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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는 두텁고 익힌 버릇은 무거우며, 자기 마음의 본 성품을 밝게 살피는 관행은 약하고 마음은 들떠서 어리석은 무명의 힘은 크고, 지혜의 힘은 약해서, 선과 악의 경계에서 마음이 동요하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하여 서로 헛갈린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한 사람은 얽힌 인연을 잊고 번뇌를 없애는 수행공부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말했다.
"인식작용의 주체가 되는 여섯 감각기관(六根)이 인식의 대상인 경계를 대하여도 마음이 얽힌 인연을 따르지 않음을 선정(禪定)이라 하고, 마음과 대상이 모두 실체가 없는 공(空)이어서 본래 미혹함이 없는 것을 비추어 아는 것을 지혜라고 한다.
이것이 상(相)을 따르는 수행방법(隨相門)의 선정과 지혜로써 점차로 닦는 점문(漸門)의 하열한 근기의 수행이지만, 대치(對治)함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다.
만약 망령된 생각으로 들뜸이 심하면 먼저 선정의 수행 방법으로 산란함을 거두어 마음이 얽힌 인연에 따르지 않게 하고, 본래의 고요함에 합당하게 하며, 만약 혼침이 더욱 심하면 지혜의 문으로써 사물을 판단하고 실체가 없는 공을 관하여 비추어 보아 미혹함이 없게 하여 본래의 앎에 합당하도록 해야 한다.
선정으로써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 지혜로써 멍청한 상태(無記)를 다스려 동요하거나 고요한 상태가 없어지고, 대치(對治)하는 노력도 없어지면, 어떤 대상이나 경계를 대하더라도 생각마다 근본으로 돌아간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인연을 만나도 마음마다 도에 합당하여 걸림없이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달아 할 일을 다 마친 무사인(無事人)이 될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참으로 선정과 지혜를 고루 평등하게 가져 불성을 분명하게 본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이하면, 깨달은 뒤에 닦는 수행 방법 가운데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지는 뜻에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자기 성품(自性)의 선정과 지혜이고, 둘째는 상(相)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입니다.
자기 성품의 문(自性門)은 "걸림 없는 고요함과 앎이 원래가 자연 그대로 무위(無爲)이므로 어떠한 객관세계도 상대될 것이 없으니 어찌 번뇌를 떨어버리려는 노력이 필요하겠으며, 한 생각도 감정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얽힌 인연을 잊으려는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며 결론지어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단번에 깨닫는 돈문(頓門)에 들어간 사람이 자기의 성품을 떠나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고루 평등하게 가지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상(相)을 따르는 수행문(隨相門)에서는 "이치에 맞추어 산란함을 거두고 사물을 판단하고 공(空)을 관하여 혼침과 산란함을 고루 다스려서 무위(無爲)에 들어간다"하고, 결론짓기를 "이것은 점차로 깨닫고 닦는 점문(漸門)의 열등한 근기의 수행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선정과 지혜에 관하여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수행할 경우, 먼저 자기 성품(自性)의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은 후에 다시 상(相)을 따르는 방법으로 혼침과 산란함을 고루 다스린 다음에 자기 성품(自性)의 수행 방법에 들어가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자기 성품의 선정과 지혜에 의지한다면 걸림 없이 고요함과 앎이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다시 더 다스릴 공부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또 상(相)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를 필요로 하겠습니까. 이것은 마치 흰옷에 쓸데없는 무늬를 새겨 그 바탕을 망가트리는 일과 같습니다.
그리고 먼저 상(相)을 따르는 방법으로 선정과 지혜로 다스리는 공부를 이룬 다음에 자기 성품(自性)의 방법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분명히 점차로 수행하는 열등한 근기, 점문(漸門)의 낮은 근기가 깨치기 전에 점차로 익히는 것이니, 어찌 돈오문(頓悟門)을 수행하는 사람이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데 있어서 노력없는 노력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동시여서 전후가 없다면, 두 가지 방법의 선정과 지혜의 돈(頓)과 점(漸)이 다른데, 어떻게 한꺼번에 같이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즉, 돈오문(頓悟門)의 사람들은 자기 성품(自性)의 방법에 의하여 걸림이 없고 자유로워 노력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점문(漸門)의 열등한 근기의 사람은 상(相)을 따르는 방법으로 나아가 다스리는 공부에 힘쓸 것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 방법의 돈(頓)과 점(漸)이 다르고 우열이 분명한데 어떻게 먼저 깨치고 뒤에 닦는 방법에서 어떻게 두 가지를 함께 아울러 말씀하십니까? 다시 잘 설명하시어 의심을 풀어 주십시오.
나의 해석과 설명은 분명한데 그대가 스스로 의심을 내는구나. 말을 따라 알려고 하면 의혹이 더욱 더 생기고, 뜻을 얻어 말을 잊으면 따질 필요가 없다.
만약 그 두 가지 방법에 대해서 각기 수행할 것을 판단한다면, 자기 성품(自性)의 선정과 지혜를 닦는 사람은 돈오(頓悟)하는 방법에서 노력 아닌 노력으로 움직임과 고요함을 함께 활용하여 자기의 성품을 닦아 스스로 불도를 이루는 사람이다.
