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젊은공인중개사의모임
 
 
 
 
 
 

카페 통계

 
방문
20241019
14
20241020
15
20241021
25
20241022
22
20241023
17
가입
20241019
0
20241020
0
20241021
0
20241022
1
20241023
0
게시글
20241019
0
20241020
0
20241021
1
20241022
1
20241023
0
댓글
20241019
0
20241020
0
20241021
0
20241022
0
20241023
0
 
카페 게시글
좋은 글 스크랩 가장 드라마틱한 복수극 전국시대`손빈과 방연`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46 15.01.24 09:5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중국 병법의 원조로 불려지는 '손자(孫子)'는 두 사람이다. 한 사람은 춘추시대 말기 오(吳)나라의 장수였던 손무(孫武)이고, 또 다른 사람은 그로부터 백여 년이 지난 전국 시대 제(濟)나라의 군사인 손빈(孫殯)이다.손빈이 손무의 자손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확실한 것은 알지 못한다.


손빈은 청년 시절에 병법을 배웠다.그는 귀곡자에게서 방연(龐涓)과 함께 병법을 배웠는데 방연이 먼저 위나라에서 위 혜왕(惠王)의 장수가 되었다.

위나라는 전국시대 초기에 정치개혁을 단행한 결과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방연은 그런 나라의 장군이 되었으므로 득의 양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방연에게도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그는 동문인 손빈이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재능의 소유자임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지위를 언제 손빈에게 빼앗길지 알수 없는 일이었다.
방연은 여러 가지로 궁리하던 끝에 옛 친구를 생각해 주는 척하며 손빈을 위나라로 불렀들였다. 손빈은 방연을 의심하지 않고 위나라로 갔다. 손빈이 도착하자 방연은 사전에 계획한 대로 손빈을 간첩으로 몰아 두 다리의 무릎 연골을 제거하는 형벌을 가해 손빈을 앉은뱅이로 만들고 그를 가두었다.

손빈은 기가 막혔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이곳에서 벗어나 방연에게 받은 치욕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손빈은 귀곡자가 준 봉투에 적힌대로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면서 감시의 눈초리를 느슨하게 만든 다음 계책을 써서 위나라에 온 제나라의 사자를 만났다. 제나라 사자는 손빈과 대화를 나누다가 그의 재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다. 제나라 사자는 손빈을 자신의 수레에 몰래 태워 제나라로 돌아왔다. 손빈은 탈출 사실이 발각될까봐 거리의 우물 옆에 자신이 평소 입고 있던 옷과 신발을 벗어 놓았다. 사람들은 손빈이 세상을 비관해 투신 자살하고 말았을 것이라는 정도로 생각했으며, 보고를 접한 방연도 반신반의 하면서도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손빈은 제나라로 와서 장군 전기(田忌)의 빈객(賓客)이 되었다. 전기는 자주 제나라 귀족들과 많은 재물을 걸고 경마를 했다. 손빈은 그 경기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어느날 전기에게 말했다.
"장군께서는 다음에 큰 내기를 한번 하십시오. 제가 반드시 장군이 이기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전기는 크게 기뻐하며 여러 귀족들과 천금을 걸고 경마를 하기로 했다. 막 경기를 시작하려고 할때 손빈은 전기에게 귀띔했다.
"이제 장군의 말 중에서 가장 느린 말을 가지고 상대방의 가장 빠른 말과 대결하게 하고, 장군의 가장 빠른 말과 상대방의 중간 말을, 장군의 중간 말과 상대방의 제일 느린 말과 대결하게 하십시오."
그 결과 한번은 졌지만 두 번은 승리하여 결국 전기는 천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손빈의 계책에 감탄한 전기는 손빈을 왕에게 추천했다. 왕은 손빈과 병법을 이야기해 보고는 그의 뛰어난 재능을 알아차려 군사로 삼았다.


얼마뒤 방연의 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에서는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지리적으로 보면 조,위,제 이 세나라는 국경을 접하여 정립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다. 만일 여기에서 조나라가 위나라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면 그 균형은 깨지고 말 것이며, 제니라의 서쪽 국경은 위협을 받게 될것이다.

그래서 제나라 왕은 장군 전기에게 명해 손빈을 군사로 삼아 조나라를 구원하도록 했다. 다리가 잘려 보행이 곤란한 손빈은 특별히 마련된 수레 위에 앉아서 작전 지휘를 하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먼저 조나라로 향해 달려갔을 것이다. 전기 또한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로 출병하려 했다. 그때 손빈이 이를 막으며 말했다.
"이리저리 엉클어져 있는 것의 실마리를 풀려면 먼저 급소를 쳐야 합니다. 급소를 치고 빈틈을 찔러 상대방의 형세를 불리하게 만들면 실마리는 저절로 풀리게 마련입니다.
지금 위나라는 조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먼 길을 왔으므로 위나라 국내에는 노약한 병사들만 남아 있을 겁니다. 장군께서는 군대를 이끌고 빨리 위나라의 수도인 대량(大梁)으로 가서 적의 허를 찔러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위나라는 반드시 조나라 공격을 멈추게 되고 조나라는 저절로 구원되게 될 것입니다."


