간마다 자주 가시던 병원이 로마 시내에 위치한 제멜리(쌍둥이란 의미) 병원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입원하셨던 2005년 3월 성목요일을 기해 교황님께서는 당신이 극진히 사랑하셨던 모든 사제들에게 유언과도 같은 서한을 보내셨습니다.
이 편지 주제가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저는 이 편지를 고이 간직하고 틈날 때 마다 꺼내서 읽어보곤 합니다. 교황님 유서다 생각하면서 그 내용이 너무나 감동 깊고, 또 의미심장합니다.
"사랑하는 사제 여러분, 저는 다른 환자들과 나란히 병원에서 회복을 기다리며 성찬례를 통해 저의 고통을 그리스도의 고통에 일치시키면서 여러분을 생각합니다. 온 교회가 성찬례에서 생명을 얻으므로, 사제의 삶은 더욱 성찬례로 구현되는 삶이 돼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제들에게 '성찬 제정문'은 축성문 이상의 것, 곧 '생명의 조문'이 돼야 합니다."
"성체성사 때 모두 경건히 침묵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장엄한 말씀을 되풀이할 때 우리 사제들은 이 구원의 신비를 전하는 특별한 전령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찌 설득력 있는 전령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제들을 향한 교황님의 충고 말씀은 제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신자들은 성체성사를 통해서 너무나 행복해하는데, 정작 가장 성체성사 가까이 서 있는 저, 매일 성체성사를 집전하는 저는 별 감흥이 없던 때가 많았음을 깊이 반성합니다.
오늘부터라도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는 성찬 제정문을 낭독할 때마다 이런 마음을 지녀보고자 노력하렵니다.
"나를 구워먹든지 삶아먹든지 어떻게 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를 이용해도, 돌아서서 험담해도, 나를 구박해도 나는 묵묵히 견딜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내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그런 나를 통해 무한히 자비하신 하느님을 조금이라도 느끼시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사랑에 굶주리고, 허기와 갈증에 허덕이는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고맙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의 몸은 은혜롭게도 늘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달려갈 수 있는 성체성사 그 한가운데 자리 잡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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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단히 건너갑시다!>
원치도 않았는데 주어진 장애(障礙), 난데 없이 다가온 장애 앞에, 장애우들과 그 가족들이 겪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스스로 거동이 힘들어진 어머님을 모시고 외출할 때 마다, 장애우들과 가족들이 느끼는 고충을 크게 실감합니다.
제 눈으로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낮은 턱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태산보다 더 높은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손쉽게 누리는 산책이며 운동이, 누군가에게는 그림의 떡이요 절실한 희망사항이었습니다.
장애는 우리네 인간 삶 안에서 특별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저런 결핍과 장애를 안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언제 어떻게 장애를 지니게 될 지 모르는 잠재적 장애우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든 어느 순간, 스스로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우리 모두 누군가로부터 도움의 손길을 받아야 하는 필연적 장애우가 되기 때문입니다.
장애는 회피하거나 분리시켜야 할 대상 아니라, 연대하고 통합해야 할 대상이며, 끌어안고 존중해야 할 대상입니다. 장애를 우리네 삶 안에서 지극히 자연스런 한 부분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동시에 장애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가 드러나는 장(場)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최근 참으로 기가 막힌 소식을 한 가지 들었습니다.
한 지역 주민들이 ‘집값 하락’, ‘안전 위협’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내세우며, 장애우들의 자립을 위한 공동생활시설 퇴출을 요구하는 연판장을 돌렸답니다. 대단한 시설을 세우는 것도 아니고 장애우 세 분의 자립을 위한 방 3개 짜리 작은 주택 하나 매입하겠다는 것입니다.
더 웃기는 것은 자신들이 무슨 민주화 운동 투사라도 되는 양, 한 사람 한 사람 연판장에다가 ‘결사 반대’라는 표현까지 쓰셨더군요.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한 인간 존재로서 정말이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하셨습니다. 동물들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인간으로서 분노 보다는 수치와 슬픔과 서글픔이 느껴졌습니다.
그리스도교적 복자, 복음적 복지가 추구하는 장애우들을 위한 복지의 미래는 ‘탈시설화’ ‘탈 대규모화’ ‘가족화’입니다. 장애우들이 첩첩산중 오지에 지어진 대규모 시설에서 단체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우리 사회의 당당한 한 일원으로 일반인들과 똑같이 평범하게 살아가도록 배려하는 것입니다.
장애우들을 위한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자연스럽고, 지극히 인간적인 이런 사업들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대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사례를 찾아보기란 하늘의 별따기랍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우리의 현주소요 민낯입니다. 동물들도 하지 않는 일들을 인간의 탈을 쓰고 태연스럽게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체성혈대축일입니다.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 파스카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고, 그 묵상한 바를 삶으로 실천하는 날입니다.
파스카(Pascha)란 말은 ‘지나가다’, ‘건너가다’ ‘넘어가다’는 의미입니다. 거룩한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한 우리는 부단히 건너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약육강식의 동물적 삶에서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인간적 삶에로 건너가야겠습니다.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의 삶에서 이웃의 슬픔과 눈물을 내 슬픔과 눈물로 여기는, 이타적 신앙인의 삶에로 건너가야겠습니다.
천박하고 미성숙한 삶에서 품격있고 성숙한 삶에로 건너가야겠습니다.
세상 것에만 죽어라고 목숨을 거는 지상 시민의 삶에서, 관대하고 너그러운 시선을 지닌 천상 시민의 삶에로 건너가야겠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홍해 바다 건너편 피안(彼岸)의 언덕 위해 서서 우리에게 빨리 건너오라고 손짓하고 계십니다.
오랜 세월 몸에 밴 죄와 악습, 인간적 미성숙과 극단적 이기주의를 모두 이쪽 땅에 내려놓고,주님께서 서 계시는 반대편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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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1kR3BrPkTw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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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은 부모가 자녀에게 자신이 사는 곳으로 초대하는 도구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이웃을 위한 양식이 되어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먹고 양식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양식’의 반대말은 ‘음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식엔 사랑이 담겨있고 음식엔 이기심이 담겨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무엇이든 먹어야 삽니다.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무엇인가는 먹었기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먹는 것이 음식인지 양식인지에 따라 그가 어디에 살게 될지가 결정됩니다.
모기는 어미로부터 양식을 받지 못합니다. 심지어 음식도 못 받습니다. 물론 탄생할 때는 부모도 조금은 희생합니다. 피 흘림 없이 태어나는 생명체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그것들은 부모의 영향을 받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음식이 있는 곳에 머물게 됩니다. 물론 어디를 가든 환영받지는 못합니다.
