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李承晩, 1875년 4월 18일 (음력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은조선과대한제국및대한민국의 개화파, 언론인, 정치인이며,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통령, 건국 대통령,대한민국의 제1·2·3대대통령[1]1960년 4.19혁명에 의해 하야 후 하와이로 요양 갔으나[2], 병세가 나빠져 하와이에서 서거했다.
이승만(1875)이 태어나서 살던 시대는 조선 왕조였다. 왕조 시대에서 자유민주주의와 개혁이라는 언어를 가지고 개화 운동을 하는 것은 극도로 의협심이 있는 선각자나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악명높은 한성 감옥에서 징역 7년을 마치고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풀려나 미국으로 떠났다. 출옥 시기는 1904년, 29세였다. 1912년생인 김일성이 태어날 때 그는 37세였다.
이승만은 1904년부터 1945년까지 42년 동안이나 미국에서 살았다. 그가 미국에서 가장 먼저 다닌 대학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자리한 조지워싱턴 대학이다.[3]이어서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 미국의 유명한 역대 대통령들이 프린스턴 출신들이었다. 그 학교 출신의 미국 대통령 윌슨이 그의 스승이었다. 그는 1919년 9월에 상해에서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 44세의 이승만이 임시정부 대통령이 되었고, 이동휘가 국무 총리였다. 그런데 이승만은 반공주의자였고 이동휘는 골수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시달림을 받았다.
이동휘는 임시 정부에 좌익들을 불러들여 ‘공산주의자 그룹’을 결성했고 이어서 1921년 1월에 여운형, 김두봉 등을 주축으로 하는 ‘고려공산당’을 결성했다. 이들은 소련으로부터 공작금 40만 루블을 받아 임시정부 조직을 소련식 ‘위원회’ 편제로 하자며 이승만을 압박했고, 이승만은 이에 반대했다. 이 때 이승만을 압박한 사람들에는 이동휘 말고도 여운형, 안창호, 이동녕 등이 있었다. 결국 이들은 1925년 3월 다수파를 만들어서 이승만을 탄핵하여 이승만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승만의 나이 50이었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체스카 여사으로부터 존경을 받기 시작했다. 1934년에 그들은 제네바에서 처음 만났고, 그해 10월에 뉴욕에서 결혼을 했다. 그녀의 나이 35세, 이승만의 나이 60세였다. 바야흐로 2차 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일으킨태평양 전쟁
미운 털이 박힌 이승만은 해방을 맞이하고서도 미 국무성의 끈질긴 방해로 귀국할 수 없었다. 결국 그와 친분이 있는 맥아더 장군(1880)이 주선해준 수송기를 타고 1945년 10월 16일에야 서울에 올 수 있었다. 이때 이승만의 나이는 71세였다. 참고로 맥아더가 인천상륙 작전을 지휘했을 때, 맥아더의 나이는 71세, 이승만의 나이는 76세였다.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세계를 뒤흔든 것이다.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건국하고 공산화로부터 지켜낸 것이 얼마나 기적같은 일인지를 보여주는 지도
스탈린은 2차대전에 참전한 대가로 15개국을 합병했고, 20개국을 위성 국가로 만들었으며 일본으로부터 북방 4개 섬인 쿠릴 열도를 획득했다. 이어서 1946년 2월 8일, 북한을 위성국으로 만든 후, 그 다음 날인 2월 9일에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는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공표했다.
이처럼 소련이 영토 욕에 사로잡혀 세력을 팽창시키고 있을 때 어이없게도 미국은 한반도 자체가 미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하에 조선을 포기했고, 이어서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면서 주한미군을 철수시켰다. 이것이 북한과 소련의 오판을 불러 6.25전쟁이 발발했던 것이다.
당시 남한 인구는 북한의 2배로 많았지만, 1인당 GNP는 북한의 반도 안 되었다.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러 북한에 갔던 김구나 김규식 등의 눈에 북한은 선진국처럼 보였고, 남한은 후진국이었다. 전력의 96%, 석탄의 95%가 북한의 소유였다. 그래서 그들은 김일성에 아부하는 발언들을 했다.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이 벌이는 온갖 방해를 받아가면서 북한에 비해 1인당 GNP가 반도 안 되는 경제력을 가지고 먹고 살기 위해 싸웠다. 1949년 조병옥 박사가 대통령 특사로 미국을 방문했지만 미국 관리들은 ‘민주주의만 잘하면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다’는 원론만 들려주고 돌려보냈다.
