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를 제대로 마시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 茶와 禪은 한 가지 맛이네”
“茶香은 영혼을 움직이게 하고 날아가게 하네. 귀신까지 움직이게 하는 신령스러운 힘을 가졌지. 모름지기 사람은 이 향처럼 순수하고 그윽해져야 하고, 세상을 그와 같이 살아야 하네.”
5월 하순 어느 햇빛 찬란하게 쏟아지는 날 한낮. 살랑거리는 남풍으로 인하여 처마 끝의 풍경이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곤 했다. 나는 풍경 소리에 진저리를 치면서 서재 문을 박차고 나왔다. 자수련꽃 만발한 연못 가에 섰다. 연못에는 내 우주가 통째 빠져 있었다.
감나무 그늘로 올라오는데, 머리칼 허연 한 노스님이 평상에 앉은 채 그윽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첫눈에 초의 스님임을 알아차렸고, 땅에 엎드려 절을 했다. 저승에 간 영혼은 이승에 살아 있을 적 마지막 나이 그대로 영원을 산다는 말이 참임을 알았다. 초의 스님은 80대 초반이었지만 강건한 몸이었고, 해맑은 얼굴이었으며, 숲 속의 맑은 호수 같은 형형한 눈빛이었다.
“스님, 저는 스님을 폄하하는 사람들을 깨닫게 하기 위해 소설 ‘초의’를 썼습니다. 사람들은 스님이 시·글씨·그림·범패·탱화 등에 능한 나머지 도 닦기에 전념하지 않고 세속적인 유학 선비들과의 교류만 일삼았다고 말합니다. 또 초의 스님이 강진에서 유배살이를 한 다산 정약용의 제자라고 말합니다. 스님이 선승(禪僧)인 것을 알지 못한 채 다만 차에 대해서만 능한 스님으로 여깁니다.” 나의 말에 초의 스님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제가 쓴 소설 ‘초의’는 말하자면 ‘초의 스님의 참모습 깊이 읽기’인 셈입니다. 초의 스님은 절집 안의 수좌들에게 경전과 선을 강의하면서 한평생을 보낸 율사나 강백이 아니고, 시와 글씨와 그림의 달인으로서 차와 선(禪)을 통하여 유학 선비와 벼슬아치들을 제도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 선승’이었다고 저는 읽었습니다.
대부분의 선승은 산중에서 마음을 깨끗하게 닦아 텅빔의 큰 깨달음을 얻으면 스스로 만족하고, 또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에게 주장자를 내리치고 악(喝) 소리나 질러주는 것으로 그 소임을 다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서산대사의 선맥을 물려받은 초의 스님은 세상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자기 깨달음을 세속 사람들에게 돌려주려 함(回向)입니다. 초의 스님은 염불도 하고 범패도 하고 그림도 그리시고 탱화와 단청도 하셨습니다. 산중에 살면서 손수 찻잎을 따 덖어 마시고, 그 차향에서 선향(禪香)을 동시에 맡고, 세상에 나가 시와 차와 선을 가지고 유학 선비들과 교류하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경학에 능하지만 오만하거나 경솔하지 않고 깨끗하게 계율을 엄히 지키며 살다 간 큰스님이었습니다.”
초의 스님은 흔들리는 감나무 잎사귀를 턱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잎사귀는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고, 바람이 지나가도록 잠시 옆으로 비켜섰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네. 자네는 잎사귀만 보고 바람을 보지 못하고 있네.”
“아 그렇습니다.”
서산대사의 선맥 물려받은 實事求是의 선승
나는 아직도 바람을 알지 못하고 잎사귀에만 얽매인 채 말을 이었다. “스님의 세속 성은 장씨이고 법명은 ‘의순’(意恂)이고 자는 ‘중부’(中孚)이며 법호는 ‘초의’(草衣) 또는 ‘일지암’ 등으로 불렸습니다.” “연못의 자수련꽃을 보게. 자네는 꽃보다 물에 어린 그림자에 더 관심이 많군.” 나는 초의 스님의 말에 반발했다.