동물들은 부모로부터 사랑이 섞인 양식을 먹습니다. 공동체가 더욱 끈끈할수록 부모와 지내는 시간이 깁니다. 부모로부터 사랑이 섞인 양식으로 길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부모처럼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사랑이 섞인 양식을 먹어야 부모가 있는 곳에 살 능력이 생깁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격리 원숭이’ 실험을 하였습니다. 새끼 원숭이를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떼어놓고 인간이 기른 것입니다. 인간도 분명 사랑이 섞인 양식을 새끼 원숭이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식은 음식만이 아니라 가르침도 포함합니다. 미사가 그래서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 둘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둘 중의 하나만 부족해도, 혹은 그 가르침이나 사랑을 감당할 수 없다면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양식을 먹은 새끼 원숭이는 원숭이 무리에 끼일 수 없었습니다.
굳게 닫혀있던 루마니아의 대형 고아원 ‘요람’이 1990년 개방되었을 때, 사진기자 ‘윌리엄 스나이더’는 그곳에 수용된 아이들의 상태를 찍어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는 요람을 ‘인간 창고’라 불렀습니다. 많은 아이가 몸을 앞뒤로 흔들거나 머리를 벽에 쿵쿵 들이받고 이상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사람이 다가가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영혼이 없는 상태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학대도 당한 적이 없고 굶주린 적도 없었지만, 아이들은 사회에서 필요한 소통 능력을 전혀 갖추지 못한 채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보모들이 주는 음식 속에는 ‘사랑’이 담겨있지 않았습니다. 요람에서는 일손이 부족하여 보모 한 명이 20~30명의 아기를 맡아야 했습니다. 보모가 하는 일은 음식을 배급해 주는 것뿐, 아이와의 따듯한 접촉이나 별다른 보살핌은 줄 수 없었습니다. 양식이 아니라 음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에 속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먹는 것이 음식인지 양식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먹는 것이 비단 식품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책도 먹고 동영상도 먹습니다. 뉴스에서 보니 15초짜리 ‘틱톡’ 동영상을 따라 하다가 많은 사고가 잇따른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에게 공유되는 동영상인데, 예를 들면 운전하면서 율동을 따라 하다가 저수지에 빠지거나 기찻길에서 동영상을 따라 하다가 기차에 치이거나 스프레이로 불장난을 하다가 큰 화상을 입는 경우들입니다. 음식만 찾다가는 이와 같이 동물의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음식과 양식을 구분하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양식은 분명 그 안에 이기심이 아닌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틱톡은 그것을 올리는 이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보라고 올리는 것입니다. 상대의 이익을 위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해 올리는 것입니다. 요람에서 자기 이익을 위해 음식을 아이들에게 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이지만 양식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자기 이익을 위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먹으면 짐승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주는 음식만 먹는다는 말은 낮은 짐승의 수준에 머물고 모기나 기생충처럼 살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양식을 이루는 사랑과 진리는 하나의 실재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기에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전달됩니다. 사랑이 담겨 우리에게 오는 것이 양식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도 그분이 사는 곳에 머물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양식 안에는 사랑과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사랑이시고 진리이십니다. 이 사랑과 진리는 모기와 같은 본성을 벗고 자신에게 양식을 주는 이의 수준으로 우리를 향상합니다. 자신도 받은 것을 내어놓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한 예를 봅시다.
휴스턴의 한 라디오 방송국의 마이크라는 진행자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네브래스카주의 목장에서 살고 12살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로건이라는 소년의 전화였습니다.
“마이크, 제 얘기 좀 들어주시겠어요?”
“물론이지, 로건. 무슨 일이니?”
“하느님이 저에게 하신 말씀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요.”
“어제 우리 아빠가 송아지를 줄로 옭아매셨는데, 이 송아지는 매우 늙은 소에서 태어나서 엄마가 너무 늙어 건강한 우유를 먹지 못했어요. 비타민 C나 그런 좋은 성분이 있는 우유를 못 먹었어요.”
“그래서?”
“우리 송아지가 그만 등뼈가 부러지고 말았어요. 그래서 오늘 아침 제가 밖에 나가서 묻고 왔어요.”
로건은 통화 중에도 계속해서 훌쩍거렸습니다.
“하느님께 물어봤어요. ‘하느님, 왜 제 송아지를 데려가셨나요? 저에게 소중했는데.’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로건, 내 아들도 나에게 소중했단다. 하지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어야 했어'. 똑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전 그 송아지를 참 아꼈어요. 하느님의 아들도 매우 소중했어요.’”
“로건, 네 말이 맞다. 사실이야. 로건, 괜찮니?”
“네, 괜찮아요. 하지만 이거 한 가지는 말하고 싶어요. 매우 중요한 얘기예요. 사랑하는 사람이나 애완동물을 잃어버렸을 때, 하느님께서도 사랑하는 아들을 잃으셨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세요. 하느님은 모두 이해하세요. 하느님은 언제나 이해해 주세요. 그냥 하느님께 나아가면 돼요.”
동물이건 사람이건 본인이 보지 못한 것은 하지 못하고 본인이 받지 못한 것은 주지 못합니다. 내가 사랑을 하고 있다면 분명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체 성혈은 이와 같습니다. 성체 성혈을 먹고 마시는 사람들은 그 받은 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소중한 아드님까지 내어놓으시는 아버지 앞에서 이기적으로 음식만 팔아 이익을 챙기는 사람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대로 당신이 주시는 양식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당신이 사시는 하늘나라를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물론 양식을 먹는다고 다 하늘 나라에 합당한 수준으로 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것을 원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고 싶으며 천상의 양식을 먹으면 양식이 무용지물이 됩니다. 같은 이슬이라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양식이 될 것인지 음식이 될 것인지에 따라 양식 안에 든 사랑이 소화되기도 하고 사랑은 버려지고 음식만 소화되기도 합니다.
세상에 속하려는 사람은 성체를 영하더라도, 마치 피자나 햄버거를 사 먹듯 헌금을 내고 당연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내가 봉헌하는 헌금도 나 자신도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거저 받은 사람만이 거저 내어줄 수 있습니다. 거저 내어주지 못하면 나는 그저 음식이 되고 맙니다. 음식은 먹히거나 썩어버립니다. 잊히는 것입니다. 누가 생선 몇 마리, 돼지나 소 몇 마리를 먹었는지, 혹은 그 이름을 기억하겠습니까? 하지만 양식을 먹으면 그 양식을 준 이를 영원히 기억합니다. 그런 양식이 되는 삶을 살려면 양식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참된 양식이 되게 만드는 진정한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밖에 없습니다.
