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akaoTalk_Audio_20140831_1947_39_393.m4a
에바다, 열리라
(마가복음 7: 31-37)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 84:12)”“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렘 17:7)”라는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어떤 문제를 당하면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건강 생활에 막히고, 경제 생활에 막히고, 인간관계에 막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히고, 쌓이고, 매이고, 맺히고, 꼬이고, 끊어지고, 터진 것이 있습니까? 우리 예수님께 전폭적으로 의탁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처럼 “에바다” 여리는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막히면 건강을 잃습니다. 열려야 합니다. 피가 온전히 통해야 합니다. 신경이 온전히 통해야 합니다. 막히면 인간관계에 질병이 생깁니다. 맺히면 풀어야 합니다. 열려야 합니다. 마음이 막히면 응어리져 속병을 앓습니다. 풀려야 합니다.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막히면 신앙에 질병이 걸립니다. 들을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없습니다. 열려야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들으면서 에바다의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막힌 것이 무너지고, 쌓인 것이 녹아 버리고, 매이고 맺힌 것이 풀리고, 꼬인 것이 정상적으로 회복되고, 끊어진 것이 연결되고 터진 것이 고쳐져 정상적으로 통하는 에바다의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두로 지방에 있는 어느 한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 곳에 계신 것을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했습니다. 그러나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소문이 두로 지방에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한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려, 그의 어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신 후에,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그의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 후에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두로 지방에서 나오셔서 그 북쪽에 있는 또 다른 해변 도시 시돈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곳에서 동남쪽으로 빙 둘러서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 오른편에 이르셨습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환자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 가운데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신 사실만을 대표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전혀 예수님에 대하여 듣지 못하여서 믿음이 없는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무엇을 요청합니까? 32절을 보십시오.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손을 얻고 기도해 주기를 간절히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수하면 나을 줄 알았습니다. 당시 병을 고칠 때 안수를 통하여 했다고 합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딸을 고쳐 달라고 할 때도 안수를 요청했습니다(막5:23).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안수하여 고쳤습니다.(막6:5)이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1. 인생의 골방에서 개별적인 만남을 통해 치료하셨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 한적한 곳으로 갑니다. 오늘날도 의사가 병을 고칠 때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은 중환자실이나 무균실로 구분하여 격리 수용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환자를 안정시키고 최상의 상태에서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외부 질병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때로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막히고 맺히고 응어지진 심리적, 영적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주님과 단둘이 있는 영혼의 광야로 부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질병일 수도 있고, 환난일 수도 있고, 실패일 수도 있고, 뜻하지 않는 불행일 수도 있습니다. 일에 묻혀 있을 때는 주님을 단둘이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단둘이 있는 곳에서 육신의 귀를 열어주고, 마음의 귀를 열어 주고, 영적 귀를 열어주기 위해 주님과 단둘이 있는 골방으로 초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방법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어려움을 줍니까? 왜 이런 고독의 시간을 줍니까? 이 고통이 어느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까? 그러나 그 때가 주님과 단둘이 만날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 벌거벗고 설 때입니다. 귀가 열리고 입을 열러 주기 위한 시간입니다.
고통의 순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을 단독자로 만나 에바다의 체험을 할 때입니다. 때로는 내 방법은 안수이지만 우리 예수님은 홀로 우리를 단독자로 서는 인생의 골방, 막장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2. 각 개인이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의 방법으로 치료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를 홀로 데리고 가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었습니다. 그는 어떤 말로 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고침받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신체적 접촉을 통해, 문제 있는 부위를 접촉함으로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손은 창조의 도구입니다. 예술가의 손은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어 내고 외과의사의 손은 질병을 고쳐줍니다. 하나님의 손이 인간을 흑으로 만들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손은 능력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에스라를 도와 백성들을 이끌고 바벨론 포로에서 무사히 귀환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손이 도와 성전 재건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도와 느헤미야를 통하여 성벽을 재건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손으로 그들이 요구한대로 안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합니까? 침을 뱉아 그의 혀에 대십니다. 이것을 보면 어떻게 예수님이 저렇게 비위생적으로 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상식적이지도 않고, 이성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식 수준으로 그냥 안수하시던지, 아니면 그냥 말씀을 선포하여 치료해주시면 될 것이지 왜 이런 유치한 방법을 쓰시느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들을 수도 혀가 굳어져 잘 말할 수도 없는 이 사람에게는 가장 좋은 사랑의 방법이었습니다. 침을 발라주는 것은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침은 더러움의 상징이 아니라 치료의 상징입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어릴 때 벌레 물리면 침을 발라 주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벌에 쏘여도 침을 먼저 발라줍니다.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입을 맞추면 침을 나눕니다. 이것은 더러움이 아닙니다. 최고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주님의 표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막힌 것이 무너지고, 쌓인 것이 녹아 버리고, 매이고 맺힌 것이 풀리고, 꼬인 것이 정상적으로 회복되고, 끊어진 것이 연결되고 터진 것이 고쳐주시기 위해서 우리가 이해 못할 방법으로 사랑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욥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욥 5:18).”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안수하거나 만지심으로 치유하셨습니다. 문둥병자를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치유하였습니다(마태복음 8장 1-4절) 누가복음 13장 13절에 보면 귀신들려 18년간이나 꼬부라져 펴지 못한 여인에게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열두해의 혈루증 여인(마5:25-34)은 옷자락에 손을 대어 치유받았습니다.
