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는 '엄연히 역사적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되풀이되는 세뇌를 통하여 이제는 사실처럼 위장된 허구'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로서 대표적인 허구적 신화가 아마도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라는 우리의 역사 인식일 것이다. 이러한 반도사관은 우리의 고대사를 왜소하게 만드는 것으로 매우 위험한 인식이다.
이러한 허구가 우리에게 고정 관념으로 정착된 이유를 한 가지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문제를 따질 때 제일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은, 이름을 고려라고 지음으로써 마치 고구려의 법통을 이어받은 듯 위장했지만 실은 그보다 훨씬 좁은 남쪽의 삼한에 안주하려 했던 왕건의 소심함이다.
그가 북벌주의자였던 궁예와 의견 충돌을 일으킨 일차적 이유도 북벌에 대한 왕건의 반대 의견 때문이었다. 고구려의 영토를 되찾고 싶어했던 궁예의 꿈과는 달리 왕건은 남방 세력인 삼한을 통일해야 한다고 늘 말했고, 고려를 건국한 후에도 남쪽 영토에 집착했다.
왕건의 이러한 삼한 위주의 건국 이념을 이어받은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쓰면서 신라를 정통으로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고구려를 비하했고, 중국에 항전했던 고구려의 기상을 묻어버리기 위해 삼국 통일이라는 미명으로 김춘추와 김유신을 지나치게 미화하기 시작했다.
"신라 정통성 인정 고구려 비하"
이러한 반도 사관에 대하여 가장 분노를 느꼈던 사람이 바로 고려 인종 때의 승려인 묘청이었다. 우리는 묘청은 요승이며 그가 일으켰던 반정을 '묘청의 난'이라고 부르는 데 익숙해 있다. 이것은 '고려사'를 쓴 정인지의 잘못도 있지만 그 후 신라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한 남방계 역사학자들과 일본 식민지사학자들의 그릇된 기록 때문이었다.
소위 임나(任那)일본부설에 입각하여 자신들이 신라의 남쪽을 식민지로 지배한 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사학자들은 신라가 삼국 중의 정통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논리적으로 한국을 지배한 적이 있다는 연고권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라 중심으로 삼국시대사를 쓰려고 했다.
묘청이 어느 해에 태어났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다만 그가 태어난 곳은 서경(평양)이었다는 사실만이 전해지고 있다. 그가 승려였다는 사실은 그가 풍수지리에 밝았음을 의미한다. 서기 624년 우리나라에 도교가 들어온 이후 한국인들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서 사는 삶이 가장 아늑하다고 생각했고, 이때부터 불교에도 도교의 무위자연의 사상이 깃들기 시작했다.
"윤관의 북방정책에 영향 받아"
묘청이 윤관의 아들인 윤언이와 절친한 친구였다고 하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윤관은 그 당시 외교를 북방에 치중해야 한다고 믿었던 대륙론자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묘청의 북방 정책의 뒷면에는 윤관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의 숭불정책과 더불어 묘청도 그 당시 사회에서 높은 인망을 얻고 있었다. 인종 시대에 이르면 묘청은 왕으로부터 대단한 신망을 받게 된다. 그는 왕을 알현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송도는 이미 왕기가 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옛 영토를 찾는다는 점에서 보더라도 모름지기 도읍을 서경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고, 인종도 묘청의 그와 같은 주장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인종은 일년 중의 며칠은 평양의 서궁에 머무르면서 북방 백성들을 어루만지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몸소 행차할 형편이 되지 못할 경우에는 몸이 가는 대신 자신의 옷을 보내어 왕의 기운을 서경에 심으려고 했다.
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자 묘청은 도읍을 서경으로 옮길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묘청의 이 같은 생각은 송도의 유생들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다. 그들은 묘청이 서경에서 태어난 인물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가 지방색 때문에 서경 천도를 주장한다고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의 서경 천도론을 지방색으로 몰고 간 것은 묘청의 진심과는 다른 것이었다. 오히려 그가 서경 출신이었기 때문에 서경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서경 천도를 남달리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반대에 부딪히자 묘청은 순리대로 해서는 천도가 어려워지리라고 생각하고 자기 딴에는 묘책을 쓰기로 했다.