나도 양식이 되어야 영원히 삽니다. 음식을 먹으면 음식이 되고 양식을 먹으면 양식이 됩니다. 내가 먹는 것이 내가 됩니다. 이는 내가 음식, 즉 고깃덩이가 될 것인지, 양식 곧 그리스도가 될 것인지의 결심에 따라 결정됩니다.
뱀이 되려는 사람은 무엇을 먹어도 뱀이고 소가 되려는 사람은 무엇을 먹어도 소가 됩니다. 각자가 소화하고 싶은 것을 소화하기 때문입니다. 양식이 될 것인지, 음식이 될 것인지 먼저 정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 것인지 천국에 속하고 싶은지 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정했다면 그 살고 싶은 곳에서 오는 양식을 먹으면 됩니다. 양식은 부모가 자녀에게 자신이 사는 곳으로 초대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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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체성사의 신비는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찬미를 모두 동원하여도 그 신비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부속가 2절에 “정성다해 찬양하라. 찬양하고 찬양해도, 우리능력 부족하다.” 하고 있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화 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의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취하셔서 우리를 당신으로 변화시켜주는 성사이다.
복음: 마르 14,12-16.22-26: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포도주를 축성하시며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24절)라고 선언하실 때, 이 말씀은 제1독서의 모세의 선언,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탈출 24,8)와 관련이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약이란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피”를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계약을 맺으신다. 바로 당신 자신이 새롭고 영원한 계약이 되신다. 성체성사는 그러기에 새로운 계약인 것이다.
복음의 앞부분은 희생제물로 바쳐지고 그것을 먹어야 하는 파스카 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새로운 파스카 양은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성체성사는 이러한 그리스도 행위의 예고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그 행위의 재현이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22절)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봉헌하는 것도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루카는 이 사실을 더 분명히 전해주고 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루카 22,19)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24절) 축복양식의 이 말씀은 희생제물을 바치며 거행했던(탈출 24,5) 시나이산에서의 계약(탈출 24,8)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피를 흘린다는 것”은 분명히 희생제사(레위 1,5.12.15; 3,2. 8.13)에 항상 연결된 죽음의 행위를 연상케 한다. 이 모든 내용을 종합하면, 성체성사는 무엇보다도 주님의 돌아가심을 거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면서 하신 모든 말씀은 당신의 몸이 창에 찔려 피가 완전히 다 쏟아진 성금요일에 입증된 죽음의 상황의 재현이다. 이 모든 것은 희생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창에 찔리는 고통과 아픔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 사랑의 봉헌을 통해 자신을 바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현존”일 뿐 아니라, “희생”이다. 예수님께서 갈바리오 산 위에서 바치셨고 오늘도 당신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감싸시며 성사를 통해 신비스럽게 재현하시는 바로 그 “희생” 자체이다. 이러한 것으로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 느끼게 되는 매력적이면서도 두려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히브리서에서도 “피”로써 새로운 계약을 맺는 “희생”으로서의 성체성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구약의 사제직과 대조시키면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탁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구약의 사제들은 물질적인 희생제물을 봉헌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영원히”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든 인간을 악에서 해방하시어 당신 자신과 더불어 “영원한 상속 재산”(히브 9,15)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셨다. 이 상속 재산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피로써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가 되심으로써 보증하셨던 영원한 생명, 구원이다. 우리는 이미 신앙을 통해 성사적 표징 안에서 미래의 “유산”을 차지하고 있다.
이 유산은 서두에 말했듯이, 성체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로 변화시켜주는 성사이며, 그래서 참 아들딸이 되게 하는 성사이다. 즉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성사이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화 되어 그리스도와 같이 된다면, 우리는 한 몸 그리스도를 이루게 되며 그리스도로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제는 성체성사를 열심히 거행하며, 합당한 준비로 성체를 영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 수난의 기념이며, 옛 계약의 완성이며,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놀라운 일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며,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의 놀라운 증거”(Opuscolo 57)라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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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우리가 미사 안에서 만나게 되는 성체와 성혈의 의미는 하느님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실 때는, 짐승의 피로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것은 옛 계약, 곧 구약입니다. 구약에서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이제 예수님의 탄생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그리고 더는 짐승의 피가 아닌, 예수님의 피로 모든 사람을 위한 새로운 계약을 하느님께서 맺으십니다. 새로운 계약, 곧 신약입니다.
계약이라는 조금은 경직된 형식의 언어가 사용되지만, 이 계약 안에는 사람을 향한, 나를 위한 하느님의 따뜻함이 담겨 있습니다.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의 자기희생과 내어 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은, 하느님과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 주는 큰 신비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이 큰 사랑의 신비를 우리는 비교적 손쉽게(?) 미사 안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자 구약의 긴 역사가 필요하셨습니다. 한두 세대가 아니라 수천 년의 기나긴 시간입니다. 아울러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따뜻함이 필요하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필요하셨습니다. 사람을 위해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헌신하겠다는 예수님의 자기 결심이 필요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시작된 긴 역사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갖 멸시와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철저한 자기희생이 없었다면 결코 가능할 수 없었던 사건입니다. 그 사랑의 절정을 성체와 성혈이 품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을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마주하고 있는지요? 나를 향한 하느님의 따뜻함과 품어 줌의 절정, 그것이 우리가 참례하는 미사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 사랑의 표지가 바로 우리가 미사에 참례하는 것만으로도 만날 수 있는 주님의 보배로운 몸과 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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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를 행하여라.>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마르 14,22-25)
1)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은 요한복음 6장에 있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48)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0-51)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4-56) 만일에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지 않았다면, 이 말씀들은 당신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상징적인’ 말씀으로만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 ‘실제적인’ 지침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당신에 대한 믿음이 믿는다고 생각하는 일로 그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행위가 되기를 바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일은, 예수님께서 당신 몸으로 주신 빵을 먹는 실제 행위로 실천됩니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상징이면서 동시에 실제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성체성사 제정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 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코린 11,23-29) 바오로 사도가 이 말을 한 것은,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먹고 마시는 것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1코린 11,17-22)
주님의 몸을 먹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는 이유와 의미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을 먹는 것은 주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 일치는 성체를 먹기만 하면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자신의 삶으로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v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라는 주님의 말씀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를 행하여라.”라는 말씀은, 성체성사를 거행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삶 안에서’ 성체성사의 정신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사랑 실천 없이 주님의 몸을 먹는 것은 주님의 몸에 죄를 짓는 일입니다.>
