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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 빈미술사박물관 특별전
o 전 시 명 :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Six Centuries of Beauty in the Habsburg Empire)
o 기 간 : 2022. 10. 25.(화) ~ 2023. 3. 1.(수) 예정
o 장 소 :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o 전 시 품 : 디에고 벨라스케스 <흰 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피터르 파울 루벤스 <주피터와 머큐리를 대접하는 필레몬과 바우키스>
얀 브뤼헐 1세 <꽃다발을 꽂은 파란 꽃병> 등 빈미술사박물관 대표 소장품 96점 출품
o 입장료 : 유료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Austria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전경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국과 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여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 대표 소장품전을 개최한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13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배출한 이후 15~20세기 초까지 600여년 간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 영토를 다스리는 황제로 군림한 가문이며 유럽의 정세에 가장 영향력 있던 명문가 중 하나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15~20세기까지 합스부르크 왕가가 수집한 르네상스, 바로크미술 시기 대표 소장품을 통해 오스트리아의 역사와 문화를 조명하는 회화, 공예, 갑옷, 태피스트리 등 96점의 전시품이 소개된다. 피터르 파울 루벤스, 디에고 벨라스케스, 틴토레토, 베로네세, 안토니 반 다이크, 얀 스테인 등 빈미술사박물관 소장 서양미술 거장들의 명화도 직접 만나볼 수 있다. 특히 1892년 수교 당시 고종이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선물했던 조선의 갑옷과 투구도 이번 전시에 선보이게 되어, 수교 130주년 기념의 의미도 되새기는 전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 이 전시는 국립중앙박물관과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이 협력하여 개최한다.
❁ 빈 미술사 박물관 합스부르크 컬렉션 편
걸작을 품은 위대한 유산
‘합스부르크’라는 단어는 낯설지 않다. 역사 수업이나 교양 프로그램에서 한 번쯤은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가문이 정확히 어느 나라에 속하고 유럽의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분명히 설명하기란 어렵다. 15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 역사에 있는 큰 사건들과 밀접하게 연관 있으면서 복합적인 관계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는 10세기 스위스 북부 지방의 작은 백작 가문이었지만, 13세기 루돌프 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면서 왕가의 반열에 올랐다. 오스트리아 영토로 진출해 세력을 키운 합스부르크는 16세기 초에는 프랑스와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거의 전 지역을 통치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칭도 붙었다. 이렇듯 합스부르크 왕가는 우리에게 역사적 관점에서 더 친숙하지만, 이들은 루벤스, 벨라스케스 등 유럽을 대표하는 걸출한 화가들의 후원자이자 예술품 수집가로서도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바로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에 소장된 르네상스, 바로크 시기의 걸작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빈미술사박물관 소장품 총 96점으로 합스부르크의 사람들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남다른 철학 속에서 탄생한 매혹의 걸작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그동안 주로 역사 속에서 접했던 합스부르크 왕가를 예술품 수집의 역사 속에서 새롭게 이해해보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이번 전시는 총 5부로 구성된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유럽의 패권을 장악하는 배경이 된 15세기의 막시밀리안 1세를 시작으로, 시대에 따른 황제나 대공 등 주요 수집가들의 역할을 살펴본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프라하, 스페인, 브뤼셀 등 유럽 각지에서 예술품을 수집했고, 이를 수도 빈으로 이전했다. 이런 과정으로 600년에 걸쳐 수집된 예술품이 빈미술사박물관으로 집대성되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프롤로그 ‘더 멀리, 합스부르크가의 비상’ 전시전경
◦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459-1519) 초상화〉, 베른하르트 슈트리겔(1460-1528) 원작을 모사, 1508년 이전, 나무에 유화, 79.3×50.8㎝, 빈미술사박물관, GG 4403 - 전시실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459-1519) 초상화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역시 다른 군주처럼 자신의 공국만을 다스리는 특별하지 않은 군주였다. 그러나 150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등극한 막시밀리안 1세는 나름의 비책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결혼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동맹을 맺어 제후들이 무시할 수 없는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마리와 결혼하여 부르군트 공국을 얻었고, 아들과 딸을 스페인 왕실의 공주, 왕자와 결혼시켜 스페인 왕국 전체와 식민지 영토까지 얻었다. 거기다 손자와 손녀는 보헤미아 왕실의 공주, 왕자와 결혼시켜 동유럽까지 손에 넣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유럽의 패권을 쥘 수 있도록 기초를 다진 진정한 설계자였던 셈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강력한 제후 세력과 맞서야 했고 실질적인 통치력은 약했다. 1508년 황제가 된 막시밀리안 1세는 군주의 권위와 명성을 드러내기 위해 초상화를 선전 수단으로 활용했다. 황제는 갑옷을 입고 오른손에는 황제의 홀을, 왼손으로는 검 손잡이를 쥐고 '명예의 천'이라 부르는 화려한 붉은색 천을 배경으로 서 있다. 이러한 양식의 초상화는 오늘날에도 다양하게 변화되어 전해지고 있다.
프롤로그 ‘더 멀리, 합스부르크가의 비상’ 전시전경
1부 ‘황제의 취향을 담다, 프라하의 예술의 방’
1부에서는 프라하에 수도를 두고 활발한 수집 활동을 벌인 16세기 루돌프 2세를 다룬다. 그는 탁월한 안목을 바탕으로 ‘예술의 방’에 진기한 예술품을 전시했고, 이는 현재 빈미술사박물관 공예관의 기초가 되었다.
루돌프 2세는 과학, 수학 뿐 아니라 가톨릭 교리에서 금하는 연금술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분야를 탐독했고 각종 분야의 장인들과 예술가들을 프라하로 불러들여 보헤미아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특히 〈십자가 모양 해시계〉는 하나의 작품에 다양한 방법으로 시각을 측정할 수 있었던 당대의 수학, 과학, 예술, 기술의 종합적 집약체였고, 가장 루돌프 2세다운 작품이다.
◦ <십자가 모양 해시계(Cruciform Sundial)>, 1619년, 구리 합금에 도금, 높이 17.8㎝, 길이 12.1㎝, 빈미술사박물관, KK 709 - 해시계는 근대 초기까지 시간을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정확한 방법이었다. 기계식 시계처럼 오작동할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해시계는 여러 방법으로 시각을 알려주는 다면 십자가 구조로 제작되었다. 해시계에 집약된 다양한 방법의 시간 측정법은 제작자의 수학, 기하학, 과학 그리고 예술에 대한 지식과 관심이 대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루돌프 2세 황제가 선호한 예술품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루돌프 2세는 특유의 내성적인 성격으로 프라하의 왕성을 좀처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자신의 끝없는 지식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일생 동안 수많은 분야의 학문을 탐독했다. 그의 말년은 고독했지만, 우주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얻고자 했던 그의 열정은 과연 보상을 받았을까. 그 답은 진기한 수집품으로 가득한 빈미술사박물관 공예관의 '루돌프 2세의 방'에 있을지도 모른다.
2부 ‘최초의 박물관을 꾸미다, 티롤의 암브라스 성’
2부에서는 오스트리아 서쪽 지역인 티롤을 다스린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을 소개한다.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연결하는 지역이면서 이탈리아와도 접한 요충지였던 티롤은 막시밀리안 1세가 인스브루크 왕궁에 거주하며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로 발달했다. 1564년부터 1595년까지 티롤을 다스린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은 남다른 수집벽으로 온갖 희귀하고 이국적인 산물을 소재로 한 공예품부터 회화, 갑옷, 무기 등 다양하고 수많은 예술품을 수집해 자신만의 박물관을 꾸몄다.
수집품을 전시하기 위한 전용 건물을 지어 전시품 배치, 진열장 설계까지 직접 결정했다는 점에서 오스트리아 최초의 박물관이라고 부를 수 있다. 16세기 유럽에 전해진 희귀한 소재, 야자열매로 제작한 공예품을 선보인다.
