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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철학의 선구자 쇠렌 키르케고르 "불안과 절망은 구원으로 가는 지름길"
김형철 교수의 고전에서 배우는 CEO 리더십
많은 철학자들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라고 우리에게 말할 때 그와 다르게 생각하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바로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입니다. 그는 부유한 상인의 집에서 태어납니다. 아버지가 한때 가난하게 목동으로 살아가던 시절에 신을 저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키르케고르는 충격에 빠집니다. 그 뒤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살게 됩니다. 천성적으로 우울하고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으로 살아갑니다. 베를린에서 프리드리히 셸링의 철학 강의를 들었고 그 후 프리드리히 헤겔의 변증법 철학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게 됩니다. 무엇 하나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것이 없고 오히려 자신과의 관계에서 불만과 고민, 절망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양자 간에는 현실에 대한 인식에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우울증 환자가 현실을 훨씬 더 정확하게 인식하는 반면 정상인은 터무니없는 낙관적 희망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키르케고르는 다른 식으로 말합니다. 절망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으로서 ‘실존’한다고 말입니다. 키르케고르의 실존은 세 가지 단계를 거치면서 심화돼 갑니다. 이 세상을 탐욕의 눈으로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향락적인 것에 다 써버립니다.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스포츠카를 타고 궁궐 같은 집에서 살고 환상적인 곳으로 여행을 다니고 희귀한 물건들을 수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던졌던 그 심오한 질문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답하려고 하는 사람은 이 단계에 들어올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타인을 배려하고 자신에게 엄격한 요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윤리적 실존주의자입니다.
“내가 공장을 폐업하면 직원 중 일부는 다른 곳에 취직할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머지 인생을 평생 실직의 상태로 살아가야 할 사람도 있다. 나는 그들을 그런 상태로 내버려 둘 수 없다.”
양치기와 눈이 마주친 미군 특공대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 부조리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 한 미군 특공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적진 깊숙이 잡혀 있는 아군 포로를 구출하라는 미션이 떨어집니다. 불안과 절망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절대적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절망은 우리를 영원한 것으로 이끌어 주는 힘의 원동력이 됩니다.
[허연의 명저산책] 쇠렌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실존주의 철학 창시자가 쓴불안과 절망에 관한 보고서
덴마크 코펜하겐대 신학과에서 논문을 준비하던 쇠렌 키르케고르는 어느 날 아홉 살 연하인 연인 레기네에게 이별을 고한다. 이별의 이유는 "그대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이 말은 유행가 가사에 종종 등장할 정도로 흔한 말이 되어버렸지만 키르케고르에게 이 말은 `실존`과 동일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다.
"절망은 죽음과 싸우면서도 죽을 수 없는, 죽을 병에 사로잡힌 자의 상태와 비슷하다. 죽음이 희망이 될 정도로 위험이 클 때, 그 죽는다는 희망조차 없는 상태, 그것이 절망이다."
/ MK
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키에르케고르(Soren Aabye Kierkegaard, 1813.5.5∼1855.11.11)
덴마크의 철학자. 코펜하겐 출생. 아버지는 비천한 신분에서 입신한 모직물 상인으로 경건한 그리스도교인이었고, 어머니는 그의 하녀에서 후처가 된 여인이었다.
7형제의 막내로,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체질이었으나, 비범한 정신적 재능은 특출하였으며 이것이 특이한 교육으로 배양되어 풍부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변중(辨證)의 재능이 되었다.
소년시절부터 아버지에게 그리스도교의 엄한 수련을 받았고, 청년시절에는 코펜하겐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연구하여 1841년에 논문 《이로니의 개념에 대하여》로 학위를 받았다. 그 동안에, 1837년경 그가 스스로 ‘대지진(大地震)’이라고 부른 심각한 체험을 하였다. 그 내용은 아버지가 소년시절에 유틀란트의 광야에서 너무나 허기지고 추운 나머지 하나님을 저주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과, 바로 자기자신이 결혼 전에 아이를 밴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것 등을 안 사실로 죄의식이 심화되었고, 인생을 보는 눈과 그리스도교를 보는 눈에 근본적인 변혁이 생겼다.
한편, 37년 당시 14세의 소녀 레기네 올센을 알게 되자, 곧 사랑의 포로가 되어 약혼까지 하였으나, 애정의 상극과 내면의 죄의식 때문에 41년 가을에 약혼을 파기하였다. 이른바 레기네 사건이며, 이 때에 체험한 정신적인 갈등이 훗날 미적 저작의 주제가 되었다. 그 후 한때 베를린에 나가 당시 명성을 떨치던 철학자 F.W.셸링의 강의를 듣기도 하고, 《돈 죠반니》 《파우스트》 등 많은 오페라를 관람하기도 하다가 이듬해인 42년에 귀국하여 저술을 시작하였다. 그의 활동은 활발하여 43~46년의 짧은 기간에 《이것이냐 저것이냐:Enten-Eller》(43) 《반복:Gjentagelsen》(43) 《공포와 전율:Frygt og Baeven》(43) 《불안의 개념:Begrebet Angest》(44)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Stadier paa Livets vei》(45) 등과 같은 이른바 미적 저작과 《철학적 단편:Philosophiske Smuler》(44) 《철학적 단편을 위한 결말의 비학문적 후서(非學問的 後書):Afsulttende uvidenskabelig Efterskrift til de Philosophiske Smuler》(46) 등의 철학적 저작을 모두 익명으로 출판하였고,이 밖에도 그리스도교에 관한 많은 교화적인 강화(講話)를 발표하였다.
그 후 저술에 싫증이 난 그는 시골의 목사가 되어 조용한 생활을 보내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이 때에 풍자신문 《코르사르》에 그의 작품과 인물에 대하여 오해에 찬 비평이 실려, 그것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논쟁하는 사이에, 또 다시 그리스도교도로서의 새로운 정신활동과 저술을 향한 의욕이 용솟음쳤다. 그는 신문의 무책임한 비평과 세간의 비웃음에도 굴복하지 않고, 한편에서는 대중의 비자주성과 위선적 신앙을 엄하게 비판하였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단독자(單獨者)로서의 신(神)을 탐구하는 종교적 실존의 존재방식을 《죽음에 이르는 병:Sygdommen ti1 D?en》(49) 《그리스도교의 수련:Indoevelse i Christendom》(50) 가운데에서 추구하였다. 그는 기성 그리스도교와 교회까지도 비판하였으며 《순간》 등의 팸플릿을 통한 공격은 매우 격렬하였다. 그런 와중인 55년 10월 갑자기 노상에서 졸도한 후 다음달 병원에서 죽었다.
