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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제국 - 잉카
< 2009년 5월 >
<1> 신화의 나라 페루
남미대륙의 중서부에 위치한 페루는 북쪽으로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동쪽은 브라질과 볼리비아, 그리고 남쪽으로는 칠레의 머리부분과 맞닿아있으며 서쪽은 길게 태평양과 맞닿아 있는데 국토의 대부분이 안데스산맥을 품고 있다.
적도보다 조금 아래쪽에 위치한 페루는 해안지역 10%, 안데스 산악지역 27%, 열대 우림지역 63% 등 대체로 세 지역으로 구분된다.
서쪽 태평양 연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해발 3000미터 이상의 고산지대와 밀림으로 이루어진 페루는 면적이 우리나라 남한면적의 13배정도, 인구는 약 3천만 정도인데 수도인 리마(Lima)는 인구가 7백만 정도로 남미에서도 대도시에 속한다.
인구 구성은 원주민인 인디오가 45%,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인 메스티소가 37%, 백인이 15%, 그 밖에 3%가 동양인과 흑인이라고 한다. 언어는 수많은 인디오의 고유 언어들이 있었지만 거의 사라지고 현재 공용어는 스페인어인데 인디오들은 케추아(Quechua)어, 아이마라(Aymara)어를 사용하며 종교는 85%정도가 로마 카톨릭을, 일부 인디오들은 아직도 토속신앙을 신봉한다고 한다.
기원전부터 수많은 부족국가 형태의 집단을 이루며 토착문화를 꽃피웠던 페루고대문명은 15세기 잉카족(일명 케추아족:태양의 사람들)이 나타나 잉카제국를 건설하며 통일되었으나 16세기 스페인의 피사로에 의하여 멸망하기까지 150여 년간 서구 문명을 능가하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특히 거석을 이용한 건축술, 도시건축, 의술 등에서 놀라운 재능을 보였는데 지금도 그때의 건축술과 농업기술 등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처럼 찬란한 고대 잉카문명을 꽃피웠던 잉카인(인디오)들은 지금은 대부분 안데스 산지와 티티카카호 주변의 오지에 거주하며 페루의 대표적인 빈곤층을 형성하고 있고 페루 정부는 그 잉카의 유적들로 인한 관광수입이 국가재정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석유와 철광석 등 풍부한 지하자원이 있지만 페루는 아직도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특히 가난에 허덕이는 인디오들의 삶은 비참할 정도로 열악해 보였다.
<2> 페루로 가는 旅程
새벽 5시 미국 텍사스 북부 러벅공항을 출발하여 1시간 비행 끝에 달라스에 도착, 비행기를 갈아타고 7시 40분에 이륙하여 다시 3시간 20분간 비행끝에 LA공항에 도착하였다. 현지시간은 아침 9시. 미국 중부시간에 맞추어져 있던 시계를 2시간 다시 앞으로 돌려 맞추었다.
LA 공항에서 어정거리다가 함께 여행하게 될 동행을 만났는데 남편이 나와 동갑인 부부로 우리 부부와 넷이 여행을 함께 하게 되었다. 남편이 꽤 큰 회사를 운영한다는 부부는 연세대학 CC커플이라는데 해박한 지식과 유쾌한 유머로 여행 내내 즐거웠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오후 1시 50분 이륙한 리마행 비행기는 8시간 50분 비행 끝에 리마에 도착했는데 현지시간은 12시 50분. 시계를 다시 뒤로 두 시간 돌려놓아야 한다. 러벅을 떠난 후 거의 13시간을 날아서 마침내 꿈에 그리던 페루 땅을 밟게 된 셈이다. 리마 시내 중심가 미라마르(Miramar) 호텔에 짐을 풀고는 서둘러 씻고 긴 비행의 피로를 씻으려 잠을 청했다.
<3> 잉카신화의 중심 - 쿠스코(cuzco)
아침 7시 30분 호텔 식당에서 에그 스크럼블과 커피로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공항으로 나갔다. 9시 40분 이륙한 비행기는 10시 55분에 쿠스코에 도착하였다.
공항에는 10여 명으로 구성된 민속의상을 차려입은 인디오 악단이 나와 인디오 민속 악기로 환영의 음악을 연주하여 주었는데 공항 안의 스피커에서는 싸이먼과 가펑클의 ‘El Condor Pasa(철새는 날아가고)’가 계속하여 흘러나오고 있었다.
잉카제국의 수도로 한때 백만 명이 거주했다는 쿠스코는 케추아어로 ‘세계의 배꼽’이라는 의미라는데 해발 3400미터, 인구는 35만 정도라고 한다. 옛 잉카인들은 하늘은 콘도르, 땅은 퓨마, 땅속은 뱀이 지배한다고 믿었는데 쿠스코는 도시 전체를 퓨마모양을 본떠서 설계되었다고 하며 이곳이 세계의 중심(배꼽)이라고 믿었던 모양이다.
훗날 지진으로 성당이 무너지면서 확인되었다지만 퓨마의 심장 부분이라는 무언카파타 광장. 스페인 정복자들은 이곳 태양의 신전인 꼬리칸차(퓨마의 허리부분) 터에는 ‘산토도밍고’ 성당을, 와이나카팍 궁전터에는 ‘라 깜파냐 헤수스’ 성당을, 태양의 처녀 집터에는 ‘산타 카타리나’ 수도원을 세웠는데 오늘날까지 바로크풍 건물들이 위풍당당하게 들어서 있다.