◦ <야자열매 주전자(Coconut Jug)>, 16세기 후반, 야자열매 은, 도금, 높이 41.0㎝, 빈미술사박물관, KK 6849 - 16세기 유럽에 야자열매는 바다에서 자라는 나무 열매라고 알려지면서 낯설고 경이로운 물건으로 여겨졌다. 인도로 떠난 유럽인들은 항해 도중 야자열매가 바다에 떠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주전자를 장식한 물고기 모양 물의 정령은 야자열매가 바다에서 왔음을 암시한다. 또 야자열매가 해독 성분을 갖고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확산되기도 했다. 전 세계에 야자열매 장식품이 6점 있는데, 이 가운데 3점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집품이다.
2부 ‘최초의 박물관을 꾸미다, 티롤의 암브라스 성’ 전시전경
3부 ‘매혹의 명화를 모으다, 예술의 도시 빈’
3부는 빈미술사박물관 회화관의 명성을 높인 명화를 집중적으로 선보인다. 카를 5세로부터 약 200년간 이어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수집한 예술품과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으로 브뤼셀에 부임했던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이 수집했던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지역의 수준 높은 회화는 수도 빈으로 모여 빈미술사박물관의 소장품으로 남았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흰 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도4와 피터르 파울 루벤스의 〈주피터와 머큐리를 대접하는 필레몬과 바우키스〉, 또한 이탈리아 베네치아 화파와 17세기 플랑드르 지역 신흥 부르주아 계층에 집안을 장식하기 위해 주문한 정물화, 풍경화, 초상화, 사냥화 등 다양한 장르의 회화를 선보인다.
◦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 〈흰 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Infanta Margarita Teresa in a White Dress)〉, 1656년경, 캔버스에 유화, 105.0×88.0㎝, 빈미술사박물관, GG 3691 - 이번 기획전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귀엽고 깜찍한 모습의 공주 초상화이다.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스페인 왕 펠리페 4세와 두 번째 부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난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페인의 공주를 보고 싶어 하던 페르디난트 3세를 위해 그린 초상화이다.
◦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주피터와 머큐리를 대접하는 필레몬과 바우키스(Philemon and Baucis Giving Hospitality to Jupiter and Mercury)〉, 1620-25년경, 캔버스에 유화, 153.5×187.0㎝, 빈미술사박물관, GG 806 - 나그네로 변장한 신들은 프리기아라는 마을을 방문한다. 집집마다 문전박대를 당하지만 유일하게 이 늙은 부부만이 그들을 성심성의껏 대접한다. 화가는 그들에게 대접한 포도주가 줄어들지 않자, 신들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을 묘사한 그림이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붉은 옷의 머큐리와 필레몬, 그리고 단 한 마리 남은 거위마저 대접하기 위해 잡으려는 바우키스를, 놀란 얼굴로 손을 들어 저지하고 있는 쥬피터의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는 그림이다.
3부 ‘매혹의 명화를 모으다, 예술의 도시 빈’ 전시전경
4부 ‘대중에게 선보이다, 궁전을 박물관으로’
4부는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의 시대를 살펴본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집품을 벨베데레 궁전으로 옮겨 전시하고자 했고, 아들 요제프 2세 때 궁전을 대중에게 무료로 개방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약혼 축하 연회를 그린 작품도6은 18세기 장대한 궁정 행사의 일면을 보여준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조카인 프란츠 2세가 수집한 태피스트리는 시스티나 성당을 위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가 라파엘로(1483-1520)가 디자인한 태피스트리 연작의 복제품으로 미술사적 의의가 높은 작품이다.
◦ 요한 카를 아우어바흐(Johann Carl Auerbach), <마리아 크리스티나 대공의 약혼 축하연(Banquet to Celebrate the Engagement of Archduchess Maria Christina)>, 1773년, 캔버스에 유화, 225.0×190.0㎝, 빈미술사박물관, GG 3150 - 1766년 4월 2일 호프부르크 왕궁에서 열린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 대공과 작센공작 알베르트의 약혼을 축하하는 공식 연회를 그린 그림이다.
4부 ‘대중에게 선보이다, 궁전을 박물관으로’ 전시전경
4부 ‘대중에게 선보이다, 궁전을 박물관으로’ 전시전경
5부 ‘걸작의 집대성, 빈미술사박물관’
끝으로 5부에서는 19세기 프란츠 요제프1 세의 시대를 조명한다. 빈미술사박물관은 1857년에 시작한 수도 빈의 도시 확장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건축되었다. 이 프로젝트로 빈을 둘러싸고 있던 성벽이 철거되고 거대한 반지 모양의 도로 링슈트라세(Ringstrasse)가 들어섰고, 그 길을 따라 빈미술사박물관・빈자연사박물관 등 빈을 유럽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로 만든 다양한 건축물들이 지어졌다. 이번 전시에서는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황후의 초상화를 선보여, 이들의 슬프고도 비극적인 19세기 말 황실의 분위기를 전할 예정이다.
◦ 요제프 호라체크(Joseph Horaczek), <엘리자베트(시시) 황후(Empress Elisabeth)>, 1858년, 캔버스에 유화, 131.0×91.2㎝, 빈미술사박물관, GG 7399 - 시시로도 불리는 엘리자베트 황후는 오스트리아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황후라고 한다. 초상화는 그녀가 21세 때 그린 것으로 실물을 보는 듯 잘 표현된, 돋보이는 미모가 인상적이다. 엘리자베트는 바이에른에서 자유롭게 성장 했다고 한다. 원래는 그녀의 언니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와 약혼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황제는 엘리자베트에게 첫 눈에 한해 황후가 되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황실 예법은 숨쉴틈 없이 엄격했는데, 비교적 자유롭게 성장한 엘리자베트에게는 적응하기 어려운 감옥과도 같은 곳에서 마음을 붙이지 못한 비운의 황후 엘리자베트는 1898년 제네바 여행 중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당한 비운의 최후를 맞이했다.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되는 이번 전시의 마지막 작품은 1892년 수교 당시 고종이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선물한 조선의 갑옷과 투구이다. 빈미술사박물관은 1894년 2월 10일 날짜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수집품으로 빈미술사박물관에 등록되었다. 130여년 만에 한국을 찾은 조선의 갑옷과 투구는 오스트리아와 조선이 19세기 말 주고받은 마음의 증표로서 수교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 <투구[冑]와 갑옷(Helmet and Armor)>, 조선(Joseon Dynasty), 1890-94년경, 마차박물관(Imperial Carriage Museum Wien) - 1892년 수교 당시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선물했던 조선의 갑옷과 투구 - 수교 130주년 기념으로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전한 고종의 선물, 갑주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에서 만날 수 있는 한국의 갑주는 1892년 대한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수교 당시 고종이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에게 선물한 것이다. 한·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이번 전시에 한국을 다시 찾은 갑주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조선시대 갑옷의 재료와 분류
조선시대 갑옷은 다양한 재료로 만들었는데, 금속으로 만든 철갑鐵甲, 가죽으로 만든 피갑皮甲, 종이와 직물로 만든 지갑紙甲·엄심갑掩心甲, 비단과 모직물로 만든 단갑緞甲·전갑氈甲, 직물과 두정으로 만든 두정갑頭頂甲, 두두미갑頭頭味甲, 무명으로 만든 목면갑木綿甲이 있다. 또한 면포배갑綿布背甲이라고 하여 무명 13겹 이상의 면직물을 겹치고 솜을 두어 총탄을 막을 수 있게 흥선대원군이 개발한 갑옷도 있다.
