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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화로 가는 한전 뒤에는 정부, 그 뒤엔 정치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
민영화는 좀비만큼이나 끈질기다. 걸핏하면 멧돼지처럼 튀어나와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서곤 한다. 시기나 방식에서 차이는 있지만 적지 않은 공기업들이 민영화의 길을 밟았다. 포항제철(현 포스코),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 담배인삼공사(현 KT&G), 국정교과서 등이 그들이다. 민영화는 ‘작은 정부’와 시장원리를 앞세운 신자유주의 정책의 상징이었지만 신자유주의가 퇴조한 지금에도 민영화는 여전히 살아남아 유령처럼 공기업을 배회하고 있다.
공공전력사업 분야를 배회하는 민영화라는 유령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영화가 되살아나는 대표적인 분야는 공공전력사업이다. 국정과제에서 이미 “경쟁과 시장원칙에 기반한 전력시장 구축”을 공언한 터이기도 했다. 정부는 소유권을 통째로 민간에게 넘기는 사유화 방식 대신 전력시장을 민간기업에게 개방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명박 정부가 발전시장을 개방한 이래 민간 발전설비의 비중은 꾸준히 늘어 2023년에는 40.1%를 차지하고 있다. LNG 발전은 물론 재생에너지 발전까지 민간이 주도하는 현재의 판세를 고려하면 앞으로 그 비중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전력시장의 자유화는 전력사업의 민영화와 한 묶음으로 진행된다. 최근 부채의 늪에 빠진 한전은 자산(인재교육원 등)의 매각과 함께 자회사(한전 KDN, 한전기술)의 지분매각, 정원축소 방침을 밝힌데 이어 송전망 건설에도 민간자본을 참여시키겠다고 선언했다. 과거 민영화의 유령을 부르는 주문이 방만경영과 비효율이었다면 지금은 경영위기와 부채로 바뀌었다. 2023년 3분기 기준 한전의 부채는 200조 원을 돌파하여 부채비율만도 560%에 이른다. 회사채 발행조차 어려워지자 한전은 자회사인 6개 발전 공기업에 대해 일찍이 없던 중간배당을 요구하고 나섰다는 보도다. 전기요금 통제로 촉발된 한전의 재무 부담을 자회사로 전가함으로써 자회사의 재무능력까지 위기에 몰아넣는 셈이다.
한전 적자의 주범은 정부의 전기요금 통제와 화석연료에 대한 높은 의존도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가스와 석탄 같은 화석연료의 값이 올랐지만 한전은 이를 전기요금에 반영할 수도, 화석연료의 비중을 낮출 수도 없었다. 전기요금은 선거 앞에서 얼어붙었다. 정부·여당이 앞장서고 야당은 침묵했다. 한전이라는 공기업의 지배구조는 공공기관 운영위원회를 앞세운 기재부와 주무 부처임을 자처하는 산자부가 점령하고 있다. 정부의 허락이 없으면 한전의 경영진은 방만경영도 할 수 없다.
전력연맹 소속 조합원들이 8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한국전력공사가 인재개발원 부지와 자회사의 지분 일부를 민간에 매각하고 직원 2천명을 감원하는 내용의 추가 자구책을 마련한 내용의 '한전 자회사 지분매각 및 인력감축 자구안'과 관련,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2023.11.8. 연합뉴스
에너지 전환의 속도를 늦추는 전기요금 억제
정부는 한국전력을 민영화하는 빌미로 역대급으로 누적된 한전의 부채를 들고 있다. 그렇다고 한전의 자산매각이 부채 해결에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전기요금 쥐어짜기는 전력시장의 민영화·자유화를 부추겨 ‘경쟁과 시장원칙에 기반한 전력시장’을 구축하고 민간주도 성장체제를 강화한다.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인 표 계산이 따르고 있음은 물론이다.
문제는 따로 있다. 전기요금의 동결은 공적 주체의 투자능력을 줄여 민간주도의 에너지 전환, 즉 에너지 전환의 민영화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에서 에너지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86.8%, 그 가운데 41.6%가 발전부문에서 발생한다(2020년). 따라서 기후위기 해결에서 급선무는 화석연료 발전을 재생에너지로 대체하고 동시에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일이다. 이번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서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설비를 3배로 늘리고 에너지 효율을 2배 높이기로 선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민간 주도의 에너지 전환 정책은 온실가스 감축을 기업의 이윤과 결부시킴으로써 전환비용을 높일 뿐 아니라 전환속도를 늦춘다. 그렇잖아도 재생에너지 비율이 OECD 국가 중에서 꼴찌인데도 2030년 재생에너지 목표를 30%에서 21.6%로 낮춘 게 윤석열 정부다. 태양광 사업을 감사하고 내수시장을 지탱해온 인센티브(RPS, FIT)를 일몰·축소하는가 하면 예산과 공기업 투자도 대폭 삭감하고 있다. 해상풍력은 외국 금융자본과 다국적 자본의 놀이터로 내주고 있다. 맥쿼리, 오스테드, 에퀴노르, 블랙록 등이 그들이다. 공적 투자가 제 역할을 못하면서 에너지 주권마저 내줄 판이다.
