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친구 카페

 
 
카페 게시글
인문/사회- 상식 [사건] 묘청과 서경천도론
스몰 추천 0 조회 237 03.07.17 21:29 댓글 18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
  • 03.07.17 22:10

    첫댓글 "고토회복운동" 저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 03.07.18 04:30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파의 보수성을 편드는것은 아니지만 북진정책의 이상론을 무조건 옹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적정한 수준의 역사적 사견과 민족주의적 경향은 허용될수 있지만 선입견과 흑백논리는 역사학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 03.07.18 04:39

    묘청의 북진정책은 고구려를 계승한 자주적 정신의 발로에서 비롯한 순수한 동기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입니다.이자겸의 난으로 기존 문벌귀족들의 사회가 동요하자 서경 길지설을 바탕으로 새롭게 등장한 신진관료 세력들은 전통적 문벌귀족들과 맞서게 됩니다.

  • 03.07.18 04:44

    김부식을 중심으로한 개경파의 사대정책은 고려 태조의 3대정책에 반하는 것이였으므로 정치적 공략으로 북진정책을 이용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 03.07.18 04:46

    또한 한가지 생각해봐야 할것은 당시의 금은 요를 멸하고 송을 남쪽으로 밀어낼 정도의 강성한 세력기에 있었다는 점입니다.그런 전성기의 금을 상대로 북진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것인가를 검토해보아야 할듯 싶습니다.

  • 03.07.18 04:57

    그리고 이상적인 북진정책은 송의 교묘한 외교전략에 역이용당할수 있었다는 사실도 상기해봐야 할듯 합니다.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묘청의 난이 실패함으로 기득권층인 전통적 문벌귀족의 체체가 일시적으로나마 더욱 강화되었고 그로인해 내부적 모순이 외부로 터져나와 아물지못하고 깊게 곪아버렸다는 점입니다.

  • 03.07.18 05:10

    민족사관은 상대적입니다.새로운 세대들에게 진보적인 자긍심을 심어줄수는 있지만 역으로는 일본의 제국주의 논리와 그로인한 그들의 식민사관을 정당화 시킬수도 있는겁니다.아직도 우리가 만주의 옛땅을 찾아 말달려야 한다는 식의 발상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 03.07.18 05:07

    민족사학은 역사학이 아닌 이데올로기적 허구를 지닌 신화인 동시에 정치학의 영역입니다.역사학은 분명 독립되어져야 합니다.그 순수한 독립성 속에서만이 진정한 민족의 미래를 찾을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입니다.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게 하는것이 역사학의 참목적 아니겠습니까.

  • 03.07.18 05:12

    역사를 쥐꼬리만큼도 모르는 자연과학도의 주제넘는 댓글입니다.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__)

  • 03.07.18 10:55

    제가 생각하기로는 기본적으로 언제나 반란은 '거창한'명분을 내세운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회주의 게릴라들이 '인민해방','계급투쟁'등을 내세우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봅니다.

  • 03.07.18 10:52

    저는 묘청의 반란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고토회복을 내걸었던것이며, 동시에 낭가사상의 반란이라는 신채호님의 주장은 다소 설득력이 없어보입니다. 묘청은 중이었고, 또한 그러한 묘청의 지지자였던 정지상은 중국인들조차 그 시를 암송할 정도로 뛰어난 한학자였습니다.

  • 03.07.18 10:55

    그리고 기본적으로 김부식이 사대주의자로 인식이 박히게 된것은 그의 '삼국사기'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삼국사기가 정말로 '사대적인'역사책이라고 생각치는 않습니다. 이 문제는 가까운 시일내에 한편의 글로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외에 제가 하고싶은 말은 잇맨님이 거의 다 하셨군요.

  • 03.07.18 10:57

    저 역시 묘청의 난은 20세기의 이념대결이라는 것이 실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두 세력의 정치적인 대결이었던 것처럼, 어느 정도의 사상성을 띄고 있다고 해도, 개성의 문벌귀족과, 서경의 신흥귀족.관료세력간의 대결로 보고자 합니다.

  • 03.07.18 11:01

    하지만 '고토회복'이라는 것이 당시 고려사회의 주요한 담론이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는 태조의 정책적인 측면이나, 국호의 문제등에서도 엿볼 수 있으며, 동시에 고려의 군주들이 국왕력을 강화할때마다 내세우던 기본적인 히든카드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 03.07.18 11:06

    그리고 잇맨형이 지적한것처럼 민족사학...다시 나아가자면 마치 역사를 '국가와 민족의 역사.'로 보는 그 시각은, 역사를 자칫하면 국가를 위한 프로파간다. 즉 정치를 위한 도구로 전락화 시켜버린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궁극적으로 역사학의 존립 자체에 모순점을 주고 위협을 준다는 것입니다.

  • 03.07.21 16:44

    사소한 태클 하나 - 대체 궁예를 북벌주의자라고 부르시는 근거가 무엇인지? 왕건이야말로 서경을 개척하며 중시하였고, 그의 아들 정종 또한 서경으로 천도할 계획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궁예가 북벌을 하려했다는 얘긴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 작성자 03.07.21 22:55

    궁예는 항상 자기 입으로도 말했지요...삼한을 통일한 이후에는 만주라고....드라마에도 자주 나왔던 대사에요~ ^-^

  • 03.07.22 13:59

    헉, 역시..--; 그건 이환경(작가)이 만들어낸 이야기지 실제 궁예가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묘청에 대해 이렇게 잘 쓰신 분이 드라마와 역사적 사실을 혼동하신다니 안타깝네요. 역시 드라마는 무서워.. 궁예가 북벌을 생각이나마 했는지 어떠한 사서에도 기록된 바 없답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