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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열린 사회를 지향한 칼 포퍼 [CEO 리더십 김형철]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52 15.01.23 10: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CEO 리더십]

열린 사회를 지향한 칼 포퍼, 열린 소통만이 열린 조직을 만든다

 

 

“아빠 백조는 무슨 색깔이야?”
“당연히 흰색이지!”

이제 아빠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한 마리의 흰색 백조를 보여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흰 색깔의 백조를 많이 보여주면 줄수록 ‘백조는 희다’는 명제의 신빙성은 더욱 올라갈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흰 백조를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백조가 희다’는 명제는 과학적으로 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 한 마리의 검은 백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비로소 그 주장이 옳다는 게 확정됩니다.

그런데 호주에 가면 검은 백조, 즉 블랙 스완이 버젓이 존재합니다. 아이 아빠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보다 쉽게 진리에 다가갈 수 있었을 텐데요. 자, 여러분이 찾지 못한 블랙 스완은 무엇입니까.

‘내일도 해가 뜰까?’를 고민하거나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태양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떴다고 해서 미래에도 영원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귀납법의 오류에 속고 살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매일 아침 해는 뜬다’는 명제처럼 단단한 진리도 부정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다른 것들은 말할 것도 없겠죠.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가 어떤 방향을 가리킨다고 해서 그 방향이 무조건 옳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지입니다.

 

 

 

 

자기만족과 자만심에 빠져선 안 되는 이유

 

진리의 발견은 정해진 코스를 따라 가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트라이 앤드 에러(Try and Error)를 통해서만진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아니 진리를 향해 나아갈 뿐입니다. 모든 주장은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을 때 역설적으로 진리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리더가 자기만족과 자만심에 빠져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런 말을 했냐고요? 바로 영국의 저명한 철학자 칼 포퍼입니다.

1902년 유대계 변호사의 아들로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포퍼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뉴질랜드에서 연구하다가 영국 런던 스쿨 오브 이코노믹스에서 교수로 활동했습니다. 나치 시절 그는 외가 쪽 친척 16명이나 홀로코스트로 죽는 핍박을 경험했는데요. ‘게르만 민족이 지구상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독선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나치, 그 광기에 희생당한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평생 한을 품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유명한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 이란 책을 통해 플라톤에게 집중 포문을 엽니다. 그런데 하필 왜 플라톤이냐고요? 그것은 “영원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플라톤의 주장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플라톤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며 나아가 ‘나는 항상 옳다. 나는 진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을 공격했죠.

“사람들이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더 큰 무지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열린 사회’를 지향한다는 포퍼는 아이로니컬하게도 학문적 토론에 있어서만큼은 조금의 양보도 없고 성격도 불같이 급했습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포퍼가 다른 사람의 의견에 ‘열린’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고 비꼬기도 했습니다. 물론 사적인 자리에서 그는 누구보다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말입니다.

포퍼에게는 대단히 유명한 제자가 있습니다. 바로 투자의 천재로 불리는 조지 소로스입니다. 조지 소로스는 스승의 철학을 따라 독재사회, 특히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투자를 결정했습니다. 그가 자유를 신장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그것은 포퍼의 가르침에 기인할 것입니다.

“우리 회사에는 대단히 자랑스러운 분이 한 분 있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제품을 개발한 분이 지금 현재 부사장님입니다. 기술계에서는 전설로 통하지요.” 회사 소개 때 이런 내용을 자랑하거나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지요. 그 자랑 이면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분’이 그 회사에 ‘살아 있는 전설’로 있는 한 다른 방식의 기술 혁신이 그 회사에서 일어나는 것은 대단히 힘들지 모른다는 것이지요.

‘나를 비판하라’고 부하들에게 다그칠 수 있는 리더가 있는 곳만이 진정으로 열린 조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비판하려고 할 때 조심하고 움츠러들게 마련입니다. 공개적인 비판을 가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더더군다나 상대방이 자신의 상관이라면 말할 것도 없겠죠. 리더가 모두를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마치고 질문할 것이나 이의가 있으면 말해 보라고 합니다. 이렇게 기회를 주는 자신에 대해 매우 흡족해 합니다. 예상대로 모두들 조용합니다.