“소설가는 실체를 그리려 하기보다 독자들에게 그림자를 그려 보임으로써 실체를 파악하게 합니다.” “그럼 소설가 식으로 말을 계속해보게.” “이름 ‘중부’는 주역 ‘풍택 중부괘’에서 가져온 듯싶습니다. ‘돼지와 물고기에게까지 믿음이 미치면 길하니, 큰 내를 건넘이 이롭고 올곧음이 이롭다.
중부는 부드러움이 안에 있고, 강함이 가운데를 차지했으므로 기뻐하고 공손해서 미더우니, 이에 나라를 교화할 것이다.’ 어린 시절 누군가가 붙여준 ‘중부’라는 이름은 스님의 운명을 확실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스님은 대답하려 하지 않은 채 하늘을 쳐다보기만 했다. “초의 스님과 정약용 선생의 만남에 대하여 좀 말씀해주십시오.” “나와 추사 김정희가 태어날 무렵은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던 때였네. 세 살 되던 해에는 천주교 책들을 불사르는 일이, 다섯 살 되던 해에는 정약용을 해미현으로 유배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네. 열두 살 되던 해 정약용은 자기의 천주교 감염 사실을 회오하고 자신을 내치는(自斥) 상소를 올렸네.
열다섯 살 되던 해, 정약용을 아끼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고 정치권은 권력 싸움의 회오리에 휩싸였네. 16세 되던 해에 신유사옥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고, 이승훈과 정약종을 죽이고 둘째형 정약전을 신지도로, 정약용을 장기현으로 유배시켰네.
거기에 황사영(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사위)의 백서(帛書-프랑스에서 군함을 이끌고 와서 정부를 위협하여 천주교 신도들을 박해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편지) 사건이 겹쳐지자 정약용을 강진으로, 그의 형 정약전을 흑산도로 유배시켰네. 내가 24세 되던 해부터 정약용(48세)은 만덕산 밑에 다산초당을 짓고 살며 저술활동을 했고, 이때부터 나하고의 교류가 시작되었네.”
“백련사에 깨달음 깊은 연파 혜장 스님이 주지로 계시면서 정약용 선생과 깊이 사귀고 있었다는데, 초의 스님께서는 어찌하여 그 스님을 제치고 정약용 선생과 그렇게 깊이 사귀셨습니까.”
“나와 정약용의 첫대면을 주선한 것이 혜장 스님이었네. 혜장은 주역에 깊이 심취해 있던 차에 다산과 만났는데, 그로 인해 더 깊이 주역에 빠져들었네. 이후 혜장과 정약용 선생의 사귐은 한없이 깊어졌네. 한데 오래지 않아 자신의 도 닦음과 삶에 대하여 회의를 느낀 혜장은 주지 일을 그만두고 대둔산의 한 암자로 가서 술에 취해 살다 입적했지. 이후 정약용이 마음의 안정을 잃고 있을 때 내가 혜장 대신 그 자리를 메워드린 셈이었네.”
“나와 추사는 장고의 속가죽과 겉가죽”
“다산학자들은 대개 초의 스님이 유학을 다산에게 배운 것이라고들 하는데 사실입니까.”
“나는 큰 산이신 정약용 선생의 두 아들(정학연·정학유)과 벗이 되었고, 선생을 자주 찾았으며 아버지처럼 모시면서 올바르게 도 닦으며 사는 길을 암시받았는데 어찌 제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나는 나주 운흥사로 출가하기 전, 고향에서 이미 사서삼경·노자·장자 따위를 다 읽었네. 할아버지에게 그림과 시도 공부했지.”
