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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獨島): 대한민국 최 동해에 있는 최 동단의 섬 독도
국보로 문화재 지정한 336호로 지정되어있다.
위치: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421번지
울지눈 주변에서는 약 217km, 울릉도는 약 87km 떨어져 있지만, 일본의 오끼섬 지역인 오끼제도는 약 211km이상
일본의 오키제도에서는 약 158km, 시마네현 히노미사끼에서는 약 211km 떨어져 있구요.
2.독도는 어떻게 생겼을까?
서도와 동도로 나뉘어져 있으며, 폭은 151m, 깊이는 10m미만으로 330m인 물길 사이로 보이듯이 나뉘어져 있다.
독도는 이 2개의 섬 말고도 부속섬인 약 89개의 부속 도서로 이루어진 오랫동안 화산폭발로 굳어진 섬이다.
즉 우리나라에서 화산폭발로 일어났으므로 우리나라 섬이라 할 수 있다.
해저 지명 등재 현황
강원대지, 울릉대지, 우산해곡, 우산해저절벽, 온누리분지, 새날분지, 후포퇴, 김인우해산, 이규원해산, 안용복해산 등 동해 해저의 지명이 한국식으로 국제해저지명집에 등재된 것은 지난 1974년 국제등재 업무가 시작된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동해 해저 10곳의 한국식 지명이 국제해저지명집에 실려 국제사회에서 표준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독도가 우리 땅인 세 번째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독도가 우리땅인 역사적 이유.
알아볼까요^^
1.삼국사기
독도가 우리 조상들의 인식에서 명확하게 기억되어 있는 시점은 512년 6월 삼국사기 기록부터 1990년 10월 대한제국 칙령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증왕 13년 6월 여름 우산국이 귀복…복속되었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우산국은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한 주변 섬들을 아우르고 있었던 나라입니다.
2.대한제국 관보
광무 4년이 바로 1900년, 10월에 관보 형태로 발표했습니다. 빨간색으로 칠해진 부분을 확대해서 볼까요?
제2조 군청 위치는 태하동으로 정하고 울릉도와 죽도, 석도를 관할한다. 여기에서 석도는 바로 독도를 의미합니다.
대한제국에서 분명히 독도를 대한제국의 영토로 관할한다는 것을 못 박고 있습니다.
2.고려사
고려사에 보면'우산도(于山島)와 무릉도(武陵島)는 본래 두 섬으로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바람이 불고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산도는 독도를 말하는 지칭합니다.
또 조선 초기에 관찬된 세종실록 지리지(1432년)에도 '우산(독도)·무릉(울릉)... 두 섬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풍일이 청명하면 바라볼 수 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독도가 울릉도에서 날씨가 맑은 날 육안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우리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위의 독도의 위치에서도 말한 바 있는 것입니다.
3.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팔도총도입니다. 여기 우산도가 독도입니다. 분명 독도가 조선의 영토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4.일본 태정관 발행문서
일본 정부에서 만든 태정관 발행문서에도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태정관은 일본 내각 총리실입니다.
'書面 竹島外一島之 義本邦關係無之義卜 可相心得事'<일본국립공문서관 소장 '태정관(太政官 문서> "울릉도(당시 竹島)와 그 외 1개 섬인 독도(당시는 松島)는 우리나라(日本)와 관계없다는 것 등 심득(心得,마음에 익힐 것)할 것".
자기네 조상들이 이렇게 적어놨네요.문서에.
5.대일본국 전도
일본이 100여 년 전에 제작한 지도에서도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닌 우리 땅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본 내무성 지리국이 1880년 제작하고 1883년 개정한 ‘대일본국전도’에는 러시아와 분쟁 중인 쿠릴열도까지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지만 독도와 울릉도는 없습니다.
울릉도와 독도를 그려넣었지 않았다는것은
"우리 나라땅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나요?
대일본국 전도에 독도가 없다는것은
"독도는 대일본국의 영토가 아닙니다."라고 직접 말한것이죠
[출처] 독도가 우리땅인 이유,알고 계십니까??|작성자 kurochow
2.신라시대부터
신라장군 이사부 라는 말의 노랫말이 있다. 위인 100인 열전 노래인데, 이 말에 대해 알아보자.
흔히 이사부 장군이라 생각하면 울릉도인 울릉국을 정벌한 장수로 기억되긴하지만 아직도 정확히 이사부가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사부가 누구일까?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13년 항목에 나오는 우산국 정벌 기록이다.