3)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삶’이고,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성체와 성혈이 주님의 몸과 피라는 것을 배워서 아는 것과 그 교리를 진리로 믿는 것은 신앙의 시작 단계일 뿐입니다. 신앙인은 믿는다고 생각하는 단계에서 멈추지 않고, ‘믿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체성사 교리를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삶과 성체성사를 일치시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성체성사의 정신은 사랑과 희생입니다. 사랑과 희생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설명 자체는 사랑도 아니고 희생도 아닙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6-18)
4) 성체성사를 제정하실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곧 닥칠 것이라고 예고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에서의 잔치를 예언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된 후에 그 나라에서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잔치가 열리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잔치를 언급하신 것은, 그날이 반드시 온다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지상에서는 한 번도 맛보지 않은 포도주를 뜻하는 말로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은 포도주인데, 여기서는 파스카 음식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라는 말씀은, “포도주를 다시 마실 틈이 없다.”라는 뜻이고, 이 말씀은 당신의 죽음이 곧 닥친다는 것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을 다시 정리하면, 수난과 죽음이 곧 닥칠 것이기 때문에 또다시 파스카 음식을 먹을 틈도 없지만, 머지않아서 하느님 나라 잔치가 열릴 것이고, 그 잔치 음식을 먹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지상에서의 성체성사와 하느님 나라의 잔치가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지상에서의 성체성사는 하느님 나라 잔치의 시작이고, 하느님 나라 잔치는 성체성사의 완성”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 잔치에 미리 참여하게 되고, 그 잔치 음식을 미리 맛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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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황제펭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암컷이 알을 낳으면 수컷은 3달 동안 남극의 눈보라를 맞으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알이 부화될 때까지 품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암컷은 바다에 나가서 새끼를 위해 먹이를 잡으러 갑니다. 본능이라고 말하기에는 새끼를 위한 수컷의 사랑이 눈물겨웠습니다. 암컷이 돌아오면 수컷은 이제 먹이를 잡으러 바다로 나갑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면에서 황제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카르디널 피시(Cardinal fish)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 물고기는 암컷이 낳은 알을 입에 넣어서 부화시킨다고 합니다. 알이 부화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고 합니다. 수컷의 입안에 있는 알은 안전하게 부활 할 수 있습니다. 본능이라고 말하기에는 새끼를 위한 수컷의 사랑이 놀라웠습니다. 알이 모두 부화하면 비로소 수컷은 먹이를 먹을 수 있습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면에서 추기경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가족을 위해서라면 장기를 기증하고, 목숨까지 바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능에 충실한 황제펭귄도, 카르디널 피시도 그렇게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타인을 위해서 희생하고, 목숨까지 바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만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최귀동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본인도 힘들게 구걸하는 가운데 더 어려운 할아버지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오웅진 신부님은 지금의 꽃동네를 일구었습니다. 걸인이었던 할아버지의 정성과 사랑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나병환자들을 위해서 맞춤 신발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학생들을 위해서 밴드를 만들어 음악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과로로 짧은 사제생활을 마치고 하느님 품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을 따르던 학생들은 의사가 되어서 신부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더 많은 젊은이들의 열정과 희생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사건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흐름을 바로 잡기 위해서 였습니다. 세상의 흐름이 강한 곳에서 약한 곳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긴 곳에서 짧은 곳으로 흘러간다면 세상은 공평해지고 아름다워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상은 예수님이 꿈꾸던 ‘하느님 나라’입니다. 사자와 어린아이가 함께 있는 나라,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있는 나라, 사막에도 샘이 흘러 꽃이 피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공부해서 성공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출세해서 자기만 잘 살고, 잘 먹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출세해서 세상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혼자서 5000명의 것을 빼앗아 먹을 수도 있지만, 혼자서 5000명을 먹여 살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혼자서 5000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 오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드리시면서 어떻게 해야 공평한 세상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체성사의 가장 큰 의미는 ‘내어줌’입니다. 사제는 미사 때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재현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것을 받아먹으십시오. 이는 여러분을 위해서 내어 줄 나의 몸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것을 받아 마시십시오.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입니다. 죄를 사하여 주려고 여러분 모두를 위해서 흘릴 피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십시오.’ 내가 잘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체 성혈 대축일의 진정한 의미는 남을 잘 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도, 예수님께서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것도 모두 우리가 잘 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또한 우리도 이웃을 잘 살게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내면서 예전에 읽었던 시를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꽃입니다.
꽃은 나비에게 주고
꿀은 벌에게 주고
향기는 바람에 날려 보냅니다.
그래도 나는 하나도 잃은 것이 없답니다.
가을이면 더 많은 열매로 태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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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김종원 히지노 신부님]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는 힘>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체성사의 제정은 최후의 만찬 때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이 대축일은 삼위일체 대축일 전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성체 성혈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우리들에게 성사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며, 구분은 되지만 분리되지 않으시는 일치 속에서 한 분으로 계십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는 서로의 사랑 안에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십니다. 그 내어줌은 너무나도 풍성하기에 당신 안에만 갇혀있지 않으시고, 흘러넘쳐 우리 인간 역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하나뿐인 외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시고, 성자 하느님은 성체성사를 통하여 당신께서 취하셨던 육을 우리에게 내어주십니다. 이 내어줌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순례 중인 우리 하느님 백성에게 이 시대는 두려움을 주고 있고, 가톨릭교회에도 영향을 주고 있으며,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나약함과 자신의 악습 그리고 세상의 부조리와 악습, 코로나 팬데믹을 대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누구에게나 고통과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게다가 많은 이들이 자신의 아픔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기에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끌어안는다는 것은 더욱 큰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그렇기에 어떤 분들은 제자들이 도망쳐 버렸듯이 도망치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베드로 사도처럼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또 어떤 분들은 유다처럼 신앙을 버리기도 합니다.
사랑은 나와 네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함께할 때, 서로 믿어주고 이해해주며, 상대를 지지하고 배려해 줍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헌신하며 희생하고, 소통과 채워짐이 이루어집니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에서 백성들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 용기는 백 배 천 배 큰 용기로 배가 되어 나타날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는 힘.”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그 힘은 사랑이며, 이 사랑은 삼위일체 하느님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안에서 가장 완전하게 이루어집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복음 6장 5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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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장현준 에프렘 신부님]
<예수님의 살과 피로 일치를 이루는 삶>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는 얘기를 해야겠지요. 교우들이 저에게 하는 인사 중에 제일 많이 하는 인사가 “신부님! 식사하셨어요?”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전화를 하시거나, 얼굴이 마주치면 가장 먼저 “신부 밥 먹었어?”합니다.