“정약용과 초의 스님께서 만난 시점은, 홍경래가 일으킨 난으로 시국이 어지럽고 불안하던 시기 전후입니다. 만일 홍경래가 내건 기치와 부르짖은 말 가운데 정약용이라는 이름이 들어있기만 한다면 정적들이 그에게 사약을 내리라고 할 판이었습니다. 가뜩이나 그 무렵은 가까이 사귀던 혜장 스님이 입적한 뒤입니다. 극도로 불안하던 때에 다산은 초의 스님과 가까이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얻은 것이다 싶은데, 제 관점이 옳습니까.” “틀리지는 않네.”
“저는 초의 스님을 생전에 천재였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로 다음의 사례를 들었습니다. 26세 되던 해 대둔사 천불전(千佛殿) 등 많은 전각들이 불에 탔고, 완호 스님이 그것을 복원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완호는 수많은 유학자(다산 같은 이)와 경학이나 선(禪)에 밝은 중진 스님들을 다 젖혀놓고 하필 젊은 수좌(28세)인 초의 스님에게 ‘천불전 상량문’을 쓰라고 했습니다.
완호는 진즉부터 초의 스님의 천재성을 인정하고 있었고, 스님께서 이미 큰 그릇이 되어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때 스님께서 쓴 ‘천불전 상량문’은 희대의 명문으로 소문나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24세 되던 해에 다산과 첫대면을 했는데, 그로부터 3년 동안 그에게 경학을 공부하여 그와 같이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승려에게 칭찬은 그를 지옥으로 밀어넣는 것일세.” “스님께서는 16세 되던 해에 남평 운흥사(雲興寺)로 들어가 벽봉 민성 스님을 은사로 머리 깎고 스님이 되었습니다. 이때 받은 법명이 의순이라고 들었습니다. ‘의순’은 무슨 뜻입니까.”
“뜻이 진실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네.” “스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신동 말을 들었다고 하는데, 완호 스님께서 스님께 초의라는 법호를 내린 까닭은 혹시 스님의 귀기 어린 현란함과 팔방미인 같은 재주를 그윽하게 감추어주려는 것 아니었습니까.”
초의 스님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글쎄 은사 스님의 깊은 뜻을 짐작할 수 없기는 한데, 어쨌든 초의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네. 숨어 사는 사람이 입는 옷, 혹은 그런 옷 입고 사는 청정한 사람을 말하네. ‘나무뿌리나 열매로 배를 채우고 솔잎과 풀옷으로 몸을 가린다(野雲 스님의 자경문)’로 해석할 수도 있네.
또 ‘굴을 파고 그 속을 나무로 얽어 보금자리를 만들어 살며 나무 열매를 먹고 풀옷을 입는다(史略)’로 해석할 수 있네. 초의는 노장(老莊)의 무위자연의 풀옷을 덧입혀 주려는 뜻의 법호임에는 틀림이 없네.”
“초의 스님께서는 당대의 많은 유학 선비들과 사귀었습니다. 도 닦음을 뒷전에 두고 왜 그러한 현란한 사귐만을 일삼으셨습니까.”
“조선조의 유학자들이 반듯하게 지은 양반가 같은 삶의 규모를 앞세웠다면(正心) 억눌림당하는 불교는 텅빔(空)을 기조로 한마음 닦기(淸心)를 앞세웠네. 유학이 현실적인 틀로 말미암아 부자유하다면 불교 쪽은 벗어남(초월)으로 인하여 자유자재로 했네.
그리하여 유학 선비들은 공공연하게 스님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유로운 삶을 보충하려 했고, 그것을 스님들에게서 증명받고 싶어했네. 유학 선비들은 나와 사귀고 시회(詩會)를 함께하고 싶어했네. 정약용·김정희·신위· 홍현주·신관호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무명의 선비들이….”
“추사 김정희는 누구인데 왜 스님과 그렇게 깊이 오랫동안 사귀셨습니까. 초의 스님과 김정희의 만남은 운명적인 것이었다고 느껴집니다. 양쪽이 똑같이 천재였고, 실사구시의 뜻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두 분께서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상승작용을 일으켰다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추사 김정희는 20대 초반에 동지 부사로 연경에 가는 아버지를 따라가 3년 동안 머무르면서 시서화가이자 금석학자인 옹방강 등에게서 금석학·훈고학·고증학을 공부하고 돌아왔네. 추사는 그 실사구시의 잣대로 사람의 삶과 시와 글씨와 그림과 선(禪)을 재고는 했네.”