1시간 여 산토도밍고 성당 등을 돌아보았는데 성당의 아랫부분은 잉카인들의 정교한 솜씨가 빛나는 꼬리칸차의 석축이 남아있다. 또 성당 안쪽에는 당시의 석축기술을 보여주는 실물의 일부분이 있었는데 수십 톤이 됨직한 돌들을 모양에 따라 정교하게 다듬은 것은 물론이려니와 더욱 놀라운 것은 이음새 부분을 요철(凹凸)로 다듬고 파내어 퍼즐모양으로 짜 맞추도록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상하좌우가 모두 그렇게 되어있고 특히 모서리의 돌은 기역자 모양인데도 정교하게 짜 맞추도록 되어있어 놀라웠다. 틈새로 백지 한 장 들어가지 않도록 맞물려있는 이런 기술로 인하여 수백 년 동안의 대 지진에도 위쪽의 스페인풍 건물은 무너졌지만 잉카인들이 쌓았던 석축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뜨거운 태양, 에머랄드 빛 하늘, 산 중턱에 커다랗게 써놓은 ‘Viva Peru' 등의 문구와 엠블렘 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1시간 여 자유 관광을 마치고 점심식사는 쿠스코 유일의 한국식당인 ‘사랑채’에서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25솔(약 12달러)짜리 김치찌개를 먹었다. 주인은 한국 TV에도 나왔던 젊은 한국인 부부. 남편은 도자기학교를 운영하여 페루정부로부터 상당한 인정을 받고 있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었다.
<4> 쿠스코 인근의 유적지
♠ 삭사이후아만(Sacsayhuaman)
쿠스코 인근의 언덕 위(해발 3700미터)에 조성된 거대한 3겹의 석축물(성곽 형식)인 삭사이후아만(Sacsayhuaman)은 케추아어로 ‘배부르게 먹은 새’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다른 석축과 마찬가지로 수백 톤짜리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 안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설치하였는데 퓨마의 머리부분에 해당한다고 하며 3겹의 성곽 맨 위쪽에서는 의식이 행해졌던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쿠스코에 성당을 건축하기 위하여 많은 석조물들을 훼손하였다고 하는데 맨 아래쪽 석축은 길이가 400미터, 높이가 6미터정도이고 인위적으로 들쭉날쭉 설치하여 퓨마의 털을 상징하였다. 그 아래에는 넓은 풀밭이 있는데 6월 24일(동지:새해의 시작)에 남미의 3대 축제중 하나로 꼽히는 잉카축제가 매년 열린다고 한다.
♠ 켄코(Qenko)
삭사이후아만에서 5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켄코는 ‘미로(迷路)’라는 뜻으로 제사를 지내던 신전이 있던 장소라고 한다. 건물은 없고 석회암의 미로처럼 생긴 바위는 퓨마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살아있는 어린아이를 희생물로 바쳤다고 하며 바위 밑으로 구불구불 길이 있고 돌로 된 제단도 있다.
♠ 푸카 푸카라(Puca Pucara)
붉게 보이는 산위의 석축물인 푸카푸카라는 지나가며 차 속에서 건너다보았는데 요새였다고 한다. 아름답고 웅장하게 보였다.
♠ 탐보 마챠이(Tambo Machay)
‘성스러운 잉카의 물’이라는 의미를 가졌다는 탐보 마챠이는 잉카의 목욕탕이었다고 하는데 제사를 지내기 전 몸을 정결하게 닦던 곳인 듯 하였다. 해발고도가 3,750m로 차에서 내려 20여 분 걸어서 올라가는데 몹시 숨이 차고 속이 메스꺼웠다.
정교하게 깎아 멋을 낸 석조물 사이로 지금도 맑은 두 줄기 물이 시원스럽게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어디서부터 끌어온 것인지, 혹은 샘인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손을 씻으면서 신비한 느낌이 사로잡혔다.
내려오는데 길옆에 화려한 원색의 전통복장을 한 새까만 얼굴의 잉카여인이 알파카를 잡고 사진을 찍으라고 한다. 가이드에게 물으니 1달러를 주고 마음대로 찍어도 된다고 하여 옆에 서서 서너 장의 사진으로 담았다.
<5> 너무나 아름다운 삐삭(Pisac)
첫날의 일정을 끝내고 숙소인 삐삭으로 향하였는데 쿠스코에서 32km 떨어진 ‘신성계곡(神聖溪谷)’에 위치한 삐삭은 해발 2,700m라니까 탐보 마챠이에서 1,000m를 내려가는 셈인데 계곡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어지러웠다.
계곡 속에 아름답게 자리 잡은 작은 마을 삐삭은 온통 높은 산봉우리들로 둘러 쌓여있고 옆으로 우르밤바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 강이 브라질로 흘러들어 저 거대한 아마존이 된다고 하며 아직은 상류라 개울정도였다.
인근의 산봉우리에는 굉장히 높은 곳까지 계단식 밭이 펼쳐져 있는데 오랜 옛날잉카시대부터 경작되어 온 것이라고 한다. 또 인근의 산 위에는 아름답고 견고한 삐삭 요새가 있다는데 올라가지는 못하였다.
우리가 이틀 밤을 잔 호텔인 로열 잉카(Royal Inka)는 손님 전용의 아담한 성당을 따로 갖추고 있었고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어 온통 꽃으로 둘러싸인 너무나도 쾌적한 환경의 호텔이었는데 방안에는 온통 잉카 고유의 문양들과 소품들로 꾸며져 있었다.
생선튀김과 빵으로 저녁식사를 하였는데 디저트로 준비된 과일이 무척 싱싱하고 맛이 있었다. 톰보 마챠이에서부터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을 호소하던 집사람이 식사도 제대로 못하더니 마침내 먹은 것을 토하고 정신을 못 차린다. 이른바 고산병이다. 여행사에서 안내를 하지 않아 미리 약을 준비하지 못한 우리는 여행을 함께하는 부인이 다행이 펜잘을 가지고 있어 2알을 얻어먹고 호텔에 연락했더니 산소통을 들고 와 10분간 산소호흡을 시켜주었다. 동행의 부인도 산소통 신세를 졌는데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남자들인 우리는 나이도 많은 편인데 무척 잘 견딘다고 놀라워하였다.