먹는 것은 중요하죠. 그렇기에 다들 잘 먹고 잘 살려고 노력합니다. 안전한 먹거리를 찾아서 먹어야죠. 그래서 다들 유기농 생산품을 애용합니다. 저도 나섬장터에서 먹거리를 많이 구입합니다. 믿을 수 있거든요. 좋은 마음으로 생산한 농부의 좋은 식품을 먹어야 몸도 건강해지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오늘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내가 잘 먹고 잘 살려면 유기농 생산품도 먹고 예수님도 먹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산다고 하니까요.
우리는 매일 미사를 합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에게는 미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자신과 목숨을 바치신 사건을 기념하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미사 때마다 성체를 모십니다. 성체를 모시는 것, 즉 참된 양식을 먹고 참된 음료를 마시는 것은 당신과 우리 사이에 떼어 놓을 수 없는 일치를 이루게 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6.58)라고 하시니 예수님을 먹고 산다는 것은 예수님과 완벽한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제1독서의 신명기에서는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기 8,3)고 하십니다.
그렇지요! 사람이 어찌 우리 입에 들어오는 빵만으로 살 수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도 곱씹으며 살아야지요. 신명기의 저자도 빵만이 아니라 말씀도 먹어야 주님과 일치를 이룬다고 하지요.
예수님과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주님의 몸과 마음으로 산다는 것이지요. 나의 생각과 행동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무장되어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신앙인답게 산다는 것이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표현되겠지요. 그러나 오늘은 한 가지만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사는 이 땅, 지구를 살려야 합니다. 환경을 살려야 합니다. 무수히 많은 생태계가 지구에 의존하고 공존하여 삽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 탐욕이 다른 생태계의 영역을 침범하여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예수님과 일치를 이룬다면 우리도 지구를 살려야지요.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가져다 준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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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마르14,22)
오늘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신 날, 곧 예수님께서 미사(Missa)인 '성체성사를 세우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되자,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십니다.
그리고 이 최후만찬 상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십니다.
"받아 먹어라. 내 몸이다."
"받아 마셔라. 내 피다."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현존하는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의 영적 양식으로 내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한 밥이 되십니다.
이 엄청난 은총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화답송)
새 계약의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내어주신 성체와 성혈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 덩어리'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내려 받은 이 극진한 사랑에 대해, 먼저 깊은 감사를 드립시다!
합당한 준비와 자세로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고, 나도 너를 위한 사랑이 됩시다! 나도 예수님처럼 너에게 먹히는 사랑이 됩시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체성사 제정이후 계속해서 거행되어져 오고 있는 '미사'이고, '거룩한 미사에 참여'이며, 나도 지금 여기에서 '먹히는 삶', '내어줌의 삶'인 '성체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권고입니다.
"매일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하여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제대 위에 내려오십니다.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빵과 포도주를 볼 때, 그것이 참되고 살아 있는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것을 보도록 또 굳게 믿도록 합시다."(권고1, '그리스도의 몸', 중에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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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스도의 몸과 피! 아멘!>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며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가거라. 그러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가거라.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스승님께서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하여라. 그러면 그 사람이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층 방을 보여 줄 것이다. 거기에다 차려라.” 제자들이 떠나 도성 안으로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 아멘!>
십자가의 길 바로 앞에서
최후의 만찬이 조촐하게 거행됩니다.
십자가의 처참한 죽음 이전에
주님은 지극히 사랑하시던 제자들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눠주심으로써
기꺼이 기꺼이 죽으십시다.
당신의 살을 아낌없이 내어주시기에
살점 후벼 파는 쇠갈고리 달린 채찍도
사랑이신 주님의 처참한 길을
멈출 수 없습니다.
당신의 피를 남김없이 뿌리시기에
손과 발 꿰뚫는 대못도
옆구리 깊게 찌른 창도
생명이신 주님의 영원한 삶을
앗을 수 없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빵이 살아 계신 주님의 몸이 됩니다.
포두주가 살아 계신 주님의 피가 됩니다.
빵이 주님의 몸으로
포도주가 주님의 피로
왜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릅니다.
믿습니다.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아멘! 아멘!
다만 아멘이라고
답할 수 있을 뿐입니다.
주님은 살과 피로 먹힘으로써 살리시고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삽니다.
주님은 죽으심으로써 영원히 살아계시고
우리는 영원히 살기 위해서 죽어야합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
아멘!
제 살기 위한 게걸스러운 먹어치움이 아니라
벗을 살리기 위한 고결한 먹힘으로
아멘이라고 응답해야 합니다.
가난한 벗들 배불리는 아름다운 나눔으로
억눌린 벗들 일으키는 정의로운 희생으로
버림받은 벗들 품에 안는 따뜻한 함께 함으로
아멘이라고 응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
아멘!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온 몸과 마음으로 정성껏 받아먹고 마시어
또 하나의 성체와 성혈이 되어
미련 없이 아낌없이 먹힐 때
오직 그렇게 먹힐 때에만
아멘은 진정 아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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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의 기억 하나가 떠올려졌습니다. 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매년 봄이 되면 제비가 날아와서 둥지를 쳤습니다. 제비 둥지를 보면서 정말로 신기했습니다. 특히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둥지에서 새끼 제비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작고 예쁜 새끼 제비를 볼 수 있었지요.
현재, 성지에서 제일 큰 나무 꼭대기의 까치둥지를 볼 수 있습니다. 도저히 사람의 손이 다을 수 없는 곳에 만든 까치둥지입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보았던 제비 둥지는 늘 사람이 사는 집 처마 밑에 있었습니다. 당연히 사람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둥지를 만들어야 안전할 것 같은데 제비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습니다. 이런 내용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글쎄 제비는 사람 가까이를 제일 안전한 곳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뱀이나 구렁이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안전한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제비를 다른 동물로부터 보호해 주었으며, 주변이 조금 지저분해지더라도 좋은 새라면서 환영했습니다.
제비의 사람에 대한 믿음을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힘 센 분 밑에 머물러서 보호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바로 주님이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성체성사를 특별히 기념하고, 그 신비를 함께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와 늘 함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단순히 2천 년 전, 잠깐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을 만난 사람들에게만 깊은 감동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살아있는 빵으로 우리 곁에 계시기 위해 성체성사를 세우셨고, 자그마한 성체 안에 내재하시면서 우리가 쉽게 당신을 모실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다가오신 주님이신데, 우리는 그 사랑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스스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한 마음으로 인해서, 마치 예수님을 반대했던 당시의 종교지도자처럼,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동으로는 예수님과 정반대의 길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매번 최고의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사람들과 함께 사는 제비들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으며, 주님 안에서 참 기쁨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성체를 모시면서 이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가슴 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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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을 할 것인가?>
회계사 남편에게 아내가 묻습니다.