G.W.F.헤겔의 범논리주의를 배제하여 불안과 절망 속에 개인의 주체적 진리를 탐구한 그의 사상은 20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국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1909년부터 독일에서 C.슈램프가 키르케고르의 번역집을 내어 당시 신진이었던 P.바르트, J.H.하이데거, K.야스퍼스 등의 변증법 신학자와 실존주의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그로부터 그의 명성은 현대 그리스도교 사상과 실존사상의 선구자로서 세계에 알려졌다. 1995년 기독교한국루터회가 뽑은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
키에르케고르- 그리스도교적인 혁명 마르크스는 사회의 전복(轉覆)에 뜻을 두었다면 키에르케고르는 그리스도교를 전복하고자 하였다. 우리는 이 둘 사이의 평행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 둘은 헤겔의 사상과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헤겔이 시민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 그리스도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국가와 교회라고 하는 대립적인 것들을 매개(媒介)하고 화해시키고자 한 것에 대해서는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들 보다 더 깊은 것을 찾아내고자 하였는데, 그에 대한 노력이 사회나 그리스도교로 나타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모든 일들에 있어서 대립들과 일회적인 것, 유일한 것 및 역설(逆說)만 고집하기에 마르크스보다 좀 더 심하게 한 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는 마르크스의 계급없는 사회에도 반대한다. 이런 그의 철학은 프로테스탄트의 변증법적인 신학(dialektische Theologie)과 실존철학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냐-저것이냐』, 『두려움과 떨림, 변증법적인 서정시』, 『불안의 개념』, 『철학적인 단편』, 『죽음에 이르는 병, 신앙심을 고취하고 각성시키기 위한 그리스도교적-심리학적인 발전』, 『그리스도교에 있어서의 단련』.
“나에게 원래부터 모자라는 것은, 인식이 하나하나의 행위를 앞서가야 할 경우를 이해하는 것과, 신이 진정으로 내가 행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 말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요, 나에게 있어서는 진리란, 내가 그것을 위해 살고 죽을, 그런 이념을 발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객관적인 진리를 아는 것, 철학사에 통달하는 것, 국가론을 논하는 것, 세계를 구상하는 것 따위는 의미 있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이 ‘그 안에 사는 것’이 아니고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 생각되면 더욱 버려야 할 것들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진리를 인정하고 그 속에 자신이 있는 것이다.
“나에게 없는 것은 완전한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의 사상의 발전을 그 무엇에 바탕지어줄 수 있는 그런 단순한 인식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인간적인 삶은 나의 실존의 가장 깊은 뿌리에 연결되어 있으며, 이것을 통해 나는 소위 신적인 것 안으로 성장해 들어갔다. 비록 온 세계가 멸망할지라도 나는 이 신적인 것에 매달려 있을 것이다.”
이런 근본태도는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일련의 개별적인 개념들 안에 잘 드러난다.
“이제 나는 눈초리를 조용히 내 자신에게 매달아두고, 내면적으로 행위하기 시작하려고 노력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만, 마치 어린이가 의식적으로 행하는 자기의 첫 번째 행위를 ‘나’라고 일컫는 것처럼, 보다 깊은 뜻으로 나를 ‘나’라고 일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이러한 내면적인 행위, 즉 이런 신적인 측면이지, 인식의 양은 아니다. 왜냐하면 물론 인식은 그 뒤에 잇따를 것이요, 그때에는 인식이 서로 늘어서서, 체계도 없고, 또 모든 반지름들이 모이는 중심이 없는 우연한 집합체나, 또는 하나하나의 것들이 이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나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이런 중심을 찾아 헤맸다.”
“절대적인 대립을 일치시킨다고 하는, 보다 높은 통일에 관한 말을 하는 것은, 윤리학을 암살하려는 형이상학적인 시도다.”
체계보다는 시간을, 개념보다는 행동을 중히 여겼던 키에르케고르에게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독자적인 자기활동인 ‘나’의 현실이었다. 그의 실존적인 ‘나’는 언제나 움직이고 있고, 언제나 완결(完結)되지 않은 것 임에 틀림없다. 그는 보편적인 것보다는 개별적인 것(das Einzelne)과 개인(der Einzelne)을 더 높은 곳에 두었다.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대립들의 화해는 우선 그 대립들이 각각 실제적으로 존재하였음을 전제로 해야 한다. 보다 높은 개념으로 지양(Aufhebung)된다는 것은 사고가 할 일에 지나지 않으며, 현실 자체는 개별적인 것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인데, 이 개별적인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현실적인 것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에 반대하여, 보편자는 추상적인 것이며, 사고가 할 일에 지나지 않으나, 개별자야말로 참된 존재자이며 결정적인 것이라고 선언했던 것처럼, 키에르케고르도 헤겔에 반대한다. 그래서 그는 헤겔의 내면화(Er-innerung)와 깊이 생각함(Mediation)을 ‘되풀이’라는 자기의 개념으로 뒤바꿔 놓는다.
헤겔의 변증법에 따르면, 삶은 여러 대립들이 그보다 더 높은 종합(Synthese)에로 ‘내면화’되는 과정을 통해 전진(前進)한다. 대립들은 모든 길을 제시해주는 소위 개념의 활주로(滑走路) 안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따라서 모든 결단, 모든 행위와 책음을 제거하고, ‘나’를 전체의 과정에 있어서 단순 한 가지의 계기(Moment)로 끌어내린다. 반대로 키에르케고르는 ‘나’가 일반적인 활주로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고, 스스로 결단 내리기를 원한다. ‘나’는 존재하고 있는 것을 알고, 또 스스로를 내면화(기억)한다. 그러나 ‘나’가 자기의 앎을 어떻게 이용하는가 하는 것은, 언제나 자립적으로 실존하고 있는 ‘나’의 고유한 행위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되풀이’라고 한다. 내면화는 수동(受動)적인 것이며, 되풀이는 능동적인 것이다.
“개인의 삶의 역사는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에로 옮겨가는 데서 전진한다. 이 하나하나의 상태는 비약에 의해서 정해진다.”
이런 일은 불안과 결합되어 있다.
“하나하나의 상태에는 모두 가능성이 현존해 있고, 그러한 한 불안도 있다.” “불안은 앞질러 간다. 불안은 결과가 생기기 전에 그 결과를 발견한다. 이런 일은 마치 우리들이 폭풍우가 다가오는 것을 저절로 느끼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런 배후에는 자유가 버티고 있는데, 이 자유는 ‘무한한 것이며, 무(nichts)에서 생겨난다’. 자유와 무에 바탕하고 있는 불안은, 바로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에 있어서는 실존범주(Existentail)이며, 그에 의해서 알려지고, 또 그 자신이 개인적으로 살아왔던 삶의 전형(典刑)이기도 하다. 이런 삶은 세계와 신에 대한 그의 태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나는 감각적인 길(?sthetisch, 미학적이라고도 번역됨), 또 다른 하나는 윤리적인 길, 그리고 종교적인 길이다. 우선, 감각적인 것을 순수 활동으로 아무것도 행함이 없이 그저 명상하는 것(Beschauung)이다. 결단에 있어서 좀 더 자유로운 선택이 이루어지는 길은 윤리적인 길로, 특히 ‘나’와 ‘나’의 독자적인 가능성들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인간은 여기에서 이미 자기가 혼자(獨斷)라는 것을 알고, 불안에 마주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모든 의무들은 가장 개인적인 의무들이고, 이런 것으로서 책임져야 하고 결단 내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궁극적인 내면성에 이르는 길이 있다. 왜냐하면, 종교적인 신, 절대적으로 영원한 자를 현존재(Dasein, 인간 존재)의 생성 속에서 붙들려고 애쓴다. 이런 일은 오직 개념이 아닌,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영원한 신은 이 시간적인 세계에 비하면 완전히 다른 것이며, 그저 역설(Paradox)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의 내용이 역설적이면 역설적일수록, 신앙은 그만큼 더 신앙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것을 그의 아들 이삭을 희생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받았을 때 아브라함의 정신을 분석하는 데서 특별히 날카롭게 드러내 보여준다. 하느님의 신앙은 순종하는 행위다. 이 순종은 인간적인 것은 모두 무시하라고 요구한다. 인간은 완전히 자기 자신의 책임을 져야 하고, 결단의 어려움도 홀로 감당해내야 한다. 역설이란 그저 생각하기 어려운 그런 것일 뿐만아니라, 이해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절망의 상태에 떨어지면서도 인간이 이럴 때 신앙을 지킨다면 최고의 확증을 보여주는 셈이 된다. 개별자는 좌절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세계에서 풀려나며 동시에 하느님에게로 이르게 된다.