<6> 마추픽추(Machu Picchu)로 가는 길
마추픽추로 가는 날. 가슴 두근거리며 새벽 6시에 일어났다. 흥분 때문인지 어제의 머리 지끈거리던 것도 어느 정도 가신 듯 하다. 쿠스코에서 출발하는 마추픽추행 기차가 이곳을 지나가지 않기 때문에 기차역이 있는 오얀따이땀보(Ollantaytambo)까지 2시간 정도 버스로 이동하여 9시에 지나는 기차를 타야 한단다.
서둘러 호텔에서 준비한 새벽 아침을 먹고 삐삭에서 우르밤바 강줄기를 따라 서북쪽으로 내려가는데 한 시간쯤 달리다 보니 우르밤바(Urubamba)라는 작은 읍내를 지난다. 달리는 내내 좌우로는 고개를 젖혀야 봉우리가 보이는 산들이 첩첩이 둘러싸여 있고 옥수수 밭과 이름 모를 꽃들로 뒤덮인 강변이 쉴 사이 없이 차창으로 스쳐지나가고, 이따금씩 나타나는 작은 마을은 볼품없는 집들 사이로 새까만 얼굴, 자그마한 키에 목이 짧고 가슴통이 큰 인디오들이 커다란 보따리를 목에 걸어 등에 짊어지고 순박한 얼굴로 쳐다본다. 남녀 구분 없이 목이 짧고 가슴통이 큰 것이 특징인 인디오들은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아기 때는 그렇지 않은데 고산지대의 희박한 산소 때문에 심호흡을 많이하여 자라면서 그런 체형이 된다고 한다.
우르밤바를 지나 다시 50분 쯤, 목적지인 오얀따이땀보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고대 잉카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관광마을로 생각되었다. 마을 안의 길은 모두 납작한 돌들로 깔려있어 이 마을을 지날 때에는 관광객을 실은 차들도 덜컹거리며 좁은 골목을 비집고 지나야 한다.
마을 가운데 작은 광장에는 제법 나무와 꽃들로 꾸며져 있었고 기차를 타려는 관광객들과 인디오들이 뒤엉켜 제법 혼잡스러웠다. 인근 언덕위에는 스페인군에 저항하여 잉카인들이 싸우던 요새의 모습이 보존되어 있었고, 집들 사이로 흘러내리는 돌로 만들어진 물길은 잉카시대부터 사용되던 것인데 오늘날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여 관광객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기차를 기다리며 마을을 돌아보는데 마침 부활절이라 인디오 처녀들이 꽃다발을 한 아름씩 안고 성당으로 향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9시 정각 인근에서 몰려온 많은 관광객들과 함께 기차에 올랐는데 대부분 백인들로 동양인은 우리 네 명뿐인 듯 했다. 기차로 계곡을 내려가는 것도 무척 즐거운 추억이었다. 강줄기는 점점 넓어지고 물도 많아 제법 소용돌이를 이루는 곳도 있었다. 강을 왼쪽으로 끼고 달리는데 열대우림 지역이라 숲들이 울창하고 이름모를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있었다.
마침 맞은편 좌석에 젊은 부부가 앉았는데 인디오 부인과 메스티소 남편으로 갓난애를 데리고 있었다. 자기들도 마추픽추가 처음이라며 제법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보아 전문직에서 일하는 부부로 보였다.
중간 몇 군데 기차가 정차하여 바깥을 내다보았더니 5,6 명씩의 관광객들이 기차에서 내려 왼편의 우르밤바 강을 건너는 다리로 향하고 있었다. 이른바 잉카 트레일(Inca Trail)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설명이다. 잉카 트레일은 여러 코스가 있는데 1박 2일짜리에서부터 5박 6일 등 다양하다고 한다. 보통 전문 가이드가 붙는데 짐을 운반해 주는 것은 물론 요리까지 해 주며 요금은 2~5백 불 정도라고 한다. 꼭 한 번 다시 와서 시도해 봐야지...
이상한 것은 기차를 타는데 여권을 제시하란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철도회사가 영국으로 철로며 기차까지 모두 영국에서 가지고 왔다는 설명이었다.
한시간 반 정도의 거리인 마추픽추역까지 1인당 77불(10만원), 입장료 42불(5만5천원), 역에서 30분 거리인 마추픽추 산위까지 버스요금이 14불(만 8천원)로 관광객들에 바가지를 씌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랴.
종착역인 마추픽추역은 계곡 가운데 아름다운 건물들로 둘러싸인 아담한 마을 가운데 있었고 역을 나서면 엄청나게 많은 기념품 가게, 식당, 까페들로 들어차 있었다. 기차에 내려 사방의 봉우리들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런 유적들이 있을만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추픽추를 비밀의 공중도시, 수수께끼의 도시 등으로 불렀던 것이리라.
마추픽추를 오르는 버스는 좌석이 채워지자 곧바로 출발했는데 밀림 속을 조금 지나자 곧바로 뱀이 꼬리를 물 듯 지그재그로 건설된 가파른 사면의 비포장도로를10여회 꼬불거리며 오르기를 30분,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마추픽추로 들어가는 매표소 입구에는 관광객들로 바글바글하다. 매표소를 지나면 왼쪽에 1911년 예일대 빙엄교수가 발견하였다는 기념동판이 보인다.