“추사하고는 언제부터 사귀셨습니까.” “내가 김정희와 처음 만난 곳은 경기도 수종사의 혹림암이었는데, 거기에는 선지식 해붕 스님이 주석하고 계셨네. 나보다 20세쯤 위인 스님이었네. 김정희는 언젠가 한번 해붕을 찾아가 그의 공(空)사상에 대하여 하나하나 따지고 가리려 하던 참이었는데 내가 거기에 와 있다고 하니까 달려온 것이었어.”
“스님과 추사 두 분께서는 또 한 사람의 선지식인 백파 스님을 찾아가 시쳇말로 ‘물을 먹였다’고 들었습니다.”
“30세였던 추사 김정희는 선지식들을 관운장의 칼로 난도질하려고 들었네. ‘선에 대한 너희의 생각은 굴절된 것이야, 항복해’ 이런 투로, 오히려 한 수 가르치려고 들었어. 추사 김정희가 얼마나 오만하게 굴었으면 그가 소피 보러 가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백파가 나보고 ‘저 양반, 반딧불 하나로 수미산을 불태우려 드네’ 하고 중얼거렸을 것인가.
그해에 벌어진 김정희와 백파의 논전은, 그로부터 25년쯤 뒤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된 뒤 본격적으로 벌어졌는데, 이때 김정희는 선(禪)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드러내고 말았네. 나는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벗인 추사 김정희의 대리전을 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가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라는 책이네. 그것은 백파의 ‘선문수경’에 대한 반박이지.”
“김정희는 초의 스님께 어리광과 투정을 하고, 초의 스님은 그것을 형처럼 받아주곤 했다고 들었습니다.”
“장고는 한가운데가 잘록하고, 양쪽에 나발처럼 벌어진 주둥이에 가죽을 입힌 타악기 아닌가. 그 장고 한쪽 가죽은 겉가죽이고, 다른 한쪽 가죽은 속가죽이네. 겉가죽을 치면 무겁고 낮은 소리가 나고, 속가죽을 치면 가볍고 가느다란 소리가 나네. 그 두 소리가 화합하여 더욱 아름다운 소리가 되는 것이지. 우리 둘 사이는 그것하고 똑같았지.”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시오.” “김정희는 지체 높은 월성위궁(부마) 집안 출신의 귀기 어린 천재로서 고집과 오만으로 말미암아 지인들과 주위 선비들에게 미움과 시기, 질투를 받았고 늘 고독했지.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업보일 거야.
그 때문에 김정희는 벗인 나에게 늘 어리광을 부리고 투정을 하고는 했지. 나에게 수시로 향기로운 차를 요구했고, 나는 손수 빚은 차를 보내주고는 했네. 나는 형처럼 그를 달래고는 했어. 제주에서 유배살이를 할 때나 해배된 다음 한양 마포 강변에 살 때 나는 찾아가 함께 기거하며 그를 보살펴 주었지.
우리는 그렇게 허물없는 지기로 살면서도 선사상에 대한 담론이 벌어지면 밤새도록 고성을 질러대고는 했네. 서로 고집과 사상을 굽히려 하지 않았어. 서로 잘 조화를 이루고 사귀지만 개성이 뚜렷하게(和而不同) 살았지.”
茶禪一切
“초의 스님의 행적을 더듬어보면, 요즘으로 친다면 ‘차 잘 마시기 운동’을 펼치셨다 싶은데요?”