“동일한 이 순간에 인간이 신을 갖게 되는 것은, 객관적인 관찰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면성의 무한한 정열에 의해서다.” “이 때 우리는 객관적으로는 불확실성밖에 갖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이 불확실성이 내면성의 무한한 정열을 긴장시킨다. 그리고 진리는 바로 무한성의 진리를 가지고, 객관적으로 불확실 한 것을 선택하는 감행(敢行)이다.”
아무도 이런 것을 개인으로부터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종교적으로는 민중이 없고, 개인만 있다. 왜냐하면 종교적인 것은 진지하고, 진지함이란 개별자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에스프레소'에서 만나는 철학자 스물일곱번째 - "쇠렌 키에르케고르"
"인간에 대한 물음에 집중하면서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적 기본 신념을 위해 중요한 결과들이 나왔다. 자주 인용되고, 거의 그만큼이나 자주 오해되는 다음의 명제가 그 가운데 하나이다.
"주관성이 참이다."
이것은 모든 것은 오로지 주관적이다. 모든 것은 인간에만 관계한다. 객관적인 참은 없다 등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널리 퍼져있던 상대주의에 어울리는 태도인데, 키에르케고르는 상대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거듭해서 주관성이 참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무엇인가가 인간에게 참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이 이것을 완전한 정열을 지니고 자신의 개인적 참으로 파악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참이 실존을 건드리지 않고, 실존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참을 얻을 것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말이다."
- <철학의 에스프레소, 빌헤름 바이셰델 지음> 25. 신의 첩자 혹은 키에르케고르 中에서
쇠렌 키에르케고르 쇠렌 오뷔에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년 5월 5일~1855년 11월 11일)는 19세기 덴마크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다. 그는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의 관념론과 당시 덴마크 루터교회의 무의미한 형식주의에 반대하였다. 그의 작품 중 많은 수가 신앙의 본질, 기독교 교회의 제도, 기독교 윤리와 신학, 그리고 삶에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개인이 직면하게 되는 감정과 감각 같은 종교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때문에 키에르케고르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에 속하는 사르트르나 니체와 달리 ‘기독교 실존주의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의 초기 저작들은 다양한 필명으로 기록되었으며, 그 이름들은 복잡한 대화에서 그들 각자가 지니는 특유의 관점을 드러낸다. 그는 많은 작품을 익명으로 남겼으며, 그가 익명으로 쓴 작품을 비판하는 또 다른 익명의 작품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키에르케고르는 독자에게 의미를 찾아야 하는 과제를 남겼다. 그것은 “과제란 어려워야만 하고, 오직 어려움만이 고상한 마음에 영감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그 뒤에 많은 사람은 키에르케고르가 실존주의자, 신정통주의자, 포스트모더니스트, 휴머니즘적인 심리학을 한 인본주의자, 개인주의자 등등이었다고 해석한다. 키에르케고르가 철학과 신학, 심리학 그리고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었기 때문에, 그는 현대 사상에서 매우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로 여겨졌다.
아버지 미카엘 페데르센 키에르케고르(Michael Pedersen Kierkegaard)는 우울했고, 걱정이 많았으며, 종교심이 깊었고,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다. 미카엘은 자신이 하느님의 진노를 샀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는 자기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살다간 나이인 33세를 넘기지 못하리라고 믿었다. 그는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믿었는데, 예를 들면 자신이 어렸을 때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일컫고 그 이름을 저주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혼외정사로 아내를 임신시킨 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일곱 자녀 중 상당수가 어린 나이에 죽었지만, 자녀 중 두 명이 33세를 넘어서 생존했을 때 그의 믿음은 틀렸음이 증명되었다. 그 나이를 넘긴 두 사람은, 쇠렌과 쇠렌의 몇 살 위의 형인 페테르 크리스티안(Peter Christian Kierkegaard)이었다. 페테르는 신학자로 정부에서도 활동했으며, 루터교 주교를 지냈다.
어린 시절부터 이러한 죄와 아버지로부터 자신에 이르는 죄와의 관계를 보아 왔기 때문에 키에르케고르는 여러 작품에 그 경험을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는 때때로 종교적인 우울증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키에르케고르와의 관계는 상당히 가까운 사이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아버지와 함께 놀면서 상상력을 키워 나갔다.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는 82세의 나이로 1838년 8월 9일에 사망하였다. 그는 죽기 전에, 쇠렌 키에르케고르에게 목사가 될 것이냐고 물었다. 쇠렌은 아버지의 종교적인 경험과 삶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아버지의 바람에 충실히 따라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 이틀이 지나고, 8월 11일 키에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 나의 아버지는 수요일에 돌아가셨다. 나는 정말로 그가 몇 해라도 좀 더 오래 살아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리고 나는 그의 죽음이 그가 나를 사랑해서 나를 위해 바치는 최후의 희생제사인 듯이 지켜보았다. … 만약 가능하다면, 그는 내가 조용히 무엇인가로 변화하게 하기 위해서 나를 위해 죽었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모든 것을 물려받았고, 나는 그의 모든 것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합쳐진 존재이고, 나는 그를 쏙 빼닮아 약간 변형된 그의 초상화처럼 보인다. … 나에게 소원이 하나 있다면, 내가 신중하게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그의 기억을 안전하게 숨겨서 보호하는 일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시민 윤리 학교에 다녔다. 그곳에서 라틴어와 역사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1830년 그는 코펜하겐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지만 철학과 문학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곳에서 키에르케고르는 논문 〈아이러니의 개념 - 소크라테스를 염두에 두고〉를 썼다. 이 논문은 대학의 심사 교수들이 주목할 만큼 잘 만들어졌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너무 길고, 철학적인 논문치고는 문학적인 성격이 강했다. 