상(相)을 따르는 방법으로 선정과 지혜를 닦는 것은 깨닫기 전에 점차로 수행하는(漸門) 근기가 낮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이며, 마음마다 의혹을 끊고 고요함만을 취함을 수행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 두 방법의 수행은 돈(頓)과 점(漸)이 각각 다르니 혼동하면 안된다. 그래서 깨달은 뒤에 수행하는 방법에서 상을 따르는 방법을 겸해서 말한 것은 점차로 닦는 점문의 열등한 근기를 가진 사람이 수행할 것만 전적으로 취한 것이 아니라 그 방편을 취하여 임시로 쓸 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단번에 깨닫는 돈문(頓門)에도 근기가 뛰어난 사람이 있고 열등한 사람도 있으므로 한 가지 예로 그 닦는 길을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번뇌가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홀가분해서 선(善)에도 근기가 뛰어난 사람이 있고 열등한 사람도 있으므로 한 가지 예로 그 닦는 길을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번뇌가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홀가분해서 선(善)에서도 선을 떠나고, 악에서도 악을 떠난 분별심이 없는 무심(無心)한 경지에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성품(自性)의 선정과 지혜에 의지해서 자유롭게 걸림이 없이 겸해 닦으면 천진(天眞)하여 조작이 없다.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항상 선정(禪定)이어서 자연의 이치를 성취할 것이니, 어찌 상을 따르는 방법을 통해 마음을 다스릴 필요가 있겠는가. 병이 없으면 약도 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비록 먼저 단번에 깨달아 돈오(頓悟)했더라도 번뇌가 두텁고, 지난날 익힌 버릇이 굳고 무거우면 어떤 대상이나 상황을 대할 때마다 생각마다 감정을 일으키고, 얽힌 인연을 만날 때마다 마음이 번뇌의 대상을 만난다.
혼침과 산란함에 떨어져 고요함과 밝게 아는 마음이 흐려지는 사람은 상(相)을 따르는 방법의 선정과 지혜를 통해서 마음을 다스려서 혼침과 산란함을 고루 다스려 무위(無爲)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
깨닫기 전의 수행은 비록 수행하기를 잊지 않고 익히고 닦았지만 곳곳에 의심을 일으켜 자유롭지 못함이 마치 어떤 물건이 가슴속에 걸려 있는 것 같아서 불안한 모습이 항상 앞에 나타난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 공부가 성숙하게 되면 몸과 마음 그리고 인식의 대상이 되는 객관 세계가 편안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편안해졌더라도 의심의 근본 뿌리가 끊어지지 못한 것은 마치 돌로 풀을 눌러 놓은 것 같아서 생사의 경계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깨치기 전의 닦음은 진정한 수행이라고 할 수 없다.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록 대치하는 방편이 있더라도 생각마다 의혹이 없어 더럽히거나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지내면 저절로 천진하고 묘한 성품에 합당하여 그대로 걸림없이 고요하고 분명해서, 생각마다 온갖 대상이나 경계에 관계하면서도 마음마다 모든 번뇌를 아주 끊어서 자기 성품(自性)을 떠나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고루 평등히 가져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고 앞에서 말한 근기가 뛰어난 사람과 아무런 차별이 없다.
상(相)을 따르는 수행 방법의 선정과 지혜가 비록 점차로 닦는 열등한 근기의 수행이지만,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서 보면 쇠로써 금을 만들려는 것과 같다. 이런 도리를 안다면 어찌 두 가지 수행 방법의 선정과 지혜에 앞뒤의 차례가 있다고 두 가지로 보는 의심이 있겠는가.
바라건대, 수행자는 이 말을 깊이 잘 되새겨 다시는 의심을 일으켜 스스로 물러서지 않도록 하라. 대장부의 뜻을 갖추어 최상의 깨달음을 구하려 한다면 다음의 말을 명심하라.
결코 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말의 참 뜻을 바로 알아, 모든 것을 자기에게 돌리고 근본에 합당하면, 스승 없이 얻은 참 지혜가 저절로 드러나고, 천지의 이치를 명확하게 알아, 지혜의 몸을 성취하되 다른 사람에 의하여 깨달은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오묘한 뜻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긴 하지만 일찍이 지혜의 씨를 심은 대승(大乘)의 근기가 아니면 한 생각에 바른 믿음을 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비방하며 무간지옥의 업을 짓는 이가 많다. 그러나 믿고 받들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한 번 귀를 스치는 잠깐 동안의 인연을 맺으면 그 공덕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
'유심결(唯心訣)'에 이르기를 "듣기만 하고 믿지 않더라도 부처가 될 종자의 인연을 맺고, 배워서 이루지 못하더라도 인간과 천상의 복보다 뛰어나다"라고 했다.