“내가 지리산 친불암에서 ‘다경요채’에서 초록한 ‘다신전’(茶神傳)을 퍼뜨린 것은 조선조 끝무렵의 ‘차 잘 마시기(茶禪三昧) 운동’의 시작이네. 그로부터 9년 뒤 정조의 부마인 홍현주의 부탁을 받고 ‘동다송’(東茶頌)을 집필했네. 다신(茶神)이란 것은 차의 귀신이란 말이 아니고, ‘차의 신명’ 혹은 ‘진짜 차 맛’ ‘차의 참된 맛과 향기와 색깔’을 말하네. 차를 제대로 잘 마시는 것은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이네. 차의 신명이 곧 삶의 신명이야. 차와 선은 한가지 맛(茶禪一切)이야.” 나는 오래전부터 벼르던 말을 꺼냈다. 그것은 공격적인 따지기와 가리기였다.
“동다송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혼자 마시는 것은 가장 신명나게 마시는 것이고, 둘이 마시는 것은 보통 잘 마시는 것이고, 서넛이 마시는 것은 취미쯤인 것이고, 대여섯이 마시는 것은 덤덤하고, 칠팔인이 마시는 것은 보시하듯 나누어 마시는 것일 뿐이라고요. 불제자로서 ‘보시’를 폄하하다니, 이것은 잘못입니다. 차 마시기는 노장의 선도(仙道)에서 시작한 것이고, 인도에서 달마가 가지고 들어온 선불교는 선도에 의해 많이 굴절되었습니다.
참선하면서 차를 마시기 시작한 까닭으로 차는 혼자 마시는 것이 가장 잘 마시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깨달음을 얻는 구도의 방법입니다. 깨달음을 얻는 것이 소중하기는 하지만, 여러 사람과 더불어 나누어 마시기, 보시라는 것 또한 소중합니다. 깨달음과 보시는 둘이 아닙니다. 도 닦는 자의 깨달음은 결국 보시로 이어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초의 스님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맞네. 사람의 생각이란 것도 물 따라 흐르네.”
茶半香初
“유마거사를 자처한 추사 김정희가 이러한 시를 썼다고 들었습니다. ‘정좌처 다반향초 묘용시 수류화개’(靜坐處 茶半香初 妙用時 水流花開). 이 시를 하나의 다선삼매(茶禪三昧)를 노래한 다시(茶詩)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고요한 자리에 앉아 차를 반쯤 마셨지만 향기는 처음 그대로이고, 그 향과 맛 미묘하게 작용했을 때 큰 깨달음의 경계에 이른다.’ 이 시는 추사의 창작이 아니고 황정견의 시라고 하기도 하는데, 나는 이 시가 초의 스님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싶습니다.
‘고요히 앉아(靜) 있는 곳에서는 차를 반쯤 우렸을 때의 첫 향기 같고 미묘하게 움직였을 때(動)는 물 흐르고 꽃 피듯.’ 그런데 ‘차가 반쯤 우러났을 때의 향’이 무엇이기에 추사 김정희는 초의 스님을 염두에 두고 그와 같이 썼을까요?”
“차 주전자의 뜨거운 물에 차를 넣고, 맥박이 뛰는 속도로 하나 둘 셋… 이렇게 아홉을 세고 또다시 아홉을 헤아리면 애벌차가 우러나네. 그 첫번째 아홉을 헤아렸을 때 뚜껑을 살짝 열어보면 향이 스며 나오는데, 이 향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그윽하고 신비로운 향이네. 다신이라는 것이 이것이지. 갓난아기를 따스한 물에 멱을 감긴 다음 살갗에 코를 댔을 때 나는 배냇향 같은 이 향은 우주를 생성시킨 은근하고 그윽한 기운이네. 냄새가 일차원적인 것이라면, 향기는 원초적인 것이면서 고차원적인 것 아닌가.
차향은 영혼을 움직이게 하고 날아가게 하네. 귀신까지 움직이게 하는 신령스러운 힘을 가졌지. 차를 마시는 사람은 바로 그 배냇향을 맡을 줄 알아야 하네. 이 향을 알지 못하는 것은 소리 못 듣는 벙어리나 귀머거리하고 같고, 색깔을 볼 줄 모르는 장님하고 같네.