키에르케고르는 1841년 10월 20일 철학 박사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그의 가족은 대략 31,000 덴마크 리그스달러(Danish rigsdaler) 정도의 유산을 상속했고, 그것은 키에르케고르가 교육을 받고 생계를 유지하며 그의 여러 초기 저서를 출판하는 데 밑천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그의 작업에 주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간주되는, 키에르케고르 생애에서 또 다른 중요한 장면은, 레기네 올젠과의 파혼이다. 키에르케고르는 5월 8일에 레기네를 만났고, 즉각적으로 그녀의 매력에 이끌렸는데, 그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일기장에 올젠을 향한 사랑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 그대, 가슴 한복판에 있는 나의 요새에 깊숙이 숨겨둔 내 마음을 장악한 주권자, 내 생각의 충만함, 그곳 … 알 수 없는 신성! 오, 내가 시인의 이야기를 믿을 수 있을까, 누군가 처음 사랑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그는 그녀를 오래 전에 본 적이 있었다고 상상하리라, 모든 기억과 같은 모든 사랑은 기억이다, 그 사랑은 한 사람에게 그 자체로 충분히 예언들과 같은 힘을 지닌다. … 그대는 나에게 그대와 같은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내가 모든 소녀의 아름다움을 소유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나는 나의 텅 빈 영혼을 채울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온 세계를 떠돌아다녀야만 했다. 내 존재 전체가 지니고 있는 깊은 신비가 가리키는, 그곳을 찾아 다녔다. 그런데 그다음 순간에 그대가 나에게로 왔다. 나의 영혼은 가득 찼고, 그것은 너무도 강력해서 나는 내 자신을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켰고, 나는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느낀다. ”
1840년 9월 8일 키에르케고르는 정식으로 레기네에게 청혼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곧 결혼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고 우울해했다. 그가 청혼한 지 1년이 가기도 전에, 1841년 8월 11일 파혼했다. 일기장에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이 지닌 “우울함”이 결혼에 대해서 그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고 믿는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그가 파혼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두 사람이 깊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하며, 아마도 그 사랑은 그녀가 요한 프레데릭 슐레겔(Johan Frederik Schlegel)과 결혼한 후에도 지속되었을 것이다. 슐레겔은 뛰어난 공무원이었다. 그 후 평생 두 사람이 서로 만날 수 있었던 공간은, 코펜하겐의 거리로 제한되었다. 몇 년이 지나고 키에르케고르는 레기네의 남편에게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슐레겔은 거절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슐레겔 부부는 코펜하겐을 떠나게 되었다. 슐레겔이 덴마크령 서인도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레기네가 덴마크로 돌아왔을 때, 키에르케고르는 사망한 후였다. 레기네 슐레겔은 1904년까지 살았으며, 죽은 후에 코펜하겐의 아시스텐즈 묘지에 묻힌 키에르케고르 근처에 묻혔다.
키에르케고르가 정치·여성 및 유년 시절의 오락과 대학 시절에 대한 글을 몇 편 썼음에도 불구하고, 키에르케고르의 첫 번째 탁월한 작품을 1841년에 출간된 대학 논문 〈아이러니의 개념-소크라테스를 염두에 두고〉 또는 1843년에 출간된 《이것이냐, 저것이냐》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앞 책을 선택한 입장의 학자는 소크라테스를 서양철학의 주요 인물로 보며, 뒤의 책을 선택한 입장의 학자는 헤겔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입장을 취하든지 간에, 학자들은 각각의 저서 모두가 키에르케고르의 독특한 글쓰기 형식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며, 그가 초창기에 이미 글쓰기에서 어느 정도 성숙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본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대부분은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에 저술되었으며 1842년 가을에 완성되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출간된 그 해에, 키에르케고르는 레기네가 슐레겔과 결혼하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사실이 키에르케고르 자신과 그의 다음 저서들에 깊게 영향을 끼쳤다. 1843년 후반기에 출간된 《공포와 전율》에서, 누구든 그 책의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신적 행위를 통해서 레기네가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공포와 전율》과 매우 가까운 시기에 출판된 《반복》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젊은 신사에 대해 쓰고 있다. 이 기간에 쓴 다른 여러 저서도 비슷하게 키에르케고르와 레기네의 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이 책의 대부분은 사실상 철학적이고, 간접적으로 필명을 사용하여 기록되었으며, 삶의 방식에 대한 다른 관점을 나타낸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각각의 철학적인 작업에 맞추어 두세 권 정도의 신학적 논설을 실명으로 출간했다. 키에르케고르는 필명으로 쓴 책에 나타난 철학적 관점을 명확히 하려고 이러한 논설들을 썼고, 그 작업의 신학적인 관점을 논했으며, 독자의 정신을 일깨우려 했다.
키에르케고르가 묄러에 답하기 위해 쓴 글은 〈여행하는 미학자의 활동〉과 〈문학적 군사행동의 변증적 결과〉로 오직 두 편뿐이다. 첫 번째 글은 묄러의 정직성을 공격하고 그의 비평에 대응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두 번째 글은 키에르케고르를 공공연하게 풍자하려 했던 《해적선》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있다.
“ 지금까지로 보아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해적선》 따위의 잡지를 읽는다. 그리고 그들은 무시되고 멸시하고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존재를 인식하는 일을 본질적으로 즐기고 있다. 문학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런 식의 글쓰기가 해낼 수 있는 일이란, 똑같은 잡지에 의해 모욕당하는 사례를 만들기 위해서 칭찬받는 유명 인사를 대상으로 삼고, 빈곤한 재능과 엄청난 노력을 바탕으로 사물들이 반영하는 도덕적 질서를 뒤집어 버리고 엎어 버리는 것이다. … 독자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다. 《해적선》이 지나칠 정도로 불멸의 명성을 부여한 존재를 내가 인격적으로 모독할 수 있었으면 하는데, 허락해 주시길 바란다. ” ? 쇠렌 키에르케고르 , 문학적 군사행동의 변증적 결과, 《키에르케고르 선집》(Essential Kierkegaard) 중에서.
몇 달이 채 가기도 전에, 《해적선》은 모욕을 주겠다는 키에르케고르의 공격에 대응했다. 그 잡지는 키에르케고르의 외모와 목소리, 습관을 우스갯소리로 만들어 시리즈로 세상에 퍼뜨렸다. 몇 달 동안 키에르케고르는 덴마크의 거리를 거닐 때마다 놀림감이 되어야 했다.
1846년 일기 전체를 통해, 키에르케고르는 길고도 상세하게 묄러와 《해적선》을 비판했다. 또한 이러한 비판 과정에서 자신이 더 이상 간접적으로 필명을 쓰는 의사소통 방식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말했다.