“여보, 내가 잘 몰라서 그런데, 인플레이션을 아주 쉽게 좀 설명해 주세요.”
남편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러면 내가 쉽게 설명해 줄게. 예전에 당신 몸매가 36-24-36이었는데 지금은 48-40-48이 되었지? 이렇게 당신의 모든 것이 전보다 커졌는데, 당신의 가치는 옛날보다 떨어졌어. 이게 바로 인플레이션이야.”
어떻습니까? 쉬운 설명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듣기 싫은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쉬운 설명보다는 상처받지 않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많은 이가 상처를 주는 말을 습관적으로 합니다. 문제는 상대방이 이해하리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전혀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데도 말이지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말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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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사랑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이러한 사랑의 보증으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으며 성체성사를 통하여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영적양식으로 주십니다. “성체로 그분께서 오시는 이유는 또 하나의 천국, 우리의 영혼을 기쁨으로 채우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를 위한 사랑의 양식인 성체로 몸과 마음이 풍요로워지길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이행되고 있는 최상의 방식이 성체성사입니다. 성체는 사랑 자체이며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말로서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결코, 잊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성체를 통하여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 가까이에 있기로 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 가까이에 아무것도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성 베드로 알칸다라)
따라서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사실 성체성사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희생하시며 당신의 몸과 피를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 가운데 머무십니다. 그리고 “성체는 우리의 보약입니다.”(성필립보 네리) “영성체는 우리가 매일 겪게 되는 우리의 나약함을 치료하기 위해 먹어야 하는 매일의 빵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우리의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하여 빵을 먹어야 하듯이 우리는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가롤로 보르메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은 빵과 포도주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빵과 포도주가 그분의 몸과 피가 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으시고 우리는 이미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27)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에 ‘아멘’(예, 그렇습니다)이라고 대답하고 그 동의가 진실한 것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체를 단순한 빵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분명히 그분의 살이기 때문입니다. 감각적으로 확신이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맛에 의해 판단하지 말고 그분의‘사랑의 신비’를 의심 없이 믿으십시오.”(성 치릴로)
그리고 “성체를 모시기 전에 잠시 동안 당신이 받아 모시는 성체가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의 양식을 받아 모셔도 효과가 없는 것은 하느님을 직접 모신다는 중대한 사실에 별로 주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파시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따라서 준비된 마음 없이 습관적으로 성체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깊은 믿음을 가지고 모셔야 하겠습니다.
성 안토니오 클라라렛은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맛있는 음식을 제대로 먹기 위해서는 먼저 속을 비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영성체를 통하여 그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이번 기회에 미사참례 회수를 늘리십시오! 왜냐하면 “모든 선행을 한데 모아도 미사 한 번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행은 사람의 행위지만, 미사는 하느님의 役事이기 때문입니다.”(아르스의 비안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미사성제에 참례하러 가기 위하여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천사가 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영원에서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바쁘다는 말은 하지 말고 하루일과 중에 미사참례를 첫 자리에 놓으시기 바랍니다.“ 미사는 지상의 천국입니다”(성녀 막달레나 소피아바라). “미사는 종합영양제입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영세한 지 얼마 되지 않으신 분이었는데 반모임 미사참례를 하셨는데 영성체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정중하게 말씀 드렸습니다. ‘혹 잘못한 것이 있으시면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하십시오. 잔칫집에 오셨으면 기쁘게 음식을 나눠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양식을 나누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신부님, 실은 저희 부부가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더니 담당 선생님께서 ‘밀가루 음식은 절대로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성체를 단순히 밀가루 음식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겠습니까? 설사 큰 은총으로 역사하신다 해도 어찌 하느님의 손길로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성체송가를 보면 “선인 악인 모시지만, 운명만은 서로 달라, 삶과 죽음 갈라진다. 악인 죽고 선인 사니 함께 먹은 사람운명, 다르고도 다르도다.”고 했습니다. 준비된 마음 안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제대로 모시기 바랍니다.
영국의 위대한 총리 토마스 모어는 매일 미사참례를 하였고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수많은 국정의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회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회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난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모심으로써 그 안에 빛과 지혜를 얻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성 요한크리소스토모는 생명의 빵을 먹는 영성체의 기쁨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을 부러워하겠지요? 그리고 눈물로써 그분의 발을 씻겨드렸던 죄 많은 여인과, 그분의 여정에 동행하면서 시중을 들었던 갈릴래아 여인들, 그분과 친밀하게 대화를 할 수 있었던 사도들과 제자들, 그분의 입술로부터 솟아나오는 은총과 구원의 말씀들을 들을 수 있었던 그 당시의 사람들을 부러워하겠지요?
제대 가까이 오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그분을 볼 수 없습니다. 영성체로써 그분을 느낄 수 있으며,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께 하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그분을 여러분 안에 모시고 다닐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사랑을 의미하며, 사랑을 생산한다.”고 토마스 데 아퀴노는 말합니다.
사랑에로 이끄는 구체적 성체의 기적은 이탈리아 란치아노에서 일어난 기적을 많이 얘기합니다. 약 1,200년 전 성 바실리오회 소속의 한 수사신부가 미사를 드리면서 성체성사에 예수님께서 실제로 현존하시는가 의심을 품게 되었는데 그 신부가 막 빵과 포도주의 성 변화를 위한 축성을 마친 순간 빵이 살아있는 살로, 포도주가 살아있는 피로 변하게 된 사건입니다.
12세기가 지난 지금도 살 모양으로 변한 성체는 불그스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오래된 수정 성작 안에 담겨 있는 성혈은 다섯 개의 핏덩이로 되어 있습니다. 1970년과 71년에 기적의 성체와 성혈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조사를 시행하였는데 그 결론은 이 기적의 피는 ‘진짜 피와 진짜 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살은 심장 근육이며 그 살과 피를 보존하기 위하여 화학적인 방부처리를 한 흔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패되지 않고 보존된 것은 절대적으로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합니다. 1973년에 세계보건 기구에 검사결과를 제출하여 다시금 핵 의학등 최첨단 기술이 동원되어 연구했지만 결국은 성체의 기적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신비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음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곳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이 기적의 성체와 대면할 때 믿는 이뿐 아니라 깊은 편견을 갖고 있던 사람도 경외심과 존경을 하게 되는 것은 그분이 살아계심을 말해 준다고 할 것입니다. 성체기적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신비의 보이는 표징입니다. 우리 믿음의 상태를 돌아보라는 권고이기도 합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으라는 부르심입니다. 모두가 성체께 대한 믿음이 더욱 깊어지길 소망합니다.