말씀과 명령으로 치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 13절에 보면 백부장의 하인이 심한 중풍병으로 고생할 때 말씀으로만 치유하였습니다. 나사로를 살릴 때(요11:43)와 열명의 문둥병자를 치유해 주셨을 때(눅17:14), 거라사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셨을 때(막5:8), 도 말씀과 명령으로 치유하였습니다.
기도로 고치셨습니다.
예수는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시기 전에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요11:41-44). 가나안 여인의 딸에 대한 치유는 그 여인 자신의 간절한 기도를 통한 것이었습니다(마15:25). 당사자의 믿음을 보시고 고치셨습니다. 혈루병을 치유받은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5:34). 두 명의 소경들을 치유해 주실때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9:29).
대화를 통해 고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3-30절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대화를 통해 심령을 치유해 주었습니다. 때로는 말씀을 통하여, 때로는 안수를 통하여, 때로는 기도를 통해, 때로는 믿음을 통해, 때로는 침과 흙을 통해, 때로는 대화를 통해 치유해 주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 사람에게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사실입니다.
3. 하나님께 탄식하는 기도를 통해 치료하십니다.
예수님은 침을 혀에 바른 후 어떻게 합니까? 하늘을 우러러 탄식합니다. 막히고, 쌓이고, 매이고, 맺히고, 꼬이고, 끊어지고, 터진 것을 보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십니다. 신음과 같은 소리고 그 사람의 처지를 마음 속 깊이 동정하였다는 말입니다. 불쌍히 여겼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도 하늘을 우러러 보고 축사하셨습니다. 같이 아파하시고 같이 비명을 지르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비참함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비참함 속으로 뛰어 들어오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버림받음을 당신의 버림받음으로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우리 인간을 대신하여 채찍을 맞아 주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막힌 것을 보시고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건강 생활에 막히고, 우리의 경제 생활에 막히고,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인간관계에 막히고, 쌓이고, 매이고, 맺히고, 꼬이고, 끊어지고, 터진 것으로 탄식하십니다.
예수님은 탄식의 기도를 드린 후 어떻게 하십니까? 능력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에바다” 열리라는 말입니다.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리라는 말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막힌 문이 열리라는 말입니다. 막히 육신의 문이, 막힌 경제의 문이, 막힌 인간관계의 문이, 막힌 영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열려야 합니다. 나사로야 나오라는 능력의 말씀이 선포될 때 돌무덤이 열리고 나사로가 살아나듯이 우리 영혼이 오늘 에바다라는 말씀을 들을 때 열려져 하나님과 매일 소통되고 사람과 소통되어 행복해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닫혀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에바다의 역사가 일어나기 바랍니다.
마음이 상처로 맺혀 있습니까? 에바다의 역사가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경제의 문이 닫혀있습니까? 에바다의 역사가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영성이 뛰어난 사람은 열려 있는 사람입니다. 하늘을 향해, 자신을 향해, 이웃을 향해,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에바다 할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납니까?병든 사람은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렸습니다. 그것을 보는 주변 사람들은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37절을 보십시오.경탄합니다. 심히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가 다 잘 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하신 모든 일은 원더풀이라는 것입니다. 감탄사가 나옵니다. 감사의 말이 나옵니다. 이게 혀가 진짜 풀리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 낼 때는 예수님을 나가라고 했던 그들이 이제는 축복의 말, 사랑의 말, 격려의 말, 위로의 말, 찬양의 말이 나온 것입니다.
내가 에바다 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 나와 전적으로 의탁하면 내 질병으로 굳게 닫힌 건강의 문이 열립니다. 예수님께 나와 전적으로 의탁하면 맺힌 인간관계의 문이 열립니다. 예수님께 나와 전적으로 의탁하면 풀리지 않던 경제의 문이 언젠가 열리게 됩니다. 예수님께 나와 전적으로 의탁하면 영적인 문이 열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을 전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나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의 말이 “예수님이 다 잘하였도다”라는 말로 원더풀로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문제도 해결됩니다.” 이것은 복음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일부만을 전하지 말고, 온전한 복음 곧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바르게 전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 37절에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이사야 35장 5~6절에, 장차 메시야가 맹인과 귀머거리와 절름발이와 벙어리를 온전하게 고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대로, 예수님은 그와 같은 사람들을 온전하게 고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그리스도이심이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러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언제나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리하면 예수님이 행하시는 창조의 역사를 날마다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건강 생활에 막히고, 경제 생활에 막히고, 인간관계에 막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히고, 쌓이고, 매이고, 맺히고, 꼬이고, 끊어지고, 터진 것이 있습니까? 우리 예수님께 전폭적으로 의탁하시길 바랍니다.
에바다가 우리에게 열리는 것입니다.
모든 막힌 것을 열고 에바다의 역사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전폭적으로 의탁하고 예수님께 나오면 됩니다.
막힌 것이 무너지고, 쌓인 것이 녹아 버리고, 매이고 맺힌 것이 풀리고, 꼬인 것이 정상적으로 회복되고, 끊어진 것이 연결되고 터진 것이 고쳐져 정상적으로 통하는 에바다의 역사가 일어 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