서기 512년 음력 6월의 어느 날. 높게 출렁이는 파도를 뚫고 울릉도 동남 해안에 군선이 나타났다. 신라 장군 이사부가 이끄는 병선이었다. 당시 울릉도는 우산국이라 불리는 성읍국가의 본거지였다. 거친 바다를 터전으로 삼아 파도에 단련된 우산국 병사들이 보기에 꼬박 이틀 물길을 달려오느라 기진맥진한 신라 수군쯤은 우습게 보였을지 모른다. 더구나 울릉도는 해안선에서부터 깎아지른 절벽이 둘러싸고 있는 천연 요새였다.하지만 신라의 병선에는 ‘비밀 병기’가 숨겨져 있었다. 동해의 물살을 가르며 이사부 장군이 호령했다. “만약 너희가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들을 풀어 모두 밟아 죽이겠다.” 우산국 병사들은 생전 처음 보는 맹수의 모습에 혼비백산했다. 말로만 듣던 사자가 신라 정벌군의 배에 가득 실려 있었던 것이다.
우산국의 우해왕(于海王)은 항복하고 공물(貢物)을 바쳤다.
삼국유사에도 역시 이사부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사부 대신 박이종(朴伊宗)이란 이름으로 기록돼 있을 뿐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이종’은 이사부의 이칭이다. 신라 왕족인 이사부의 아버지의 은 김(金)씨였지만, 어머니의 성을 따 표기한 듯하다는 게 학자들의 해석이다.당시 한반도 사람들에게 사자는 전설 속에만 나오는 상상의 맹수였다. 섬나라 우산국은 물론이고 신라에서도 실물 사자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산국 병사들이 뭍에서 건너온 사자를 보고 겁에 질려 전의를 상실했으리라고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사부의 정벌군이 병선에 실어갔다는 사자는 실은 나무로 깎아 만든 사자 조각에 지나지 않았다. 이사부는 왜 이런 속임수를 썼을까.'삼국사기'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이사부가 말하기를 우산인은 어리석고 사나우므로 위력으로 복종시키기는 어려우니 계략을 써 굴복시킬 수밖에 없다. 이에 나무 사자를 만들고 전선에 나눠 실었다.(謂于山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 分載戰船)”
울릉도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은 더욱더 극적으로 이런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
“신라군의 배에는 덮어씌운 물건들이 실려 있었다. 사자였다. 입에서 불이 두어 길씩 튀어나왔다. 우산국 군사는 사기가 죽었다. 투항의 표시로 큰 깃발을 투구바위에 올렸다. 나팔바위에서는 항복 나팔을 불었다. 이리하여 이사부는 우해왕의 항복을 받았다.(중략) 이사부는 사자 한 마리를 바닷가에 던졌다. 알고 보니 나무로 만든 사자였다. 우산국 사람들은 이사부의 꾀에 속아 항복한 것을 후회했지만 때는 늦었다”('울릉도의 전설·민담')
이때 이사부가 두고간 사자가 울릉도 남양항에 있는 사자바위의 화석이 됐다는 전설이다. 사자바위 외에도 울릉도에는 투구바위·나팔바위 등 이사부 전설과 관련된 이름이 붙여진 지형지물이 있다.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은 삼국이 정립하고 있던 당시의 한반도 정세,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결정적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512년은 광개토왕과 장수왕 때 전성기에 이른 고구려의 팽창기가 막을 내리고, 지증왕·법흥왕을 거쳐 신라 팽창기의 초입이었다. 삼척·강릉 등 지금의 강원도 동해안 지방은 이 무렵 신라와 고구려가 영역 다툼을 벌이는 접점이 됐다. 박교식 관동대 교수에 따르면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은 신라가 고구려와의 경쟁에서 결정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기폭제가 됐다. 동해안의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배후의 위협을 차단하면서 안전하게 북진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된 것이다. 당시 우산국은 고구려의 대일 교섭 항로의 중간 기착점이었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 일본의 통교 가능성을 차단하지 않고서는 북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신라는 진흥왕 시절 황초령·마운령의 순수비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6세기 중·후반 함경도까지 진출했고, 한강 유역을 손에 넣었으며 대가야를 멸망시켰다. 이것이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우산국 정벌은 1500년이 지난 현시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우산국이 한반도의 판도에 들어오게 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넓은 해양 영토를 갖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이사부 정벌 이전 울릉도는 물론 동해 연안까지 왜구가 빈번히 출몰하고 있었다. 만약 일본이 먼저 울릉도와 독도를 장악했을 경우와 대비해보면 이사부의 정벌이 갖는 의미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사부학회장인 손승철 강원대 교수는 “이사부 장군은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의 영토에 편입시킨 동해 수호와 해양 개척의 선구자였다”고 말했다
4.고려시대부터 지금까지 독도를 우리가 관리했다.