<7> 아, 아. 마추픽추(Machu Picchu)
울창한 숲길을 따라 언덕길을 조금 걷자 눈앞에 위대한 잉카의 유적이 펼쳐졌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꼽히는 마추픽추는 해발 2,400m로 잉카인들의 마지막 저항지(빌까 밤바)로 추정되던 곳. 그러나 훗날 학자들에 의해 아무런 전쟁의 유물들이 발견되지 않음으로 빌까 밤바는 아니라고 판명되었다고 한다. 관광객들이 처음 서게 되는 곳은 마추픽추(늙은 봉우리)의 뒤쪽 언덕위인데 눈 아래로 유적 전체가 한눈에 펼쳐져 보이며 그 뒤로 와이나픽추(WaynaPicchu:젊은 봉우리)가 마추픽추를 호위하듯 우뚝 솟아있는 모습은 정말 형언할 수 없는 감동과 신비감을 자아냈다.
첫 감동과 놀라움은 우선 사진으로 보아오던 것에 비하여 굉장히 규모가 크다는 것과 훨씬 더 신비롭다는 것이었다.
빙엄 교수가 처음 올라왔을 때에는 나무와 풀들로 뒤덮여 전체 규모를 가늠하기 어려웠다는데 지금은 너무도 말끔하게 정돈되어 한눈에 모든 윤곽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내가 책에서 읽었던 것과 다른 것은 빙엄 교수가 처음 왔을 때 인디오 한 가정이 살고 있었고, 130여구의 유골과 5,000여 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또 건물의 수와 주변에 조성된 계단식 밭의 규모로 미루어 볼 때 상주인구가 2,000명에서 10,000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하니 생각했던 것 보다 큰 규모의 주거지였다.
아직도 미스테리인 것은 수습된 유골들을 분석한 결과 모두 여자들과 아이들뿐이었고 성인 남자의 유골은 없었다고 하는데 여기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 여러 가지 가설들은 있지만 정설로 된 것은 아직 없다고 한다.
또 이 유적은 총면적이 5㎢ 정도로 그 절반은 비탈면의 계단식 밭이라고 한다. 시가지의 서쪽 높은 곳은 신전과 궁전이 있고 동쪽 낮은 곳은 주민 거주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그 주위로 계단식 밭이 있고 성벽이 둘러쌌다.
이 도시의 형성을 두고 학자들에 따라
① 스페인군의 공격을 피해 세운 비밀도시
② 훗날 스페인에 복수하기 위한 군사훈련을 위해 건설한 비밀도시
③ 자연재해, 특히 홍수를 피해 고지대에 만든 피난용 도시
등으로 추측하기도 하지만 도시의 건물 배치나 기능으로 보아 태양신께 제사를 드리던 특별한 신전이 아니었나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16세기 후반, 잉카인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이곳을 버리고 더 깊숙한 오지로 떠났다. 그 뒤 약 400년 동안 밀림 속에 묻혀 있다가 1911년 미국의 역사학자 하이람 빙엄에 의해 발견되었던 것이다.
♠ 중앙 신전
뒤쪽 가장 높은 언덕위에 우뚝 솟은 집은 경비병을 두었던 초소쯤으로 보이는데 거기서 내려오면서 탐방로가 시작된다. 도시 입구에 오면 돌로 만든 석문이 나타나는데 정교한 석축솜씨를 볼 수 있다. 석문을 지나면 서쪽 가운데 쪽 높은 지역에 중앙 신전이 있다. 어마어마하게 큰 돌 제단이 있고 뒤쪽은 석축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한쪽 부분이 허물어지고 있어 안타까웠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로 분석되는데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관광버스와 너무 많은 관광객들이 원인이 될 수 있다하여 유네스코에서 일일 관광객을 500명으로 제한할 것을 페루정부에 건의했다는데 관광수입원인 이곳의 인원제한이 어려웠는지 현재 비수기에는 1일 2,500명, 성수기에는 5,000명의 관광객이 들끓는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신전의 뒤쪽으로 돌아가면 신관들이 머무르던 방이 있는데 사람 얼굴 높이의 벽면에 깊이 20cm정도의 사다리꼴 벽감이 쭉 둘러 있었는데 그 곳에 머리를 집어넣고 말을 하면 공명현상이 일어나 머리가 웅웅거린다. 잉카시대의 신관들은 이렇게 큰 소리로 벽감에 대고 주문을 외어 최면상태가 일어나면 나와서 일반인들에게 최면상태에서 신의 소리를 전하였다고 한다.
♠ 인티파타나(태양을 묶는 기둥)
중앙신전 뒤쪽 조금 높은 곳에 태양을 묶는 돌기둥이 있다. 잉카인들은 천체의 궤도가 바뀌면 커다란 재앙이 온다고 믿었는데 매년 6월 동지(새해)가 되면 이 '인티파타나'라고 하는 높이 1.8m, 너비 36cm의 돌기둥에 바로 위에 뜬 태양을 붙잡아 매려고 돌기둥에 끈을 매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 태양의 신전
아름다운 원형의 성채모양으로 건축된 태양의 신전은 매우 아름다우며 그 아래쪽은 왕의 무덤이었다는 지하 공간이 있다.
♠ 콘도르 신전
태양의 신전 조금 아래쪽에 매우 신비한 모습의 콘도르신전이 있다. 엄청나게 크고 뾰족한 두개의 바위는 흡사 거대한 콘도르가 날개를 편 모양으로 그 아래쪽 넙적한 바위위에 콘도르의 부리와 눈을 새겨 놓았는데 멀리서 보면 틀림없는 콘도르 형상이었다. 잉카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콘도르에 의하여 그 영혼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었기 때문에 콘도르를 신성한 새로 여긴다.
♠ 달의 신전
또 조금 위쪽 사면에 아름다운 달의 신전이 배치되어 있는데 보수 중이었다.