“ 글을 쓰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신에게 감사드린다. 내 나름대로는 지난 세월이 만족스러웠는데, 그것은 내가 언제 끝장을 내야만 하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던 시간이었고,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출간한 다음부터 나는 그것을 신에게 감사드렸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지와는 상관없는 것이지만, 나는 두 마디 말로 그것이 그렇다는 것을 정말로 증명할 수 있었다. 나는 나의 저작권에 대해서 매우 잘 안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괴롭게 했다. 이 분위기는 나에게 무슨 책을 썼는지 다 자백하라고 요구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Let it be.) 만약에 내가 어떻게든 해서 성직자가 되었다면, 분위기에 맞추어야 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사는 오늘의 삶에 대부분 만족하고 있다. 여유로운 시간에는 때때로 글을 쓰면서 조용히 활동하는 이 삶이, 나를 조금 더 자유롭게 숨 쉴 수 있게 한다. 키에르케고르의 첫 번째 저작이 헤겔 철학을 반대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다면, 이 시기 저작에서는 기독교계의 위선을 비판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키에르케고르가 기독교 자체를 공격하지 않았음을 기독교계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키에르케고르가 표적으로 삼은 것은, 교회와 그가 살던 사회에서 드러난 종교의 현실적인 모습이었다. 해적선 사건 이후에 키에르케고르는 “일반 대중” 및 대중과 개인의 상호작용에 관심이 생겼다. 이 시기에 그가 처음으로 쓴 글은, 《두 시대:문학적 감상문》이었다. 이 글은 토마신 크리스틴 길렘부르크 에흐렌스뵈르트(Thomasine Christine Gyllembourg-Ehrensv?rd)가 쓴 소설 《두 시대》에 대한 비평이었다. 이 글을 쓴 이후에, 키에르케고르는 그 시대 사람들의 본성과 그들이 지닌 삶에 대해 열정을 느끼지 않는 무관심한 태도에 대해 여러 통찰력 있는 관찰을 할 수 있었다. 근대성에 대한 그의 불평 중 하나는, 그것이 이 세계에 대해 별다른 열정이 없는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썼다. “현재는 열정이 없는, 본질적으로 합리적인 시기이다. … 오늘날의 유행은 수학적 같음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데, 그 결과로 모든 계층에서 한결같이 비슷비슷한 익명의 개인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 키에르케고르는 개인을 무관심한 대중으로 바꾸어 가는 체제 순응성과 문화적 동화를 공격하고 있다. 비록 키에르케고르가 대중을 공격하기는 했지만, 그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다양성과 유일무이함을 지킬 수 있는 공동체를 지지했다.
다른 저서들은 계속해서 대중의 천박함이 유일무이한 개인을 억압하려고 시도하는 것에 집중했다. 《아들러에 관한 책》은, 교회의 성스러움을 침해하는 계시를 언급한 아돌프 피터 아들러(Adolf Peter Adler) 목사의 주장을 담은 책이다. 아들러 목사는 그런 주장을 한 결과로 목사직에서 쫓겨나고 출교 당했다.
대중에 대한 그의 분석에서,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 교회의 부패와 몰락을 인식했고, 특히 그것은 덴마크 국교회를 겨냥하였다.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계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자신의 길을 잃어 버렸다.”라고 믿었다. 이 시기 기독교계는 기독교의 원래 가르침을 적당히 무시하거나, 왜곡하거나, 아니면 단지 입에 발린 말(‘lip service’) 정도로 취급했다. 키에르케고르는 후기에 이르러서 소위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이라 불리는 것의 어두운 이면을, 다른 이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그는 당대 기독교를 비판하는, 《기독교인 담론》(Christian Discourses), 《사랑의 역사》, 그리고 《다른 종류의 영혼을 계발하기 위한 담론》(Edifying Discourses in Diverse Spirits) 등등의 여러 글을 썼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키에르케고르가 이 시기에 쓴 책 중 가장 대중적인 것에 속한다. 비록 그 시대의 일부 무신론적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이, 키에르케고르가 제안한 해결책이 신앙이라는 사실을 간과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실존적인 절망의 본성에 대한 그의 분석은 주체에 대한 최고의 설명 중 하나이다. 그의 분석은 또한 뒤이어서 등장하는 철학자들의 설명과 우열을 다투어 왔다. 예를 들면, 마르틴 하이데거의 실존적인 죄(existential guilt) 개념과 장 폴 사르트르의 “사르트르와 불신”(Sartre and bad faith)을 들 수 있다.
1848년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의 실천》(Practice in Christianity), 《자기반성을 위하여》, 그리고 《너 스스로를 판단하라》와 같은 그의 책에서 덴마크 국교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책들을 통해, 그는 기독교인이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예수를 제시하면서, 기독교의 진정한 본질을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키에르케고르는 말년에 이르러 꾸준히 덴마크 교회를 비판했다. 《조국》이란 이름의 신문에 기사를 쓰기도 했고, 《순간》(Øjeblikket)이란 제목의 잡지를 직접 발간하기도 하였다.[22] 또한 키에르케고르는 덴마크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성서를 인용할때에 성서본문의 뜻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엉뚱한 해석을 하는 문제 그러니까 성서를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성서의 도구화에 대해서도 지적하였다. 실제로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가 '예수가 나사로를 살릴때에 그의 시신을 옮기게 했다'는 요한복음서 이야기를 인용해서 묘지를 이동시키도록 한 묘지법을 지지한 일을 자신의 책에서 인용했다.
키에르케고르는 한스 라센 마르텐센(Hans Lassen Martensen) 교수가 교회에서 최근에 사망한 야코프 P. 민스터(Jakob P. Mynster) 전 주교를 “진리의 목격자, 진실한 진리의 증인 중 한 사람”이라 부르는 연설을 하자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키에르케고르는 민스터를 좋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가 지닌 기독교의 개념에 비추어 볼 때, 신의 입장이 아니라 인간의 입장에서 민스터의 삶을 ‘진리의 목격자’와 비교할 만한 그 어떠한 이유도 없었다. 그는 에밀 보에센(Emil Boesen)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밀은 키에르케고르와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고, 키에르케고르와의 대화를 기록했으며, 그 자신이 목사인 사람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그에게 자신의 삶은 엄청나고 알 수 없는 고통을 지닌 것이었다고 언급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했다.