갑옷은 만든 구조와 입는 방법에 따라 스리피스, 투피스, 원피스 스타일 갑옷으로 분류할 수 있다. 즉 ①‘호항護項 분리형 갑옷’은 조선 초기에 나오는데, 몸과 팔을 보호하는 ‘갑신甲身’과 호항護項과 겨드랑이를 보호하는 ‘호액護腋’의 세부분으로 나뉘는 스리피스 구조이다. ②‘소매분리형 갑옷’은 몸통을 보호하는 ‘갑신’과 하반신을 보호하는 ‘갑군甲裙’이 상하 구분되어 있으며 성기를 보호하는 ‘골미鶻尾’와 겨드랑이를 보호하는 ‘호액’으로 구분되어 있다. ③‘의상衣裳형 갑옷’은 상의는 갑甲, 하의는 갑상甲裳, 겨드랑이는 호액, 그리고 성기를 보호하는 엄심掩心으로 구분한 것처럼 상의[衣]와 치마[裳]가 분리되는 투피스 형태이다. ④‘포袍 형 갑옷’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19세기말, 20세기 초까지 가장 많이 알려진 원피스 유형으로 이번에 소개하는 오스트리아 갑주도 여기에 속한다.
◦ <갑옷의 네 가지 유형〉/ ① 호항분리형 갑옷, ② 소매분리형 갑옷, ③ 의상형 갑옷, ④ 포형 갑옷갑주 구성의 주요 특징
갑옷의 겉감은 모직물이고 안감은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보통은 안감 속에 갑찰甲札이 숨겨져 있다. 갑옷의 겉감은 당시 유행하던 고급직물인 홍색 융絨으로 만들었고, 안감은 청색구름무늬와 보배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하였다. 겉감과 안감을 청홍으로 한 것은 음양오행을 따랐다고 하는 이론이 있다. 갑옷의 겉에는 두정이 일정하게 박혀 있고. 두정이 있으면 안에는 당연하게 가죽이나 황동으로 만든 갑찰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지만, 갑찰 없이 두정만 박혀있는 갑옷도 있다. 어깨에 부착한 용 장식은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린다. 갑주의 양어깨에 견장처럼 장식한 것이 용인데, 발톱이 4개인 4조룡이다.도2 반면,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갑옷은 발톱이 5개인 5조룡인데 갑옷에서 발톱의 숫자로 신분의 고하를 구분하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차별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머리부분 1개, 몸통부분 2개, 꼬리부분이 1개로 총 4개로 구분하여 제작하였고, 3곳이 분절되도록 하여 활동할 때 어깨를 편안하게 움직일 수 있다. 갑옷의 소매 양 끝과 깃 둘레선, 옆선, 밑단 도련 및 양옆 트임 등에는 수달과 같은 동물의 털을 달았다. 해외소장 일부 유물에서는 동물의 털 대신 청색 직물로 선을 두른 것도 보인다. 겨드랑이 지점부터 양옆이 트여있고, 단추를 사용하여 앞길을 여며서 고정하는데, 단추는 밀화로 하거나, 밀화에 칠보장식이 있는 경우도 있다. 깃의 둘레는 은이나 황동으로 만든 잎사귀를 달았는데, 앞에는 좌우 각각 5~6개씩, 뒤에도 5~6개 정도씩 달았다.
투구[冑]는 전쟁 시에 머리를 보호하는 기능을 하는 모자로 머리가 들어가는 감투, 정수리장식, 드림 등으로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도3,4 얼굴의 양 옆과 목 뒷면에 총 세 장의 드림이 있는데, 재료 및 색상은 일반적으로 짝을 이루는 갑옷과 일치하는 편이다. 두정갑頭釘甲과 같이 홍색 드림이 있는 투구는 상위 계급용이고, 드림의각 면에는 두정이 있고 가장자리에는 수달과 같은 동물의 털을 둘렀으며 감투의 장식 역시 화려하다. 네 조각으로 구성된 감투의 앞 두 면은 오조룡이, 뒷면은 봉황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차양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 투각되어 있다.도5 투구의 양옆에는 파란을 올린 공작을 부착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도6 감투의 가장 윗부분에는 긴 막대 형태인 간주를 꽂았다. 간주의 가장 윗부분은 보주寶珠 또는 당파钂鈀 형태로 장식하고 그 아래는 붉은색으로 염색한 말총으로 만든 상모象毛를 달았다.
갑주의 쇠퇴와 소멸
『조선왕조실록』에 갑주 관련 기사가 1,000여 건에 달할 정도로 조선시대에는 각 시대와 배경에 맞는 다양한 갑주가 발달하였다. 19세기 중반에서 말기 이후에는 갑주가 다원화되는 시기로 고종대의 신미양요·병인양요·운요오호 사건 속에서 갑주의 중요성이 재고되었고 새로운 갑주를 개발해보았지만, 결국 갑주의 쇠퇴와 소멸이라는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1882년(고종19년)에는 명목상으로 남아있던 갑주가 제도적으로 철폐되었으며, 1892년(고종29년)에는 군제개혁으로 인한 갑주 착용 금지령이 내리면서 조선시대의 갑주는 사실상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궁중 행사그림에서도 1887년까지만 갑주가 보이고,도7 1901년부터는 한국식 군복과 서양식 군복이 갑주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수교의 해인 1892년은 기 제작된 갑주가 더 이상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시기였으므로 왕실에서 해외 수교 시 선물용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어떤 연유인지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진 사실은 없지만,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의 우리나라 갑주가 외국연구자 및 기관들에 의해 선물, 구입, 경매, 기증 등의 다양한 경로로 수집되었고, 그들에 의해 보관 관리되어 왔다.
그동안 국립문화재연구원이 2002년-2017년까지 국외소재 한국문화재 조사연구를 하면서 국외에 소장된 다량의 갑주를 발굴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이 갑주는 구한말 국가 간 ‘수교기념 선물’이고,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투구와 갑옷 뿐 만 아니라 갑주함·투구 내모, 보자기 등 일습이 한 세트로 잘 보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글이 130년 만에 오스트리아에서 우리나라에 오게 된 한국의 갑주를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갑옷, 투구, 갑주함 등 수교기념 선물 일습
투구 전면과 투구 뒷드림
빈미술사박물관 갑옷의 어깨 4조룡 장식, 투구 전면 용장식
투구 옆면에 파란을 올린 공작문 장식
헌종가례진하도(1844)년, 홍색갑주 차림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켜낸 예술의 힘
합스부르크 왕가가 600년간 수집한 예술품들은 빈미술사박물관에 남아 열정적인 예술 수집가이자 후원자였던 그들의 면모를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그들은 예술이 곧 힘이자 지식이고 권력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순탄하지 않은 역사 속에서도 예술품 수집을 이어왔고 이를 집대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왕정이 몰락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들의 유산은 빈미술사박물관에 남아 지금도 합스부르크의 이름을 빛내고 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매혹의 걸작들을 감상하며,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켜낸 예술의 힘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 얀 판 덴 후키(1611-1651),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Erzherzog Leopold Wilhelm)>, 1642년경, 캔버스에 유화 - 레오폴트 빌헬름(1614-1662)은 성공한 지휘관의 모습이다. 오른 손에는 지휘봉을 쥐고, 왼손을 허리에 올려 자신만한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페르디난트 2세(1578-1637)의 막내아들인 빌헬름은 30년 전쟁 시기 독일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1646년 에는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검은 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은 야전 사령관으로 일생을 보낸 대공의 인생을 암시하는 것 같다.
◦ 대공(大公) : 유럽에서, 왕가의 황태자나 여왕의 부군(夫君)을 이르는 말
◦ 얀 판 맨 후커(1611-1651), 〈페르디난트 3세(Ferdinand III)>, 1643년경, 캔버스에 유화 - 페르디난트 3세(1608-1657)는 페르디난트 2세(1578-1637)와 바이 에른의 마리아 안나(1574-1616)의 세 번째 아들이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페르디난트 3세는 합스부르크 군주 가운데 처음으로 작곡을 했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어로 시를 쓰기도 했는데. 따라 부르기 쉬워 당대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 서명하는 것으로 길고 길었던 30년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를 이루게 된다.