그 향을 알았다면 모름지기 이 향처럼 순수하고 그윽해져야 하고, 세상을 꼭 그와 같이 살아야 하네. 만일 물이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면 이 배릿한 향이 제대로 나지 않네. 차의 향은 텅빈 곳에 어리는 향기로운 모양새(空卽是色), 그 모양새 속에 어려 있는 텅빈 것(色卽是空), 우주의 원동력과 순리와 평등을 가르쳐주네.
나는 좋은 차인 경우 열 번까지 우려 마시네. 첫번째 우린 것은 배릿내가 나는 10대 인생의 맛이고, 두번째 것은 혈기방장한 20대 맛이다. 세번째 것은 삶의 맛을 바야흐로 알기 시작하는 30대 맛이고, 네번째 것은 깨달음이 보일듯 말듯하는 40대 맛, 다섯번째 것은 부처님이 눈을 반쯤 감은 뜻을 알기 시작하는 50대 맛이고, 여섯번째 것은 연꽃 잎을 스치는 부처님 눈빛을 보기 시작하는 60대 맛, 일곱번째 것은 연꽃들이 다 지고 없는 연못의 황달 든 연잎에 어린 불음을 듣는 70대 맛이다.
여덟번째 것은 ‘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느니라’ 하고 말씀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80대 맛, 아홉번째 것은, 햇볕에 잘 바랜 모시 같이 머릿속이 바래지는 90대 맛이고, 열번째 것은 사바 세상과 아미타 세상을 넘나드는 맛이네.”
“남종화가로 이름을 떨친 소치 허련이 초의 스님의 제자라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초의 스님은 감회가 깊은 듯 한동안 하늘을 쳐다보다 말했다.
“어느 날 한 초립동이 찾아왔네. 그림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네. 이리저리 떠보니 순수하고 착하기 이를 데 없고 열정도 대단하게 느껴졌네. 그래서 그놈을 해남 연동 공재의 후손들에게 소개하고 ‘공재-낙서-청고’ 삼대의 화첩을 빌려다 공부하게 하고, 일지암에 방을 내주고 그림에 매진하게 했네.
화재에 능할 뿐 서권기가 없는 그놈에게 경학과 선을 가르쳤네. 그리고 그림 수준이 웬만큼 되었을 때 한양의 추사 김정희에게 소개했지. 발견한 것은 나이지만 그 사람을 큰 화가로 키운 것은 추사였네. 허련에게 ‘소치’(小癡)라는 호를 내린 것은 김정희인데, 중국의 화가 ‘대치’(大癡)에서 가져온 것이네.”
“진도의 떠꺼머리 총각 허련이 일지암의 초의 스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걸출한 화가로 만들어지지 못했겠네요?” “사람에게는 운명길이 있어. 나는 그 사람의 운명길을 가르쳐주었을 뿐이야.”
“誤處가 悟處”
“초의 스님과 당대의 선지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던 백파 스님의 선에 관한 논전은 역사적으로 아주 유명합니다. 그때 백파와 스님께서 나눈 말들 가운데 명언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느질 흔적이 없는 천사 옷을 백파가 백결의 누더기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처(誤處)가 오처(悟處)’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나오게 된 배경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사사로운 견해로 조사선과 여래선에 계층을 두어 선문 오종에 배대하는 것은 본래의 도리를 왜곡되게 천착하여 후학들을 갈등의 소굴로 빠뜨린 것이니, 백파의 선론은 도저히 선도(禪道)로서 활용할 수 없는 죽은 글이라고 내가 공박하면서 한 말이 그것이야. ‘백파는 바느질 흔적이 없는 천사의 옷을 이리저리 손을 대어 백결의 옷처럼 누더기를 만들어 놓았다’ 그 말에, 백파 스님이 ‘초의의 말에 오처(誤處-잘못 알고 있는 부분)가 있다’고 지적했네.
