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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련은 힘겹게 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모든 것이 뿌옇게 보였다. 그리고 찾아온 참을 수 없는 토기---.
"웩! 웩!"
파랗게 변색된 피가 그녀의 입에서 토해져 땅으로 떨어졌다.
"휴우----. 이제 독에서 벗어났구나."
안도의 한숨과 함께 그녀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이젠 좀 맑아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토굴이었다.
"여기는---?"
"장강 근처에 있는 토굴이오."
"옥 선배,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소. 독연을 피해 모두 산지사방으로 흩어졌소. 이곳에 있는 것은 우리 둘 뿐이오."
비틀거리며 일어나던 그녀는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간신히 토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그녀가 물었다.
"며칠이나 지났어요?"
"사흘이 지났오."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물었다.
"숭산에 오르기가 참으로 힘들군요."
"그들 역시 소구라는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줄 알기에 사력을 다하는 것일게요."
"과연 소구가 나오면 그들이 움직이게 될까요?"
"모르겠소. 명에서 청으로 나라가 바뀌면서 구파일방의 고수들은 모두 잠적한 상태이니---. 반청복명을 부르짖으며 죽어간 사람도 무척이나 많다는 것을 알 거요. 호랑이 없는 곳에 여우가 왕 노릇 한다고, 그들은 호랑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일게요."
천궁의 말을 들으면서 방화련은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현재의 중원을 지배하는 청나라의 황제가 바로 그녀의 아들인 것이다. 몸은 비록 한족이었지만 그녀는 한족의 편에도 아들의 청나라를 편들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복수에 미쳐 홍방의 무리들을 쳐죽이는 일만 하고 있는 것이다.
토굴 밖으로 떨어지는 비를 내려다보며 두 사람은 말없이 각자의 상념에 잠겼다.
"옥 선배, 왜 저를 계속 돕는 것이죠? 그냥 조용히 여생을 편하게 살수도 있었을 텐데--."
한참이 흘러서 방화련이 물었다.
"후--우---."
방화련의 말을 듣고 천궁은 긴 한숨을 내뿜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말문을 열었다.
"팔십이 넘어서야 철이 들었다고나 할까-----. 살아오는 동안 이런 일 저런 일 참 별일을 다 겪었지. 그런데 말이야----."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춘 천궁 옥형진은 고개를 돌려 방화련의 수척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살아오면서---, 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고 있으면서도 한번도 그 길을 걸은 적이 없었네. 단지 그 때 그 때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길을 걸어가고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아왔지. 그러다 죽기 직전에 칠호를 만나게 되고--, 그리고 그의 도움으로 다시 표국 일을 할 수 있게 되고---. 그자는 내가 만나보지 못한 소구라는 아이를 악마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내가 본 바로는 그자야 말로 악마였지. 난----, 이미 살만큼 산 나이이지. 더군다나 칼날 위에 사는 무림의 밥을 먹고 살아온 사람치고는 엄청나게 오래 산 셈이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 죽기 전에 옳은 일은 한번하고 죽고 싶다고---. 그리고 그 때 만난 것이 방씨의 자매들이었지. 악마의 손에서 내가 본 아름다운 자매를 부족한 힘으로나마 지켜주고 싶었지만----, 십 년 전의 그 사건에서 구할 수 있었던 것은 한명 뿐이었어----."
천궁은 거기서 말을 멈추고 다시 떨어지는 토굴 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았다.
방화련은 고개를 숙이고 상념에 잠겼다. 홍방과 홍방을 지배하는 운룡회의 무리들이 죽지 않는 한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고 분노하면서 상처 입고 있는 이 싸움을 끝내려면 하루라도 빨리 소구를 찾아야 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칠호를 죽일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중원 천지에 아무도 없었다. 구파일방 그리고 과거 천하제일검이라 불렸던 화산파 풍진자의 최후 심득을 얻은 소구라면 어쩌면 칠호를 죽일 실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금 있다 다시 숭산으로 가지요."
"지금 그 몸으로는--, 아직은 안되네. 그리고 청방의 지원군이 이틀 이내에 이곳에 당도할 것이오. 우리 둘만의 힘으로 숭산에 들어가는 것은 자살 행위요.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란 말이오."
낮고 잔잔한 음성이었지만 그 속에는 단호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방화련의 마음은 한시라도 빨리 숭산으로 가고 싶었지만 천궁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고, 천궁과 같이 토굴 밖으로 떨어져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토굴이 있는 언덕 아래로 보이는 장강의 불어난 물이 거칠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 시간 소구는 소화촌의 우물 속에서 만상금쇄진이라 불리는 천고의 절진과 싸우고 있었다.
진 안쪽에 서 있는 방수련은 초조한 얼굴로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숨을 헐떡이는 동생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구는 심각한 얼굴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전에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전에도 이가 갈리는 진이었고, 다시 만나니 또 한번 이를 갈게 만드는 진이었다.
혼천문의 무공을 익히는 과정도 극악했고 무기도 극악하고 또 진법도 극악했다.
'정말 이 갈리는구먼. 파해법을 아는데도 이 모양이니---.'
소구는 자신을 바라보는 누나의 모습을 보고 안심하라는 듯 손을 흔들면서 미소를 짓고 있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태산을 등에 업고 있는 것처럼 무겁고 어려웠다.
하여튼 진을 파해하는 일은 막대한 심력과 내공을 소모시켰지만 그래도 성공하고 소구는 진 안쪽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진 안쪽에서 소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방수련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지친 듯 비틀거리는 소구를 부축하면서 물었다.
"괜찮아?"
"아무래도 난 잠시 쉬어야 할 것 같아."