◦ 다비드 테니르스 2세(David Teniers II),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Erzherzog Leopold Wilhelm)의 브뤼셀 화랑>, 1651년, 빈미술사박물관 - 모자를 쓴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과 그의 궁정 화가 다비드 테니르스 2세를 중심으로 당시 구입한 51점의 이탈리아 회화를 둘러보는 장면을 그렸다. 제일 위의 왼쪽에서 두번째 그림이 이번 전시에 출품된 베로네세의 <동방박사의 경배>이다. 그림 속에는 모자를 쓴 레오포트 빌헬름 대공과 그의 궁정화가 다비드 테니프스 2세를 중심으로 당시 구입한 51점의 이탈리아 회화를 둘러보는 장면이 표현 되었다고 한다.
◦ 베른하르트 슈트리겔(Bernhard Strigel, 1465(1470)~1528), 1516년경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459~1519)〉 - 자신의 첫 번째 부인과 아들, 손주들이 함께 있는 가족 초상화,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 안드레아 아피아니(Andrea Appiani, 1754-1817), 〈나폴레옹 1세(Napoleon I)〉, 1805년 이후, 캔버스에 유화 - 나폴레옹은 녹색 테두리의 오렌지색 현장을 두르고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목에 걸고 있다. 나폴레옹은 1797년 북부 이탈리아 치살피나 공화국의 지방총독이었고, 1805년 자신을 이탈리아 국왕으로 승급시켰다. 이 작품은 1805년 5월 26일 밀라노 두오모 대성당에서 열린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드레아 아피아니는 신고전주의 화가로 1805년 나폴레옹의 제1 궁정 화가가 되었다.
◦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뚜쟁이(Procurress)〉. 1656, 바로크 시대, 유화기법, 캔버스에 유채, 130x143cm, 드레스덴 고전 거장 미술관
◦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류트를 조율하는 여자(Young With a Lute)〉. 1662, 캔버스에 유채, 51.4x45.7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르 브룅(Elizabeth Louise Vigée-Le Brun, 1755년~1842),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Self-Portrait in a Straw Ha)〉, 1782. - 예쁜 옷을 입고 붓과 팔레트를 손에 든 아름다운 여인. 바로 엘리자베스 자신을 그린 그림이다. 1776년 화가이자 미술상인 장-바티스트-피에르 르 브룅과 결혼했다. 1779년에는 베르사유 궁에 초대되어 루이 16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왕비의 총애를 받는 궁정화가이자 친구로 명성을 얻으며, 약 30점에 이르는 왕비의 초상과 그의 가족을 화폭에 담았다.
◦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야코모 데 카시오핀(Jacomo de Cachiopin)>, 1643년경, oil on canvas, 111.0x84.5.0cm,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 야코모 데 카시오핀 (1575-1642)은 안트베르펜 출신의 예술 애호가이자 수집가로, 이 초상화를 그린 안토니 반 다이크와 가까운 친구였다. 반 다이크는 그의 내성적인 성향을 잘 표현 했다. 초상화로 유명했던 플랑드르 화가 반 다이크는 1596년 부터 1621년까지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섭정한 알브레히트 7세 대공(1559-1621)과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1566-1633) 부부의 궁정 화가로 일했다.
◦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 〈스페인 왕 펠리페 4세(Felipe IV Rey de España)〉. 1631-32년, 캔버스에 유화 - 이 초상은 펠리페 4세(1605-1665)의 첫 번째 왕비인 엘리자베트 (1602-1644)의 초상화와 짝을 이루는 작품이다. 펠리페 4세는 왼손에 장갑을 끼고 다른 쪽 장갑을 손에 쥔 채 검 손잡이 위에 왼손을 걸치고 있다. 장갑을 벗은 오른손은 종이를 쥐고 있다. 15-17세기 남성이 즐겨 있던 더블릿을 입고 있으며 소매에만 검은색과 흰색 문양의 장식이 있다. 목에는 검은색 리본의 황금양모 기사단 휘장을 걸었다.
◦ 얀 브뤼헐 2세(1601-1678),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1626년 이후, 패널에 유화 -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둘러싼 수풀과 꽃은 꽃 정물에 뛰어났던 얀 브뤼헐 2세의 화법을 보여준다. 유명한 플랑 드르의 화가 가문의 전통을 잇는 얀 브뤼헐 2세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때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의 궁정 화가였던 다비드 테니르스 2세(1610-1690)의 소개로 오스트리아 황실의 작품 의뢰를 받으며 부와 명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 〈스페인 왕비 엘리자베드(Elisabeth)> , 1631-32년, 캔버스에 유화 - ️펠리페 4세(1605-1665)의 첫 번째 왕비인 엘리자베트(1602-16세)는 프랑스 왕 앙리 4세(1553-1610)와 마리 데 메디치(1575-1612) 사이 에서 태어났다. 펠리페 4세의 초상화와 짝을 이루려고 왕을 향해 살짝 몸을 돌린 모습으로 그렸다. 왕비는 초상화 그리는 것을 즐기지 않아 딱 한 번 포즈를 잡아 초상화를 그렸다. 이후에 그려가는 수많은 초상화는 그 모습을 따른 것이다.
◦ 베로네세(Paolo Veronese: 파울로 칼리아리, 1528-1588),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이브(Adam and Eve’s Exile From the Garden of Eden)〉. 1580-88년경, 캔버스에 유화 -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이브의 모습을 그렸다. 이브는 아벨로 추정되는 아이에게 것을 먹이고 있고 아담은 샘에서 물을 뜨고 있다. 평화로워 보이지만 초록색과 갈색으로 물든 전원 풍경은 이들에게 다가을 재앙을 암시한다. 베로네세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베네치아 화가로, 베네치아의 산 자코모 델라 주데카 성당에서 이 작품을 주문해 제작했다.
◦ 〈성 세바스티안(Saint Sébastien)〉 - 고대 로마황제의 근위대장이였던 성 세바스티안은 기독교 신자들은 몰래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를 알게 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사형선고를 내리지만, 그는 화살을 맞고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두 번째 선고에서 세바스티안은 순교한다고 한다. 세바스티안이 첫 번째 선고에서 나무에 묶여 화살을 맞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몸에 화살이 꽂혔지만 편안한 표정을 짖고 있어, 전염병을 막는 수호성인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 요스 데 몸퍼르 2세(1564-1635), 〈산 풍경〉, 1620년대, 캔버스에 유화 - 화가는 전경, 중경, 원경을 구분하여 감상자의 시선이 그림의 아래에서 시작해 가운데의 회색 봉우리를 지나 먼 곳에 있는 계곡으로 향하게 한다. 안트베르펜 출신의 요스 데 몸퍼르 2세는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까지 활동한 화가로 풍경화를 잘 그리기로 유명했다. 이 작품은 스위스의 생고타르 고개를 묘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화가가 1580년대 스위스의 여행에서 받은 인상을 그림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 안토니오 수시니( antonio susini, 1558-1624), 〈켄타우로스 에우리티온(Centaur Eurythion)을 죽이는 헤라클레스(Herakles)〉, 1600년경, 청동 - 에우리티온은 올레노스의 왕 덱사메노스의 딸과 결혼하고자 왕을 위협하지만 헤라클레스와 결투를 벌여 결국 죽는다. 조각은 헤라클레스가 켄타우로스를 죽이는 순간을 묘사한 것으로 수시니가 그의 스승이었던 메디치 가문의 궁정 조각가 잠볼로냐(1529-1608)의 작품을 복제한 것이다. 눈에 눈동자와 홍채를 새긴 것은 수시니 작품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 페루지노(피에트로 바누치 Perugino, 1446-1524), 〈성(聖) 히에로니무스(Saint Jerome: Hieronymus)〉. 1502년, 1502년경, 패널에 유화 - 성 히에로니무스는 십자가상을 향해 무릎을 꿇고 있다. 그는 돌로 가슴을 치며 고행을 했던 것을 알려져 있는데, 작품에서도 오른손에 돌을 움켜쥐고 있다. 사자는 히에로니무스가 고행을 할 때 사자의 발에 박힌 가시를 빼준 이야기를 토대로 한다. 성인 옆 빨간 추기경 모자는 그가 추기경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라파엘로의 스승인 페루지노는 로마, 피렌체에서 활동했던 이탈리아 화가로, 참회 하는 히에로니무스의 모습을 이탈리아 풍경을 배경으로 그려냈다.
