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종명 대위·전영철·조정웅·박의원·이태련·차유철·김인창·이건욱 병장. 연천 GP 총기 사건의 희생자들이다. 고인들은 사후 1계급씩 추서되어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범인이라고 자백한 김동민 일병은 ‘상관 살해’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겉으로는 사건이 일단락되었고, 과거 속으로 묻혀가는 듯했다. 하지만 유족들에게는 ‘미완의 사건’이었다. 당시 유족들은 ‘조작 흔적’이 있다며 의혹을 제기했지만 군 당국은 사건을 서둘러 마무리했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지난 9월28일 유족들이 서울 프레스센터에 모습을 나타냈다.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국방부의 조작설’을 전면 제기하며 진상 조사를 촉구했다. 이 자리에는 김동민 일병의 아버지도 모습을 나타냈다. 자식을 잃은 부모와 자식을 죽인 아버지가 함께 기자회견장에 서 있었다. 선뜻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김일병의 아버지는 유족들의 설득으로 기자회견에 동참했다고 한다. 김씨는 “아들이 증거도 목격자도 없는데 왜 범행을 인정하는지 모르겠다”라며 망연자실해 했다.
여기서 커다란 의문점이 생긴다. 만약 유족들의 주장대로 군 수사당국의 발표와는 달리 북한군의 이동을 막기 위한 차단 작전 중 북측의 발포로 빚어진 사고였다면 ‘누가’ ‘무엇 때문에’ ‘왜’ 사건을 조작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고 조정웅 병장의 아버지 조두하씨(51)는 “당시 남북한 관계에 해답이 있다. 2005년 6월17일 정동영 통일부장관(현 통합신당 대통령 경선후보)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했다. 사건 당일에는 전력 지원, 쌀 지원, 북한의 6자회담 복귀 등 굵직한 현안들이 놓여 있었다. 전방 GP 교전이 알려지면 남북한 관계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 뻔했고, 정부와 군 당국이 이를 우려해 벌인 일이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은 당시 군 수사기록과 상황 보고서, 부대 일지, 장병 진술서, 530GP 병력 현황, 시체검안서, 증거물 감정서 등을 입수해 유족들의 주장과 대조해가며 사건에서 제기된 여덟 가지 의문점을 조목조목 풀어보았다.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2005년 6월19일 오전 02시30분께. 경기도 연천군 제28사단 81연대 530GP(전방관측소)에서 ‘꽝’하는 폭음과 총성이 울렸다. “적의 공격을 받고 있다” “대응 사격은 했는가” “상황을 보고해라” 등 전시 상태를 방불하게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GOP대대 상황병은 ‘미상 확인 적으로부터 9발 피격’이라는 급전을 날렸다. 81연대에는 북한군의 공격시 발령하는 매트릭스가 발령되었다. 다른 부대 및 상급 부대에도 상황이 전파되었다. 연대 간부들도 모두 비상 소집되었다. 이 상황은 고속지령대(고지대)를 통해 합동참모본부(합참)까지 보고되었다.
① 북한군이 침입했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당시 군 수사기록, 상황 보고서, 부대 일지, 장병 진술서 등에 따르면 상황 근무자들과 GP 소대원들은 최초 상황이 발생했을 때 ‘북한군의 공격’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미상 적으로부터 530GP가 9발의 총격을 받았다는 내용 접수’ ‘530GP 및 GOP와 전화를 해 대응 사격 실시 여부 지속 확인’(81연대 지휘통제실장 정판영 대위), ‘옥상 쪽으로 포를 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군이 공용화기를 쏘아서 건물이 무너지는 것으로 알았다’(생존 소대원), ‘북쪽의 도발이라 판단됨’(관측장교 김희준 소위) 등의 진술이 이어졌다.
상황이 종료된 후 국방부의 발표는 달랐다. ‘북한군 침투 상황’이 아니라 ‘내무실 총기 사고’라고 발표했다. ‘선임병들에게 앙심을 품은 김동민 일병이 내무실에 수류탄 1발을 투척하고 소총을 난사해 GP장을 포함한 8명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국방부가 사고 경위 조사 후 발표한 사건 전말도 ‘김일병에 의한 내무실 총기 사고’였다.
유족들은 국방부의 수사 내용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최초 상황시 군의 모든 움직임이 ‘북한군의 공격’에 맞추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내무실 총기 사건으로 바뀔 수 있느냐는 것이다. 또 당시 상황 보고 중에는 ‘내부 침입’이나 ‘내부 공격’이라는 말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GP 내부에서 폭음이 들렸다면 적 침투나 적 기습에 의한 상황 전파가 가능할까. 최첨단 탐지 장비를 운영하고 있는 최전방 경계 부대가 실제 상황과 내무실 사고를 구분할 수 없었느냐는 것이다. 당시 군의 비상 상황 전개, 매트릭스 발령 등은 무엇을 말하는가. 유족들은 국방부가 ‘북한군의 침투 상황’을 은폐하기 위해 내무실 총기 사고로 조작했다며 ‘조작설’을 주장하고 있다.