“없지? 그럼 끝!” 그리고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면 “그때 말하라고 했잖아. 이제 와서 그 얘기를 하면 시간이 너무 늦잖아”라고 화를 내지요. 이런 리더는 지금 누구 때문에 일이 이렇게 뒤늦게 처리되고 어긋나게 됐는지 끝내 이유를 모를 것입니다.

 

진리는 반증을 통해 증명된다

 

모두가 보스의 눈치만 살피는 조직은 닫힌 조직입니다. 닫힌 조직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오직 찬란했던 과거만 있을 뿐이지요. 그 어느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있는 특권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부하들에게 보여주는 리더는 자신감 있는 리더입니다. “내가 항상 옳았다”고 과거형으로 변명하는 리더는 비겁한 리더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점쟁이를 찾아가 본 적이 있습니까. 어떨 때는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경기를 예측하는 것보다 점쟁이의 말이 더 잘 맞아 놀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의심이 듭니다.
 
‘왜 점쟁이의 말은 절대로 틀리지 않을까’하는 생각 말입니다. 참 말을 잘도 만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절대로 틀리지 않는 말은 과학적 진리가 아닙니다.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때 그 말은 진리일 수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틀릴 수 있는 길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때 과학적 진리가 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점쟁이가 말하는 것처럼 아무런 반박이 불가능하도록 부하들과 소통하는 상사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소통이 아니라 불통입니다. 상사의 말에 토를 달지 못하도록 하면 부하들은 숨 막혀 죽고 맙니다. 아니 결국 그 조직은 죽어버리고 맙니다.

수없는 실패 끝에 전구 발명에 성공한 에디슨은 실패할 때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전구를 만들 수 없는 방법을 또 하나 배웠다.”

긍정적 사고의 극치지요.
 
그런데 이 긍정적 사고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는 태도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과거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이죠.

‘실패로부터 배워라’는 말이 중요한 것은 원래 진리라는 것 자체가 반증을 통해 증명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누가 먼저 블랙 스완을 발견하느냐는 게임입니다. 열린 조직만이 블랙 스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 잘못을 과감하게 지적해 다오”라고 외치는 리더의 열린 소통만이 열린 조직을 만들 수 있습니다.

김형철 연세대 철학과 교수


/ 한경 

 

 

 

 

칼 포퍼

비판적 합리주의자

 

20세기 투자(혹은 투기)의 귀재, 조지 소로스는 자신의 투자전략은, 수많은 경험적 사례에 의한 반증을 견딘 이론만이 받아들일 만하다고 말한 포퍼(K. R. Popper)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소로스는 런던 정경대학에서 포퍼의 강의를 들은 포퍼의 제자 중 한 사람이다. 최근 미국 경기 불황기에도 막대한 투자이익을 남긴 소로스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포퍼의 저서에서 이름을 따서 ‘열린사회 재단’이라는 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또 독일 수상을 지낸 헬무트 슈미트와 헬무트 콜, 그리고 폰 바이츠제커 독일 대통령, 마가렛 대처 영국 수상은 자신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철학자로 포퍼를 꼽고 있으며, 노벨 의학상 수상자인 피터 미더워,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자크 모노도 포퍼를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탁월한 철학자로 평가했다. 이처럼 철학계는 물론 정계, 재계, 그리고 다른 학문 분야의 지성인들에게 포퍼만큼 널리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왜 포퍼 철학이 20세기 지성에 그토록 큰 영향을 미친 것일까?

 

 

마르크시즘과의 조우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강의를 듣다.

