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치훈(趙治勳: 일본명 초치군(ちょう ちくん))은 1956년 6월 20일 생으로 아직 생존해있는 일본 프로바둑계의 살아있는 전설입니다.
대한민국 부산시 출신으로 아직도 그 위업을 깰 수 없는 본인방전 10연패의 전설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서 본래는 죽은 이를 기리기 위한 명칭으로 사용되는 ‘~대 본인방’이라는 호칭을 생전에 쓸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한국과 일본을 왕복하면서 그의 실력은 최고의, 지존적인 위치에 올라서게 되는데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 그가 보여준 수많은 타이틀 획득, 실리를 추구한 기풍은 하나의 주류로서 자리를 잡았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실리를 추구하면서 승패에 철저한 집착을 보이는 강한 승부심으로서 언제나 최강의 수를 두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와 함께 무척 오랜 시간 생각을 하고 수를 놓은 인물로도 알려져 있지만 그와 함께 빠른 바둑에서도 달인급의 경지를 보이는 인물로서 알려져 있습니다.
조치훈은 일본에서 기도상(棋道賞)을 9번, 최우수 기사상을 9번 받았고, 1996년에는 치바(千葉) 시민영예상을 받았으며 지금도 활약하고 있는 몇 안되는 고수 중의 고수로 예우 받고 있습니다.
조치훈은 1962년 8월 1일, 6살의 나이로 일본에 건너가 키타니 미노루 프로기사의 문하로 입문했고, 이후 11살 9개월의 나이로서 1968년에 프로시험에 합격, 입단을 했습니다. 이 기록은 일본 최연소 기록 입니다. 그와 함께 같은 해인 1968년에 2단으로 승단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후 매해 벌어지는 승단시험에 있어서 한 번도 떨어지지 않는 조치훈은 1969년에 3단, 1970년에 4단, 1971년에 5단으로 승단, 1973년 16살의 나이로 신예 토너먼트 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처음으로 타이틀을 가지게 됩니다. 또한 개회시합 33연승이라는 기록을 세우면서 6단으로 승단합니다.
1974년 18살이 되어 키타니도장에서 독립한 그는 1975년 프로십걸전에서 우승하면서 최연소 공식타이틀을 얻으면서 7단으로 승격, 1978년에는 8단으로 승단하는 경이적인 승단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1980년 24살의 나이에 명인자리를 획득한 이후 5연패를 달성하고 처음으로 ‘명예명인’으로서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이 일로 한국에서는 조치훈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하게 됩니다.
1981년 4월에 9단으로 승단한 조치훈은 사상 4번째 본인방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1982년에는 학성, 십단, 본인방, 명인의 타이틀 4개를 가지게 되고 1983년, 27살의 나이로 기성(棋聖) 자리까지 차지해 대삼관(大三冠)을 이루며 그의 이름은 무적의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1986년 1월 6일 교통사고를 당해 전치 3개월의 중상을 입고 바둑대회에서 감이 무뎌질 것을 걱정한 조치훈은 마취를 하지 않고 수술을 감행하는 정신력을 보이면서 대국에 임했지만 기성(棋聖) 타이틀을 빼앗기고 맙니다. 그러나 회복된 8월에는 바로 기성(碁聖) 타이틀을 되찾습니다. 그가 마취를 하지 않고 수술을 감행한 일은 지금도 회자되는 일본 바둑계의 전설적인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그가 1987년 천원(天元) 타이틀을 획득하면서 사상 처음으로 그랜드슬램(일본 7대 타이틀 모두 획득)을 달성한 기세는 가히 천하무적의 조치훈을 보여주었다고 하겠습니다.
1988년에 들어 10단 타이틀을 되찾은 조치훈은 천원 타이틀을 방어하고 1989년 본인방 타이틀도 다시 얻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가 일본 바둑계의 전무후무한 기록인 본인방 10연패를 달성하자 조치훈에게 대적할 인물이 일본엔 없다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1991년 후지츠배 세계바둑대회에서 중국의 전우평 9단을 물리치고 우승을 하면서 일본에서 무적이 아니라 세계 최강자의 자리를 지키게 된 조치훈은 이때부터 제자를 두기 시작했고 그의 위치는 가희 바둑의 신적인 존재로서 인식되었습니다.
1997년에는 11년만에 명인 타이틀을 차지하더니 4연패의 기록을 다시 새웠고 2번째 대삼관을 달성했습니다. 2003년 한국 삼성화재배 세계오픈전에서도 우승을 하면서 아직도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는 조치훈은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2005년, 48세 7개월이 되던 시기에 사상 최연소 입단 후 36년 9개월만이라는 역시 사상 최단기간에 1,200승을 달성한 인물이 되었으며, 이 해에 4연패를 기록한 왕립성 9단에게 승리, 10단의 자리를 방어하는데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획득했던 대표적인 타이틀만 해도
기성(棋聖) 8회(1983 1984 1985 1994 1996 1997 1998 1999)
명인(名人) 9회(1980 1981 1982 1983 1984 1996 1997 1998 1999)
본인방(本因坊) 12회(1981 1982 1989~1998)
십단(十段) 6회(1982 1988 1989 2005 2006 2007)
천원(天元) 2회(1987 1988)
왕좌(王座) 3회(1976 1994 2001)
기성(碁聖) 2회(1979 1986)
NHK배 TV기국토너멘트 우승 4회(1983 1992 1996 2007)
NEC컵 토너멘트전 우승 4회(1984 2000 2001)
용성전(龍星戰) 우승 2회 (1991 1993)
빠른바둑선수권 우승 7회 (1986 1990 1991 1992 1996 2001 2002)
신예토너먼트 우승 3회 (1973 1974 1976)
학성(鶴聖) 우승 2회 (1982 1985)
이외에도 아사히 8강 쟁패전을 1976년에 우승, JT배를 1996년에 우승, 프로십걸전 1975년 우승, JAL슈퍼 빠른바둑전에서도 2004년에 우승, 후지츠배 세계바둑전에서 1991년 우승, 삼성화재배 세계오픈전 2003년도에 우승을 거두었습니다.
2006년에는 10단을 방어하는데 성공하고 2007년 NHK배 토너멘트에서 11년 만에 우승, 4월에는 10단을 다시 방어하면서 그가 가지고 있는 타이틀 획득 수는 71개로서 역대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살아있는 ‘바둑의 신’으로 일본에서의 그의 존재감은 너무너 엄청난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4살 때 바둑을 시작해 겨우 1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아마추어 고단자 수준으로 알려지면서 1962년 당시 6살에 불과했던 그가 당시 6단이었던 기사에게 5알을 두고 놓는 국전에서 승리하면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여기에 100여 국 이상을 둔 고바야시 프로와의 전적은 50:50정도의 비율에 가깝지만 타이틀이 걸린 싸움에서는 더 많이 이기는 승부사적인 기질과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타이틀전이 7번 열리는 경우 29전 6패로서 7번째까지 승부를 몰고 가면 거의 승리를 하는 놀라운 집중력도 그에게 ‘7번 승부의 귀신’ 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했습니다.
“저는 5단이 되려고 일본에 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의 어록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에서도 높이 평가되는 말로서 그가 15살의 나이로 5단이 된 것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강한 승부사로서, 한국인으로서 일본에서 성공해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그가 아직도 활약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의 존재는 나이를 넘어서 확실히 대단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첫댓글 오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