결론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71세인 노구를 이끌고 1945년에 한국에 들어와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싸우면서 74세였던 1948년에 대한민국을 건국했고 그 후 12년 동안 문맹률 80%인 국민에게 주권이라는 것을 선물해주었으며 문맹 퇴치를 위해 헌신했다. 당시에는 이런 말이 유행했다.
“남이야 전봇대를 뽑아 이쑤시개를 하든 말든, 남이야 절간 변소에서 낚시질을 하든 말든 웬 상관이야~” 이런 말들이 당시의 민주주의를 상징했다. 자유 방임이 곧 민주주의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선진국들은 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해 피를 많이 흘렸다. 하지만 우리가 얻은 해방은 하늘(미국)이 준 선물이었고, 우리가 얻은 민주주의도 하늘(미국, 이승만)이 준 선물이었다.
한국 민주주의는 선진국들처럼 피를 흘려 쟁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가치를 잘 모른다. 그래서 자기의 자유를 위해 남의 자유를 방해하는 무책임한 행태들이 아직도 고쳐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어지러웠다. 일반 국민들은 연료 및 식량 부족에 허덕였고, 일부 부유층들에서는 부정부패, 양주, 양담배로 표현되는 사회악이 난무했다. 이는 깨끗함과 풍요를 내세우는 공산주의자들의 선동 대상이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더 더러웠지만 그들은 언제나 정의와 아름다운 말과 깨끗함으로 위장하여 군중들을 선동했고, 선동된 군중들을 움직여 부패한 기득권을 공격했다. 당시의 사회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었다.
제주 4.3사태 때 제주도로 가서 남로당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은 여수, 순천 주둔 14연대는 제주도로 가는 척하다가 10월 19일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충격을 받은 이승만은 1948년 12월 1일부터국가보안법
1952년 부산에서 열린 6.25 남침 2주년 행사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권총으로 암살하려는 범인유시태(柳時泰, 1890~1965)김시현(金始顯, 1883~1966)등의 사주를 받았다. 권총의 불발로 암살은 실패하며, 범인들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로 감형되었다 4.19 때 풀려났다.[4][5]김시현이나 유시태는 의열단원 출신이므로 북으로간 의열단장김원봉
폭동에 가담했던 좌익 반란군들이 산 속으로 도망쳤고,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1949년 5월, 2개 대대 규모를 만들어 월북까지 했다. 반란군을 토벌할 임무를 받았던 토벌 사령관 송호성은 6.25가 발생하자 서울에서 인민군으로 변신하여 인민군 소장이 되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우군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었다.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세상이었다. 그래서 오해가 있었고, 억울한 희생도 많이 생겼다. 이러한 희생을 놓고 소련과 북조선은 남한 정부를 야만 집단인 것으로 선전했고, 지금도 좌익들은 이승만을 독재자로 매도한다. 좌익들은 또 미국과 맥아더를 증오한다. 이승만, 미국, 맥아더 이 세 존재가 없었다면 한반도는 김일성, 박헌영이 공산주의 체제를 수립했을 텐데, 이 3개의 존재가 민족의 원수라는 것이다.
맥아더를 위시한 미군정 장군들은 “이승만이 없으면 전쟁을 할 수 없으며, 그를 대체할만한 인물은 없다”고 했다. 사실 월남에서 미국은 엄청난 전비를 들이고 수많은 인명을 희생했지만 패했다. 그 이유는 월남에는 이승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처칠보다 더 훌륭한 인재였다. 단지 영국은 강대국이고 한국은 알려지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이승만이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 세계 국가들 중에서 한국만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와 싸워온 유일한 나라이다.” 휴전을 놓고 이승만과 대립했던 로버트손 미국무부 차관보는 이렇게 말했다. “이 대통령은 전국민을 분발시켜 공산주의와 싸우도록 만들었습니다. 세계의 그 어느 나라 지도자들에게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남'이란?
우남(雩南)은 서울(당시 한양) 남산에서 그의 유소아 시절 성장기 거주하던 곳의 명칭에서 유래한다.[6]
우(雩)는 제사나 굿을 하던 장소의 의미. 남(南)은 남산의 첫 글자를 따온 것.
한성감옥 당시
우남은 대한제국 역모죄로 1898년 수감된다.
우남의 기독교
우남은 사형선고를 받음. 이후 우남은 한성감옥에서 외국인 선교사와 교류한 후 기독교를 믿기 시작함.