◦ 피테르 브뢰헬 1세(Pieter Bruegel, 1564-1625) 1세(1568~1625), 〈꽃다발을 꽂은 파란 꽃병〉, 1608년경, 패널에 유화,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 검은 붓꽃은 정물화에서 잘 등장하지 않는 꽃이지만, 얀 브뤼헐 1세는 꽃 정물화에 종종 이 검은 붓꽃을 그렸다. 바닥에 떨어진 무당벌레, 메뚜기, 파리, 헤이즐넛, 떨어진 꽃잎은 '눈속임(트롱프뢰유)' 기법으로 그려 실제로 눈앞에 있는 듯 느낌을 준다. 떨어진 꽃잎은 화려한 꽃도 시간이 지나면 시든다는 인생의 덧없음을 상징한다. 꽃병은 중국 명대 청화백자로, 동물 머리 모양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 얀 판 덴 헤케(1620-1684), 〈꽃다발〉, 1650년경, 캔버스에 유화 - ️노란 오스트리아 들장미를 중심으로 청백색 나팔꽃은 화면 왼쪽에서 색감을 뽐낸다. 하얀 백합은 하늘을 향해 뻗어 있고, 그 옆으로 주홍빛 깍지콩꽃은 꽃다발의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불꽃무늬 튤립이 꽃다발의 전체적인 균형을 맞춘다. 화가는 얀 브뤼헐 1세 (1564-1625)가 유행시킨 꽃다발 정물을 변형하여 풍성함은 적지만 세련되어 보이도록 구성했다.
◦ 얀 판 덴 헤케(1620-1684), 〈꽃다발〉, 1652년, 캔버스에 유화 - ️창문 앞 난간에 놓인 유리병에는 튤립, 카네이션, 수선화, 팬지, 재스민으로 가득하다. 오른쪽 벽은 자연스러운 경계를 만들어 왼편의 도시 너머 평야로 관람객의 시선이 향하게 한다. 꽃병 뒤로 보이는 도시 그레벨링겐 성벽으로 공격이 이어지고 있다. 튤립은 역사적 사실을 숨기는 아름다운 허상을 의미하며, 관람자의 시선을 공격받는 도시가 아닌 화려한 꽃다발에 머물게 하고 있다.
◦ 얀 브뤼헐 1세(Jan Bruegel, 1568-1625), 〈이집트로 피난 중 휴식(Rest on the Flight into Egypt)〉, 1595년경, 동판에 유화 -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아기 예수가 헤롯왕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하는 도중 휴식을 취하는 장면이다. 천사는 그들의 여정이 신의 보호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16세기 숲 풍경화는 주로 성경이나 신화 이야기의 배경으로 그려졌다. 숲을 배경으로 아기 예수 가족이 쉬어가는 장면은 당시 화가 들이 즐겨 그렸던 주제이다. 이 작품에서 얀 브뤼헐 1세는 풍경을, 한스 로텐함머(1564-1625)는 인물을 그렸다.
◦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ia, 1717-1780)〉,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 마리아 테레지아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뚫고 나올 듯 강열한 시선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0년 아버지 키를 6세가 사망하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보해미아의 왕위를 계승 하였다. 그러나, 여성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남편인 프랑츠 슈테판이 174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 하였다. 후세 평가에 의하면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자 중 가장 유능한 인물 이였고 가장 인간적인 인물로 평가 되었단다.
◦ 요제프 히켈(1736-1805), 〈요제프 2세(Joseph Ⅱ)>, 1785년경, 캔버스에 유화 -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아들인 요제프 2세(1741-1790)는 아버지의 황위를 물려받아 174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다. 서재를 배경으로 한 모습은 요제프 2세가 '일하는 황제' 로 묘사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지도와 지구본은 신지식을 섭렵한 군주의 지적 능력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전통적으로 그려지던 황실 휘장이 없어, 그가 허례허식 없는 황제로서 오스트리아 국민 앞에 서고 싶어 했음을 알 수 있다.
|카를 5세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광활한 영토를 다스렸다. 그는 모든 영토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었지만,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은 황제의 권력이 강해지는 것을 견제했다. 결국 카를 5세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스페인 영토를,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오스트리아 영토를 물려주었다. 그렇게 합스부르크 왕가는 스페인을 다스리는 계열과 오스트리아를 다스리는 계열로 나뉘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1700년까지 5대에 걸쳐 약 200년간 이어졌다. 무적함대 스페인의 전성기를 누린 펠리페 2세에 이어, 펠리페 4세의 시대는 정치적으로는 쇠퇴했으나 문화적으로는 번성하여 예술의 부흥기를 열었다.
◦ 〈카를 5세(Karl V, 1500~1558)가 있는 메달〉, 535-40년경, 금, 흑요석, 나무,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 카를 5세(1500-1558)가 1535년 튀니지를 정복한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메달이다. 월계관을 쓴 황제는 고전주의풍의 가슴 갑옷을 입고 그 위에 망토를 걸치고 있다. 황제 주위로는 카를 5세를 아프리카 황제로서 축하한다는 의미의 "CAROLV[S] V IMP AVC AFRICANVS" 문구가 새겨져 있다. 메달 제작자는 메달 거푸집 1세트로 같은 모양의 메달을 많이 만들어 전쟁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기념품으로 수여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 마르티노 로타(Martino Rota, 1520년경-1583), 〈루돌프 2세(Rudolf II)>, 1576-80년경 / 캔버스에 유화 - 루돌프 2세(1552-1612)의 궁정 화가였던 마르티노 로타가 황제 즉위를 기념해 제작한 초상화로 추정된다. 루돌프 2세는 합스부르크 군주를 통틀어 가장 독특한 인물로 꼽힌다. 루돌프 2세 치세에 구교와 신교의 갈등은 커져만 갔다. 또 13년 이상 지속된 오스만 튀르크 전쟁에서는 별 다른 소득을 얻지 못해 무능한 황제라는 인식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수집한 공예품은 빈미술사 박물관 공예관의 모태가 될 정도로 그의 예술가적 감식안은 높게 평가된다. 루돌프 2세는 예술에 탁월한 안목을 가진 황제로 평가받는다. 그는 스페인 왕궁에서 다양한 분야의 학문과 예술을 탐독하며 성장했다. 1576년 황제가 된 후 수도를 프라하로 이전하여 많은 예술가와 장인들을 불러들였고, 프라하를 보헤미아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는 폭넓고 깊은 예술적 안목을 바탕으로 회화부터 진기한 공예품, 학문적 성과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품을 수집해 '예술의 방'에 전시했다. 루돌프 2세의 수집품은 현재 빈미술사박물관 공예관을 만드는 데 기초가 되었다. 예술 후원자이자 수집가로서 그가 남긴 문화유산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 뤼카스 판 팔켄보르흐(Lucas van Valckenborch, 1535년경-1597), 〈마티아스(Matthias)>, 1583, 캔버스에 유화 - 마티아스(1557-1619)가 린츠에 머물던 시절에 그의 궁정 화가 였던 뤼카스 판 팔켄보르흐가 그린 것이다. 그는 루돌프 2세 (1552-1612)의 동생이다. 정치적 야망이 컸던 마티아스는 헝가리 신교 진영 세력을 규합해 1608년에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1611년에는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고 결국 1612년 신성로마 제국 황제로 추대됐다. 황제가 된 이후에는 오히려 신교 진영을 탄압하는 정책을 펴 30년 전쟁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 〈페르난트 2세 대공(Ferdinand II, 1564-1595)>, 16세기 후반, 캔버스에 유화 - 헤라클레스의 곤봉을 든 페르디난트 2세 대공(1529-1595)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황금양모 기사단 휘장을 목에 건 대공을 둘러싼 화환은 티롤 통치권자의 권위를 강조한다. 대공은 종교 대립이 심했던 티롤에서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그 결과 다양한 종파가 자리 잡고 예술이 발달하면서 르네상스 인본주의가 티롤에 유입됐고 이는 그의 수집품에 반영되어 암브라스 성에 남았다.