당시 고려는 통일 이후, 울릉도를 고려가 직접 통치하여, 우산국이 아닌 우릉도로 부르기 시작했다.
즉 고려는 울릉도를 기점으로 동해를 최전방 동해 전선으로 하여 방어태세를 갖 추었다.
▹고려 태조 13(930)년, 우릉성주 토두가 공물을 바치자 사자인 백길에게 관작을 제수하고, 토두를
정조(正朝: 12위)로 삼았다. (증보문헌비고 권30 여지고 19 해방-동해 강원도의 울릉도 편)
◦ 고려 전기 현종대 이후 우산국은 여진족의 침입에 의해 급격히 황폐화되었다.
▹현종9(1018)년 조정은 우산국의 수습을 위해 관리 이원구(李元龜)로 하여금 농기구를 보내
주도록 하였다(고려사).
▹현종 10(1019)년에는 여진족의 약탈 때문에 본토로 도망나온 우산국 사람들을 우산국으로 돌아가게
하기도 하였지만, 여진족의 약탈이 계속되자, 우산국 사람들의 본토로의 피난이 계속되었다
(고려사).
▹현종 13(1022)년에는 본토에 피난했던 우산국 사람들을 예주(禮州- 지금의 경북 영덕지역)에 정착
시키는 조치를 취했다(고려사).
◦ 여진족의 약탈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고려 조정은 우산국을 지방 조직에 편입시키고, 우산국을
우릉도로 부르기 시작한다.
▹덕종 원년(1032)에는 우산국 사람, 우릉(羽陵)의 아들인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이 조정에 토산물을
바침에 따라 우산국은 ‘우릉(于陵, 羽陵)’으로 이름이 바뀌고 우산국주는 우릉성주로 바뀌었다
(고려사).
▹인종19(1141)년에는 명주도감창사(溟州道監倉使) 이양실(李陽實)이 본토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릉도의 과실
및 나뭇잎 등 특산물을 임금께 올렸다(고려사).
☞이는 우릉도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은 물론, 우릉도가 명주도 감창사가 관할하는 지방 조직에 편입,
중앙정부의 직할 아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의종 11(1157)년 고려조정은 우릉도에 본토 주민을 강제 이주(徙民)시키고자, 명주도감창사
김유립 (金柔立)으로 하여금 우릉성에 대해 조사토록 하였다. 그러나 김유립이 암석이 많아
백성들을 이주시키기 적합지 않다고 보고함에 따라, 이 계획은 중지되었다(고려사).
☞이 때의 보고내용 중 '석불(石佛)․철종(鐵鍾)․석탑(石塔)' 등이 있었다.
이는 적어도 11세기 여진족의 침입으로 인해 이 지역이 황폐화하기 이전까지는 본토의 불교
문화가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의종 24(1170)년,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이후 계속된 국내외 정세의 불안과 고종 18(1231)년부터
시작된 몽고의 침공, 그리고 충정왕 2년(1350)부터 본격화되어 고려말까지 계속된 왜구의 창궐
때문에, 고려정부의 우릉도 개발은 지속되지 못하였다.
▹장기간에 걸친 몽고군과의 치열한 전투로 전 국토가 황폐화되고 있던 와중에 당시 실력자
최이에 의해 고종 30년(1243)에 이르러 우릉도에 동해안 주민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당시 이주가 실시된 이유를 살펴보면, 우선 대몽항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산성해도
입보책(山城海島入保策)의 일환으로 볼 수 있으며, 당시 혼신의 열정으로 판각되었던 팔만대장경의
재목(材木)을 구하기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 시기 우릉도로 이주한 사람은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 나라가 대목(大木)을 구하고자 고려 울릉도의 재목을 벌채하기 시작하였는데, 얼마 안 가
왕(元宗)이 요청하여 원에서 벌목을 중단하였다. (고려사 열전 이추전(李樞傳)) 고려가 이 요구를
철회할 것을 청하였으나, 원이 듣지 않아 대규모 벌목을 하였다. 이에 따라 우릉도 현지민들은
심한 고초를 당했으며, 일부는 이를 피해 다시 본토로 도망하기도 하였다(증보문헌비고).
