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이 세상이 잔뜩 굳어 있어서 변함이 없다면 숨이 막힐 것이다. 변하기 때문에 환자가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고, 어두운 면이 밝아질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변해 가느냐에 달려 있다. 자신의 중심을 들여다봐야 한다. 중심은 늘 새롭다. 거죽에 살지 않고 중심에 사는 사람은 어떤 세월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허물어지지 않는다."
뽕삐두 센터가 보이는 한 까페에서 백건우를 만난 것은 지난 12월 14일 살 갸보에서 열렸던 독주회 다음 날 오후였다. 평범한 차림에 평범한 표정, 격렬한 전투와도 같았던 연주회를 바로 전날 치른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될 수 없는, 그저 늘 그럴 것 같은 모습으로 그가 나타났다. 필자로써는 이번이 그와의 세 번째 인터뷰였기에 재삼 확인한 것이지만 - 하긴 누구라도 그와 세 번쯤 만나면 느낄 수 있는 - 그이는 어떤 질문을 던지더라도 늘 대답하는 톤이 평화롭다. 그 내용이 어떻건 간에. 그런 언어습관의 그이도 아주 조금이지만 톤이 올라 갈 때가 있다. 다른 예술 작품을 보고 감탄할 때가 그렇다.
자리에 앉자마자 백건우는 창너머 보이는 뽕삐두 센터 앞의 '화분'을 이용한 설치미술 작품에 시선을 던지며 말문을 열었다. "저것 좀 보세요"라며 마치 신기한 물건을 발견한 아이와 같은 눈동자를 하고 필자에게 그 작가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 그럴 때면 그의 어조에서 약간의 흥분을 느낄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전날 연주회에서 들려준 부조니와 베토벤의 박력 넘치는 연주와는 아주 거리가 먼.
하드웨어로부터 시비를 걸었다. '왜 야마하 피아노를 골랐는가'라고. 역시 대답하는 말투는 김빠진 맥주 같았다.
"옛날만큼 악기에 신경을 덜 쓴다고 그럴까, 중요성을 조금 더 잃은 것 같아요. 야마하는 특히 이번 독주회에서 처음으로 연주했는데, 오전부터 야마하 팀이 와서 열심히 손질을 하고 - 이번 연주회의 조율사는 백건우 자신이 존경하는 연주자로 꼽았던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의 전문 조율사였다 - 성의를 보여 연주해 봤구요. 그 조율사에게 리히터는 악기 고를 때 어땠냐고 물었더니 그는 아무 피아노나 쳤다고 그래요. 점점 나이를 먹을수록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야마하보다는 평소에 늘 쳐왔던 스타인웨이가 더 마음에 들어요." 악기가 무슨 상관이냐고 하실 독자도 계시겠지만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명필이 붓을 가릴까마는 그래도 손에 익은 붓이 더 나은 것만은 부정할 수 없지 않은가. 다만 이제 아무 붓이나 잡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 그리고 아무 붓으로나 좋은 글씨를 쓸 수 있다는 것은 그가 명필의 반열에 올랐음을 증명해주는 얘기다.
이왕 처음 답이 무겁게 나왔으니 계속 무겁게 가보자. 두 번째 질문, '왜 베토벤을 레퍼토리에 넣었는가, 특히 32번 소나타는 전에 연주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리고 스승이자 베토벤 전문가였던 빌헬름 켐프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여전히 동요 없는 목소리가 나왔다.
"베토벤을 선택했다기보다 32번 소나타에 매력을 느껴서 연주한 거죠. 다른 후기 소나타들을 연주하긴 했지만 32번 소나타는 벼르고 별러 작년에야 처음 연주할 수 있었어요. 이 곡은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로 인간적인 면과 함께 죽음을 바라보며, 그것을 뛰어넘는 초연함을 담고 있기에 들어가기 힘든 곡이에요. 스승 켐프와는 베토벤을 다르게 생각하는 것같구요. 켐프의 연주는 정돈되어있고, 고귀한 베토벤인 반면, 나에게 베토벤은 혁명가 같은 작곡가고, 그의 어떤 힘이 더 끌려요."
곡에 대한 정확한 이해야 기본이라 치고 '스승 켐프는 켐프고 나는 나다'라는 자세에서 그의 예술의 진정성이 느껴진다. 사실 우리 주변, 특히 한국 음악계에서 스승의 지시 하나하나를 아무 반성없이 되뇌는 앵무새들을 얼마나 많이 봐왔는가. 그리고 스승을 추켜세워, 그와의 '관계'로 반사이익을 보려는 태도야 비단 음악계만의 얘기가 아니다.