♠ 오두막집
계단식 밭이 있는 곳에 서너 채의 오두막집이 있다. 사람이 숙식을 하던 흔적이 보이지 않아 농장을 관리하던 집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 옆 풀밭에는 알파카가 풀을 뜯고 있어 목가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 계단식 밭
가파른 경사면에 석축을 쌓아 조성한 긴 띠 모양의 계단식 밭은 그 폭이 좁은 곳은 1m도 채 안될 듯 너무 좁고 높아서 자칫 실족하면 목숨이 위태로워 보였다. 가이드는 아마도 죄수들이나 최 하층민으로 경작하게하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며 웃었다.
♠ 와이나 픽추(WaynaPicchu)
‘젊은 봉우리’라는 의미를 지닌 와이나픽추는 높이가 마추픽추보다 100m정도 더 높은 2,500m로 구름에 싸여있어 신비감을 자아내었는데 정상까지 등산로가 있다. 왕복 2~3시간이 걸리는 와이나픽추 등산은 등산로가 매우 가파르고 위험하여 따로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고 시간도 촉박하여 오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래도 오르는 사람들이 보였는데 아슬아슬하게 절벽 모서리의 등산로를 오르는 모습이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 수수께끼로 가득 찬 마추픽추
마추픽추의 건축물들을 조사한 고고학자들은 부분적으로 건축시기가 다른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주신전, 태양의 신전 등은 잉카제국이 형성되기 800년 이상 앞선 선사인들이 건축한 것으로 판명났고, 그 위에 잉카인들의 건축기술로 쌓은 것, 또 조잡한 석조기술로 보아 그 이후에 쌓은 것 등 크게 3기의 건축시기를 보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대에 따라 도시의 기능도 달랐을 것으로 해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시간 남짓 마추픽추의 관광을 끝낸 후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버스로 마추픽추 역이 있는 마을로 내려와 송어튀김으로 점심을 먹고 6시에 출발하는 기차를 기다리며 3시간정도 기념품 쇼핑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마존을 향하여 힘차게 흐르는 우르밤바강의 거센 물줄기와 고개를 젖혀야 봉우리가 보이는 빙 둘러싸인 준봉들에 매료되었다. 또 가파른 고산지대 산길을 코카잎을 씹으며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묵묵히 걸어갔을 잉카인들도 상상하여 보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우르밤바 마을에 들러 고기모음으로 저녁을 하고 숙소인 로열 잉카호텔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가까웠다.
<8> 티티카카로 가는 길
아침 9시, 아름다운 마을 삐삭을 떠나 티티카카 호수가 있는 뿌노(Puno)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어제의 마추픽추와는 정 반대방향인 남동쪽이다. 중간에 라마 목장도 들르고 점심도 먹으며 시간을 지체하긴 하였지만 저녁 6시에 뿌노에 도착하였으니 굉장히 먼 거리였던 셈이다. 40분쯤 숨 가쁘게 계곡을 벗어나다가 길 옆에 있는 라마(LLama:스페인어로는 야마라고 발음)목장에 들렀다. 목이 기다란 사슴 크기의 안데스 특산종인 라마는 낙타과로 분류된다고 하는데 비슷한 종으로 알파카, 과나코, 비쿠냐가 있다.
이 목장에서는 이 네 가지 종을 모두 기르고 있었고, 털을 깎아 직물을 생산하고 천연염료로 날염(捺染)까지 하며, 관광객 상대의 멋진 매장까지 갖추고 있는 기업화된 목장이었다. 야생종인 비쿠냐는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는 반면 야마나 알파카, 과나코는 풀을 주면 다가와서 잘 받아먹었다.
사람을 경계하여 사람에게 침을 잘 뱉는 것으로 알고 있어 물었더니 이곳의 동물들은 사람에 익숙하여 침을 뱉지 않는다고 한다. 그 중 비쿠냐의 털로 짠 모직물이 가장 고급으로 부드럽고 따뜻하여 비싸게 팔리고 있었는데 상상외로 비쌌다. 두 번째로 좋다는 베이비 알파카 털로 짠 집사람의 긴팔 T셔츠를 30% 할인하여 69.5불(약 10만원)에 샀으니 현지 물가로 보아 바가지를 쓴게 아닌가..... ?
또 그곳에는 전통 복장을 갖추어 입은 인디오 여성들을 5~6명 고용하여 작은 초막 앞에서 전통적으로 실을 뽑고 손으로 직접 직물을 짜는 모습을 보여주며 마음껏 사진을 찍도록 하였다.
목장을 떠나 멀리 높은 준봉들이 둘러싼 고원지대를 3시간 정도 달리다가 드넓은 고원의 한 가운데 한 채 덩그러니 있는 꽤 규모가 큰 식당에 들러 점심을 먹었는데 식당마당 한 구석에 얼굴 검은 인디오 부부가 펼쳐놓은 인디오 기념품 좌판에서 오카리나 두개와 인디오 문양이 수놓아진 등산용 물통을 넣는 것을 몇 개 샀다.
오후 2시 경 안데스를 넘는 고원의 마루턱쯤인 듯 벌판에 이정표와 안내판이 서 있는 곳에 차를 세웠다. 안내판을 보니 해발 4,335m, 우르밤바강의 발원지란다. 기가 막힌다. 이 고원 한 가운데가 백두산의 거의 2배 높이라니... 차에서 내려 우르밤바강의 발원지라는 작은 늪지를 보러 가는데 머리가 어찔거리고 속이 메슥거린다.
주위를 돌아보니 흰 만년설을 머리에 인 봉우리들이 둘러섰는데 모두 5,000m 이상이라고 한다. 여기에도 인디오들 너댓 명이 토속품을 늘어놓고 지나가는 관광객들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에 우리 같은 관광객 차량이 서너 대나 지나갈까??
가로세로 4~5m의 풀이 우거진 자그마한 이 연못에서 동쪽으로 흐르면 우르밤바 강줄기가 되어 브라질로 흘러들어 아마존이 되고, 서쪽으로 흐르면 대서양으로 흘러든다고 한다.