▹우왕 5(1379)년 7월 “왜가 우릉도에 보름 동안 머물다가 물러갔다” (고려사).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보건대, 충정왕 2년(1350)부터 고려말까지 계속된 왜구의 창궐 때문에
우릉도 개발을 진행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말 왜구의 침구와 이 지역의 피폐는 조선 정부의
우릉도 지역에 대한 통치방식을 정하는 주요한 판단 상황이 되었다. 즉 왜구의 침구는 주민의 이주
보다는 섬을 비우는 수토정책을 택하게 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 고려는 울릉도․독도를 영토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과 자료가 후대에 전승되어, 조선
전기에 편찬한 고려사,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이 지역을 신라 시대 이후 고려왕조까지
우리 영토였다는 사실을 명기하였던 것이다
4.조선시대의 독도관리
이젠 지겹다. 일본 우익세력은 또 다시 우리 땅 독도를 건드렸다. 쓰나미로 인해 떨어진 국민신뢰를 얻기 위한 정치 쇼인지 뭔지 알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일본의 독도침범은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애들이 땅따먹기 할 때도 상대편 땅 넘어가면 그냥 아웃이다.
초등학생도 아는 법칙이며 진리다. 일본 우익단체는 초등학교부터 다시 다녀야겠다.
소설을 써놓은 역사 교과서 때문에 그쪽 초등학생들은 뭘 배우고 자랄지 걱정이 되긴 한다.
암튼 일본은 듣는 척도 안하겠지만 한 번 더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인 수많은 이유 중에 가장 결정적이라 생각하는 안용복 장군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유랄 것도 없겠다. 사실을 사실이라 말하는데 뭔 이유가 있겠나.)
이번 일을 계기로 독도가 우리 땅인 이유에 대한 자료를 가공할 만큼 수집하였지만
기사가 끝이 없어질 것 같기도 하고, 바다와 연결이 되어야 하니 조선시대 위대한 어부 안용복에 대해서만 다루기로 한다.
어부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에 일본이 침범하자 강경하게 대응하고 독도를 지켜냈다.
그리고 독도가 우리 땅임을 재확인시키고 일본이 독도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안용복의 이런 업적을 기리기 위해 부산 수영사적공원에서는 안용복의 동상을 세우고 안용복 장군 사당을 모시고 있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수영사적공원으로 향했다. 보통 수영공원이라 불리는 곳이다.
수영사적공원은 옛날 만해도 관리부실로 좌수영성지의 가치가 퇴색되어 갔지만
지금은 많은 신경을 썼는지 문화재 보전과 주민들의 쾌적한 쉼터로 제 역할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좌수영성지의 옛 남문이 공원의 입구로 자리 잡고 있고 안용복을 기리는 사당과 동상은 공원 뒤편에 있다.
[수영사적공원: 수영사적공원은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에 있는 역사 공원으로, 경상좌수영성지에 마련되어 있다.
좌수영성은 부산 수영구 수영동, 망미동, 광안동 일대에 2,785m규모의 성으로, 조선 숙종 18년(1692년)에 다시 쌓았다고 전한다.
일제 강점기에 관리를 소홀히 하여 대부분 무너졌다.
현재는 성 터(부산 시도기념물 제8호, 좌수영성지)가 남아 있고, 성지 관련 유적을 수영사적공원으로 조성하였다.
공원 안에는 수영성남문(부산 시도유형문화재 제17호), 25의용단(부산 시도기념물 제12호),
부산 좌수영성지곰솔(천연기념물 제270호), 부산 좌수영성지 푸조나무(천연기념물 제311호) 등
지정문화재와 안용복 장군충혼탑 등 비지정문화재가 있다. 이를 보전하고 관리하는 수영민속예술관이 함께 있다.](위키백과)
수영사적공원 / 도시근린공원
- 주소
- 부산 수영구 수영동
- 전화
- 설명
<수영사적공원 지도 -다음>
안내 표지판이다. 안용복의 업적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외관도 깔끔하고 정갈하다.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있어 이곳을 찾는 이방인도 안용복에 대한 정보를 편하게 안내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유적지나 전시관이 늘 그렇듯 그 외에 특별한 점은 없다.