우남의 독립정신
우남이 수감 중 저술한 우남 최초의 책. 한성감옥에서 조-영사전을 만들던 우남은 러일전쟁 소식을 들은 후 뜻한 바 있어, 계몽목적의 독립정신을 저술하기 시작한다. 우남 독립정신 주 내용은 당대 선진외국을 모델로 조선 선진화를 이루려면 각 개인이 독립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
한학 수준이 남달리 높았던 우남이 책을 한글로 쓴 이유는 조선인들이 쉽게 읽게 하려는 의도. 즉 '민국'을 가지기 위한 내용임.
그러나 당시 대한제국에 대해서는 역모일 수 있음을 알기에 지인들이 나서서 미국으로 원고를 가져간 후 책으로 발행됨. 일제 강점기 하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 우남의 '독립정신'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썼다고 함.
이승만의 국제연맹 및 소련과 접촉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54권 1920년대 이후 미주·유럽지역의 독립운동 - 제3장 미주한인사회의 변화와 신진단체의 출현 - 5. 유럽에서 외교 및 선전활동 전개
미군정기 여론조사 지지율
해방 직후 미군정기에 대통령 예비 후보자들에 대한 아래와 같은 3건의 여론조사가 있었는데, 이승만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p.45~51 에 실린 1945.10.10 ~ 11.09 기간에 시행된 대통령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7]. 설문지에 직접 기명하는 방식이었으며, 배포한 1957매 중 투표한 매수 978매이며, 응답률은 50.0% 였다. 이승만 431표 (44.1%),김구293표 (30.0%),여운형78표 (8.0%), 무기록 176표 (18.0%)
한국여론협회(韓國輿論協會)가 1946년 7월 시행한 초대 대통령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8] 종로4가 등 3개소 행인 6,671인을 대상으로 조사 이승만 1916인 (28.7%),김구702인 (10.5%), 김규식 694인 (10.4%),여운형689인 (10.3%),박헌영84인 (1.3%), 기타 110인 (1.6%), 모르겠다 2476인 (37.1%)
미군정청 홍보처가 1947년 5월 서울에 거주하는 1,00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대통령 후보자에 대한 여론조사[9] 이승만 43.9%, 김규식18.5%,여운형17.5%,김구15.2%,허헌1.3%,조소앙1.3%,김원봉0.9%,김성수0.7%,박헌영0.4%
번역 :만주의 한국인들(1933)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8권 구미위원부 Ⅱ > Ⅱ. 선전문건류 > 4. 1930년대 전반기 선전문건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Syngman Rhee, 《Japan Inside Out - The Challenge of Today》, John Long (1941), Fleming H. Revell Company (Second edition, 1941) :영문 복원판 (광창 미디어, 2017)[15]
보통 좌익들이 죽어라 물고 늘어지는 이승만 비판이, 바로 '런승만'이라며 조롱하는 한강인도교 폭파사건이다. 우남 이승만이 '직접'서울을 사수하란 방송을 틀어 시민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고, 그러면서 대통령 자신만 몰래 빠져나가려 한강다리를 폭파 명령을 내렸다고 하는데 이건 결코 사실이 아니다. 우남 이승만은 결코 한강인도교 폭파 명령을 내린적이 없다. 그건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의 결정에 의한 폭파인 것이었다.
한강교 폭파 타임라인
방송 내용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敗走)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은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한강 인도교 폭파에 대한 비판
북한의 남침 소식을 들은이승만 정부가이승만본인 입으로 말한 것을 포함해서 이를 재구성하고 각색한 후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틀은 방송. 정작 이 방송이 들릴 시점에서 이미 이승만은 국군과 피난민들의 유일한 퇴로인한강 다리마저 끊고서울에서 도망친 후였다. >------->그러나 이것을 이승만 대통령이 무고한 시민들을 서울에 가둔채, '자신만 살려고' 일부러 방송했다는 것은 황당한 주장이다. 27일 당시 이승만 동정을 살펴보면,
보면 알겠지만, 참모진들이 거짓말을 해서라도 겨우 서울을 탈출시킬 정도로 이승만 자신은 서울을 사수하려고 하였다.