'왜 남들이 즐겨듣는, 쉬운 레퍼토리를 연주하지 않는가?' 하는 김에 또 음악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사람들은 늘 새로운 체험을 원하죠. 다른 곳에서 이미 들었던 곡일지라도 새롭게 느낄 수도 있고. 그러다 보니 항상 새로운 세계를 찾게 되요. 때로는 아는 곡도 일부러 한참을 연주하지 않다가 새롭게 접근하려고 하기도 하죠."
그가 바흐, 쇼팽, 모차르트를 연주하지 않는다고 그의 연주영역이 좁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기에는 그의 레퍼토리가 너무 자주 바뀐다. 물론 일관성을 가지고. 다시 말해 그는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듯 한 작품, 한 작곡가 씩 만나며 자신의 갈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그의 디스코그래피(음반목록)는 너무 적다. 그가 답한다.
"별로 녹음하고 싶지 않고, 하고 나서도 만족스럽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음반은 그 속성상 정지된 상태, 즉 박제된 것인데, 어떤 점에서는 한 번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더 진실한 것이 아닐까요? 주변 사람들은 하고 나면 사라지는 것이 얼마나 아깝냐고 하는데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 더 정확할 수 있죠."
그래서 그를 칭해 '건반의 나그네'라고 하는가? 그 별명을 어떻게 생각하나 물었다. 답의 첫마디, "나그네야 나그네죠." 하도 허탈해져서 계속 물고 늘어졌다. '그래도 이제는 나그네의 가벼움보다는 어떤 철학적인 사색이 깃들지 않았나'라고. 그런데 그는 "오십이 넘었는데도 연주할 때 보면 새로운 곡을 쳐서 그런지 늘 시작하는 느낌이에요."라고 연륜의 프리미엄조차 거부하고 말을 풀어나갔다.
"묘한 것이 젊었을 때는 철학적인 것에 관심도 많았고 책도 보고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단순해지는 것 같아요. 철학이라는 것이 생활에서 오는 자그마한 진리이고,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의 깨달음이 더 중요할 지도 모르죠. 간단한 얘기로 각자 태어나서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을 찾아 그것에 충실한, 그것도 철학 아닐까요."
글쎄, '그것도 철학 아닐까요' 정도가 아니라, '그만한 철학'이 있을까?
선승들에게서나 나옴직한 답이 나왔으니 그가 고생한 얘기, 즉 그가 수양한 얘기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연주가 즐거우니까 하시겠지만 힘들 때도 있지 않은가'라고. 잠깐 고뇌 비슷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스쳐갔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왜 이 길에 들어섰나 하는 생각도 해요." '뭐가 그렇게 힘이 드냐'고 내처 물었다. "연주할 작품에 부담을 느낄 때도 그렇고... 또 내가 과연 이 곡을 청중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라든가... 사실 그런 의문 없이는 할 수 없으니까." 혼자 되뇌듯이 말하던 그가 좋은 예를 찾았다는 듯이 조금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칠레 출신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가 그랬다죠. 무대에 나서기 직전까지 악보를 들춰봤다는데 누군가가 '왜 평생 연주해 온 곡의 악보를 또 들여다보고 있냐'고 물었대요. 아라우의 대답은 '저 청중들 중에는 이 곡을 처음 듣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였고. 그만큼 우리 연주자들의 책임이 크다는 얘기죠."
예술가로써의 고민이야 그렇다 치고, 생활인으로써의 고생한 얘기도 듣고 싶어졌다. '직업연주자로 생활하는 것도 처음엔 힘들었을 텐데'라고 물었다.
"당연하죠. 특히 우리 세대야 부모가 특별히 돈이 많지 않고서는 모두 고생한 세대잖아요? 다행히 우리 둘(윤정희 씨와 자신) 모두 사치스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심플하게 살려는 사람들이라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다른 음악인들이 아껴준 것도 그런 우리 삶의 방식 못지 않게 큰 힘이 되었던 것 같고. 그리고 그게 진짜인 것 같아요. 상업적인 붐을 일으키고, 상업적으로 포장하는 요즘 음악계에 만연한 풍토는 도대체 내 비위에 맞지 않아요."
단순하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삶의 방식이 젊어서의 고생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줬다는 그의 말이 더욱 무게있게 와 닿았다.
천재, 신동, 상업적 성공을 추구하는 세태에 대한 그의 의견이 궁금했다.