안용복을 모시는 사당이다. ‘안용복 사당 수강사’라고 부르는데 수강사라 함은 ‘우리 강토를 지킨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현재 가까이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안용복 사당으로 가려면 수영사적공원 입구로 천천히 걸어가도 좋지만
수영팔도시장을 끼고 있어 시장 한 바퀴 돌고 찾아가도 좋다.
입구인 남문은 수영팔도시장 안 수영동사무소 옆에 위치하고 있고 사당으로 바로 가려면 수영역에서 300m정도 걸어가면 보인다
. 주위에 큰 건물이 없어 자세한 설명이 불가. 표지판이 친절히 안내하고 있으니 따라가면 되지 싶다.
(백번 설명해도 지도 한번 보는 것이 낫겠다. 위 지도를 참고.)
안용복 사당은 2001년 3월에 완공되었으며 매년 4월 18일에 제향을 한다.
생각보다 완공 된지 오래되었다. 그만큼 관리를 착실히 잘했다는 것.
구름이 잔뜩 낀 날에 찍어서 그렇지 화창한 날에 가면 아주 쾌적하고 깔끔한 모습을 자랑한다.
안용복 장군의 동상이다. 안용복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안용복 장군 기념 사업회에서 수영사적공원에 세웠다.
양옆에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향하는 양용복의 모습과 일본 관리들을 상대하는 안용복의 모습을 동판으로 새겨 놓았다.
앞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면 모두에게 보여줄 텐데 출입 금지되어 있어 말로만 설명한다. 아쉽다.
하지만 인터넷에 말끔하게 찍힌 사진이 있으니 그것을 확인하면서 궁금증을 풀어도 되겠다.
(잘나온 사진을 퍼오고 싶었지만 저작권이 애매해서 네이버백과사전 사진으로 대신하겠다.)
(안용복의 업적을 새겨 놓은 동판화/출처 네이버과사전)
안용복 장군 충혼탑이다. 1967년에 만들어 졌으며 2004년 새롭게 단장되었다.
이 역시 바로 앞에서 안용복의 강인함을 느껴보고 싶었지만 들어가지 못해 멀리서만 바라봤다.
충혼탑 뒷면에는 안용복 장군 충혼탑 건립문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안용복 장군 동상을 좀 더 멀리서 바라봤다. 멀리 있는 동판을 보기위해서. 하지만 안간힘쓰다 무릎만 까지고 말았다.)
예전만해도 사당 앞까지 들어가서 동상 앞에서 사진도 찍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출입이 금지되고 있었다.
그래서 동상과 사당을 가까이 가서 사진에 담아내진 못했다.
하긴 예전부터 너무 개방되어 있어 어느 정도 보호관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몇 년 전엔 일반인도 출입이 가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료로 개방되어진 곳이라 관리상의 어려움으로 막아놓은 것은 이해하지만 아쉽긴 하다.
CCTV까지 돌아가고 있다니 기분이 썩 좋지도 않고 제향일에는
특정인들에게 개방하더니 일반인은 참배도 못하나하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모두 독도를 아끼는 대한민국 사람인데 말이다. 탓하자면 공공시설이나 문화재는 훼손하는 무개념 사람들을 탓하고 싶다.
사적공원까지 갔지만 안용복 장군이 독도를 지켜낸 업적에 대해 자세한 정보는 얻지 못했다.
안용복 장군의 업적이 대단하니 작은 표지판에 다 쓸 순 없었겠다 생각한다.
그래서 2011년 5월5일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 독도는 조선의 영토다-안용복에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까지>를
참고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참고보단 신세진다는 말이 맞겠다. 다큐 한편이 이렇게나 정보를 잘 정리해주다니.
17세기 안용복은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주장했다.
부산시 수영구 옛 경상좌수 터에 안용복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안용복은 독도를 지키는 수호자로 장군의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17세기후반 안용복은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알렸다고 한다.
역사는 그런 안용복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일본이 외면하고 싶어 하는 기록이다.
안용복 장군은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가장 중요한 근거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어부였던 안용복은 장군의 칭호를 받을 만큼 독도를 지키기 위해 앞장섰다는 것이다.
이런 안용복을 일본은 곱게 볼 리가 없다.
독도의 일본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학자들은 안용복을 한일관계를 방해하는 원흉이라고 유치한 발언을 하고 있다.
일본은 어떻게 해서든 안용복을 부정해야 했던 것이다.