전기는 손빈의 계책대로 먼저 위나라 수도로 쳐들어갔다. 허를 찔린 위나라는 조나라에 대한 포위 공격을 즉시 풀고 귀국길에 올랐다. 이를 기다리고 있던 제나라 군사는 위의 수도 대량 바로 앞에 위치한 계릉(桂陵)에서 위나라 군사와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기원전 353년)
이로부터 13년후 이번에는 위나라가 조나라와 연합하여 한(韓)나라를 공격하였다. 한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니 제나라에서는 전기를 장수로, 손빈을 참모로 하여 도와주도록 했다. 한편 위나라에서는 지난날 손빈을 모함하여 억울한 형벌을 당하게 했던 방연이 사령관이 되어 한나라를 공격하고 있었다.


방연은 제나라의 대군이 한나라를 구원하러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즉시 군사를 돌려 손빈의 제나라 군대를 향하여 공격해 왔다.
그런데 제나라 군사들은 싸우려 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려 후퇴해 버리는 것이었다. 위나라 군사들은 자신들의 기세에 눌려 제나라 군사들이 후퇴하는 줄 알고 기세등등하게 제나라 군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제나라 군사를 뒤쫓던 위나라 군대가 지난밤에 제나라 군사들이 머물렀던 곳에 당도해 보니 10만 명분의 취사를 했던 가마솥 터가 남아 있었다. 추격한 지 이틀째, 역시 제나라 군대가 숙영한 곳에 당도해 보니 이번에는 가마솥 터가 상당히 줄어 대략 5만 명분의 취사를 했던 것 같았다. 사흘째 되던 날 가보니 이번에는 3만 명분의 취사밖에 안 한것 같았다.


위나라 장수 방연은 제나라 군대의 뒤를 쫓으며 매우 만족해 했다.
"내 원래부터 제나라의 군사들이 겁쟁이인 줄 알고 있었다. 우리땅에 들어온지 3일 만에 도망간 군인 수가 반을 넘었구나."
방심한 방연은 속도가 느린 주력 보병군을 버리고 걸음이 빠른 정예군만 이끌고 제나라 군대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바로 손빈의 계책에 의한 것이었다. 손빈은 방연이 가마솥 터가 적어진 것을 보고 군사가 도망간 것이라고 생각하여 방심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손빈은 방연의 행군 속도를 계산하여, 방연의 군대가 날이 저물면 마릉(馬陵)에 도착할 것이라 생각했다. 마릉은 길이 아주 좁을 뿐만 아니라 길 옆이 막혀 복병을 매복시키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었다.


손빈은 나무를 하얗게 깎은 후 "방연이 이 나무 아래서 죽을 것이다" 라는 글귀를 써 놓았다. 그리고는 제나라 군사 중에서 특히 활을 잘 쏘는 병사 5만 명을 매복시키고 "해질 무렵 이 나무 밑에 불꽃이 보이면 그것을 겨냥해서 일제히 사격하라!"고 명령했다.
밤이 되자 방연의 군대가 과연 마릉에 도착했다. 캄캄한 밤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나무를 하얗게 깎아 그 위에 무언가가 써 있는 것이 보였다. 방연이 불을 비춰 그 글귀를 읽으니 자신이 지금 이 장소에서 죽는다고 쓰여 있는 것이었다. 놀란 방연이 채 주위를 돌아보기도 전에 수많은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위나라 군대는 뜻밖의 기습을 받아 큰 혼란에 빠졌다. 이리저리 흩어져 달아나다 화살에 맞는 군사가 부지기수였다. 방연은 자신의 지혜가 모자라 패배한 것임을 깨닫고 스스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으며 말했다.
"드디어 그 더벅머리 아이놈이 이름을 날리게 되었구나."
제나라 군대는 위나라 군대를 모두 격파하고 위나라의 태자 신(申)을 포로로 삼아 귀국하였다. 손빈은 이 싸움에서의 승리로 그 명성을 천하에 드날리게 되었다.

 

오늘날 전해지는 병법서 <손자병법(孫子兵法)>은 손무의 저서이다. 한편 손빈 역시 병법서를 남겼다는 기록은 있으나 실제로 그 책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손자병법의 저자가 손빈일 것이라는 설, 손무는 가공의 인물일 것이라는 설 등 논의가 분분하였다.
그러나 1972년 산동성의 임기(臨沂)에서 <손빈병법(孫殯兵法)> 89권이 발견 됨으로써 손무, 손빈 모두 각각 병법서를 저술 했음이 확인되었다.

 

[출처] 손빈과 방연|작성자 불귀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