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유신 이후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쳐 초대 내각 총리대신까지 지낸 거물이다. 그는 조선에 건너온 후 경복궁의 정기(精氣)를 간파하고 왕궁의 정기를 훼손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경복궁과 경운궁(덕수궁) 등의 맥을 끊는 데 주력했다.
경운궁에 불을 지르고 화재를 핑계로 궁의 규모를 지속적으로 축소했다. 경운궁의 원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었으나 ‘나쁜 놈이 드나드는 문’라는 뜻의 대한문(大漢門)으로 바꾸었다. 조선왕궁에 반한 그는 통감관저가 좁다며 경복궁을 조선통감관저 자리로 만들 욕심을 품었다. 경복궁의 왕기를 끊어놓자는 속셈이었다. 그때부터 이토 히로부미에게 암운(暗雲)이 드리웠고, 1909년 10월 북부 중국의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처단 당했다.
비명횡사한 이토에 이어 2대 조선 통감 자리는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가 이어받았다. 프랑스 유학파인 소네는 이토 내각의 사법대신, 야마가타(山縣) 내각의 농상무대신, 가쓰라(桂) 내각의 재무대신을 역임한 다음 추밀고문관을 거쳐 조선통감부 부통감이 됐다. 이토가 죽자 통감직을 물려받았으나 이듬해 병사하고 말았다.
그가 죽은 1910년은 새 통감부자리로 경복궁터가 언급되던 시기였다. 만약 그가 부통감에 머물렀다면 경복궁의 저주를 피할 수 있었을까. 소네가 단시일에 급사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배가(倍加)된 저주가 원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에게 내려진 경복궁의 저주는 당연했다.
소네는 석굴암의 대리석 5층 석탑을 훔친 절도범이다. 이미 조선의 고서는 물론 진귀한 문화재를 닥치는 대로 갈취해 일본으로 보낸 상습범이었으니 그 대가는 당연히 죽음이었다. 1, 2대 통감이 잇따라 죽자 일제는 통감을 ‘총독’이라 개칭했다. 모종의 보이지 않는 힘을 자각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다고 경복궁의 강렬한 기운과 상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1대 조선 총독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로 일본의 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1902년 제1차 가쓰라(桂) 내각의 육군대신에 오른 후 10년 동안이나 자리를 보전하던 데라우치는 1910년 5월, 조선합방을 완결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조선 총독이 됐다. 그리고 명령받은 대로 1910년 8월 22일 합방조약을 강요, 성사시켰다. 이후 1916년 일본 내각의 총리까지 됐지만, 역시 경복궁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1918년 도쿄에서 쌀 소동이 일어나면서 데라우치는 중도하차했고, 다음해 병으로 죽고 말았다.
데라우치 시대인 1915년, 경복궁터에 조선총독부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왕기는 들썩였다. 명성황후의 원혼은 자신을 죽인 일본인이 왕궁을 차지하는 것을 두고만 보지 않았다. 본격적인 경복궁의 저주가 시작된 것이다. 데라우치 역시 문화재 절도와 약탈범이었다. 데라우치가 훔쳐간 희귀 고서적만 무려 1000여종 1500여점에 달한다. 더욱이 데라우치는 단군왕검마저 건드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한민족 혼 말살 차원에서 1910년 11월부터 이듬해 12월말까지 1년2개월 동안 고사서 51종 20여만 권을 강탈했는데, 단군조선에 관한 서적 대부분이 이때 소실됐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끔찍이도 받들던 단군왕검의 기록을 훼손한 데라우치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었다.
2대 총독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다. 가렴주구식 무단통치와 민족운동 탄압으로 악명 높은 인물이다. 1904년 10월 조선주둔군사령관으로 임명된 데 이어 1906년에는 임시 통감대리를 겸임했다. 1914년 원수(元帥)로 승진한 다음 조선총독으로 왔다.
조선 임야조사령, 식산은행령(殖産銀行令), 지세령(地稅令) 따위를 공포해 식민지 지배의 기틀을 마련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무력으로 대응했으나 결국 3.1운동에 책임을 지고 중도낙마하고 말았다. 부당한 권력자에게 경복궁은 단 한 차례도 천수(天壽)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사이토 마코토다.
1919년 8월12일 부임한 일본의 총리 출신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제 3대와 5대 총독을 역임했다. 얼핏 능력과 관운이 탁월한 인물로 오해할 수 있는 경력이다. 해군 대장 출신으로 추후 총리까지 올라갔으니 말이다. 조선 총독으로 있으면서 이른바 ‘문화통치’를 표방했는데 이는 우리의 민족문화를 말살하는 몹시 악랄한 통치를 감행한 인물이다. 민족고유의 전통을 없애려했으니 그의 인생이 순탄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