 

포퍼는 1902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유대계 변호사였던, 포퍼의 아버지는 15,000권이 넘는 장서를 소유할 만큼 지적인 욕구가 강한 사람이었고, 그러한 욕구는 포퍼에게 고스란히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지적 욕구에도 불구하고, 포퍼는 1차 세계대전의 혼란 속에서 제도교육에 환멸을 느껴 고등학교를 중퇴한다. 그러나 그의 지적인 욕구는 그로 하여금 빈 대학에 청강생으로 등록하게 하였고, 그는 그 곳에서 자신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경험을 한다. 그 하나는 마르크시즘과의 조우이고 다른 하나는 아인슈타인으로부터 그의 상대성이론의 강의를 들은 것이다.

 

 

 

포퍼가 마르크시즘과 만나고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들었던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 <출처: Gryffindor at en.wikipedia.org>

 

 

포퍼는 10대 후반부터 마르크시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등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조국인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합병할 때, 마르크주의자들이 그 사건을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의 자연스러운 귀결, 즉 공산혁명으로 가는 필연적인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마르크스주의를 일종의 전체주의로 규정하고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사상편력을 정당화라도 하듯이, “젊어서 마르크스에 빠지지 않으면 바보지만, 그 시절을 보내고도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으면 더 바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1922년 빈 대학에 정규학생으로 등록을 하여, 26세가 되던 1928년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그런데 이 무렵 서유럽 철학계의 중심에는 빈 서클(Vienna Circle)이라는 모임이 있었다.

 

그들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 영향을 받아, 20세기 새로운 철학인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를 태동시켰다. 논리실증주의의 핵심적인 주장은 귀납주의와 검증가능성 원리라고 할 수 있다.

 

귀납주의는, 소박하게 설명해서, 과학이 경험관찰로부터 시작되고, 과학법칙은 경험관찰 사실을 일반화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이다. 예를 들어, 관찰된 몇 개의 에메랄드가 초록색이라는 사실로부터 그 사실을 일반화하여 “모든 에메랄드는 초록색이다”는 보편적인 주장을 얻어낸다는 것이다. 그런 일반화 과정은 대표적인 귀납추리이기 때문에, 이러한 논리실증주의의 주장을 귀납주의라고 한다. 논리실증주의의 검증가능성 원리란, 어떤 진술이 의미 있는 진술이기 위해서는 그 진술의 참 또는 거짓이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모든 에메랄드는 초록색이다”는 진술은 ‘초록색인 에메랄드’의 관찰을 통해서 검증되는 셈이고, 따라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신은 자비롭다”와 같은 진술을 검증할 관찰 사실은 없고, 따라서 이 진술은 무의미하다는 것이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요컨대 논리실증주의자들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어떤 과학적 주장의 정당성은 그것을 지지하는 관찰과 경험의 정도에 달려 있고, 과학 이론은 다양한 종류의 경험적 사실에 기초하며, 그런 경험적 사실의 정도가 많을수록 그 이론의 설득력은 높아진다는 것이다.

 

 

지적인 거장들의 주장에 반기를 든 젊은 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

 

이러한 지적인 거장들의 주장에, 채 서른이 되지 않은 젊은 포퍼가 반기를 든 것이다. 그는 과학이론을 검증하는 아무리 많은 수의 관찰사례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증거가 이론의 진리성을 논리적으로 확립해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많은 ‘초록색의 에메랄드’를 관찰한다고 해도 ‘모든 에메랄드는 초록색이다’는 진술이 결정적으로 참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단 한 차례의 반박사례(초록색이 아닌 에메랄드)만 발견되어도 그 진술은 거짓이 되고 만다. 그것이 바로 포퍼가 귀납주의를 포기하고 과학의 방법이 연역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다음 두 논증을 보자.

 

 

논증1) 모든 에메랄드가 초록색이라면 다음에 관찰될 에메랄드도 초록색일 것이다.
          관찰된 에메랄드가 초록색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에메랄드는 초록색이다.