한강인도교 폭파는 "정부와 국군, 의회가 서울 사수에 대해 통일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인민군의 진군 속도를 늦추기 위해 불가피하게 한강인도교를 폭파했다"며 "현재의 관점에서 다양한 역사적 평가가 가능하다 해도 고의나 과실에 의한 위법행위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또한 '의정부를 탈환했으니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내용의 방송을 한 데에 대해서도 "서울 시민의동요를 방지하기 위한것"이라고 봤다.[18]
진실은? - 6.25전쟁 개전 타임라인
1950년 6월 25일 04:00 북한 인민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
1950년 6월 25일 09:30 아직 북한의 공격을 몰랐던 이승만은 식사 후 경회루로 낚시를 하러 감
1950년 6월 25일 09:30 같은 시각 프란체스카 여사는 치과에 치료를 받으로 감
1950년 6월 25일 09:40 이승만이 남침에 대한 보고를 받음
1950년 6월 25일 10:30 신성모 국방장관이 경무대로 들어와 개성이 함락되었고 춘천 근교에 인민군이 도달했다고 보고
1950년 6월 25일 10:30 이승만은 '국가수호를 위한 전쟁목표 4원칙' 설정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이 세계대전의 빌미를 제공하는 장이 되어서는 안된다.
한국민은 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총력전을 펼친다.
북한의 불법 남침을 남북통일의 절호의 기회로 삼는다. 해방 후 미-소에 의해 인위적으로 그어진 38선은 북한이 먼저 침범했기 때문에 이제 필요없어졌다.
위기를 타개하고 북진통일을 위해서는 미국과 유엔의 지원이 필요하다.
1950년 6월 26일 03:00 서울 상공에 인민군 공습경보가 울리는 등 전황이 악회되는 것을 확인한 이승만은 도쿄에 있는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을 구하라고' 항의. 맥아더는 긴급지원을 약속함.
1950년 6월 26일 03:00 이승만은 워싱턴에 있던 장면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트루먼 대통령에게 무기지원 약속을 이행할것을 전하라고 지시.
1950년 6월 26일 14:00 이승만은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로 나가 상홍을 보고받음. 이때 의정부 방어선이 무너지고 있다고 보고받음.
1950년 6월 26일 14:40 의정부가 인민군에게 점령당함.
1950년 6월 26일 오후 서울 상공에 인민군의 야크기가 계속 돌아다녔고 이때마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여사는 방공호에 들어갈 정도로 상황이 긴박해짐.
1950년 6월 26일 밤 각료들이 이승만의 피난 문제를 처음으로 거론.
1950년 6월 26일 21:00 김태선 서울시경 국장이 경무대로 와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있는 공산분자들이 탈옥하면 제일 먼저 경무대로 올 것임으로 일시 피난을 해서 전쟁 전반을 지도해야 된다"고 보고.
1950년 6월 27일 02:00 신성모 국방장관, 이기붕 서울시장, 조병옥 등이 경무대로 찾아와 피난을 간곡하게 건의하지만 이승만은 '서울 사수'를 주장하며 거절. 프란체스카 여사도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더 큰 혼란이 발생하고 대한민국 존속이 어려워진다"고 피난을 설득하지만 이승만은 거절.
1950년 6월 27일 02:00 인민군의 탱크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는 보고에 피난을 결정함. 이때 이 보고는 피난을 위한 참모들의 거짓말이라고 밝혀짐.
1950년 6월 27일 03:30 이승만은 열차에 탑승하여 남하하기 시작.
1950년 6월 27일 11:40 대구에 도착하지만 이승만은 다시 서울로 올라갈 것을 명령.
1950년 6월 27일 12:30 기차는 서울 방향으로 다시 되돌아감.
1950년 6월 27일 오후 기차가 대전에 도착했으니 신성모 국방장관이 서울이 함락되었다고 전화함. 이는 이후 대통령이 서울에 오지 못하게 할 의도로 한 신성모 국방장관의 거짓말로 밝혀짐.
1950년 6월 27일 오후 미 대사관의 드럼라이트 참사관이 유엔의 대북 군사제재 결의와 트루먼의 무기원조 명령 결의를 전달함. 이승만은 이 소식을 듣고 대전으로 정부를 옮기기로 결정.
1950년 6월 27일 밤 무초 미국 대사가 이승만을 찾아와 미국의 참전을 전함. 이 말을 듣고 이승만은 국민을 안심시키고 국군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방송을 해야겠다고 상의.
1950년 6월 27일 22:00 서울중앙방송국에 전화를 해 "유엔과 미국이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했다. 지금 공중과 해상으로 무기, 군수품을 날라와 우리를 돕기 시작했으니 국민들은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수 있으니 안심하라"는 취지의 방송을 하기로 함.
여담
좌익의 주요프레임런승만이라는 프레임이 대표적이지만 일반적으로 좌익은 친일파, 독재자 프레임을 쓰는데 이승만은 독립운동가였고 독재자 또한유신체제를 이용한박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