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IYslK0h8leU?si=h9_Y68zSRGsgX3B3
빌라 Lobos - Bachianas Brasileiras No.3 - Jean Louis Steuerman | Zoltán Kocsis:
빌라 로보스 Heitor Villa Lobos 1887~1959
브라질이 낳은 가장 유명한 작곡가 빌라-로보스는 리우 데 자네이로에서 아마추어 음악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1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서 가출한 그는 유랑 극단에 들어가 각종 악기와 작곡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그의 음악은 그런 식의 독학으로 이루어졌다. 18세 때엔 마치 바르톡이나 야나텍 등이 그랬던 것처럼 브라질의 오지로 들어가 민족음악을 연구했다.
1923년 36세의 나이로 파리에 가서 7년 동안 유학 생활을 보냈다. 그 기간 동안 세고비아를 비롯한 지도적 음악가들과 교분을 나누면서 창작 활동을 엮어갔다. 기존의 작품들과 판연히 다른 그의 작품은 유럽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30년 브라질로 돌아온 그는 지휘자, 교육자로 일하면서 자신의 작품과 유럽의 음악들을 소개하는 데 정열을 바쳤다. 뉴욕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 등 각종 문화단체와 학계에서 보내온 영예를 누렸으며, 1945년엔 브라질 음악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대표를 역임했다.
그의 음악은 브라질의 민속음악과 유럽음악이 잘 혼용되어 있다. 특히 9개의 곡으로 이루어진 <브라질풍의 바흐>(1930~1944)는 전세계가 애청하는 그의 대표곡이다.
브라질의 작곡가. 스페인계의 아버지 라울 Raul은 역사학의 권위자였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아들에게 첼로와 클라리넷을 가르쳤다. 1899년 라울이 죽은 뒤에는 어머니 노에미아 Noemia가 그의 음악 교육을 계속했다. 빌라 로보스는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유럽으로부터 들어온 살롱음악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민중음악가들의 음악도 알게 되었다. 그의 가족들은 그를 다른 길로 나가게 하려고 했지만 그는 음악을 계속했고 쇼로스의 악단에 들어가 기타리스트가 되었다.
그는 14세 때부터 작곡하기 시작했다. 클래식 음악의 작곡가들의 작품을 독학으로 공부했던 그는 어려서부터 바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레크레이오 극장 오케스트라의 첼로 주자가 되어 오페라, 오페레타, 사르수엘라 등 변화가 많은 레퍼토리를 연주했다. 1905년 브라질 국내 여행 시대가 시작된다. 확실한 본능에 이끌려 원시 인디언의 노래와 바히아 흑인의 리듬, 도시와 지방의 민요 등에서 브라질 음악의 혼을 이해하게 되었다. 바그너와 푸치니의 선율에서, 뱅상 댕디나 후에는 드뷔시, 스트라빈스키 등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음악을 자기 자신 속에 직접 소유하고 있었던 창조자에게 영향이라는 문제는 점차 의미를 잃어 갔다. 빌라 로보스의 작품은 1915년부터 연주되었다. 1917년의 아마조나스와 위라푸루는 그의 창작활동의 여러 단계에서 발전시켜나가는 장르, 즉 아마존적, 원초적 교향시, 그리고 생동하는 리듬과 기량이 넘치는 음의 만화경이라고 할 수 있는 장르를 확립했다.