독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의 오키 섬, 오키 섬에 도착한 안용복 일행은 취조 당하게 된다.
그때 안용복은 일본관리들 앞에서 조선팔도지도를 꺼내 보이며 강원도에 울릉도와 독도가 속에 있음을 알렸다.
당시 울릉도는 죽도였으며 독도는 송도라 불리었다.
그 현장은 2005년에 발굴된 무라카미 가문의 문서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안용복의 증언을 검증할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이 아닌 또 다른 문헌이라 의미가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이미 안용복은 두 섬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고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돗토리 현의 공식문서 이나바지는 당시 상황을 세심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문서에서는 우산도는 일본말로 송도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안용복이 말한 자산도는 우산도를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우산도는 지금의 독도임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고로 우산도와 독도가 다르다는 일본 측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 안용복은 당시 독도와 울릉도, 독도와 조선과의 거리를 구체적이고 단호히 언급하기도 했다.
안용복은 일본으로 건너가기 3년 전, 독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일본어선에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일본어민들이 국경을 넘어 불법조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3년 후 안용복은 울릉도에서 조업 중인 일본어선을 만나게 된다.
안용복은 “울릉도는 본디 우리 땅인데 왜인이 어찌 감히 경계를 넘어 침범하였는가.”라고 하자
일본어민들은 자신들이 독도에 산다고 답했다고 한다. 안용복은 독도역시 우리 땅임을 알리고 이들을 내쫓았다.
그리고 도주하는 일본어선을 일본까지 쫓아가 항의했다.
일본은 일본어선의 왕래를 두고 독도를 일본이 먼저 지배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허가를 받고 국경을 넘은 것이며 이조차도 뇌물로 이루어진 것이다.
울릉도 인근의 풍부한 해산자원이 탐이 났던 모양이다. 안용복이 아니었으면 일본의 울릉도 침범은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안용복으로 인해 일본어민들은 두 번 다시 독도에 올수 없었다.
안용복은 일본이 주장하는 대부분의 근거를 허물게 한다.
안용복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확인하는 명백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안용복: 안용복은 일본과 외교를 한 조선시대 어부출신이다. 조선 숙종 때 동래출신(현 부산시 수영구 수영동 부근) 어민으로, 경상좌수군절도사영의 수군인 능로군이었다. 왜관에 자주 드나들며 일본말을 익혔고 1697년 대마도주가 울릉도가 조선땅임을 확인하는 서계를 보냄으로써 조선과 일본 간의 울릉도를 둘러싼 분쟁을 일단락 시켰다. 울릉도와 독도 수호에 큰 업적을 세워 후세 사람들에 의해 장군이란 칭호를 받았다.](다음백과사전, 위키백과) 안용복 장군 동상에서 흐르는 빗물이 안용복 장군의 눈물이라는 상상을 해봤다. 재난이 있을 때마다 우리나라는 이웃나라라고 도움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는데 그쪽은 보따리까지 뺏어가는 고약한 심보를 드러냈다. 역사가 아닌 소설을 쓰며 억지주장은 몇 백 년이 흘러도 멈추지 않으니 안용복 장군이 편히 눈감지 못할 것 같다. (방심하면 힘 있는 소설이 역사가 될 수도 있다. 우리도 진실이 약해지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당시 조선이나 지금이나 독도 지키기에 힘쓰는 이들을 나라가 도와주지 않는 형국은 비슷하긴 하다. 독도가 위협받으면 우리의 바다, 동해까지 위협받는 것이다. 독도를 지키는 것은 우리의 바다를 지키는 것이다. 일본이 왜 그토록 독도를 침범했던가. 바로 대한민국의 바다, 동해가 욕심났기 때문이다. 분명 독도는 우리 땅이다. 우리 땅인데 자꾸 우리 땅이라고 하는 것도 웃기다. 간단하고 자명한 사실인데 말이다. 다시 한 번 어부 안용복의 업적이 헛되지 않도록 독도에 대한 인식을 굳건히 새기자. 대한민국 동쪽에 있는 바다는 동해(East Sea)이며 ‘독도는 우리 땅’이다. (참고: <KBS 역사스페셜 '독도는 조선의 영토다 - 안용복에서 조선칙령 41호까지'>, 수영사적공원 안내)