그렇게 해도 성불할 바른 인연을 잃지 않는데 하물며 들어서 믿고, 배워서 성취하여 잊지 않고 수호하는 사람의 공덕이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지난날 괴로움 속에서 윤회하던 업을 돌이켜 보면 몇천 겁 동안 어두운 지옥에 떨어져서 온갖 고통을 받았을 것인가. 불도(佛道)를 구하고자 하여도 착한 벗을 만나지 못하여 헤매면서 깨닫지 못해 얼마나 많은 나쁜 업을 지었던가. 생각할수록 저절로 긴 한숨이 나오는데 어찌 또 게으르게 방일해서 과거의 그때 같은 재앙을 다시 받겠는가.
그리고 누가 나에게 지금 인간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만물의 영장이 되어 진리의 길을 닦도록 하였는가. 실로 눈먼 거북이가 바다에서 천우신조로 나무 판자를 만나는 것과 같은 다행함이요, 하늘에서 겨자씨를 던져 그 겨자씨가 바늘 끝에 꽂히는 것과 같은 희유함이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원컨대 모든 수행자들은 게으르지 말고 탐욕과 음탕한 것에 집착하지 말고, 머리털에 붙은 불을 끄듯이 살피고 돌아보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무상한 세월은 빨라서 아침 이슬과 같고, 사람의 목숨은 지는 해와 같다. 오늘은 살아 있을지라도 내일은 기약하기 어려우니 간절히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라.
선한 행위의 결과로써 지옥·아귀·축생 등 삼악도(三惡道)의 괴로운 윤회를 면하고, 천상과 인간 세상에서도 큰 즐거움의 과보를 누리는데, 하물며 마음을 깨끗이 닦는 이 최상의 높은 가르침은 잠시 믿기만 해도 그 공덕은 가히 어떠한 비유로도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경전에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三千大千) 세계에 가득 찬 온갖 보배로써 모든 중생들에게 베풀어 보시 공양하여 모두를 만족하게 하고, 또한 그 세계의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성자의 지위를 얻게 한다면 그 공덕은 한량없이 클 것이다. 그러나 잠깐 동안이라도 이 법을 바르게 생각하여 얻는 공덕보다는 못하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법문은 가장 존귀하고 어떤 공덕으로도 비유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한 생각의 깨끗한 마음이 바로 도량(道場)이니, 갠지스강의 모래와 같이 많은 수효의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훌륭하다. 보배로 된 탑은 언젠가는 무너져 티끌이 되겠지만 한 생각의 깨끗한 마음은 마침내 바른 깨달음을 얻어 부처를 이룬다."
원컨대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 말을 깊이 음미하여 간절히 마음에 새겨라. 이 몸을 금생에 건지지 못한다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건질 것인가. 지금 만약 닦지 않으면 만겁에 어긋날 것이고, 힘써 닦으면 어려운 수행도 점차로 어렵지 않게 되어 공부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애닮다. 요즘 사람들은 배고파하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보고 먹을 줄 모르고, 병이 들어 앓고 있으면서도 제일 가는 의사가 주는 약을 먹을 줄 모르는구나. 어리석어 내 말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로서도 어찌할 수 없구나.
세상의 일들은 그 모양도 볼 수 있고 그 공덕도 경험할 수 있으므로 사람들은 한 가지 일만 얻어도 희귀하다고 찬탄한다. 그러나 우리의 이 마음은 그 형상을 볼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으며 마음으로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악마와 이교도들이 비방과 훼방을 하려 해도 방법이 없고, 하느님과 모든 신들이 칭찬하려 해도 미칠 수가 없다. 그런데 하물며 지식이 얄팍한 보통 인간들이야 어찌 흉내내고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우물 안의 개구리가 어떻게 바다의 넓음을 알며, 여우가 어떻게 사자의 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어지럽고 죄악이 성행하는 말법(末法) 세상에 이 법문을 듣고 희구하다는 생각을 내어 믿고 받아 지닌 사람은 이미 한량없는 세월에 많은 성인들을 섬기어 온갖 선근(善根)을 심었고, 지혜의 바른 인연를 깊이 맺은 최상의 근기임을 알 수 있다.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이 글귀(사구게)에 능히 신심을 내는 이는 한량없는 부처님이 계신 데서 온갖 선근을 심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원컨대 도를 구하는 사람은 미리 겁을 내거나 약한 마음을 내지 말고, 부디 용맹스런 마음을 내야 할 것이니, 지난 세월에 얼마나 착한 인연을 쌓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렇게 훌륭한 법문을 믿지 않고 스스로 못났다고 자처하여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 지금 닦지 않으면 비록, 지난 세상에 선근이 있었더라도 지금 그것을 중단하였기 때문에 더욱 어렵고 점점 멀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미 보배가 쌓인 곳에 왔으니 결코 빈손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
한 번 인간의 몸을 잃으면 만겁(萬劫)을 두고도 인간의 몸을 받기가 어렵다. 바라건대 마땅히 삼가라. 어지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보배가 있는 곳을 알면서도 구하지 않고 오래도록 가난함만을 원망할 것인가. 만약 보배를 얻고자 한다면 가죽 주머니인 육신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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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좋은인연입니다()날마다 좋은날되셔요()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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