이제부터 내려가는 모양인데 거의 끝이 없는 고원의 평원을 한없이 달려가는 기분이었다. 4~5시간을 달려도 집한 채 없고 이따금 라마나 소, 말, 혹은 면양들을 방목하는 목장이 눈에 띌 뿐이다.
오후 다섯 시 경 제법 큰 도시인 훌리아까(Juliaca)를 지났다. 공업이 발달하였고 공항까지 있는 이곳에서 뿌노까지는 한시간 정도의 거리이다. 아름다운 티티카카 호반의 도시 뿌노에 도착하니 오후 6시였다.
<9> 하늘호수 티티카카
너무나 아름다운 호반도시인 뿌노는 해발 3,850m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호수로 그 면적은 우리나라 전라북도만한 크기라고 하는데 1/3은 볼리비아에, 2/3는 페루에 걸쳐있으며 안데스의 만년설이 흘러내려 항상 차고 맑은 1급수를 유지한다고 한다.
새벽에 일어나 어제 저녁 보아 두었던 도시 뒤쪽 산꼭대기에 있는 커다란 콘도르가 날아오르는 형상의 조각이 있는 전망대를 향하여 무작정 출발하였다. 지난 밤 너무도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워 호텔에 약이 있냐고 물었더니 약 이름을 적어주며 약방에 가서 사 먹으란다. 그 모습을 본 동행의 부인이 펜잘 두 알을 주어 먹고 잤더니 조금 낫기는 하였지만 머리가 어찔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골목길을 벗어나 40분 여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데 집사람이 도저히 못가겠다고 주저앉으려는 것을 가까스로 달래며 몇 번이나 앉아 숨을 고른 후 마침내 전망대까지 올랐다.
오르는 중간, 산책 나온 노인이 친근한 미소를 보이길래 어제저녁 페루 TV에서 보았던 우리나라 연속극 ‘삼순이’를 기억해내고 손짓 발짓으로 우리는 ‘삼순이’ 나라에서 왔다고 했더니 활짝 웃으며 반가워한다.
올라가 보니 전망대 지붕위에 설치된 페루의 상징 콘도르 조형물은 두 날개를 활짝 편 모습이었는데 엄청나게 컸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아침의 뿌노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호수 주변을 따라 형성된 뿌노 시가지는 푸른 하늘과 함께 드문드문 갈대로 뒤덮인 호수는 끝이 수평선과 맞닿아 있어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내려오다 뿌노의 중심광장인 ‘다 아르마스’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스페인 정복자들이 세운 바로크 형식의 아름답고 웅장한 뿌노성당이 인상적이어서 들어가 보려고 했지만 문이 잠겨져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3블록 정도 떨어져있는 산토 도밍고 성당을 들어가 보았는데 제단 옆에는 이스터(Easter:부활절)행렬에 쓰였던 것인 듯 멋지게 치장한 예수 고상이 커다란 가마위에 올려져 있었다. 페루 성당의 특징은 성당 내부를 빙 둘러 성인 성녀들을 모셔놓은 것이었다. 특히 성녀들의 모습이 많은 것도 특이했으며 뿌노의 수호신도 성녀였다. 마침 마당에 수사님이 계시길래 손짓 발짓으로 인사를 드리고 축도를 받았다.
호텔에 돌아와 아침식사를 했다. 뷔페식이라 몇 가지 가져다 먹는데 써빙하는 친구가 안 해도 될 써빙을 하며 기웃거리길래 1불을 줬더니 식사가 끝날 때까지 임금님 모시듯 온갖 써빙을 다 해주어 돈의 위력을 실감하며 속으로 웃었다. 덕분에 기분 좋게 아침식사를 할 수 있었다.
우로스 갈대섬 방문은 점심식사 후로 일정이 잡혀있어 아침 식사 후 여유 있게 시내를 둘러볼 수 있어 좋았다. 돈을 바꾸러 은행을 기웃거리다가 한국인 두 사람을 만났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40대의 시를 쓰고 사진작가라는 남자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조그만 싸구려 호텔에 들었다가 10여 명의 권총강도 습격을 받아 모든 투숙객이 몽땅 털렸다며 자신은 노트북 컴퓨터와 좋은 카메라 및 여행경비를 몽땅 털렸다고 푸념을 털어놓아 놀랐다.
또 한사람은 이화여대 학생인데 봉사단으로 왔다가 끝나고 혼자 여행 중이라고 했다. 가진 돈이 백 불짜리인데 가운데 접는 부분이 조금 찢어졌다고 아무데서도 받지 않아 은행에 왔는데 은행에서도 바꾸어주지 않는다고 울상이었다.
나도 똑 같은 경험을 했는데 황당한 것은 이곳 페루에서는 달러지폐가 조금이라도 찢어진 것은 화폐로 인정을 하지 않는다. 찢어지지 않은 것을 주어도 하늘에 비춰보고 가짜인지 확인하고, 조금이라도 찢어지면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 여대생은 우리 가이드가 잔돈으로 바꾸어주자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하고는 헤어졌다.
다 아르마스 광장에서는 택시기사들이 파업을 벌이고 있었는데 피켓을 흔들며 구호를 외치기는 했지만 모두 웃는 모습들로 축제에 나온 사람들 같았다. 또 작은 성당 앞에서 음악연주 소리가 들려서 기웃거려 봤더니 6~7명의 노인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4~50대의 아주머니들이 음악에 맞춰서 열심히 무용(?)을 하고 있었는데 그 옆의 임시텐트 안에서는 의료봉사를 하고 있었다. 진료 받으려는 사람들도 많지 않아 이 또한 너무나 평화스러운 분위기였다.
