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적으로 국사시간에 별책으로 나누어주는 '역사부도'를 보면 윤관이 쌓은 동북 9성은 함흥과 그 주변의 지역들로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 맨 위에 조그만하게 '두만강 유역이라는 설도 있음'이 붙어있더군요....ㅡ.ㅡ
그렇다면 윤관은 정말 함흥평야 정도의(?) 땅뙤기를 얻자고 그렇게 여진족과 일진일퇴를 벌였으며, 동시에 그 함흥평야가 여진족이 애걸하면서까지 돌려달라고 할 정도로 가치있던 땅이었을까요?
사실 저는 동북 9성은 함흥평야가 아니라 두만강 유역에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본인의 주관적인 주장에 마땅히 마땅한 근거를 제시해야 하며, 또한 다른 꿍꿍이...즉 지금의 우리에게 동북 9성의 위치의 고증을 두고 벌어진 여러 사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현재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어떠한 가치를 갖는지를 서술하려 합니다.
1. 키포인트
- <고려사> 예종 3년 2월조, <고려사 지리지>는 다음과 같이 윤관의 9성 축성과 그 경계를 언급하고 있다.
'예종 2년에 평장사 윤관을 원수로, 추밀원사 오연총을 부원수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군대를 이끌고 잔적(여진족)을 몰아내었다. 그 후 이 지역에 9개의 성을 설치하고, 공험진(公驗鎭)의 관할 구역에 있는 선춘령(先春嶺)에 비를 쌓아 그 경계로 삼았다.'
즉 이 말은 다시 바꾸어 말하자면 공험진에 있는 선춘령이 곧 국경선이라는 의미이며, 동시에 선춘령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만 밝힌다면 9성의 영역이 어디까지 있었는지를 확실하게 밝힐 수 있는 것이다.
2. 그렇다면 공험진, 선춘령의 위치는 어디인가 ㅡㅡ?
- 최근 일본에서 발견된, 조선 초기에 편찬된 <동국지도(東國地圖)>는 세종이 4군 6진을 축조하면서 그 지역에 대한 지리를 조사하도록 명한 결과 만들어진 지도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지도에서 공험진은 속평강(速平江 : 지금의 목단강의 지류)유역에 위치해 있으며 선춘령은 속평강 북안에 위치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동북면 국경에 비교적 관심이 많았던 세종이, 김종서에게 특별히 고려의 유적을 조사할 것을 권한 이후에도 수 차례 조사단(?)을 파견하여 만든 것이기에 표기의 오류나 단순한 수소문에 의거하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필자는 <동국지도> 이외에도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을 언급할 것이나, 그 전문의 언급은 힘든 관계로 일부만을 기재하는데에 미리 죄송함을 밝힌다.
"....(상략)....회질가탄이 있으니 바로 두만강의 하류이다. 강을 건너. 큰 성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현성이다. 그 북쪽으로 90리 괴는 곳의 산상에 옛 석성이 있으니 어라손참이라 한다. 그 북쪽으로 30리에 허을손참이 있고, 그 북쪽으로 60리에 유선참이 있으며, 그 동북으로 70리에 거양성이 있다. 거양에서 다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선춘령이니, 바로 윤관이 비를 세운 곳이다."
- 선춘령에 대한 언급
"두만강탄을 건너서 북쪽으로 90리를 가면 오동사오리참이 있으며, 그 북쪽으로 60리에 하이두온이 있고 그 북쪽으로 100리에 영가사오리참이 있으며, 그 북쪽의 강에 바로 공험진이 있으니, 곧 윤관이 설치한 진이다." - 공험진에 대한 언급.
다시 말하자면 윤관이 쌓은 9성의 영역은 비단 두만강 유역 뿐만이 아니라 만주(정확히는 동간도)를 포함하는 영역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비단 세종실록 지리지 뿐만이 아니라 <동국여지승람>,<북로기략>,<북관기사>등의 서적들도 같은 입장을 보이고 있다.