 

논증2) 모든 에메랄드가 초록색이라면 다음에 관찰될 에메랄드도 초록색일 것이다.
          초록색이 아닌 에메랄드가 관찰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에메랄드가 초록색인 것은 아니다.

 

 

귀납주의는 논증1)에 의지하는 이론이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이는 논리적으로 오류(후건 긍정의 오류)이다.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은 논증2)이고, 포퍼는 이를 토대로 과학이론의 등장과 발전을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퍼는 과학의 발전은 기존 이론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경험적 사실이 관찰됨으로써, 그 이론이 반증되는 과정을 통해서 달성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과학자는 기존 이론을 검증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고, 반증할 수 있는 관찰 사실을 발견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반증주의(falsificationism)라고 한다.

 

 

철학자 칼 포퍼. <출처 : Wikipedia>

 

 

그러면 과학이론이 경험관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시작되는 것인가? 포퍼에 따르면, 과학이론은 기존의 이론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고 발생한 사실을 적절한 방식으로 설명하기 위해 제안된 가설적인 추측이다. 즉 과학이론은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고 발생한 사실을 적절하게 설명하기 위한 가설을 제안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가설이 관찰을 통해서 반증된다면 그 가설은 포기되고 다른 가설이 제안되는 과정이 지속되고, 이러한 과정에서 반증을 견디고 살아남은 가설은 과학이론의 지위를 확보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반증을 견디고 살아남은 과학이론은 반증되어 버려진 과거의 이론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참에 가까울 뿐, 그것이 반드시 ‘참’이라고 보장할 수는 없다.

결국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은 실수와 착오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추측과 반박(conjecture and refutation)이라는 시행착오를 거치는 것이다. 이처럼 과학은 문제에 부딪혀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합리적인 가설을 제기하고, 그것을 반증하는 과정을 통해서 성장한다는 그의 관점을 ‘비판적 합리주의(Critical Rationalism)’라고 한다.

 

비판적 합리주의는 인간의 이성이 완벽하지 않고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데, 즉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를 오류가능주의(fallibilism)라고 한다. 오류가능주의에 따르면, 이성은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서로의 비판을 허용하고 반증을 통해 점진적 방법으로 나아가야만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포퍼는 자신을 계몽철학의 전통에 속하는 마지막 철학자라고 말한 바 있다. 비판적 합리주의는 이성을 중시하기는 하지만 방법론적으로만 이성을 중시할 뿐이고, ‘이성’ 자체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논리실증주의에 반대하여 반증주의를 제안한 그의 첫 저서, [탐구의 논리]가 1934년 출간되었다. 그 저서는 1930년부터 씌어져서 1932년 완성되었으나 출판사를 찾지 못해 2년여를 방황하다가 상당히 많은 부분을 제거한다는 조건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으로 포퍼는 빈 서클의 회원들에게도 알려졌지만, 여전히 그는 그들의 모임에 초대되지 못했고, 심지어 노이라트(O. Neurath) 같은 빈 서클의 회원은 포퍼를 자신들의 ‘공식적인 적’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고 한다.

 

포퍼는 철학계에서 인정을 받기도 전에, 1930년대 나치의 등장으로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1936년 뉴질랜드로 망명을 떠난다. 그곳에서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의해서 합병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본격적으로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을 시작한다. 그 결과 1944년 [역사주의의 빈곤], 1945년 유명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 출간된다.

 

 

 

과학철학에 대한 견해의 확장

사회철학과 정치철학에 대한 포퍼의 견해

 

 

전체주의에 의해 세계대전이라는 불행에 빠졌을 때 포퍼는 전체주의가 역사주의의 산물임을 지적했다. <출처 : Wikipedia>

 

 