바다야 사랑해 3기 블로그기 자 김상균 4.일본이 왜 그렇게 독도를 집착할까?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 우리 외교권 즉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가로챘다. 러시아 전쟁으로 승리한 일본은 동해의 지배를 완전하게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가뜩히나 착각일지만 일본은 땅덩어리 좁다하는데, 오히려 따지고 본다면, 오히려 우리 땅이 일본보다 좁다. 그렇다면 왜? 집착할까? 2005년 당시, 시마네현에서는 '다케시마의 날'이라는 제정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우리나라는 항의를 했지만, 일본은 대대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일본 교과서는 제작년 2006년까지만 해도 "다케시마는 한국이 점거하고 있다."며 2012년 지금은 "불법점거"라고 표기하고 있다. 일본은 1907년에 알 수 잇는데, 유명한 대사건 중 독도 강치사건이다. 독도를 함부로 들어와서 강치를 포획하고 자ㅣ나라나 외국에 수출하거나 팔기도 했다. 1950년에도 일본이 독도를 침략했다. 한국전쟁 중에서 미의 요구에 지원군을 편성하여 도를 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일본정부는 지금도 대대적인 망언과 독도에 관련 시위에 나서고 있다. 최근 2011년 일본 정부가 아닌 자민당 의원들이 인천국제공항에 강제 입국을 시도하다 쫓겨난 사건이 있다. 자민당 측 "일본의 고유 영토 한국정부에 문서를 전달하기 위함"이라고 밝히며 우리 외교통상부에 방문하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만 외교통상부는 이것은 명배한 영토침해라며 자기의 나라로 돌아가라고 하면서, 입국을 불허조치했다. 하지만 이것은 외교통상부의 오판이다. 즉 일본에게 빌미를 제공한 셈인 것이다. 독도가 한국당인 이유와 그의 관련된 기록 종합한 결과물을 공개하면서 일본 정부가 왜 자신의 영토가 아닌 이유를 묻는 것인데한국정부는 이에 따른 것을 거절한 것이다. 결국 , 일본은 이것을 통해 얼마든지 독도를 놓고 분쟁지역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가진것이다.
일본은 한국 불법입국이라는 것에 정부에게 사과를 요구 했지만 한국정부는 거절했다. 어찌보면 우리입장에선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일본이 꼼수를 잡은 것이다.
일본은 이에 따라 국제사법제판소에 회부하여 독도를 영토를 분쟁지역화 하기 위함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에 우리는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
한국이 만약 제판에 피고신분이라 할지라도 거절만 하면 재판은 취소가 된다. 그러나 만약 어떤 한국정부가 우리가 일본의도대로 간다면 오히려 우리는 지게 되고 결국 일본은 전쟁하기 위한 유엔에 합법화에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일본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
1.일본은 전범국가이다. 1933년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은 1945년 미국에 의해 항복을 하게 된다.
이후 일본은 미군정하에 일본은 미국이 다스리게 되고, 결국 독도는 한국정부에게 확정적으로 한국영토가 됬다.
2.일본이 설사 전쟁을 한다하더라도 전쟁은 못한다.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은 어느 나라에도 군대를 파견한다거나 어느 국가에 공격할 수도 없다. 즉 일본은 전쟁을 치를 수 없는 국가다.
자위대(自偉隊): 자신의 위치에 있는 군대이다. 일본은 한마디로 말해서 일본지역에서만 군대를 움직일 수 있지, 어느 국가에 특정국가에 가서 전쟁할 수 없다.
유엔이 설사 합법으로 한다하더라도, 일본은 전쟁허용은 절대 유엔이 허락하지 않는다.
3.일본은 왜? 독도인가?
한국 독도 동해아래에는 지하에 메탄가스가 있다.
해양심층수
바다 속 200m 이하, 태양빛으로 닿지 않아 미네랄과 유기질이 풍부하다. 즉 자동차 휘발유 값으로 5배 이상 팔리고, 최근 일본이 이것을 이용해 의약품을 개발하는데, 우리나라 독도아래에 90%이상 정도 심층수가 있다.
또 하나는 하이드레이트
하이드레이트는 천연가스(LPG)로써 불타는 얼음이라고도 불린다.
모양은 고체인데, 이것으로 최근 국가간 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 자원 안에는 탄소=석탄+석유+화석에너지가 넘어 세계 각국이 개발에 힘쓰는 것이다. 일본이 70년대 당시 이것을 존재한다는 점을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 하이드레이트는 30년간 쓸 수 있다. 그만큼 전 세계에서 추정 매장량은 약 1만기가톤, 천연가스보다 많은 약 25배정도, 석유보다 2배이상이다.