② 최초 상황 보고, 왜 다른가?
최초 상황시 ‘미상 화기 9발’이 시간이 흐르면서 ‘수류탄과 실탄’으로 바뀌었다. 연대 지휘통제실장(지통실장)인 정판영 대위는 ‘고지대 방송(530GP에서 총격 도발 9발 받았음) 후 사단 지통실장의 전화가 와서 고지대 내용과 동일하다’라고 답변했다. 상급부대인 사단에 ‘미상 화기 9발 피격’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셈이다. 정대위가 6월23일 군 수사기관의 요구에 의해 작성한 진술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최초 ‘9발’은 보고자에 따라 여러 번 바뀐다. 28사단 정훈공보참모 이숙자 중령이 사단에 보고한 GP 공보 상황 보고에는 ‘탄약 10여 발’이다. 530GP 부대일지에는 ‘수류탄 1발, 실탄 25발’이다. 지통실 상황 일지와 판이하게 다르다. 6군단 헌병대가 6월23일 작성한 수사 발표 자료에는 ‘수류탄 1발, 실탄 44발’이다.
범행에 사용된 무기와 실탄이 ‘미상 화기 9발→탄약 10여 발→수류탄 1발, 실탄 25발→수류탄 1발, 실탄 44발’로 4번이나 바뀌었던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탄피 하나까지 챙기는 군대가 아닌가. 이후 군에서 나온 530GP 사고는 수류탄 1개와 탄창 2개에 의한 총기 난사 사고로 맞추어져 있다.
상황 보고와 상황 전개 과정도 각각 다르다. 국방부는 최초 상황 시간을 02시36분이라고 밝혔다. 81연대 지통실 상황 일지와 같은 시간이다. 상황 일지에는 ‘3중대장이 530GP 방향에서 총격 청취, 530GP 확인 결과 상황병이 북한군이 들어왔다(라고) 속삭이며 말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81연대 작전장교 김형호 대위가 사단 지통실에 보고한 ‘상황 보고(최초)’에는 총격 상황을 접수한 시간대가 02시34분이다. 2분의 간격이 있다. 당시 급박한 상황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1분 1초에 따라 상황이 확연하게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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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황문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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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국방부가 남,북한 화해무드를 깨지 않기 위해 북한군 침투사건을 조작했다"라고 주장한다. |
③ '내무실 사고가 아니라 ‘차단 작전 사고?’
유족들은 GP 총기 사건은 차단 작전 중에 발생한 사고라고 주장한다. 이날 차단 작전 수행을 위해 간부 2명과 상병급 12명이 노루골 방향에서 작전 중 북한군의 미상 화기(RPG-7, 로케트포) 9발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사고로 차단 작전지역(7~8발)과 530GP 옥상(1~2발)이 피격되었으며, 사망자 8명 중 6명은 노루골 차단 작전 지역에서, 2명은 530GP 옥상에서 사고를 당했다고 보고 있다. 사고 발생 시간도 군에서 발표한 02시30분께가 아니라 2005년 6월18일 22시~6월19일 오전 1시 사이에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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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황문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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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GP 사건의 진상을 놓고 유족과 국방부 의견이 완전히 다르다. 국회차원의 진상 조사를 촉구하는 조두하 유족대책위 대표. |
GP에서 실시하는 차단 작전은 월북하려는 적이나 불순 세력을 막기 위한 것이다. 보통 주간 작전 (14시00분~16시00분)과 야간 작전(23시00분~01시00분)이 있다. 01시 이후에는 적으로 오인할 수 있으므로 01시 이전에 복귀하는 것이 원칙이다. 유족들은 이를 근거로 연천 GP 사고는 6월19일 01시 이전에 발생된 사고라고 주장한다.
사고가 발생한 날 새벽 유족들은 지통실장이던 정판영 대위(수색중대장)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정대위는 사망·부상 가족들에게 “폭탄이 폭발해 사망했다”라거나 “지뢰를 밟아 부상했다”라는 등으로 자식들의 소식을 전했다. 이때 유족 중 누구도 ‘내무반 총기 사고’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 유족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대위는 왜 사망 경위에 대해 말을 바꾼 것일까.
조두하 연천 총기사건 유족대책위원회(유족 대책위)는 “차단 작전 중 북한군의 공격을 받았다는 증거는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포격 6~7발이 먼저 시작된 후, 530GP 옥상 포격은 8~9발째 진행된 후 정전되었다. 북한에서 GP 옥상 쪽으로 포를 쏘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소대원의 진술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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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면으로 나마 송회장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사건정황을 자세하면서도 논리정연하게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복사하여 사건을 알리는데 소중한 자료로 사용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