사회철학과 정치철학에 대한 포퍼의 견해도 과학철학에 대한 그의 견해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반증주의를 주장한 포퍼는 어떤 이론이든지 그것이 과학이라는 범주에 포함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반증가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를 토대로 진짜(genuine) 과학과 사이비과학(pseudo-scie nce)을 구별한다. ‘모든 물체는 열을 받으면 팽창한다.’는 진술은 반증가능하다. 왜냐하면 열을 가해도 팽창하지 않은 물체가 존재한다면 이 진술은 거짓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험적인 투기는 행운을 낳는다.’는 진술은 반증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진술을 반증하는 사례는 모험적인 투기를 했음에도 행운을 낳지 않는 경우일 텐데, 모험적인 투기란 어느 정도로 위험부담을 가져야 모험적인 투기인지, 행운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의 이익을 낳는 경우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에 어떤 일이 발생해도 이 진술을 결정적으로 반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이론이 진정한 과학이론이 되기 위해서는 그 이론을 구성하는 진술들이 반증가능해야 하고, 반증가능하지 않은 진술로 구성된 이론은 참다운 과학이론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포퍼가 반증가능하지 않아서 진짜 과학이라고 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이론 중 대표적인 것이 아들러의 심리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다. 아들러의 심리학은 열등감이 인간행동에 동기를 부여한다고 주장한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어린 아이를 보았을 때, 어떤 사람은 그를 구하기 위해서 뛰어들 것이고, 어떤 사람은 못 본 척 외면할 것이다. 그런데 아들러의 심리학은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것은 열등감이 그 동기라고 설명한다. 결국 그의 이론은 모든 행동을 다 설명하고, 따라서 어떤 행동이 발생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이론은 반증되지 않는다. 포퍼의 아들러에 대한 설명이 옳다면 아들러의 이론은 반증가능하지 않고 따라서 참다운 과학이론이라고 할 수 없다.

 

포퍼는 역사주의에 대해서 그 핵심적 원리를 “역사는 특수한 역사적 법칙이나 진화적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며 그 법칙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운명을 예언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역사주의에는 역사의 발전법칙을 신의 의지로 설명하는 유신론적 역사주의, 역사 발전법칙을 자연의 법칙으로 취급하는 자연주의적 역사주의, 그리고 역사 발전의 법칙을 정신적 발전의 법칙으로 취급하는 정신적 역사주의, 역사를 경제적 발전의 법칙으로 설명하는 경제적 역사주의 등이 있다.

이처럼 다양한 역사주의가 있지만, 모든 역사주의가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역사가 불가피하게 어떤 원리나 규칙에 따라 결정된 목적(determinate end)을 향해서 발전해나가고 따라서 역사의 미래를 법칙에 따라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 이론이다.

 

포퍼는 두 가지 이유로 역사주의를 비판한다.

첫 번째 이유는 역사주의가 반증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사회과학의 중요한 작업은 발생한 사회현상을 설명하고 인간의 사회적, 정치적 발전에 대해서 예측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마르크스주의도 미래의 역사에 대해서 예측을 한다. 문제는 그 예측이 지지될 수 없는 경우에도 마르크스주의는 미봉적인(ad hoc) 가정을 덧붙이거나 수정함으로써 그 예측을 여전히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포퍼는 마르크스주의가 초기에는 진짜 과학적이었지만, 결국 사이비 과학, 도그마로 전락했다고 주장한다.

 

포퍼가 역사주의를 비판하는 두 번째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인간 이성에 대한 오류가능주의와 관련되어 있다. 역사주의의 미래 예측은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등장하는 필연적인 것이므로 거짓일 수 없는 진리일 것이고, 이것은 오류가능주의와는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의 산물인 지식은 그 자체로 절대적 진리가 아니고, 그런 의미에서 반성과 비판의 대상이어야 한다. 과학철학의 방법론인 ‘비판적 합리주의’가 사회철학의 원리로 확장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지식과 이론에 대한 비판이 가능한 사회가 바로 열린사회이다.