란치아노 성지 방명록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추기경 시절에 기록한 기도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더욱 더 당신을 믿고, 당신 안에서 희망하고,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오늘 그 기도를 함께 올립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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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지난 주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이었고 오늘 주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그대로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의 절정의 축일입니다. 이런 거룩하신 대축일을 통해 역으로 인간이 얼마나 존엄한 품위의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저절로 나오는 고백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의 고백도 그대로 우리의 심중을 대변합니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
오늘 아침성무일도시 마음에 감동으로 와닿은 참 아름다운 아침기도 후렴과 즈카르야의 노래 후렴도 생각납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렇듯 아름다운 전례로 감동스럽게 표현됩니다.
“당신 백성을 천사들의 음식으로 배불리셨고, 하늘의 빵을 우리들에게 주셨도다. 알렐루야.”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 온 살아있는 빵이로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리라.”
하느님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천사들의 음식이자 하늘의 빵이신 성체성혈을 모시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아름답고 거룩하게 살아가게 될 우리들입니다. 문득 김지하 시인의 '밥'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민중신학자 고故 안병무 박사가 성체성사의 본질을 참 잘 드러냈다고 극찬極讚했던 시입니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언제 읽어도 감동입니다. 바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밥이자 성체성혈입니다. 비단 공동 미사전례는 성당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식당에서의 공동식사로 또 일상에서 사랑의 나눔으로 연장됨을 봅니다. 참으로 하느님 자녀들의 삶은 성체성사화된 사랑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야 비로소 성체성사의 완성이자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예수님이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을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임을 깨닫습니다. 장상 사임후 오랫 동안 양노원에 계신 분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나 휴가 못간다. 낙樂이라곤 미사 하나뿐인 노인들을 두고 어떻게 휴가 갈 수 있겠나? 나 휴가 못간다.”
나이들어 갈수록 남는 낙樂이라곤 미사뿐이 없다는 고백을 자주 듣곤 합니다. 가톨릭 교회도 교회 생활의 원천이며 절정인 성찬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장엄하게 고백합니다.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이다. 교회의 모든 교역이나 활동과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성사들은 성찬례와 연결되어 있고 성찬례를 지향하고 있다. 실제로,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교회의 모든 영적 선이 내포되어 있다. 곧 우리의 파스카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신다.’(가교1324)
자 그렇다면 이런 주님의 사랑에 어떻게 응답하며 살아야 할까요?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의 은혜에 보답하여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을까요? 저는 네 측면에 걸쳐 답을 찾아냈습니다.
첫째,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입니다. 성 베네딕도도 당신 수도승들에게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도 앞세우지 말라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최후만찬시 당신 존재 전체를 사랑으로 내어 주신 주님께 대한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입니다.
참으로 매일 우리의 밥으로 오시는 하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신데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바로 이런 사랑의 표현이 순교요 순교적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최후만찬시 주님은 성체성혈을 나누시며 말씀하십니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받아 마셔라.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세상에 주님과 사랑으로 일치되는 이 미사시간보다 행복한 시간도 없을 것입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근원적 치유의 처방도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은총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전 성체송가 23절도 참 은혜롭습니다.
“참된 음식 착한 목자 주 예수님 저희에게 크신 자비 베푸소서.
저희 먹여 기르시고 생명의 땅 이끄시어 영생 행복 보이소서.”
둘째, 감사입니다.
새 계약의 중재자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감사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감사는 그대로 하느님께 대한 감사도 됩니다. 오늘 제1독서 탈출기에서 모세는 피를 뿌리며 말합니다. “이는 계약의 피다.” 그러나 구약의 의식에는 뭔가 2%가 부족합니다. 제단과 백성에게 뿌리는 피는 다름 아닌 동물의 피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를 능가하는 그리스도의 피, 성혈입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통쾌한 고백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 성혈의 정화 은총은 얼마나 놀라운지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더욱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잘 섬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입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우리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어,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가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구약의 모세를 완전히 능가하면서 보완하는 아무리 감사해도 부족한 새 계약의 중개자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셋째, 찬미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찬미입니다. 물론 하느님 찬미입니다. 찬미의 사랑,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입니다. 찬미의 맛으로 살아가는 찬미의 사람인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예수님 역시 이스라엘의 후손답게 찬미와 감사가 몸에 밴 분이십니다. 참으로 성체성사적 삶은 찬미와 감사의 삶입니다. 바로 우리가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 시편기도와 미사전례기도가 성체성사적 삶을 완성에로 이끌어 줍니다.
오늘 복음중 최후만찬시 분명히 언급되는 두 말마디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에 이어,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의 두 말마디에서 찬미와 감사가 한 셋트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산으로 갔다.’ 복음 말미에서 보는 것처럼 찬미로 시작해서 찬미로 끝나는 최후만찬임을 봅니다.
성무일도시 우리는 ‘주님을 찬미합시다’ 하면, ‘하느님 감사합니다’로 화답합니다. 제 행복기도중 강조되는 바 역시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입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주님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넷째, 희망입니다.
성체성혈의 성체성사야 말로 희망의 성사입니다. 성체성사 성찬례는 어제의 예수님을 되새기는 회상제回想祭요, 오늘의 그리스도를 섬기는 현존제現存祭요, 내일의 주님을 기다리는 희망제希望祭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과거를 새로이하고 현재에 충실하면서 미래의 희망을 북돋아 주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이런 생생한 희망의 은총 선물이,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영원한 청춘의 영혼으로 살게 합니다. 바로 이런 황홀한 미래를 앞당겨 보여 주는 저녁 성무일도 마니피캇 후렴과 성체송가24절도 참 깊고 아름다워 감동을 줍니다.
“오 거룩한 잔치여 예수의 몸은 음식이 되었도다. 수난의 기념, 은총의 충만, 장차 영광의 보증이로다. 알렐루야.”
“전지전능 주 예수님 이 세상에 죽을 인생 저 세상에 들이시어,
하늘 시민 되게 하고 주님 밥상 함께 앉은 상속자로 만드소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 절망이요 허무입니다. 바로 희망의 성사, 사랑의 성사인 성체성사야 말로 절망과 허무에 대한 최고 처방의 명약名藥이자 영약靈藥임을 깨닫습니다.