키에르케고르는 한 달을 넘게 그곳에 있다가, 프레데릭의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코펜하겐에 있는 뇌레브로(Nørrebro) 구역의 아씨스텐스 묘지에 묻혔다. 키에르케고르의 장례식에서, 그의 조카인 헨릭 룬트는 소란을 피웠다. 키에르케고르가 그의 삶에서 비난하고 그곳으로부터 탈출하려고 애썼던 것이 덴마크의 국교회인데, 그 교회가 키에르케고르를 묻는 것에 반발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에 룬트는 그런 상황을 받아들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철학자이자 신학자로 불려 왔다. 그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들에는, 실존주의의 아버지, 문학 평론가,[21] 유머가 넘치는 사람, 심리학자 그리고 시인이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두 가지 사상은 “주체성”에 대한 논의이다. 그리고 “신앙을 향한 도약(비약)”은 널리 언급되는 용어로서, “신앙의 도약”이란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신앙의 도약”은 한 개인이 어떻게 신을 믿는가 또는 한 개인이 어떻게 사랑으로 행동하는가에 대한 그의 개념이다. 그것은 이성적인 결정이 아니고, 좀 더 위험하고 초자연적인 것으로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에서 신앙을 갖는 것은 동시에 의심을 갖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진실로 신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다. 의심은 인간의 사고에서 이성적인 부분으로, 그곳에서 신앙은 진짜 내용을 갖고 있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의심은 (참된) 신앙의 필수적인 요소이며, 신앙을 유지시켜 주는 버팀목이다. 쉽게 말해서, 신의 존재나 선함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고,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그런 맹목적인 신앙은 믿을 만한 가치가 없다. 예를 들어, 신앙이 누군가가 직접 보고 만진 후에 연필이나 책상이 있다고 믿는 것과 같은 차원이라면, 그런 것을 신앙이라고 부를 수 없다. 신앙, 즉 신을 믿고 믿음을 가지는 일은, 눈에 보이지도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으며 신에게 접근할 수 없어도, 여전히 신을 믿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또한 자기비판과 내적 성찰에서, 기반이 되는 존재로서의 자아의 중요성과 자아가 세계와 맺는 관계를 강조했다. 그는 《철학적 단편에 비과학적인 해설을 덧붙여 끝내기》에서 “주체성이 진리다.”와 “진리는 주체성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객관적인 진리라는 것과, 개인적인 주체성과 진리와의 관계(무관심하거나 참여하는 것)의 구별과 연관된다. “어떤 감각” 안에 있는 사람들은 동일한 것들이 매우 다르게 여러 형태의 믿음과 관계한다고 믿는다. 두 개인이 아마도 그들 주위에 많은 사람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점을 함께 믿는다고 하더라도, 이 지식은 둘 중 오직 한 사람만이 실제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결정을 내리게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기본적으로 주체성이 종교적인 문제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미 적었듯이, 그는 의심이 신앙의 요소이고, 그 의심이 신의 존재나 구세주의 삶과 같은 종교적인 교리들에 대해 그 어떠한 객관적인 확실성도 획득하지 못하게 한다고 보았다. 대부분의 경우에 기독교인은 기독교 교리가 진리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합당하다는 결론을 희망한다. 그런데 만약 한 사람이 그러한 교리를 진리인 것 같아 보인다는 정도로 믿는다면, 그/그녀는 진정으로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이다. 신앙은 이러한 교리에 대한 절대적인 참여의 주체적 관계에 있다.
키에르케고르가 쓴 책의 절반가량이, 그가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나타내기 위해 창조한 여러 익명 인물의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이것은 키에르케고르의 간접적 의사전달 방식을 보여 준다. “저자로서 나의 저서에 대한 관점”과 같이, 그의 책과 일기 중 여러 부분에서,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저서가 체계적인 구조를 갖춘 철학적 체계로 취급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글을 썼다.
“ 익명의 저서들에서, 내 것은 단 하나의 단어도 없다. 나는 마치 제삼자의 입장인 것처럼 그 저서들에서 개인적인 의견을 표명하지 않았고, 그들의 의미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었고, 독자로서 읽었을 뿐, 익명 저자들과는 아주 멀리 떨어진 사적 관계조차 맺지 않았다. ”
키에르케고르가 간접적인 의사전달 방식을 사용한 이유는, 자신이 쓴 글이 어떤 관점을 드러내고 있는지 간에, 그것을 독자가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독자가 그의 삶에 어떤 부분이 글에 반영되었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글의 표면적인 의미만 간단히 읽어내기를 원했다. 키에르케고르는 또한 그의 독자가 그의 사상을 권위적인 체계로 여기지 않기를 원했고, 그런 식으로 신봉하기보다는 차라리 독자 자신의 해석으로 자신의 글을 읽어 내려가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
아도르노 같은 초기 키에르케고르 연구자들은, 필명으로 글을 쓴 것이 키에르케고르의 의도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전체 저작이 키에르케고르의 개인적이고 종교적인 견해를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견해 탓에 독자들은 많은 혼란을 겪었고, 키에르케고르가 논리적인 일관성이 부족한 면이 있어서 그의 저작에 상호 모순되는 내용이 드러난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후기 구조주의자들을 비롯한 많은 후기 연구자는 키에르케고르의 의도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익명의 저서들이 각 저자마다 그들 나름의 관점에서 기록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키에르케고르가 만들어낸 주요 필명을 연대기적 순서로 배열하면 다음과 같다.
빅토르 에레미타(Victor Eremita),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편집자.
키에르케고르의 일기는 그와 그의 글을 이해하는 데 필수이다. 그는 7000쪽이 넘은 일기를 썼다. 그의 글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중요한 사건이나 명상, 생각 들이 그 일기장에 빼곡히 담겨 있는 것이다. 덴마크어로 기록된 일기의 전체 모음은 13권으로 편집되어 출간되었다. 그 책은 색인을 포함하는 25개의 분리된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영문판 편집은 알렉산더 드루가 했고, 1938년에 출간되었다.
그의 일기는 여러 가지 다른 모습의 키에르케고르를 드러내며, 그의 생각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을 돕는다. 그의 일기가 지닌 형식은 그의 글 중에서 가장 시적이고 우아하다.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일기를 진지하게 기록했으며, 자신의 일기를 “가장 믿을 수 있는 신실한 친구”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 나는 결코 그 누구도 신뢰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작가로서 어느 정도까지 나는 일반 사람들을 나의 친구로 삼아 왔다. 하지만 현재 내가 일반 대중과 맺고 있는 관계에 관해서 보면, 나는 다시 한 번 후손들을 나의 신뢰할 수 있는 친구로 삼아야만 한다. 누군가에 대해서 웃고 있는 똑같은 사람들이 누군가의 진정한 친구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
그의 일기는 키에르케고르의 전매특허인 수많은 경구(警句)의 원천이다. 다음에 나오는 구절은 아마도 키에르케고르의 일기 중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것으로, 실존주의자 연구에서 항상 중요하게 인용된다.
“ 중요한 것은 나에게 진리인 진리를 찾는 것, 나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생각을 발견하는 것이다. (The thing is to find a truth which is true for me, to find the idea for which I can live and die.”) ”
그의 일기가 그의 삶과 사사의 여러 측면을 명확하게 해주는데도 불구하고, 키에르케고르는 많은 부분을 밝히지 않았다. 사상의 갑작스러운 변화, 반복되는 글쓰기, 그리고 특별한 구절의 전환은, 독자를 정돈되고 체계적인 독서의 길에서 내팽개쳐 버리려고 그가 사용하는 많은 잔재주 중 일부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일기에 대해서는 여러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미래에 그의 일기가 중요해지리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1849년에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 덴마크에서 오직 죽은 사람만이 상황을 지배한다. 부도덕함, 질투, 뒷담화, 평범함은 모든 최고의 공간에 존재한다. 지금 내가 죽는다면, 나의 삶이 남긴 결과는 비범한 것이 될 것이다. 일기들에서 부주의하게 간단히 몇 작 적어둔 많은 것이, 매우 큰 중요성을 갖게 될 것이고, 엄청난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나와 화해하게 될 것이고, 나를 인정할 수도 있고 내가 올바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위에서 언급한 대로, 키에르케고르는 말년에 이르러 지속적으로 정치적인 실체로서의 기독교계와 기독교를 비판했다. 19세기에 대부분의 덴마크인은 덴마크의 시민이자 필수적으로 덴마크 국립교회의 구성원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국립교회 연합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것이 기독교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시킨다고 보았다. 그의 비판에서 가장 중요한 요점은 다음과 같다.