◦ 프란스 라위크스(Frans Luycx, 1604-1668),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Erzherzog Ferdinand Karl)>, 1648년경, 캔버스에 유화 -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프랑스식 옷차림을 한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1628-1662)의 모습은 그가 패션에 민감하고 허영심이 많았음을 드러낸다. 의복을 장식하는 리본과 나비모양 매듭은, '갈랑'이라 불리던 프랑스 패션의 요소로, 17세기 중엽 유럽 에서 유행했다. 작품을 그린 프란스 라위크스는 루벤스(1557-1640) 에게 훈련을 받은 후 티롤을 다스린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의 초상화를 여러 점 제작했다.
◦ 오타비오 바니니(1585-1643년경), 〈우물가의 리브가와 엘리에셀(Rebecca and Eliezer at the Well)>, 625-26년경, 캔버스에 유화 -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신붓감을 고르기 위해 시종 엘리에셀을 라반에게 보낸다. 그는 우물가에 멈춰 서서 낙타에게 물을 먹이는 여성이 신이 신부로 정한 사람임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작가는 리브가가 낙타에게 먹일 물을 엘리에셀에게 주는 순간을 그렸다. 17세기 피렌체에서 활동한 화가 오타비오 바니니는 생동감 있는 인뮬 묘사와 강렬한 색채 표현으로 주목받았다.
◦ 안젤로 솔리메나(Angelo Solimena, 1629-1716), 〈성聖 가족(Holy Family)>, 17세기 중엽, 캔버스에 유화 -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사이의 애정 어린 관계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요셉은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고, 배경에는 양과 소. 당나귀가 있다. 이탈리아 출신 화가 안젤로 솔리메나는 주인공들 사이의 안정된 구도를 만들기 위해 원형 틀 안에 인물들을 배치하여 세 사람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1528-1588), 〈동방박사의 경배(Adoration of the Magi)〉, 1580-88년, 캔버스에 유화,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앉은 아기 예수는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는 나이 든 왕을 축복한다. 왕의 오른편으로는 터번을 쓰고 코트를 입은 무어인 왕이 금 그릇을 손에 들고 아기 예수에게 허리를 숙이고 있다. 성모 뒤에 있는 요셉은 이 순간을 바라보고 있다. '세 명의 동방박사'는 16세기 베네치아 에서 인기가 많았던 주제로, 동양과 유럽 무역의 중심지였던 베네치아는 이국적인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곳이었다.
◦ 야코포 로부스티(Jacopo Robusti, Tintoretto, 1519-1594), 〈갑옷을 입은 남자>, 1553년, 캔버스에 유화 - ️창밖 바다에 떠 있는 빨간 군함으로 보아 턱수염을 기른 초상화의 주인공은 공화국 해군에 복무하며 해상 원정에서 부를 쌓으려고 했던 베네치아 귀족이었던 것 같다. 허리에 손을 올린 당당한 자세와 눈빛에서 자신감이 엿보인다. 틴토레토는 인물이 입고 있는 갑옷의 우아한 금장식 하나 하나의 반짝이는 반사 광을 세심히 포착해냈다. 이것은 베네치아 화파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 비제 르브룅(Marie Louise Elisabeth Vigée-Lebrun),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Queen of France, 1755~1793)>, 1778년, oil on canvas, 273.0x193.5cm,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 마리 루이즈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 초상화는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초상화로 크기가 2m 70cm이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우리에게는 앙투아네트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마리 안토니아(1755-1793)로, ‘베르사유의 장미’라는 만화의 모델이 된 여인 이기도 하다. 1774년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 루이 16세와 결혼하고, 후에 왕비가 되고 프랑스 대혁명을 겪으면서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프랑스 대혁명 전부터 프랑스 국민들은 ‘정치에 간섭하는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부르며 낭비가 심한 어린 왕비를 싫어 했다고 한다. 초상화는 실크로 만들어진 전통적인 프랑스식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으로 일생을 악평에 시달렸지만 한 편으로는 일찍이 패션의 선구자였던 인물로 재평가되고 있다.
◦ 〈스테파니 황태자비(Stefani Rown princess)> -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아들, 루돌프 황태자와 17세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어린 나이에 결혼 했다. 꽃으로 장식한 우아한 새턴 드레스를 입은 이 초상화는 약혼을 기념하여 선물로 그려진 그림이다.
◦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의 초상> -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통치령의 상속자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카를 6세의 장녀이자 요제프 2세와 레오폴트 2세, 마리 앙투아네트 등의 어머니다.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에르데이 대공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부코비나 공국, 밀라노 공국,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의 군주였지만 살리카법이 적용되는 신성 로마 제국만은 여제 즉위가 불가능해서 남편 프란츠 슈테판을 대신해서 황제로 세웠다. "역사 속에서 나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에서 나라를 떠맡게 된 군주의 사례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나의 백성들은 내 마지막 아이들이 될 것이다."
◦ 얀 스테인(Jan Steen, 1626~1679). <성 니콜라스 축일>, 1660, 캔버스에 유채, 70.5x81.9cm
◦ 마스 바르톨로메우스 스프랑거(Bartholomeus Spranger, 1546~1611). <머큐리의 경고를 받는 비너스와 마스>. 1586, 캔버스에 유화 - ️사랑의 여신 비너스는 주로 남편인 대장장이 신 불카누스가 아닌 다른 남성과 함께 그려지곤 한다. 이 그림에서는 전쟁의 신 마스와 등장한다. 날개 달린 모자를 쓴 머큐리는 훈계 하듯 손가락을 들어 올려 간통하지 말하는 경고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바르톨로메우스 스프랑거는 매너리즘을 대표 하는 루돌프 2세(1552-1612)의 궁정 화가이다. 매너리즘의 특징인 길어진 신체 비례와 모호한 자세 등이 나타난다.
◦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1525년경~1569년). <바벨탑(Tower of Babel)>. 1563년. 나무판에 유채. 114×155㎝ - 구약성서의 창세기에는 바벨탑에 관한 짧고도 매우 극적인 일화가 실려 있다. 높고 거대한 탑을 쌓아 하늘에 닿으려 했던 인간들의 오만한 행동에 분노한 신은 본래 하나였던 언어를 여럿으로 분리하는 저주를 내렸다. 바벨탑 건설은 결국 혼돈 속에서 막을 내렸고, 탑을 세우고자 했던 인간들은 불신과 오해 속에 서로 다른 언어들과 함께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조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 37-100)가 집필한 『유대인 고대사(The Antiquities of the Jews)』(93-94년경)에서 서사적 구조로 확장되었으며, 16세기 초 플랑드르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아마도 피터르 브뢰헬은 이들의 작품 가운데 하나를 <바벨탑>의 직접적인 출처로 삼았을 것이다. 그는 총 3점의 <바벨탑>을 그렸다고 하는데, 현재는 2점만이 전해지고 있다. 빈의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의 <바벨탑>은 로테르담(Rotterdam)의 보이만스 반 뵈닝겐 미술관(Museum Boijmans Van Beuningen)에 소장된 <작은 바벨탑(The Little Tower of Babel)>(1564)의 두 배에 가까운 크기로 제작되었다. 두 작품의 전체적인 구도는 거의 동일하지만, 빈의 <바벨탑>이 다양한 인물 군상들과 도시 풍경을 보다 풍부하게 포함하고 있다.