인종 10년, 왕이 서경에 행차를 하는 기회를 타서 묘청은 비밀리에 커다란 떡을 만들고 그 속에 기름을 넣어 대동강 물 속에 집어넣었다. 시간이 지나 떡의 기름이 물위로 떠올라 영롱한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묘청의 무리들은 왕에게 상소를 올려 중국의 천자처럼 고려의 왕도 제왕이라는 칭호를 쓰고 중국의 연호를 버리고 자신의 연호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대동강에 서기가 피어오르고 있으니 이제 곧 금나라로 쳐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순리 거스른 자충수에 궁지 몰려"
그 동기가 아무리 훌륭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묘청이 진실하지 못했다는 점은 그의 실수였다. 대동강에 피어오른 서기라는 것은 곧 거짓임이 발각되었으며 이때부터 묘청의 계획은 의도했던 바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진실보다 더 큰 무기는 없다. 설령 자신의 뜻을 이루는 일에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묘청은 좀더 인내와 성실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추진했어야 했다. 그러나 묘청은 그렇지 못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망쳤고 더 나아가서는 국가적으로 불행을 끼쳤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공교롭게도 이 무렵 서경의 궁궐인 대화궐이 벼락을 맞아 민심이 흉흉해지고 이런 틈새를 타고 송도를 수도로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세력의 반격이 거세지자 인종도 마음이 흔들려 서경 천도를 멈칫거리기 시작했다.
이에 초조해진 묘청은 결국 인종 13년(1135)에 서경을 근거로 하여 정지상, 조광, 유참, 조창언 등과 더불어 반역을 일으켰다. 나라 이름을 대위라고 부르고 연호를 천개라 불렀다.
"조선역사 1천년 가장 큰 사건"
그러나 불행하게도 묘청은 사대주의자인 김부식이 이끄는 정부군의 공격을 받고 고전하던 중 부하 조광의 손에 죽임을 당함으로써 신채호가 이른바 '조선의 역사 1천년이래 가장 큰 사건'이라고 평가했던 그의 고구려 정신도 함께 사그러지게 됐다.
미국의 정치학자 배링턴 무어의 말을 빌리면, 역사에서 실패한 자에 대한 연민을 갖지 않으면 그 시대의 신화에 파묻히고 만다고 한다. 이 시대에 묘청을 다시 거론하는 것은 우리가 결코 반도 민족도 아니었고 약소 민족도 아닌 대륙 민족으로서의 기백을 되찾을 수 있는 역사의 동력을 얻기 위함이다. 그런 점에서 묘청은 결코 반역자가 아니었으며, 묘청의 난 또한 묘청의 '고토 회복 운동'이라고 바꿔 불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상적인 북진정책은 송의 교묘한 외교전략에 역이용당할수 있었다는 사실도 상기해봐야 할듯 합니다.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묘청의 난이 실패함으로 기득권층인 전통적 문벌귀족의 체체가 일시적으로나마 더욱 강화되었고 그로인해 내부적 모순이 외부로 터져나와 아물지못하고 깊게 곪아버렸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김부식이 사대주의자로 인식이 박히게 된것은 그의 '삼국사기'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삼국사기가 정말로 '사대적인'역사책이라고 생각치는 않습니다. 이 문제는 가까운 시일내에 한편의 글로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외에 제가 하고싶은 말은 잇맨님이 거의 다 하셨군요.
그리고 잇맨형이 지적한것처럼 민족사학...다시 나아가자면 마치 역사를 '국가와 민족의 역사.'로 보는 그 시각은, 역사를 자칫하면 국가를 위한 프로파간다. 즉 정치를 위한 도구로 전락화 시켜버린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궁극적으로 역사학의 존립 자체에 모순점을 주고 위협을 준다는 것입니다.
헉, 역시..--; 그건 이환경(작가)이 만들어낸 이야기지 실제 궁예가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묘청에 대해 이렇게 잘 쓰신 분이 드라마와 역사적 사실을 혼동하신다니 안타깝네요. 역시 드라마는 무서워.. 궁예가 북벌을 생각이나마 했는지 어떠한 사서에도 기록된 바 없답니다.
첫댓글 "고토회복운동" 저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파의 보수성을 편드는것은 아니지만 북진정책의 이상론을 무조건 옹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적정한 수준의 역사적 사견과 민족주의적 경향은 허용될수 있지만 선입견과 흑백논리는 역사학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묘청의 북진정책은 고구려를 계승한 자주적 정신의 발로에서 비롯한 순수한 동기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입니다.이자겸의 난으로 기존 문벌귀족들의 사회가 동요하자 서경 길지설을 바탕으로 새롭게 등장한 신진관료 세력들은 전통적 문벌귀족들과 맞서게 됩니다.