살만한 세상입니다. 바로 이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성혈의 성체성사 은총 덕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사랑의 사람, 감사의 사람, 찬미의 사람, 희망의 사람이 되어 한결같이 성체성사적 찬미와 감사의 삶에 정진精進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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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에페소기도의 집)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보편교회는 전통적으로 삼위일체 대축일 다음 목요일에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을 지내지만 한국교회에서는 사목적 이유로 주일로 옮겨 지내고 있습니다. 이 대축일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이루어진 성체 성사의 제정과 그 신비를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성체의 의미는 최고의 은혜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함을 말합니다. 성체는 밀떡과 포도주의 외적인 형상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현존합니다. 가시적인 빵과 포도주는 형태에 불과하나 실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까지도 그 형태 안에 현존합니다.
이 성체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힘으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실체로 변화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축성된 빵과 포도주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머물러 계시며 이를 신자들이 받아 모시는 성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는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이며 동시에 은총의 성사입니다.
모든 그리스도 신자 생활의 원천이요 정점인 성체성사 거행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은 대치할 수 없는 중심이며 신앙생활으 활력을 불어 넣는 힘입니다. 초대교회의 중심적 기도는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들은 주일 저녁부터 토요일 까지 자기의 독방에 머물며, 토요일과 주일에만 성찬례에 참석합니다. 일주일간의 영적 투쟁에서 견딜 수 있게 그들을 지탱시켜주는 것은 주님의 살과 피입니다. 성인들 그리고 은수자들, 그리고 선교사들의 삶은 성체가 신앙의 핵심적 삶임을 그들의 삶으로 증거하며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 비안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선업이란 선업을 한데에 다 모아도 미사 성제만 못합니다. 그 선업은 사람이 한 것이고 미사는 하느님이 직접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순교도 비교가 안 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이지만, 미사는 하느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사람에게 주시는 희생입니다. 성체가 아니고서는 이 세상에 행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성체와 성혈이 놓여지는 제대와 성체가 보존되어 있는 감실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성체성사는 모든 성사의 중심이며 우리 신앙의 근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체를 영할 때 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날까지 성체 안에 계심을 확신하고 베풀어 주신 그 크신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의 영으로 인도된 사람만이 성체 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합당하게 만나뵈올 수 있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성체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수 있기 위하여 필요한 양식이며 죽음의 해독제이고 불멸의 약’이라 말합니다. 성체는 과거에 당한 상처를 치유해 주고 다가올 해악에 대해 무장시켜 줍니다. 성체는 악을 무찌를 수 있는 힘을 줄 뿐 아니라, 우리의 양식이며 생명의 원천입니다.
우리 몸에 성체를 모신 감실을 지니고 다니며 언제나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되새기는 신앙의 삶을 살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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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주님에게서 받은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간직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마르 14,14)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며 이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내 방" 즉 당신의 방을 찾고 계십니다. 파스카 예식을 치르면서 함께 음식을 나눌 방이 필요하신 건데 왜 굳이 "내 방"이라고 하셨을까요?
"내 방"
이는 당신이 지금 '필요로 하는 방'을 의미하고 또 '그분께 속한 방'이란 의미도 포함합니다. 머리 둘 것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에루살렘 도성 안에 당신 방을 소유하셨을 리는 없을 터이니, 이 "방"은 그저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을 겁니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마르 14,22)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예수님께서 파스카 예식 중 쪼개어 나눠주는 빵이 당신의 몸이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그 긴 세월 동안 내내 행하였던 의식이고, 빵 나눔인데, 당신의 영원하고 결정적인 파스카 제사를 준비하시는 이 때 그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신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시나이 산에서 주님과 백성이 계약을 맺는 장면입니다.
"모세는 피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뿌리고 말하였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탈출 24,8)
피를 뿌리는 예식은 모세가 주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법규를 일러주고, 이 모두를 실행하겠다고 백성이 응답한 뒤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기 직전, 주님의 백성이 문지방과 상인방에 바른 어린 양의 피는 그들을 대살육의 재앙에서 보호해 주었지요.(탈출 12,23 참조) "피"는 함부로 흘리거나 먹어서는 안 되는 생명 그 자체로서, 이제부터 주님과 백성을 마치 혈연관계처럼 결속시켜 주는 동시에 주님의 소유가 된 백성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이루어진 새 계약을 이야기합니다.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히브 9,14)
성자의 희생 제사로 우리에게 더 이상 짐승을 잡고 그 피를 뿌리는 예식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봉헌하는 미사성제야말로 우리 구원을 위해 새롭게 당신 자신을 바치시는 십자가의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를 마시는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마르 14,25)
이스라엘이 짐승의 피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예수님의 피로 완성되었고, 이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마실 새 포도주를 기다립니다. 새 포도주는 성령, 사랑, 그리고 영원한 일치입니다. 더 이상의 고통도 눈물도 없을 그곳에서 우리의 죄를 씻어줄 피는 뜨겁고 열렬한 사랑의 합일로 이어져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해줄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리라."(영성체송)
오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을 전부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념하는 축제의 날입니다. 우리에게 내주시는 그분의 몸과 피는 이 세상에서 그분의 현존을 보증하는 실체입니다. 그리고 이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설령 아무리 부족하고 나약한 죄인이어도 주님께 머물러 차츰 주님으로 변모되어 갑니다. 우리 자신이 파스카 예식이 이루어지는 "내 방" 곧 '주님의 방'이 되어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성체의 삶을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의 몸과 피를 모시고 주님 안에 머물러 사랑을 누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코로나19의 조심스런 상황에서 첫영성체를 하는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을 축복하면서, 그들로 인해 우리 가정과 교회, 세상이 더욱 정화되고 성화되길 기도합니다. 아울러 우리 주변에 있는, 영육으로 굶주린 이들에게 소박한 나눔으로 성체의 삶을 완성하는 오늘 되시면 좋겠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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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hMhuyAlawWo&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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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마르 14, 22)
성체와
성혈 앞에
무릎을 꿇는다.
다시 하느님
사랑으로
돌아가는
은총의
시간이다.
하느님께서
매일
밥상을
차려주신다.
살리시는
하느님이시다.
살게하시는
하느님이시다.
따뜻한
사랑의
식탁이다.
빵과 밥으로
포도주와
국으로
오시는
하느님이시다.
서로에게
밥이 되길
바라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식탁에
우리가 있다.
끊임없이
주시는
가슴 저린
사랑이시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하느님 사랑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
생명은
하느님
사랑이다.
사랑으로
일상이 열린다.
사랑의 식탁은
우리의
일상 안에
차려진다.
지극한 사랑의
선물이다.
일상 안에
나란히 있다.
하느님이
없는 삶
사랑이
빠져버린 삶은
가짜이다.
다시 삶을
살리시기 위해
성체와 성혈이
되신다.
당신의
생명을
주신다.
생명은
거룩해야 한다.
하느님
생명을
오늘도
받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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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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