"얼마전 이르떼(arte)에서 방영한 예프게니 키신의 프로그램을 봤는데, 구 소련 출신으로 십 대에 신동 소리를 들으며 '상업적으로 포장된' 그 친구의 연주를 보면 예술성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아요. 아직도 젊은 어떤 연주자를 정말 아낀다면 그의 음악세계 그 자체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지 센세이셔널한 면만 강조시키고 앙코르 몇 곡 연주한 것만 가지고 늘려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야 되겠어요. 기교는 뛰어나다지만 설득력,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그건 원숭이가 나와서 재주부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우리나라 음악교육도 그런 방향을 무작정 쫓는 것 같은데'
"한국의 어떤 연주자가 인터뷰한 것을 읽었는데, '음악을 왜 선택했나?'라는 질문에 '이름도 나고 돈도 벌 수 있고, 그래서 선택했다'고 하더라구요. 어떻게 그런 답을 할 수 있죠? 한국은 일등만 빼고 모두 실패자가 되는데 그게 정말 잘못된 것 같아요. 그건 자기를 위한 거지 음악을 위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는 딸아이에게도 여러 번 다짐을 받았어요. 어려운 길인데 각오가 되어있냐고. 다행히 딸아이는 음악이 좋아서 음악에 종사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더라구요. 이를테면 독주자보다는 오케스트라 단원 같은 방식으로. 그리고 그런 생각이 오히려 건전한 태도인 것 같아요."
'자기를 위해서 하지 말고 음악을 위해서 음악을 하라'는 그의 말 역시 음악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고, 또 적용 되어야 할 백건우 식 철학의 한 단편이다.
'대개들 서울 공연만 하는데 지방에서도 많이 공연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무슨 이유가 있나?'
"재밌잖아요." 그는 많은 질문에 그렇게 한마디 던져놓고 생각을 시작한다. "아니, 음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지방에도 있는데 왜 그 사람들은 들을 기회가 없어요? 음악인은 내가 사랑하는 음악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는 여러 지방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뒤늦게 합석한 윤정희씨와 기억해냈다.
"목포에서는 복도까지 사람들로 가득 찼었는데 중간 휴식시간에도 자리를 뺏길까봐 일어서지를 않더라구요. 제주도에 처음 갔을 때는 시 문화회관의 피아노가 국산이라. 그걸로 연주를 하는데 아주 혼났어요. 그런데 2년 전에 다시 갔더니 스타인웨이를 들여놨더라구요. 그 피아노가 그렇게 귀여웠는지 관장 님이 피아노를 닦고 또 닦고 하시더라구요. 그것 뿐 인가요. 정상적인 음악회를 도저히 할 수 없는 체육관, 극장 이런 데서도 많이 연주했어요. 그래도 요즘은 연주회장 수준이 많이 나아진 것 같아 다행이에요."
슬슬 인터뷰를 정리할 시간이 다가오기에 꼭 묻고 싶었던 질문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당신에게 음악이 뭐라고 생각하나?'
"얘기하기 어려운 질문인데... 음악 속에서 몇 십년 살다보니...내 인생의 한 부분이 아니라 나의 한 부분인 것 같고, 나의 존재가 될 수도 있고, 나의 생명수도 있고... 잘 모르겠어요."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는 없나' 질문의 범위와 방향을 약간 틀었다.
"근데 그건 아주 그래요. 이 음악이라는 건 '진리'인 것 같아요. 또 그 것을 깨닫지 않고서는 좋은 음악인이 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이 음악이, 특히 요즘 와서는 음악에 종사하기보다는 음악을 이용하는, 그런 경향이 강한데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아요. 그리고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전에는 힘들어요. 보통 각오가 필요한 게 아니에요."
웬걸, 그는 다른 질문의 와중에서도 '음악이 나에게 뭔가?'를 계속 생각한 사람처럼 답을 했다. 그에게 음악은 '진리'였고, '진리'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이 구도자 앞에서 필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기 불이 켜졌네." 다시 그의 눈동자가 인터뷰 첫머리의 화분 작품으로 향하며 호기심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 조명은 기가 막힌 것 같애. 작품을 완전히 살려주잖아요." 시계를 쳐다본 윤정희 씨가 일어서며 말했다. "우린 오랜만에 영화나 하나 볼까하구요..." 두 사람이 떠난 까페 탁자엔 뽕삐두 센터의 조명이 환하게 비췄다. 그리고 필자의 뇌리엔 불현듯 법정 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