에너지 전환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을 강화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다. 자유시장에 기초한 세계화가 후퇴하면서 국가의 역할은 무역 규제의 강화와 산업정책의 부활로 나타나고 있다. 그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기후위기 대응이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나 유럽의 그린딜 산업계획에 이어 일본 정부도 새로운 성장전략으로 ‘디지털 전환과 그린 전환을 위한 공공투자’를 제시하고 있다(이강국, 2023). 이러한 정책들은 하나같이 기후위기 대응을 민간이 주도할 수 없을 뿐더러 주도해서도 안된다는 공감대를 밑자락에 깔고 있다.
에너지 전환 위해 공적 주체의 역할 재정립 필요
정부의 재생에너지 정책이 보여주기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후단체와 노동조합이 민영화 저지와 공공성 실현에 나서고 있다. 지난 8월에는 100여 개의 노동·시민단체가 ‘민영화 저지! 공공성 확대! 시민행동’을 결성해 공기업의 위장된 민영화를 저지하기 위해 나섰다. 11월에는 양대 노총에 소속된 공공기관 노조들이 ‘공공서비스 민영화 금지 및 재공영화 기본법(민영화 금지법)’에 대한 입법청원에 나서 하루 만에 5만 명을 채웠다. 이 법안은 민영화나 공공기관의 자산을 매각할 때는 국회의 동의절차를 마련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공공성에 기반한 재생에너지 전환은 ‘정의로운 전환 충남도민 회의’가 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에너지 전환을 시장의 이윤구조에 맡길 일이 아니라 공적 주체가 주도해야 한다는 것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내용이다.
에너지 전환은 공공이 주도하는 재생에너지를 축으로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지향한다. 석탄이나 가스발전을 태양광이나 풍력발전으로 대체하는 한편 전력망과 에너지 저장장치(ESS)에 대한 대규모 공적 투자가 뒤따라야 한다. 공적 투자는 대규모 투자가 가능하고 기술적인 역량을 동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윤구조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물론 공공이 주도한다는 사실이 민간을 배제한다는 걸 뜻하지는 않는다.
에너지 전환의 과정은 에너지 민주주의의 과정이기도 하다. 에너지 민주주의(energy democracy)는 에너지 정책의 결정 과정에 이해당사자와 시민이 참여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다. 특히 전기요금의 인상이 에너지 빈곤층(energy poor)의 에너지 기본권을 빼앗으면 안 된다. 에너지 요금을 올리더라도 취약계층에게 에너지 기본권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주거환경을 개선해 에너지 절약을 유도해야 한다. 그것이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이다.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을 위해서는 한전을 공적 주체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전기요금을 현실화해 한전의 투자능력을 키우는 일이 전제가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전은 발전 자회사의 화석연료 의존도가 60%를 넘는 등 에너지 전환에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딱히 낮은 전기요금 탓만은 아닌, 흑자상태에서도 그러했다. 지금도 세계에서 가스발전을 가장 많이 늘리고 있는 기업이 한전이다(기후솔루션, 2023). 특히 한전이 추진해 온 해외 석탄발전사업은 해외투자자 및 연기금으로부터 줄곧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세계 3대 연기금의 하나인 네덜란드 연기금(APG)은 한전 투자금을 회수했으며 노르웨이 국부펀드(GPFG)는 한전을 투자 금지기업으로 지정했다. ’밀양 사태‘는 송전망 건설의 흑역사로 남아있다.
그나저나 한전의 민영화를 저지하면 한전이 화석연료 발전을 줄이면서 재생에너지 확대에 나설 수 있을까? 한전 뒤에는 정부가 있고 정부 뒤에는 정치가 있다. 공기업 지배구조의 사슬이 그렇다. 지난 대선판에서 한 후보가 RE100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고 묻자 상대편 후보는 RE100이 뭐냐며 되물었다. 지금 이 두 사람이 한국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RE100을 몰랐던 후보는 여전히 모르고, RE100을 물었던 후보는 물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 언급이 없다. 그러는 사이에 정치가 짬짜미한 전기요금 통제는 급기야 RE100을 중심에서 추동해야 할 한전마저 집어삼킬 태세다.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 민영화라는 유령을 잡으려면 피켓이라도 들고 여의도로 가야 하나, 아니면 용산이 더 빠를까를 저울질해야 할 판이다.
출처 : RE100이 뭐냐고 물었던 대통령 후보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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