 

나치즘이라는 전체주의에 의해 세계대전이라는 불행에 빠졌을 때, 포퍼는 전체주의가 역사주의의 산물임을 지적한다.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된 유토피아적 사회철학은 헤겔과 마르크스로 이어지면서 서양 지성사의 한 축을 형성해 왔는데, 바로 이러한 유토피아적 사회철학은 “인간의 역사는 개인의 노력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해진 법칙대로 진행된다.”는 역사주의에 토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역사주의를 “인류의 낡아빠진 꿈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말하면서, “역사는 내적인 원리나 법칙에 따라 진화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사회는 열린사회인데, 역사주의는 그러한 열린사회로의 발전을 방해하고, 독단적이고 전제적인 이데올로기를 강요한다는 점에서 비판되어야 한다는 것이 포퍼의 주장이다.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

끝없는 탐구를 계속해야하는 이유

 

포퍼는 열린사회의 특징으로, 한 사회에서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하고, 그 토론이 정치적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과 사회제도는 사회구성원의 자유와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점, 두 가지를 든다. 우리가 이런 열린사회를 지향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이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만 사회가 진보할 수 있으며 누구도 궁극적인 진리를 독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규범이나 가치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필요에 의해서 언제든 개선시켜 가야 하는 인간의 과제이고, 따라서 사회의 진보는 합리적인 비판을 통해서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정해진 원리나 법칙에 따라 결정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린사회를 거부하는 사회는 모두 암암리에 전제적인 이데올로기를 궁극적인 진리라고 주장하고 강요한다는 점에서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반증된 과학이론이 포기되고 새로운 가설이 다시 시험무대에 등장하는 것처럼, 많은 시민의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회이론이나 정책은 포기되고 새로운 대안이 시험되는 사회가 바로 열린사회이다. 열린사회에서는 사회구성원들의 비판적 탐구에 의해서 사회정책이 포기되고 수정될 수 있다. 과학이론에 대한 그의 설명처럼, 그리고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는 그의 마지막 에세이집의 제목처럼, 우리의 삶은 문제 해결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비판적 이성으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끝없는 탐구]를 계속해나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포퍼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인 것이다.

 

 

글 송하석 / 아주대 철학 교수

불어불문학을 공부하다 철학에 관심을 갖고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학교에서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클레어몬트 대학에서 진리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언어철학, 심리철학, 논리학에 관한 여러 논문을 발표하였고, 우리 사회가 논리적인 사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리더를 위한 논리훈련]을 출간하였다. 지금은 아주대학교 기초교육대학에서 철학과 논리학을 가르치고 있다.

 

/ 네이버 서양철학

 

 

 

 

 

비판적 합리주의자 칼 포퍼의 생애와 사상

 

 

안상헌(충북대 철학과 교수)

 

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우리에게는 ‘열린 사회’라는 유행어를 가져다주었던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는 92세의 나이로 지난 9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포퍼가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주요 저작인 ?열린 사회와 그 적들?(1945)이 번역되어 읽혀지고, 같은 제목의 소설이 등장하면서 ‘열린 사회’라는 말이 유행어가 된 이후의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철학계에서는 70년대 중반부터 그의 저술 ?탐구의 논리?(1934), ?역사주의의 빈곤?(1945), ?추측과 반박?(1963)과 ?객관적 지식?(1972) 등을 중심으로 과학철학과 사회철학 분야에서 연구가 이루어져왔다.

포퍼가 평생을 바친 철학적 문제는 지식이론에 관한 것으로 ‘과학적 지식’이 ‘과학적인’ 까닭을 밝혀내는 것이었으며, 사회철학에서는 이를 토대로 ‘비판적 합리주의’와 ‘부분적 사회공학’을 정립하는 일이었다.

 

1. 포퍼의 생애

 

포퍼는 1902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양친은 유태교인이었으며 포퍼의 어린 시절 기독교로 개종했다. 70세 때 씌어진 철학적 자서전에 의하면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사상적으로 존 스튜어드 밀의 급진적 자유주의를 신봉했던 지식인이었다. 포퍼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을 읽고 함께 토론하기를 좋아했는데,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고 진지하면서도 명쾌하게 표현하는 아버지에게서 큰 감명을 받았다.