◦ 얀 스테인(Jan Steen), <바람난 신부를 둔 신랑(The Cuckolded Bridegroom)>, 1670년경, 캔버스에 유화(oil on canvas), 57.0x68.0 cm, 빈미술사박물관 - 한 여관에서 열린 왁자지껄한 결혼식 피로연 장면이다. 나이 많은 신랑은 지푸라기 몇 가닥만 꽂은 모자를 쓰고 있다. 볼록한 신부의 배에 손을 올린 아이가 짓궂은 표정을 짓고 있어 신랑이 바람 난 신부에게 속았음을 알 수 있다. 플랑드르 에서는 교훈적인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풍속화가 그려졌 는데 얀 스테인은 대표적인 풍속화가였다. 이 그림은 부부의 정절을 지키고 간통을 삼가라는 교훈을 전달하고 있다.
◦ 요한 조파니(Johan Joseph Zoffany, 1735-1810), 〈프란츠 2세(Francis II, 오스트리아 제국 프란츠 1세, Franz I)>, 1775년, 캔버스에 유화 - 프란츠 대공(1768-1835)은 후일 신성로마제국의 프란츠 2세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 프란츠 1세가 된다. 할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가 주문해서 그린 초상화이다. 대공은 오스트리아식 군복을 입고 황금양모 기사단 휘장을 걸고 있다. 책이 쌓인 탁자에 손을 올린 자세는 그가 후계자로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음을 의미하며 대공 뒤 의자에 놓인 삼각모와 흉갑은 기사도적 용기와 고견함을 상징한다.
◦ 요제프 하인츠 1세(Joseph Heintz, 1564~1609). 〈주피터와 칼리스토(Jupiter and Callisto)〉. 1603, 동판에 유화 - 주피터는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로 변장하여, 다이아나를 따르며 순결서약을 한 님프 칼리스토를 속이고 있다. 주피터의 등 뒤로 보이는 분홍색 천은 그가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흔적이다. 주피터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칼리스토는 주피터의 포옹을 거부하고 있다. 요제프 하인츠 1세는 매너리즘을 대표하는 화가로 루돌프 2세(1552-1612)의 궁정 화가였다. 길어진 신체 비례는 일반적인 매너리즘 화풍의 특징이다./
◦ 피터르 루벤스(Peter Paul Rubens). 〈평화의 여신을 보호하는 미네르바(Minerva Protecting Peace from Mars)〉. 1630
◦ 한스 폰 아헨(Hans von Aachen, 1552-1615),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의 전쟁 선포(Konstantinopolis Declaration of war)〉, 1603-04년경, 종이 또는 양피지에 유화 -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배경으로 두 무리의 사람들이 마주하고 있다. 붉은 옷을 입은 오스만 제국의 지도자는 언월도를 들고 있다. 반대편에는 신성로마제국을 대표하는 사신이 헝가리 전통 의복을 입고 쇠고랑을 차고 있다. 뒤에는 사자 가죽을 두르고 곤봉을 든 헤라클레스가 서 있다. 이 작품은 루돌프 2세 황제(1552-1612) 재위기에 있었던 합스부르크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 ~ 1675 )의 말년 작품인 〈신앙의 알레고리〉, 1674년경, 캔버스에 유채, 114.388.9cm.
◦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 ~ 1675 ), 〈편지 읽는 여자와 하녀〉. 1670.
◦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 1665. -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의 걸작으로, 그림의 정중앙에서 영롱하게 반짝이는 진주보다 더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의 신비한 분위기(Aura) 때문에 ‘북유럽의 모나리자’로 불리기도 한다. 노란색 상의에 푸른 수건을 머리에 두른 소녀가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바라보는데, 석류같이 살짝 벌어진 빨간 입술은 관능미의 절정을 나타내는 것 같다.
◦ 외르크 조이젠호퍼(Jörg Seusenhofer),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의 독수리 장식 갑옷(“Eagle Garniture” made for Archduke Ferdinand II)>, 1547년, iron, fire-gilt, brass, leather, fabric, 높이 180.0cm,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 빌헬름 폰 보름스 1세(Wilhelm von Worms the Elder), <세로 홈 장식 갑옷(Fluted Armour)>, 1525-30년경, iron, leather, 높이 190.0cm,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갑옷은 남성이 소유할 수 있는 가장 비싼 물건 중 하나였다. 전투 때 몸을 보호하는 기능만 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나타내기도 했다. 갑옷이 빛을 발한 대표적인 행사는 중세 후기와 르네상스 시기에 유행한 마상 시합이었다. 마상 시합의 형식에 따라 특화된 갑옷이 필요해 주로 부품을 조립식으로 제작했습니다. 부품 수가 많을수록 비싸고 기능이 다양한 갑옷으로 여겨졌다. 단순히 전투를 위한 목적만이 아닌 시대의 패션으로서 유행에 따라 갑옷의 형태도 달라진,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표 수집품이다.
◦ <누금 장식 바구니(Small Gold-filigree Basket)>, 16세기 후반, 금, 높이 3.6cm,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 작은 크기의 바구니는 꽃과 잎 무늬의 가는 금줄과 작은 금 알갱이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누금 세공으로 섬세하게 작업한 이와 같은 금세공 작품은 장식용으로 수집되어 17세기 유럽에서 수요가 많았다. 루돌프 2세 황제는 이 작품을 가장 특별한 예술품만을 모은 소장품집에 포함시켰다. 17세기 당시 이러한 예술품은 대부분 고아를 중심으로 한 인도 서부에서 생산되어 리스본을 통해 유럽에 들어온 것으로 여겨졌고, 루돌프 2세의 소장품집에도 인도의 작품으로 기록하고 있다.
◦ 〈셔벗(Sherbet)용 식탁 장식〉 - 카로 6세 황제의 황우가 소유했던 유물, 손잡이 기둥에 달린 여섯 개의 고리에는 조가비 장신구로 장식된 셔벗 그릇이 달려있다. 셔벗 그릇은 입술을 금테로 둘렀고 바닥은 잎과 띠무늬, 그리고 흉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주재료인 물, 설탕, 향신료, 우유, 크림에다 과일로 맛을 낸 냉동 디저트. 셔벗(Sherbet)이란 이름은 페르시아어 샤르바트에서 유래했다. 만들 때는 질감을 위해 달걀 흰자 등을 첨가하거나 향을 위해 포도주를 넣기도 한다.
◦ 조반니 카스트루치 추정(1598-1615년 추정), 〈요새 다리와 물레방아가 있는 풍경〉 17세기 전반, 마노, 벽옥 - 멀리 산맥이 있고 가운데에는 우뚝 솟은 탑이 있는 성과 다리가 보인다. 보석류 석판을 형태에 맞게 깎아서 조립한 것으로 '보석 모자이크'라고 부른다. 조반니 카스트루치는 1610년 루돌프 2세 황제의 황실 석공이었다. 아버지 코지모 카스트루치는 피렌체 출신 장인으로 프라하로 이주해 '보석 모자이크'를 전문으로 하는 공방을 설립했다.
◦ 조바니 암브로조 미세로니 추정(Giovanni Ambrogio Miseroni, 1551년경-1616), 〈누어있는 비너스와 큐피드〉, 1600-10년경, 옥수(玉髓),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 다루기 까다로운 재료인 옥수(玉髓) 한 덩어리를 인체 표현과 움직임을 정교하게 살려 만든 작은 조각상이다. 두 인물에 맞게 재료의 자연 적인 색채를 그대로 살린 조각가의 방식도 놀랄만하다. 조반니 암브로조는 1600년부터 밀라노에 미세로니 가문 공방을 이끌 었던 인물로, 당시 재료의 질감을 잘 살려 실력이 뛰어난 석공으로 평가받았다.