김부식을 중심으로한 개경파의 사대정책은 고려 태조의 3대정책에 반하는 것이였으므로 정치적 공략으로 북진정책을 이용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한가지 생각해봐야 할것은 당시의 금은 요를 멸하고 송을 남쪽으로 밀어낼 정도의 강성한 세력기에 있었다는 점입니다.그런 전성기의 금을 상대로 북진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것인가를 검토해보아야 할듯 싶습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북진정책은 송의 교묘한 외교전략에 역이용당할수 있었다는 사실도 상기해봐야 할듯 합니다.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묘청의 난이 실패함으로 기득권층인 전통적 문벌귀족의 체체가 일시적으로나마 더욱 강화되었고 그로인해 내부적 모순이 외부로 터져나와 아물지못하고 깊게 곪아버렸다는 점입니다.
민족사관은 상대적입니다.새로운 세대들에게 진보적인 자긍심을 심어줄수는 있지만 역으로는 일본의 제국주의 논리와 그로인한 그들의 식민사관을 정당화 시킬수도 있는겁니다.아직도 우리가 만주의 옛땅을 찾아 말달려야 한다는 식의 발상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민족사학은 역사학이 아닌 이데올로기적 허구를 지닌 신화인 동시에 정치학의 영역입니다.역사학은 분명 독립되어져야 합니다.그 순수한 독립성 속에서만이 진정한 민족의 미래를 찾을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입니다.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게 하는것이 역사학의 참목적 아니겠습니까.
역사를 쥐꼬리만큼도 모르는 자연과학도의 주제넘는 댓글입니다.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__)
제가 생각하기로는 기본적으로 언제나 반란은 '거창한'명분을 내세운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회주의 게릴라들이 '인민해방','계급투쟁'등을 내세우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봅니다.
저는 묘청의 반란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고토회복을 내걸었던것이며, 동시에 낭가사상의 반란이라는 신채호님의 주장은 다소 설득력이 없어보입니다. 묘청은 중이었고, 또한 그러한 묘청의 지지자였던 정지상은 중국인들조차 그 시를 암송할 정도로 뛰어난 한학자였습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김부식이 사대주의자로 인식이 박히게 된것은 그의 '삼국사기'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삼국사기가 정말로 '사대적인'역사책이라고 생각치는 않습니다. 이 문제는 가까운 시일내에 한편의 글로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외에 제가 하고싶은 말은 잇맨님이 거의 다 하셨군요.
저 역시 묘청의 난은 20세기의 이념대결이라는 것이 실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두 세력의 정치적인 대결이었던 것처럼, 어느 정도의 사상성을 띄고 있다고 해도, 개성의 문벌귀족과, 서경의 신흥귀족.관료세력간의 대결로 보고자 합니다.
하지만 '고토회복'이라는 것이 당시 고려사회의 주요한 담론이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는 태조의 정책적인 측면이나, 국호의 문제등에서도 엿볼 수 있으며, 동시에 고려의 군주들이 국왕력을 강화할때마다 내세우던 기본적인 히든카드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잇맨형이 지적한것처럼 민족사학...다시 나아가자면 마치 역사를 '국가와 민족의 역사.'로 보는 그 시각은, 역사를 자칫하면 국가를 위한 프로파간다. 즉 정치를 위한 도구로 전락화 시켜버린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궁극적으로 역사학의 존립 자체에 모순점을 주고 위협을 준다는 것입니다.
사소한 태클 하나 - 대체 궁예를 북벌주의자라고 부르시는 근거가 무엇인지? 왕건이야말로 서경을 개척하며 중시하였고, 그의 아들 정종 또한 서경으로 천도할 계획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궁예가 북벌을 하려했다는 얘긴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궁예는 항상 자기 입으로도 말했지요...삼한을 통일한 이후에는 만주라고....드라마에도 자주 나왔던 대사에요~ ^-^
헉, 역시..--; 그건 이환경(작가)이 만들어낸 이야기지 실제 궁예가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묘청에 대해 이렇게 잘 쓰신 분이 드라마와 역사적 사실을 혼동하신다니 안타깝네요. 역시 드라마는 무서워.. 궁예가 북벌을 생각이나마 했는지 어떠한 사서에도 기록된 바 없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