"그래. 잠시 쉬도록 하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방수련은 소구를 바닥에 조심스레 눕혀주었다. 방수련 역시 이곳을 막고 있던 진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닥에 누워 사방을 살피는 소구는 곳곳에서 자신이 계승한 혼천문의 흔적을 발견하고 지친 음성으로 물었다.
"누나, 이곳에서 무엇을 배웠지?"
"파천수라는 무공이야. 일종의 금나 같은데--, 아직 오성 정도 밖에 익히지 못했어."
소구는 누나 방수련의 말을 들으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이곳은 선대의 혼천문의 조사들 중 한 명의 은거지가 분명했던 것이다. 소구가 배우기는 했지만 완전히 터득하지 못한 혼천문의 여섯 가지 무공 중의 하나인 혼천대금나의 전신이 바로 파천수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극악할 정도로 무공을 터득하기를 강요하는 혼천문을 경험한 소구였다. 자신과 비슷한 일을 겪었으리라고 믿으면서 안쓰러운 얼굴이 된 소구는 누나의 모습을 새삼 다시 바라보았다. 그런데---.
소구는 갑자기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우고 물었다.
"누나 이곳에서 머물면서 어려운 일은 없었어?"
방수련은 자신을 걱정해서 물어본 질문이라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전혀, 먹을 것도 이곳엔 많았어. 저기 안쪽에는 단약을 만들어 놓은 것도 많았고, 벽곡단도 있었고 과일도 많았는걸. 게다가 저 안쪽에 지하에서 나오는 작은 샘이 있는데 그곳에서 나오는 은색의 물고기는 엄청 맛있어. 그리고 이 안에는 다섯 개의 밀실이 있는데 그 중 한곳에는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때도 안타고 불에도 안타고 물에도 안젖는 이상한 옷감이 잔뜩 쌓여 있어서 그것으로 옷을 만들면서 나날을 보냈지."
누나의 말을 들으면서 소구는 하나를 더 들을 때마다 약이 바짝 올라갔다. 똑 같이 혼천문의 은거지에 갇혀 지내게 되었지만 자신에 비하면 누나 방수련은 천국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크아악!"
갑자기 괴성을 내지르는 소구를 방수련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방소구는 벌떡 일어나서 우물 속에 감춰져 있는 혼천문의 유적을 하나하나 돌아보기 시작했다.
천장에 박혀 있는 야명주 아래 기화이초가 만발한 화원이 있었고 그 속을 작은 내가 졸졸 흐르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그 냇물 속에는 손가락 만한 작은 은색의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는 방이 있었다. 또 다른 방에는 벽곡단이 그득한 항아리들이 가득 차 있고 다른 벽면에는 영약이라 불리는 단약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굶주림과 배고픔에 허덕이던 소구는 그 광경을 보고 이를 갈면서 또 다른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곳에는 화려하고 아늑한, 푹신한 침상이 있는 침실이었다. 잠도 못자고 차가운 물 속에서 이십년을 보낸 소구였다.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소구는 또 다른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서재로 쓰이던 곳인지 그곳의 한쪽 벽에는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서가와 탁자 그리고 안락해 보이는 의자가 있었다. 허탈한 얼굴로 그 방을 나온 소구는 터벅터벅 걸어 다른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여러 가지 무기들이 구비되어 있는 방이었고, 무엇보다도 소구를 열 받게 한 것은 이 안에 있는 무기들은 모두 가볍다는 것이었다. 몸서리쳐지는 극악봉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소구는 다음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뿌드득 이빨 가는 소리가 소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광경을 보면서 방수련은 겁이 날 수 밖에 없었다. 무엇 때문인지 이십년이 넘어서야 만난 동생은 화가 난 것이다.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옷감들이 저장되어 있는 방에 들어갔다 나온 소구의 손에는 한 폭의 옷감이 들려져 있었다. 늘 누더기만을 걸치고 있어야 했던 소구였다. 그 방에서 나온 소구의 손에는 천 중에서 가장 귀한, 돈주고도 구할 수 없는 천잠사라 불리는 옷감이 들려져 있었다.
"누나!"
잔뜩 화가 난 어조로 소리치고 있는 소구의 모습에 겁이 난 방수련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으-응, 왜?"
"이걸로 내 옷도 만들어 줘! 지금 입고 있는 것은 나무꾼의 옷을 빌려 입은 거야!"
뭐가 그리도 화가 나는지 손에든 옷감을 내밀면서 소구는 그렇게 소리쳤다.
옷감을 건네고 난 후 무엇이 그리고 화가 나는지, 소구는 침상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궁시렁 거리고 있었다.
"못된 영감탱이, 이런 곳이 있는데도 나를 그 지옥에 밀어 넣다니--. 못된 영감탱이, 지옥에서도 안 받아줄 못된 영감----."
소구가 내민 천을 품에 안고 침상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소구의 등을 바라보는 방수련은 고개를 흔들었다. 동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단지 몇 번이고 못된 영감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소리만을 알아들은 상태였다. 그래서 자신을 향해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방수련은 안도할 수 있었다. 잠시동안은 정말 엄청나게 긴장했던 것이다.
"소구는 헤어진 이십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을 겪은 것일까?"
그렇게 중얼거리던 방수련은 갑자기 어릴 때의 소구를 기억해내고, 후다닥 옷감들이 있는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녀의 머리 속에는 화가 나면 하인이고 하녀고 가리지 않고 두들겨 패던 소구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누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일단 화가 나면 눈이 뒤집혀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아무나 잡고 마구 두들겨 팼던 것이다. 그런 소구를 말릴 수 있었던 사람은 어머니뿐이었지만, 어머니는 지금 이곳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화난 상태인 소구를 더욱 화가 나게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바늘과 실 그리고 가위를 챙기면서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동생의 성격은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깨어나기 전에 옷이 안 만들어져 있으면 동생은 또 화를 낼 것이 틀림없었다.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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