1916년부터 1920년까지 일련의 5개의 교향곡을 발표했는데 그 중 세 곡은 세계적인 사건들이 주제이다(제3번 전쟁, 제4번 승리, 제5번 평화). 1923년 그는 파리에 갔고, 종종 소란스러운 청중 앞에서 연주된 그의 음악은 적지 않은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예술세계에서의 끝없는 우정을 느끼게 했다. 폴 르 플렘, 르네 뒤메닐과 마찬가지로 플로랑 슈미트도 적절하고 열렬한 평론으로 빌라 로보스의 명성을 확립시키는 데 공헌했다. 브라질에서의 첫 시대의 친구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악보의 발행자인 막스 에시크를 소개해 주었다. 브라질 특유의 노래, 어린애의 가족, 야성(野性)의 시 Rudepoema, 아마조나스, 9중주곡, 쇼로스 등이 청중들을 사로잡기 위한 야성적 목록의 일부를 이루었다. 그의 가장 혁신적인 작품인 위대한 많은 쇼로스들은 가장 우수했다. 1930년 브라질로 돌아간 그는 활동을 작곡과 교육으로 나누었다. 음악 예술교육 감독국을 지도하기 위해 리우 데 자네이루에 머물면서 많은 콘서트를 지도하였고 많은 학교에서 음악 교육기관을 조직하는 등 정력적이고 유능한 리더로서 돋보이는 활동을 했다. 그의 연주 프로그램에는 항상 많은 부분이 프랑스 음악을 위해 할애되어 오네게르, 미요, 라벨, 루셀, 슈미트, 프랑크 등의 작품이 브라질에서 초연되었다. 또 합창음악원을 창설하여 스타디움에서 대규모적인 앙상블을 지휘하였으며 1942년에는 4만명의 국민학교 학생이 그의 지휘로 노래를 불렀다.
브라질 민속음악의 보급에 공헌한 피아노곡, 민요, 그리고 합창곡을 모은 실용 첫걸음에 비하여 쇼로스와 마찬가지로 뜻밖의 편성을 한 9곡의 바키아나스 브라질레이아스에는 빌라 로보스의 예술이 보편성으로 향하는 방향이 결집되어 있다. 24년간 중단했던 교향곡의 창작을 1944년에 재개하여 브라질의 산에서 힌트를 얻은 제6번부터 1957년에 작곡한 최후의 제12번까지 이르게 되었다. 1940년부터 남북아메리카 대륙에 걸친 연주여행을 시작하였고 전후에는 활동무대를 브라질, 미국, 유럽, 특히 파리에 두었다. 자신의 작품을 직접 지휘하고 프랑스 국립 방송관현악단과 기억에 남는 콘서트를 했으며 녹음도 했다. 1952년에 브라질의 발견 전곡을 파리 시민을 위해 초연하였고 다른 작품의 초연도 차례로 계속하였다. 서정성과 보편성이 증가한 그의 음악은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많은 상과 특별대우를 받았다. 말년에는 여러 가지 작품 완성에 힘써 현악4중주곡, 합창곡, 교향시, 교향곡, 오페라 등을 작곡했다. 운명이 20세기 음악에 가장 변화가 많고 가장 풍요한 이 영혼의 흐름을 멈추게 한 것은 그의 작품수가 1000개에 가까워졌을 때였다.
두 여성이 이 작곡가와 일생을 함께 하게 되는데, 1913년에 결혼한 피아니스트 루실리아 기마라에스 Lucilia Guimaraes와 1930년 이후 거의 모든 작품을 헌정받은 아르민다 네베스 달메이다 Arminda Neves d'Almeida이다. 달메이다는 오늘날 그의 성(姓)을 취하고 1960년부터 리우 데 자네이루 교육성, 문화성 관할의 브라질의 여러 관청에 의해 창설된 빌라 로보스 기념관 관장의 자리에 있다.
빌라 로보스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최초의 브라질인 음악가이고, 그의 음악은 브라질의 자연과 인간의 무한한 다양성을 반영하고 있다. 거기에는 남미적이고 유머가 넘치는 묘사와 음색, 리듬, 그리고 조성을 대비시켜 가면서 매우 자유로운 화음으로 끊임없이 악기법을 탐구해가는 매우 고도의 창조성을 엿볼 수 있다. 화성을 붙인 것 이외에는 단 하나의 주제도 민요에서 인용한 사실이 없으며, 그는 그의 모든 감각으로 하나의 개성적인 음악어법에 동화시킨 것을 표현하였다. 민요, 그것은 나입니다-라고 그는 단언했었다. 오케스트라 음악이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만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일 수 있는 재능, 손을 댄 모든 장르에 같은 풍부한 소리를 유지할 수 있는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음악이 열대 지방의 우울, 무서운 무기력, 숨은 투쟁을 표현할 때에도 음악의 기쁨이 저절로 드라마를 지배하도록 되어 있다. 이 기쁨이란 우주에 대한 범신론적 명상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것이었다.
자료출처: 웹사이트
https://youtu.be/P4wh5ScYcIw?si=g4A0318IfFFHLY7I
Maria Callas Villa Lobos Bachianas Brasileiras n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