즉 독도 수심 아래 1,500아래에는 약 6억톤 이상의 매장되어, 약 30년간 쓸 경우 팔거나 하면 252조원 이상의 수입이 효과가 있다. 엄청난 규모로 100년정도 쓸 수 있다.
현재 이 자원을 캐기위한 고도의 개발 기술에 있으며, 하지만 돈이 재정상태는 많아야 하며, 현재 기술수준으로 국제유가 55달러 이상 올라야, 경제성이 있다는 경제전문가의 입장이다. 일본이 이에 잡기 위한 선두로 기술을 개발한다는 소식이다. 또 일본은 100년차 오래전부터 이 개발에 연구하고 있는 보고서가 있고, 앞으로 10년내 이 자원을 이용하겠다는 구상계획도 마련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인 한국가스공사는 “일본이 기술개발에 축척하지만, 외부유지 및 유출을 철저히 막고 있다.”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도 역시 개발에 힘쓰기 위해, 2015년까지 생산목표에 두었다.
*일본은 대륙침탈을 꿈꾸며 태평양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포섭으로 노리는 것!
일본이 독도를 놓고 물고 늘어지는 이유는 바로 태평양 전쟁이다.
1939년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을 펼친다. 중국은 일본에게 패전을 거듭하며, 요동 요북지방 전선에서 후퇴를 한다.
일본은 요동 만주에 만주국을 세우고, 일본은 중국을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 계속적인 공격을 한다.이에 중국은 국공합작을 통해 일본이랑 끝까지 싸울 것임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에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광복군을 통해 미얀마(버마)전선이나 중국 각 주요도시, 등 일본군 기지를 기습공격하기도 하였다.
일본은 심지어 미국 진주만에 주둔한 미 해군마져 공격했다.
일본은 1945년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항복했지만, 아직도 지금 남아있거나 일본 사람들은 그 태평양 전쟁마져도 국제사회에 “동아시아 평화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정당화 시키려는 작전이다.
일본이 독도를 단순히 요구하는게 아니라, 이러한 대륙침탈이 정당하다는 국제적인 평가를 받기 위함인 셈인 것이다.
독도를 뺏으면, 다음 울릉도, 한반도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우리는 독도를 정부가 직접적으로 적극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셈이다.
5.독도를 지키기 위한 우리나라의 대처
우리는 조용히 지키기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적극적인 대처자세이다.
예를 들어서, 독도에 기지에 해양과학기지, 해양연구소 독도박물관 등을 건립하는 것도 괜찮은 것이다.
적극적으로 문화체육관광부나 국토해양부가 이러한 관련에 독도연구를 적극 펼칠 만한 것을 제시한다면,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또 하나는 북한이다.
비록 NLL기반으로 북한은 못내려오지만, 내년 정부라든지 아니면 북한이랑 동쪽 판문점이라는 기반으로 남북이 서로 공동어로구역만 만들면 적어도 일본은 한국이 아닌 북한과 독도문제에 붙어야 하는 심정이다.
남북이 하나가 되려면, 비록 경제적 문화적이지만, 이러한 독도에 관해 관심을 표하게 유도한다면 적어도 일본은 당황할 것이다.
남북이 서로 뭉친다면 아마 독도를 공동을 관리할만한 남북관계 정상이나 관료들이 풀어야할 숙제이다.
6.일본은 전쟁을 할 수 없다.
앞서 말했듯 일본은 군대를 이끌 수 없다.
어떻게 해서든 뺏고 싶은 일본이지만, 현실적으로 일본의 의도대로 되기 힘들다.
비록 일본이 홍보로는 가능하지만, 물리적인 힘으로는 독도를 뺏을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전범국가이며, 일본은 군대를 파견하려면 유엔승인이나 미국의회에 통과에 의해 출격이 가능한 군대이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군사력으로 쳐도, 충분히 우리나라에게 질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세계군사력이 12위로 일본보다 월등한 무기가 있고, 탱크와 해군의 이지스함 , 등 광개토태왕함, 이순신함, 대조영함, 최영함, 등 엄청난 해군력도 우리도 만만치 않다.
즉 일본이 설사 온다하더라도 누군가 지원을 받아야만 전쟁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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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독도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저런식으로 해서는 독도가 우리것이 되지 않는다요
그럼 지킬 방법은있소 가르쳐 주시오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