즉 조선 초기만 해도 9성의 영역은 두만강 이북이었다는 것이 널리 인정되었던 것이다.
3. 그렇다면 왜 9성의 영역이 함흥지방으로 축소되었는가?
- 기본적으로 9성의 영역이 함흥평야로 인식된 데에는 조선의 실학자 한백겸(韓百謙)의 역활이 크다. 그는 <고려사>에 나오는 [영주벽상기(英州璧上記)]에서 그러한 생각의 단초를 얻었는데. '영주벽상기'란 윤관이 장수 임언의 공을 칭찬하여 그 전공을 영주청의 벽에 걸어놓은 것이다.
그것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그 지방이 300리(其地方三百里)인데 동에는 대해에 이르고, 서북에는 개마산이, 남으로는 장,정주에 접해 있으니, 가히 사람이 살 만하다.....(이하 하략)..."
한백겸은 거기서 300리라는 기록을 감안한다면, 두만강까지의 거리인 700리에도 미치지 못하므로(영주 벽상기는 지금의 함흥시에 있었다고 한다.) 9성의 영역은 함흥평야 주변이라고 결론내린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지방(其地方)'이 과연 9성 전체를 가르키는 것인지 매우 애매하며, 동시에 그 지방이란 9성 중의 하나, 즉 주진의 영역,구분선으로 보아야 할 가능성도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한 것은 북쪽의 경계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300리란 어쩌면 동-서축의 넓이로 보아야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애매함을 보완하기 위하여 한백겸은 결정적인 증거를 드는데 바로, 길주와 함흥을 잇는 고개인 황초령에 하나의 석비가 서 있는데, 그것을 바로 윤관의 선춘령비라 주장한 것이다.
당시, 실학은 고증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사실적인 증거..즉 석비까지 제시하는 한백겸의 주장은 많은 실학자들에게 반영되었다. 이는 정약용이 쓴 <아방강역고>에도 한백겸의 주장과 동일하게 기재되어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1929년에 최남선이 고적수집을 위해 함흥에 방문차 들렸다가 그 비석에 대한 조사와 고증을 실시했고, 결국 그 비석은 바로 진흥왕의 순수비로 밝혀졌다. 한백겸의 주장의 가장 큰 지지목이 넘어진 셈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때 필자는, 9성의 영역..특히 선춘령은 두만강 이북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4. 글을 마치며.
- 사실 이 글을 쓰는 것을 많이 망설였다. 왜냐면 이러한 논조의 글은 필자가 싫어하는 역사관을 가진 이들, 즉 '만주회복'을 외칠정도의 쇼비니스트적 역사학도들의 좋은 놀잇감(?)이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역사는 사실을 근거로 하는 학문이다. 또한 철저한 고증이 이루어져야한다. 따라서 제대로 고증조차 하지 않고 황초령비를 선춘령비라 단정한 한백겸의 잘못을 언급하면서 보다 고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글을 쓰면서 오히려 쇼비니스트적 역사학에 대한 씁쓸함도 느낄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한백겸이 확실하지도 않은 몇몇 증거를 들어, 당시 실학,고증학이라는 흐름을 타고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한 것 처럼.
지금도 민족주의 사학이라는 흐름을 타고, 몇몇 검증되지도 않은 역사서를 가지고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이들이 생각이 난다면, 지나친 비유일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시의 실학이나, 지금의 민족주의 사학이 그 빛을 잃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는 관점이 중요하다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사실적 증거위에 근거한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카는 말했다.
"역사학자의 관점은 목수의 미적 감각이며, 사료에 관한 고증은 목수의 의무이다. 좋은재료를 골라쓰는 것은 목수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지만 목수의 의무인 것처럼, 사료에 대한 역사학자의 입장 역시 이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첫댓글 으음.. 이도 마찬가지인듯 하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