 

포퍼는 상당히 조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네다섯 살 때 벌써 깊은 사랑에 빠진 경험이 있으며, 철학적 문제의식도 12살 무렵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1차 대전 중에 김나지움에 다녔으나 학교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18년 학교를 떠나 비엔나대학의 청강생으로 들어갔다가 22년 정식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에서는 역사, 문학, 철학, 심리학을 두루 수강했으나, 수학과 이론물리학 강의를 제외하고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한 때 그는 철저한 육체 노동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육체 노동에도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육체의 허약함으로 인해 번번히 좌절되었다. 22년 대학을 졸업, 초등교사 자격증을 획득했으나 자리가 없어 졸업 후 2년 동안 캐비넷 제작 견습공 생활을 했으며, 후에는 고아들을 위한 사회사업에 얼마간 종사했다. 그러다가 1925년에 교육대학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28년에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29년에는 중등학교 수학 및 물리학 교사자격증을 획득했다. 이 때 그는 동료 학생이었던 아내를 만나 30년에 결혼하였다.

 

1929년부터 쓰기 시작한 ?인식론의 두 가지 문제?는 32년에 완성되어 비엔나 학파의 ?과학적 세계관 총서?로 발간하기로 하였으나, 240쪽 분량으로 요약하라는 요청을 받아 요약본 형태로 34년 ?탐구의 논리?로 출간되었다. ?탐구의 논리?가 알려지자 영국의 캠브리지, 옥스포드 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초청하기 시작했으며, 런던 경제정치대학에서는 하이에크 교수의 세미나에서 ?역사주의의 빈곤?을 강의했다. 그 후 캠브리지 대학과 뉴질랜드 캔터베리 대학의 철학교수로 동시에 초빙되었으나 뉴질랜드로 가기로 결정하고, 37년 3월 뉴질랜드에 도착했다. 35살에 이르러서야 철학교수가 된 그는 인식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38년 3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다시 침공하자 뉴질랜드에 머물면서 ?역사주의의 빈곤?과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출판했다. 46년 1월에 하이에크의 주선으로 런던 경제정치대학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49년 논리학 및 과학적 방법론 정교수가 된 이래 정년퇴직 때까지 교수로 일했으며, 은퇴 후에도 삶을 마감할 때까지 런던 근교에 살았다. 은퇴 후 그는 영국 왕실로부터 학문적 공로를 인정받아 작위를 수여받았다.

 

 

2. 과학과 사이비과학

 

포퍼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아들러 등의 이론을 비판하기 위해 과학이론과 사이비과학의 구분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이 당시 비트겐쉬타인과 카르납을 중심으로 하는 비엔나 학파에서는 이른바 ‘논리실증주의’라는 이름 아래 과학과 형이상학의 구분 기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들은, 과학은 경험과 관찰을 통해 정립되는 사실명제, 즉 유의미한 명제의 논리적 결합체이며, 형이상학은 경험과 관찰에 기초하지 않는 무의미한 명제의 나열에 불과하기 때문에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포퍼는 과학과 형이상학의 이러한 구분 기준에 대해, 형이상학을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형이상학의 과학에 대한 선구자적 역할을 부정한다는 점과, 의미기준을 둘러싼 비엔나학파의 논의는 새로운 스콜라주의로 경도될 수 있다는 점에 우려를 나타냈다.