재잘거리며 몰려가는 여학생들의 모습도 카메라에 담으며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다보니 자그마한 간판에 태극기가 그려져 있고 밑에 태권도라고 영문으로 씌어져 있는 간판을 발견하여 반가웠다. 아침시간이라 문이 잠겨있어 사범이 한국 사람인지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중국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는 오후 2시, 우로스 섬을 향하는 배를 탔다.
♠ 갈대섬 우로스
잉카시대의 뿌노는 태양의 신이 내려온 곳으로 신화의 중심이었으나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하여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식민도시가 되었는데 이곳에 뿌리내렸던 많은 인디오들은 산속 오지로 도망가거나 우로스 갈대섬으로 숨어드는 등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아직도 이곳은 인디오들의 영혼의 땅으로 주민들 중 인디오가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높다고 한다.
잉카제국 때 잉카족에 밀려 호수 가운데에 갈대로 인공섬을 만들어 살기 시작한 우로스족. 티티카카호에는 자생하는 갈대인 토토라를 이용하여 인공으로 만든 섬이 셀 수 없이 많은데 이 섬들을 통 털어 우로스(Uros)라고 한다.
부두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기념품 가게를 기웃거리고 있었는데 가이드의 권유로 방문하는 섬의 어린이들에게 나누어 줄 과자 나부랭이를 20불정도 샀다.
정원 30명은 됨직한 모터 유람선은 달랑 우리 네 명과 가이드만 태운 채 호수 가운데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출발하고 잠시 후 2층 갑판에 올라갔는데 풋풋한 물풀 냄새와 밝은 햇빛, 볼을 스치는 싱그러운 바람으로 기분이 상쾌하였다. 우리가 떠난 뿌노를 뒤돌아보니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 들어선 도시의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수정처럼 맑은 수면을 헤치며 10분 쯤 지나자 길게 자란 갈대들이 나타나고 그 사이로 뱃길이 나 있었다. 수면 위에는 이름모를 수백 마리의 물새들이 수면을 날고 있고, 이따금 물 닭 종류인지 꽤 큰 물새들이 갈대들 사이에서 목을 내밀고 우리를 살핀다. 얼마쯤 달리다보니 젊은 인디오 부부가 배 위에서 그물을 올리고 있는 모습이 보여 손나팔을 만들어
‘세뇨르! 세뇨리따, 알리란츄~!’하고 소리를 질렀더니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든다. 물길 옆에는 몇 군데 사방 4~5m의 작은 인공 갈대섬이 보이고 돼지들이 꿀꿀거린다. 돼지우리인 모양이다.
멀리 물길이 끝나는 곳 오른편으로 높다랗게 지은 전망대가 보이는데 이곳을 통과하면 넓은광장(호수)이 나타나고 그 주변으로 크고 작은 수많은 갈대섬들이 들어서 있다.
♠ 삐리고라소(심장) 섬
첫 번째로 방문한 삐리고라소 섬은 ‘심장’이라는 의미라는데 4~5가구가 거주하는 조그만 섬이었다. 우리 배가 다가가자 섬의 전체 주민인 듯 아이들을 포함해서 열 댓 명이 나와 손을 흔들며 환영한다.
토토라(갈대)를 두껍게 깔아서 만든 섬은 무척 푹신푹신하지만 물이 묻은 곳은 매우 미끄러워 조심해야 한다. 갈대로 만든 오두막이 몇 채 있고 창고로 사용하는 오두막은 따로 지어져 있었다. 오두막 안을 구부리고 드려다 보니 옹색하고 좁아 보였는데 바닥에 울긋불긋한 담요를 깔고 생활하는 듯 했고 구석에는 텔레비전도 보인다.
섬 한편에 텔레비전 수신용 안테나가 보였는데 전직 후지모리 대통령 재직시 인디오들의 생활 향상을 위해 처음으로 설치해 주었다고 한다.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사진을 찍는데 우리에게 중앙 광장에 갈대를 둥글게 드럼통 모양으로 묶어 바닥에 놓은 의자(?)에 앉으란다. 우리를 환영하는 공연을 펼칠 모양이었다. 관광객이 많이 왔으면 좋았을 것을, 달랑 우리 넷이 앉아서 공연을 관람하려니 조금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손뼉을 치며 노래를 시작하는데 모두 우리나라 동요들로 10여 곡 이상을 부른다.
우리 가이드는 이번에 남편이 몸이 아파 자기가 대신 나왔는데 전문 가이드인 남편은 특히 이 섬에 정성을 들여 한국노래도 직접 가르치고 올 때 마다 설탕이며 밀가루를 가져다준다고 하였다.
모두 원색으로 짠 인디오들 전통 복장과 모자 및 장신구들로 단장을 했는데도 햇볕에 그을린 새까맣고 지저분한 얼굴, 거친 피부, 새까만 손과 맨발이 안쓰러웠다. 그늘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제대로 씻는 시설도 없는 열악한 생활환경이지만 그래도 인디오들 얼굴표정은 그렇게 순박하고 착해 보일 수가 없었다.
이들은 원래 물고기나 물새를 잡기도 하고, 식물을 가꾸는 별도의 작은 섬을 만들어 몇 가지 야채도 가꾸기도 하지만 말린 생선을 육지로 가져가 옥수수나 감자로 바꾸어 생활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부분 관광객들이 떨어뜨리는 팁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사람의 생리현상인 배설도, 마시는 식수도 모두 이 호수의 물로 한다는데 다만 식수는 섬에서 좀 떨어진 호수에서 길어다 먹는다고 하였다.
공연이 끝난 후 줄을 맞추어 우리들 앞으로 지나가며 악수를 하는데 이때 과자를 한 봉지씩 들려주었다. 그리고는 지도자인 듯한 남자에게 약간의 팁을 쥐어 주었다.