“교회 모임은 무의미하다.(Church congregations are meaningless.)” 모임의 사상은 개인들을 어린아이로 유지시킨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신과 맺는 관계에서 책임을 지고 주도권을 갖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 기독교는 개인이고, 여기 서 있는 한 사람의 개인이다. “기독교계는 세속화되고 정치화되어 왔다.(Christendom had become secularised and political.)” 교회가 국가에 의해 조종되어온 이래로, 키에르케고르는 국가 교회의 관료적인 임무가 구성원의 숫자를 늘리고, 구성원의 복지를 감독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 밑바탕에는, 좀 더 많은 구성원이 모여들수록 성직자는 더 큰 힘을 갖게 된다는 부패한 생각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 임무는 전체가 아니라 개인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진정한 가르침에 비추어보면, 이상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구조로서의 국가 교회는, 개인에게 무례하고 해를 끼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기독교인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모른 채 “기독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 교회는 종교 그 자체를 손상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믿지 않는 “믿는 사람들” 즉 사람들의 “돼지 떼 정신”에 따라서, 기독교를 단지 사교계의 전통 정도로 격하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만약에 교회가 국가로부터 자유롭다면, 모든 것이 좋다. 나는 즉각적으로 이 상황을 적합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에 교회가 정치적으로 해방된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무슨 의미에 의해서, 어떠한 방법으로? 종교적 운동은 종교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가짜다! 결과적으로 피를 흘리거나 그렇지 않거나 간에, 해방은 고난을 통해서 와야만 한다. 그것을 구입하는 데 지불해야 할 값은 정신적인 태도이다. 하지만 고난 없이 교회가 세속적인 의미에서 교회가 해방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전체 세계의 조화를 위한 인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 세계에서 인내는 무관심과 같고, 그것은 기독교에 반대하는 가장 끔찍한 공격이다. … 국가적으로 설립된 교회의 교리와 그것의 조직은, 둘 다 정말 매우 좋다. 오, 그러나 우리 삶에서 그것들은 정말 가증스럽다. ”
기독교 교회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하는 모습에서,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프리드리히 니체 같은 철학자의 등장을 예견한 것처럼 보인다.
“ 나는 묻는다. 우리가 신약 성서에 따라서 우리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면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관통하는 기준으로 삼아 행동하는 것을 지속할 때, 그것은 무슨 뜻인가? 신약성서의 생각은 삶에 대해서 뒤떨어진 것인가? 게다가 이 사건들의 상태가 드러내는 거대한 불균형이, 많은 이들이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에 이러한 전환을 주는 것을 좋아한다. 인간 종족은 기독교에서 벗어나고 있다. ”
20세기에 이루어진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유명한 철학적 비판에는,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것이 포함된다. 장 폴 사르트르와 같은 무신론적 철학자들과 마르틴 하이데거와 같은 불가지론자 철학자들은, 대부분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적 견해를 지지했지만, 그의 종교적인 견해는 거부했다.
아도르노가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에 가한 비판은, 원래 키에르케고르의 의도보다는 덜 신실한 것이었다. 최소한 아도르노의 비평 중 하나인 그의 책인 《키에르케고르: 미학의 구조》는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무책임한 것”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아도르노는 키에르케고르의 익명 저서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했고, 그런 이해에 근거하여 키에르케고르의 전체 철학을 구성하는 바람에,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을 논리적인 일관성이 부족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이해 방식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그 가 쓴 작품의 주인공인 오셀로를 혼동하거나, 도스토옙스키와 그가 쓴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를 같은 사람으로 여기는 착각과 같은 것이다. 또 다른 비평가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아도르노는 오늘날 우리가 가진, 키에르케고르의 모음집에 대한 신뢰할 만한 해석이나 번역과는 거리가 멀었다.”
레비나스가 키에르케고르에게 가한 비판의 주요한 내용은, 그의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단계들에 집중하였다. 특히 《공포와 전율》에 대해서 그러했다. 레비나스는 신앙의 도약을 비판했는데, 그가 보기에 이러한 윤리적인 매달리기와 신앙으로의 도약은 폭력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 키에르케고르의 폭력은, 실존이 믿음의 영역인 종교적인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 윤리적인 단계를 포기할 때 시작된다. 그러나 믿음은 더 이상 외부적인 정당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내부적으로 조차, 그것은 의사소통과 고립이 결합되었고, 따라서 거기에서 폭력과 고난이 유래하였다. 그것은 윤리적인 현상을 격하시켜 이차적인 지위를 주는 것의 유래가 되었고, 존재의 윤리적인 기초를 멸시하는 것이어서, 그것은 니체를 불러들이고, 니체를 거치면서 도덕관념이 없는 현대철학으로 완성되었다. ”
레비나스는 기독교인의 신앙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처음 언급한 신과, 천사를 보내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한 그 신을 믿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정말 종교적인 단계에 있었다면, 그는 아들을 죽이려는 자신을 멈추게 한 천사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고, 계속하여 이삭을 죽여 버렸을 것이다.“초월적인 윤리학”은 마치 살인자들을 그들의 범죄로부터 용서해 주기 위해 생긴 구멍처럼 보이고, 따라서 그것은 수용되기 어렵다.
키에르케고르의 종교적 관점에 대해, 사르트르는 신의 존재에 반대하는 논쟁을 제기한다. 만약에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면, 그것은 감각이 있는 존재가 완전할 수 없다는, 감각에 관한 용어의 의미로부터 뒤따르는 것이다.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는 신이 “Pour soi” 즉 혼자 힘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의식(감각)이며 또한 “en-soi” 즉 본질적으로 하나의 존재로서 하나의 사물이라는 것은, 말에서 모순된다고 언급했다.
사르트르는 아브라함이 불안을 견뎌야 했다는, 키에르케고르의 분석에 동의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신이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도록 말했다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의 강의록인 《실존주의는 인본주의이다》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함을 통해서, 그의 양심이 진정으로 병들게 해야만 한다. 그 말이 부인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포함하는 거짓말을 실천하면서 말이다. 그런 지나친 변장을 통해, 그의 고뇌는 그 자체를 드러낸다. 이것은 키에르케고르가 “아브라함의 고뇌”라고 불렀던 고뇌이다. 당신은 그 이야기를 알고 있다. 한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 명령에 그는 순종했다. 만약에 정말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천사라면,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아브라함 당신은 당신의 아들을 희생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닥친 사람이면 누구나, 첫째, “말하는 사람이 정말 천사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것이고, 둘째, “내가 정말 아브라함인가?”라는 의문도 지닐 것이다. 그런 의문을 해소할 증거가 어디 있는가? 망상으로 고통 받는 어떤 미친 여성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온다고 말하면서, 그녀의 요구 사항을 말한다. 그러면 의사는 그녀에게 묻는다. “그러나 당신에게 말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녀는 대답한다. “그는 그것이 신이라고 해요.” 그러면 정말 그녀가 말하는 그것이 신인지를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만약 한 천사가 나에게 나타난다면, 그것이 천사임을 증명하는 것은 무엇이며, 만약에 내가 소리를 듣는다면, 그 소리가 천국에서 들리는 것으로 지옥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고 누가 증명할 것이며, 또는 그 소리가 나의 잠재의식이나 병적인 상태로부터 생긴 것이 아니라고 누가 증명하겠는가? 누가 그것들이 나에 대한 것이라고 증명할 수 있겠는가? ” ? 장폴 사르트르 , 실존주의는 인본주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
키에르케고르의 시각에서, 아브라함의 확신은 ‘내면의 목소리’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그 목소리는 실제로 다른 이들이 그 존재를 증명하거나 들을 수 없는 것이다.(“문제는 아브라함이 이해받기를 원하자마자 다가온다.”) 키에르케고르에게, 모든 외부의 “증거”나 정의는 단지 주체의 바깥에 있는 것일 따름이었다. 예를 들어, 영혼의 불멸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증거는, 인간이 지닌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마음에 근거한다.