◦ <아테네에서 설교하는 사도 바울(St. Paul Preaching in Athens)>, 밑그림: 라파엘로 산치오(design: Raffaello Sanzio), 제작: 야콥 괴벨스 1세(production: Jakob Geubels I), 1600년경, 양모, 실크, 414.0x410.0cm,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1528~1588). <가나의 혼인잔치((The Marriage at Cana)>. 1563.
◦ 코르넬리스 데 보스(Cornelis de Vos, 1584-1651), <기름 부음(Anointment)을 받은 솔로몬(Solomon)>, 1630년경, 캔버스에 유화 -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이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아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는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그렸다. 기름 부음은 왕위 계승 의식을 의미한다. 솔로몬은 화려한 대야 위로 몸을 숙이고 그 뒤로 어린 시종 두 명이 왕실의 상징인 홀笏과 왕관을 놓은 베개를 들고 서 있다. 뒤로 보이는 나선형 기둥은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솔로몬 기둥을 연상시키며, 기름 부음의 주인공이 솔로몬임을 나타낸다.
◦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년). <레우키포스 딸들의 납치(The Rape of the Daughters of Leucippus)>. 1617, 유화, 209x224cm - 아폴로도로스의 신화에 근거한 주제로, 레다와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가 레우키포스의 딸 힐라에이라와 포이베를 납치해서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묘사한 것이다. 등장 인물은 네 명뿐이지만 화면은 놀란 여성들의 사지 움직임, 울부짖는 말들의 다리와 갈기, 여성들을 말에 싣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근육질 남성의 번쩍이는 갑옷 등으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 두드러지는 것 하나는 루벤스 특유의 인체 표현이다. 루벤스 예술의 주제가 인간의 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는 성별, 나이, 계급에 따라 각기 다른 피부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줄 알았다. 이 작품에서도 구릿빛 남성 피부와 푸른 정맥과 붉은 핏줄이 비쳐보이는 투명한 여성의 피부는 서로를 두드러지게 하며 대조된다.
◦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년), <십자가를 세움>. 1609-1610. - <십자가를 세움>을 제작할 당시 루벤스는 이탈리아로 유학을 다녀왔다. 이 여행을 통해 반종교개혁의 여파로 그는 세 폭 제단화 형식에 전형적인 중세 후기 성화 형식을 따랐다. 이 작품은 안트베르펜 성모 대성당에 있는 같은 제목의 작품과 상당히 유사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수직적 구도로 된 세 폭 제단화는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어 관람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전달한다.
세 폭 중 특히 중앙에 있는 제단화에 관람자의 시선이 가게끔 기획되었다. 역동적이면서도 긴장감 있는 신체의 움직임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중앙의 제단화는 대각선 구도로 십자가에 매달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스도의 육체는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밝은 빛을 발산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시선은 아버지께 대한 신뢰로 하늘을 향하고 있다. 또한 그 주위에는 십자가를 세우려는 군사들이 몰려 있는데, 이들은 응축된 근육과 역동적인 자세를 통해 더욱 강조되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육체는 골고타 언덕에 십자가를 세우는 근육질의 인간 군상과 강한 대조를 이루게 된다. 반면에 양 측면의 패널들은 중심에 놓인 제단화를 공간적으로 확장 시키고 있다.
* 기름부음(Anointment) : 사물이나 사람(머리 또는 몸)에게 기름을 바르거나 붓는 일. 일명 '도유'(塗油). 이렇게 하여 그 대상은 더 이상 세속적인 일에 사용될 수 없고 거룩한 존재로서 하나님과 그 영광을 위해서만 사용될 수 있다(창28:18; 출30:23-33; 레8:10-12). 성서시대 전체를 통해 고대근동에서 행해졌다.종교적 의미에서 기름부음은 두 가지 예가 있는데, 하나는 어떤 물체에 기름을 발라 성별시키는 것이고(출애굽기 30:23), 다른 하나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제사장(출애굽기 29:7)과 선지자(열왕기상 19:16) 및 왕(열왕기상 1:39)으로 세우는 것이다
◦ 피터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은둔자와 잠자는 안젤리카(The Hermit and the Sleeping Angelica)〉, 1625-28년경, 페널에 유화 - ️이탈리아 시인 로도비코 아리오스토(Ladorico Aríosto, 1474-1533)의 「광란의 오를란도」(1516)에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공주가 은둔자의 구애를 계속해서 거절하자, 은둔자는 그녀에게 약을 먹여 접근한다. 루멘스는 은둔자가 잠든 공주에게 다가가는 순간을 포착해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공주 뒤로 보이는 악령의 표정은 관람자의 감정을 대변한다. 이야기의 극적인 순간을 포착해내는 화가의 재치가 엿보인다.
◦ 안 리벤스(1607-1674), 안판 덴 헤키 (1620-1684), 〈화환 속 남자〉, 1642-44년, 패널에 유화 - ️미소를 띤 젊은 남성이 화환에 둘러싸여 있다. 화환은 튤립, 수선화, 카네이션, 장미, 한련, 물망초, 히아신스, 아네모네, 은방울꽃, 나팔꽃을 비롯한 어리 종류의 꽃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이 같은 화환 속 초상화는 안트베르펜 지역 회화 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양식이다. 루벤스와 반 다이크의 영향을 받은 안 리벤스는 초상화로 가장 잘 알려진 네덜란드 화가이다.
◦ 미하이 문카치(1844-1900),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I)>, 1896년경, 캔버스에 유화 -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오스트리아 육군 원수의 정복 위에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기사단 현장과 휘장을 갖추고 있다. 그는 1848년 오스트리아 황제가 된 후, 1867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을 결성하여 헝가리 왕으로도 즉위 했다. 황제의 가장 큰 업적은 빈을 현대적 도시로 탈바꿈하고 빈미술사박물관을 건립한 것이다. 19세기 형가리를 대표하는 화가 미하이 문카치는 초상화, 풍경화. 종교화 등으로 유명했다.
오스트리아(Austria)는 중부 유럽의 내륙국으로 9개의 주(Bundesländer)로 이루어진 연방공화국이다. 정식 명칭은 '오스트리아공화국(Republik Österreich)'이다. 북쪽으로 독일과 체코, 동쪽으로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남쪽으로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 서쪽으로는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에 접한다. 국명인 오스트리아는 10세기 중엽 동방의 이민족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된 오스트마르크(Ostmark:동쪽의 변경)에서 유래되었으며, 이 지역은 중세시대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지였다.
1156년 9월 17일 바벤베르크가문의 공국으로 건국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본산으로, 1452년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배출하기 시작하여 1806년 프란츠 2세가 황제권을 포기하고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신성로마제국을 이끌었다. 프란츠 2세는 같은 해에 오스트리아제국을 선포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제국과 왕가가 해체되어 연방공화국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1955년 영세중립국이 되었다.
유럽의 대표적인 부국 중 하나로, 유럽의 6개 영세중립 국가 중 하나이다. 하이든·모차르트·슈베르트·카라얀 등 세계적인 음악가들의 탄생지이자 빈소년합창단과 빈필하모니관현악단, 빈 국립오페라단 등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이다. 옛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산뿐만 아니라 스키 등 겨울 스포츠와 휴양을 위한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관광산업이 발달해 있다.
면적은 8만 3871㎢, 인구는 871만 1770명(2016년 현재), 수도는 빈(Wien)이다. 주민의 91.1%가 오스트리아인이며, 세르비아 크로아티아인 등이 3%이다. 공용어는 독일어이며, 종교는 73.6%가 가톨릭교, 4.7%가 개신교를 믿는다.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3,792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7230달러이다.
'무안중학교 동문 동창들의 동유럽 여행' 중, 풍광이 아름다운 '오스트리아 할슈타트 잘츠캄머굿지대에서'
출처: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