그들은 자기네 주식인 수십 종의 감자, 옥수수 등을 보여 주었고 또 잡아놓은 조그만 물고기, 말려놓은 물새 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자기네들 전통 간식이라며 갈대 껍질을 벗기고 하얀 속살을 먹어보라고 주었는데 들쩍찌근하고 풀냄새가 났지만 씹을 만 하였는데 차마 삼키기는 어려웠다.
또 호수가 얼마나 깊은지 보여주겠다고 마을 가운데 갈대 뭉치를 뽑아내고 그 속으로 돌맹이를 묶은 끈을 집어넣었다가 바닥에 닿으면 끌어올려 보여주었는데 20m는 족히 되어 보였다. 이 갈대섬은 밑 부분이 자꾸 썩으며 가라앉아서 몇 개월에 한번씩 계속해서 갈대를 깔아주어야 한다고 한다. 3m 쯤 씩이나 자라는 갈대를 한아름 정도씩 여러 부분을 묶어 차곡차곡 쌓는 형식인데 물속에 잠긴 부분은 가늠이 잘 안되었지만 굉장히 두꺼워 보였다. 그렇지만 힘주어 걸으면 바닥이 일렁일렁한다.
다음으로 광장(호수) 건너편에 있는 두 번째 섬으로 갔는데 우리의 모터유람선은 그냥 보내고 1인당 2불씩 내고 갈대배로 이동하였다. 엄청나게 뚱뚱한 인디오 여자가 노를 잡았는데 30여 분의 거리를 거친 숨 한번 내지 않고 단숨에 저어 건넜다. 팔뚝 굵기가 내 두 배도 넘어 보인다. 너무나 아름다운 호수모습에 나도 모르게 이태리 가곡 ‘산타루치아’가 입에서 흘러 나왔는데 느닷없이 웬 이태리냐고 모두들 웃었다.
건너면서 보니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하는 섬들마다 높다란 기둥위에 갈대로 엮은 고유의 조형물을 얹어놓고 있었는데 커다란 새 모양, 물고기 모양, 이상한 짐승모양 등이었다. 섬들마다의 상징물인 모양이다.
♠ 까미사리끼(웰컴) 섬
삐리고라소보다 훨씬 큰 이 섬에는 호텔도 있고 식당도 있고 까페며, 제법 큰 기념품 가게도 있다. 나무로 엉성하게 테두리를 만들고 위에 호텔이라는 간판을 붙이긴 했는데 조그만 갈대 오두막이 5~6채 딸랑 있는 것이 전부다. 들어가 갈대문을 열고 들여다봤더니 갈대로 엮은 무릎 높이의 침대위에 인디오 전통문양의 침대보를 씌워놓은 것이 전부였다. 가구로는 작은 책상과 TV가 있었던가??
10여 년 전 일본의 혈기방장한 젊은이가 이 호텔에 들었는데 인디오 여자를 끌어들여 자고 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인디오 여자가 임신을 하였고 낳은 아이가 지금 거의 20세가 되었다는 가이드의 귀뜸이 있었다. 그 일본인은 그 이후로 코빼기도 물론 보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인디오들은 눈이 맞으면 쉽게 동거하고, 아이를 낳으면 남자는 쉽게 도망을 가버린다고 한다. 정식 결혼을 해도 마찬가지로 남자들이 이른바 책임감이 없고 바람둥이들이란 말인데 아이들이 생기면 당연히 여자들이 양육을 도맡고 남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한다. 정말 무책임한 종족들이다. 인디오 여자들은 항상 등에 원색으로 울긋불긋 수놓은 두툼한 보따리(이름을 잊어버렸음)를 항상 지고 다니는데 온갖 짐은 물론 아이까지 넣고 다닌다. 인디오여자들은 바람둥이 남편들 때문에 항상 속을 썩이는데 남자들을 그 보따리 속에 넣고 다녔으면 좋겠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작은 섬을 들렀는데 조금 둘러보고 곧바로 뿌노로 돌아왔다.
높고 푸른 하늘, 끝없이 펼쳐진 에머랄드빛 티티카카호수, 바람에 일렁이는 초록의 갈대숲, 까마득히 호수를 에워싼 만년설을 이고 있는 고산 봉우리들, 호수위로 스칠 듯 떼 지어 나르는 이름모를 물새들, 갈대로 엮은 작은 섬 위에서 원색의 전통복장을 차려입고 관광객을 기다리는 검은 얼굴의 한없이 순박하고 가난한 사람들...
영원히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하늘호수 티티카카의 모습이다.
일정 탓으로 나스카의 거대 문양들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며 훌리아까의 망코 까팍(Manco Capac:페루 초대대통령) 공항으로 이동하여 리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LA공항에서는 남미에서 왔다는 이유 때문인지 입국수속을 하는데 마약견이 두 차례나 훑고 지나가고 짐도 샅샅이 뒤져서 기분이 언짢았는데 결국 쿠스코에서 미네랄 성분이 풍부해 건강에 좋다하여 샀던 암염(巖鹽)이 문제가 되었다.
암염이라고 설명을 했는데도 가방에서 꺼내 들고 가더니 한참 후에야 들고 와서 통과를 시킨다. 달라스를 거쳐 러벅에 도착하여 계산해 보니 훌리아까에서 떠나 러벅에 도착하기까지 꼭 23시간이 걸렸다. <끝>
첫댓글 로즈님 여행기 정말 대단 하시네요 아마 그때그때 노트북에 기록 하셨다가 쏟아 부으셨나요 나같은 타이핑 실력으로는 최소한 1개월 이상 쳐야만 가능할꺼 같네요 부디 잘다녀 오시고 바로 연락좀 주셔요 이거 올리시느라 시장 하셨겠어요 멀리서 나마 식사한끼
로즈님.. 넘 반갑습니다.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셨군요... 너무 부러운 삶이십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