그래서 내가 대뜸 ‘그 오처가 바로 오처(悟處-깨달음의 자리)입니다’ 하고 말했는데, 그 말 또한 세상에 두루 퍼져 후세에까지 전해오는 유명한 말이 되었다고 들었네. 백파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不二)이 너의 잘못된 생각’이라고 지적한 그 부분(誤處)이 사실은 큰 깨달음의 자리(悟處)라는 말인데, 그 두 낱말이 우리 말로 읽는다면 같은 발음(오처)이기 때문에 더욱 재미있게 느껴진 까닭일 거야.”
“초의 스님께서는 진묵 대사를 이상적인 인물로 생각하며 노년기를 보내신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진묵대사 유적고’를 집대성 편집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가 석연치 않습니다. 진묵 대사가 아이들이 불에 구워 놓은 물고기를 모두 먹은 다음 엉덩이를 시냇물로 두르고 ‘빠르르’ 하자 죽었던 고기들이 모두 살아나 헤엄쳤다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오어사(吾魚寺)에 얽힌 이야기하고 비슷합니다.
원효 스님과 은사인 혜경 스님이 물가에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놀다 원효가 시냇물에 엉덩이를 두르고 ‘빠르르’ 하자, 혜경도 마찬가지로 ‘빠르르’ 했습니다. 이때 원효의 엉덩이에서는 오물이 나오는데, 혜경 스님 엉덩이에서는 살아 있는 물고기들이 나와 헤엄쳐 다녔습니다. 혜경이 원효에게 말했습니다. ‘네 엉덩이에서는 오물이 나오지만 내 엉덩이에서는 물고기가 살아나온다(汝屎吾魚)’.”
“까마귀는 경상도에서만 ‘까욱까욱’ 우는 것이 아니고 충청도·전라도에서도 ‘까욱까욱’ 운다네.”
“또 하나 미심쩍은 것이 있습니다. 시냇가를 거닐던 진묵 대사가 지팡이를 세우고 물가에 앉아 손을 씻다 물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가리키며 시자에게 말했습니다. ‘저게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 모습이구나.’ 곁에 있던 시자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스님의 그림자입니다.’ 진묵이 꾸짖었습니다. ‘너는 다만 나의 허망한 모습(가짜)만 알 뿐, 석가의 참모습(眞如)은 모르는구나.’ 이 일화는 초의 스님께서 기록한 것인데, 저는 아무래도 초의 스님 자신의 이야기인 듯싶은데, 어떻습니까.” 한동안 초의 스님과 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초의 스님이 그 침묵을 깼다.
“나 이승을 떠난 지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 내 참모습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알지 못하네. 그런데 자네가 쓴 ‘초의’라는 소설을 보고 깜짝 놀랐네. 자네가 객관적으로 파악한 나의 참모습이라고 펼쳐보인 그것이 어쩌면 진짜 나의 참모습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게다가 내가 자네를 오랫동안 살펴보았는데, 자네의 소설 ‘초의’가 사실은 자네의 소설 쓰면서 살고 있는 삶, 그것을 빼박아 놨어.” “저는 시냇물에 ‘빠르르’ 오물을 쏟아놓고 있는데 지금 스님께서는 ‘빠르르’ 살아 있는 물고기를 흘려놓고 계십니다.”
이 말을 하고 나서 돌아보니 내 옆에 앉아 있던 초의 스님은 보이지 않았다. 팔랑거리는 감나무 잎사귀를 쳐다보았다. 그 잎사귀들 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한없이 깊은 텅빈 하늘.
초의 스님과 자리를 함께한 그 얼마 동안 나는 내내 즐거웠다. 초의 스님을 알고 난 지금, 나는 세상이 훨씬 아름답고 향기롭고 넓어 보이고, 세상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확실하게 하게 되었다.
한승원
1939년 전남 장흥 출생. 대한일보에 ‘목선’의 당선으로 등단. 신춘문예에 ‘가증스런 바다" 입선. ‘신들의 저녁노을" ‘신화" ‘불의 딸" ‘포구" ‘우리들의 돌탑" ‘초의"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