 

포퍼는 자신의 과학과 사이비과학의 구분 기준은 과학과 형이상학의 구분 기준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과학적 지식이란 개별적 사실명제의 귀납적 일반화가 아니라 아직 반박되지 않은 가설적 이론체계로서, 반박되기 전까지만 유효한 잠정적인 진리체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모든 백조는 희다”라는 명제는 실제로 검은 백조가 발견되기 전까지만 참이며 문제해결 능력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명제는 하나의 가설적 추측에 불과하며, 이 명제는 반박이 가능하다는 전제 아래서만 의미를 지닌다. 즉 과학적 이론을 제기하려면 먼저 “나는 어떤 경우에 나의 이론이 유지될 수 없는지”에 대해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이비과학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 답변할 수 없기 때문에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3. ‘비판적 합리주의’와 ‘열린 사회’

 

‘반증가능성’ 혹은 ‘반박가능성’을 과학과 사이비과학의 구분기준으로 제시한 그는, 사회과학자로 자처해 온 마르크스주의자나 정심분석학자들에 주목했다. 특히 그의 문제의식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 집중되었다. 그는 청년시절 친구의 권유로 사회주의 학생연합에 가입하여 활동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17살 때 비엔나 시위에서 경찰서에 체포되어 있던 공산주의자의 피신을 돕기 위해 발포한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공산주의와의 관계를 청산했다. 이 때부터 그는 자본주의가 사회주의 혁명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낸다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주장이 과연 ‘과학적’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으며, 여기에서 더 나아가 보다 나은 사회를 가져다준다는 공산주의적 교의의 지식근거가 되는 역사의 발전법칙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덜 폭력적이고 더 정의로운 세계를 원하는 것이 과연 지식에 근거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기대감에 불과한 것인지를 대해 생각하면서, 일단 복잡한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얼마나 무지한 일인지를 깨닫지 못한 자신에 대해 스스로 놀랐다고 술회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느껴온 자신의 무지에 대한 자각과 무지의 끝없음에 대한 자각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포퍼에 의하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이러한 비판에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법칙에 의하면, 역사의 발전과정은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토대의 변화로부터 점차 상부구조의 변화로 이행한다는 것인데, 실제 역사과정의 변화를 보면 정치적 결사와 투쟁을 통한 위로부터의 변혁을 통해 점차 토대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통해 반박되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과학은 반박된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반박을 벗어나려는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역사 법칙론은 비판에 견디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비판적 방법의 절차를 ‘비판적 합리주의’라고 불렀는데, 비판적 방법은 곧 사회문제의 실천적 해결을 위한 실천적 방법이며 모든 실천이론은 비판에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사회적 실천이론이나 방안은 비판받을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하며 신랄한 비판을 끝까지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념은 어떠한 이론도 완벽한 이론은 없으며 시행착오를 통해 오류를 제거함으로써 보다 나은 이론, 즉 해결책이 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이념의 대전제는 모든 개인이나 집단은 합리성에 입각한 비판적 태도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를 충족시키는 사회를 그는 ‘열린 사회’라 불렀다.

 

‘열린 사회’는 모든 사회 문제에 대한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한 민주적 절차를 가진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는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토론과 절차를 통해 점진적으로 개혁해 나갈 수 있는 사회를 의미한다. 그는 이러한 사회개혁의 전망을 ‘부분적 사회공학’이라 부르며, 이를 이상주의적 원대한 목표나 꿈을 실현하려는 ‘유토피아적 사회공학’과 구별한다.

 

그러나 포퍼의 이러한 사회철학은 몇 가지 반박을 견뎌내야 하는 난점이 있다.

첫째는 포퍼가 지향하는 ‘열린 사회’라는 이념에도 불구하고 현실 세계에는 수많은 ‘닫힌 사회’가 엄존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회에서도 점진적 ‘부분적 사회공학’이 과연 유효한가 하는 점이다.

둘째는 ?역사주의의 빈곤?에서 역사에 대한 모든 법칙적 설명의 시도를 ‘역사주의(historicism)’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러한 비판은 역사이해를 실증주의적 과학관의 한계 안에 묶어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반박가능성’이라는 구분기준이 비엔나학파의 ‘검증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사실적 경험명제에 국한되어 있다. 따라서 ‘죽은 사실’의 집적이 과학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죽은 사실’에 의한 반박도 과학에 대한 반박으로서는 한계를 지닌다. 왜냐하면 과학은 현상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경험과 관찰을 통해 법칙적 연관을 발견해내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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