키에르케고르의 저서들은 그의 사후 수십 년이 지날 때까지도 널리 유용하게 쓰이지 못했다. 그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당시 덴마크 내에 주요한 조직 중 하나였던 덴마크 국교회는, 될 수 있으면 키에르케고르의 책을 언급하지 않고 회피하려 했고, 다른 덴마크인들도 그렇게 하기를 권했다. 게다가 독일어나 프랑스어, 영어 같은 주요한 언어권에서 덴마크 언어가 널리 쓰이는 말이 아니어서, 덴마크어 사용자가 아닌 독자들이 키에르케고르를 가까이하여 알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첫 번째 학구적인 관심이, 독일어를 덴마크어만큼 잘했던, 그의 동료인 덴마크인 게오르그 브란데스(Georg Brandes)의 활약 덕분에 키에르케고르에게 주어졌다. 브란데스는 키에르케고르에 관한 첫 공식적인 강의를 했고,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관심이 생기게끔 도왔다. 1877년 브란데스는 또한 키에르케고르의 철학과 삶에 대한 첫 번째 책을 출간하였다. 희곡작가 헨리크 입센도 키에르케고르에 흥미를 갖고, 그의 저서들을 나머지 스칸디나비아 반도 지역에 소개하였다. 1870년대에 키에르케고르 저서 중 일부가 독립적으로 독일어로 번역되기 시작하였고, 키에르케고르 저서 전체에 대한 학문적인 독일어 번역은 1910년대에 이르러서야 실현되었다. 이 번역들은 키에르케고르가 20세기에 독일, 프랑스, 영국의 지식인과 작가 등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30년대에, 첫 번째 학문적인 영역본이 나왔다.[51] 번역한 사람들은 알렉산더 드루, 데이비드 F. 스웬선, 더글러스 V. 스티어, 그리고 월터 라우리였고,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일하는 찰스 윌리엄이 편집자로 수고했다. 이차적이고 최근에 광범위하게 인용되는 학문적인 영어 번역본은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에서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에 출간하였다. 하워드 V. 홍과 에드나 H. 홍이 감수하였다. 세 번째 공식적 번역은 쇠렌 키에르케고르 연구 센터의 지도로, 55권 분량으로 확대되어 출간될 예정이며, 2009년 이후에 완성되리라 여겨진다.
유신론자이건 무신론자이건 많은 20세기 철학자와 신학자는, 키에르케고르로부터 여러 개념을 끌어오곤 한다. 분노·절망의 개념이라든가, 개인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를 예로 들 수 있다. 철학자로서 키에르케고르가 지닌 명성은, 1930년대에 대단했다. 왜냐하면 당시 타오르기 시작한 실존주의 운동이 그를 선구자로서 주목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는 여전히 매우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사상가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루터교 교회의 성인 달력에서 교사로서 11월 11일에 기념되고 있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영향을 받은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 칼 바르트, 시몬 드 보부아르, 닐스 보어, 디트리히 본회퍼, 에밀 브루너, 마르틴 부버, 루돌프 불트만, 알베르 카뮈, 마르틴 하이데거,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 카를 야스퍼스,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 라인홀트 니부어, 프란츠 로젠츠바이크(Franz Rosenzweig), 장 폴 사르트르, 조셉 솔로베이치크(Joseph Soloveitchik), 파울 틸리히, 미겔 데 우나무노(Miguel de Unamuno) 등이 있다. 파울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의 과학적인 무정부주의는 키에르케고르가 언급한 진리로서의 주체성에 영감을 받았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도 키에르케고르에게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키에르케고르는 나에게 멀고도 깊었다. 그가 지닌 영혼의 깊이가 좋은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어도, 그는 나를 당황하게 했다.”라고 주장했다. 칼 포퍼는 키에르케고르를 “기독교 윤리의 위대한 개혁자, 당시 관료적인 기독교의 도덕성이 사실은 반(反)기독교적이고 비인간적인 위선이라고 폭로한 사람”이라고 언급했다.
현대 철학자 중 엠마누엘 레비나스,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자크 데리다, 위르겐 하버마스, 알라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 그리고 리처드 로티 같은 사람들은, 때때로 매우 비판적이지만, 그들 또한 키에르케고르의 통찰 중 일부를 수용하고 있다. 제리 표도르는 키에르케고르가 “대가이며, 다른 철학자들이 뛰노는 무대에서 빠져나온 사람”이라고 적었다.
키에르케고르는 또한 20세기 문학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영향을 받은 모습을 보이는 작가로는 W. H. 오든(W. H. Auden),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헤르만 헤세, 프란츠 카프카, 데이비드 로지(David Lodge), 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or), 월커 퍼시(Walker Percy), 라이너 마리아 릴케, 존 업다이크(John Updike) 등이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또한 심리학에 두드러진 영향을 끼쳤고, 기독교 심리학의 설립자로 불리기도 한다. 실존주의적 심리학과 실존주의적인 치료 요법에도 영향을 주었다. 실존주의자(때때로 “인본주의적”이라 불리는) 심리학자와 치료자에는 루트비히 빈스방거(Ludwig Binswanger)를 비롯하여 빅토르 프랭클(Viktor Frankl), 에리히 프롬, 칼 로저스(Carl Rogers) 및 롤로 메이(Rollo May)가 포함된다. 메이가 주장한 “불안의 의미”는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키에르케고르의 사회학적 작업은 〈두 시대: 혁명 시대와 현재 시대〉라는 글을 통해, 우리에게 근대성에 대한 흥미로운 비판을 제공해 준다. 키에르케고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그가 죽은 후에 얻을 명성을 예견했고, 그의 책들이 주체에 대한 치열한 탐구로 여겨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일기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 시대는 천재가 필요하지 않다. ? 그것은 충분히 천재들이 있기 때문이고, 순교자는 별로 없지만, 죽음에 이르는 것을 순종하도록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필요한 사람들은 충분히 많다. 시대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언젠가 나의 글뿐만 아니라 나의 전 생애까지도, 기계의 흥미를 자아내는 모든 신비로서 연구되고 또 연구될 것이다. 나는 신이 나를 어떻게 도우셨는지 결코 잊지 않으며, 그러므로 나의 마지막 바람은 모든 영광을 그에게 돌리는 것이다. ” ? 쇠렌 키에르케고르 , 《일기》 (1847년 11월 20일)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ilsbook&logNo=70090833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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