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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의 특산물(特産物)【탐라(耽羅)의 산물(産物) 기후(氣候)】(3편)
○ 반도(半島) 서남(西南) 바다가운데(海中)에 있는 섬(島) 제주도(濟州道)! 탐라(耽羅)라고 하고, 탁라(乇羅)라고도 하는데, 많은 다른 이름(異名)이 있다. 이 탐라(耽羅)는, 옛 적에 소국(小國)으로 있었으나, 백제(百濟)때부터 반도(半島) 왕조(王朝)에 예속(隸屬)되었다고 전(傳)하는데,
초(初) 백제(百濟)에 속했다가 다시 신라(新羅)로, 이어 고려(高麗)에 속(屬)했다가, 원(元)나라가 빼앗았고, 이를 다시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때 수복(收復)하여, 이어 조선왕조(朝鮮王朝)에 예속(隸屬)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역사서(歷史書)는 전한다.
○ 문제(問題)를 삼는 것은, 오늘날의 제주도(濟州道) 지형지리(地形地理)나 기후(氣候), 산물(産物), 백성(百姓)들의 풍속(風俗)등등이 역사서(歷史書)에서 전(傳)하는 내용(內容)과는 너무도 다르다는데 있다. 탐라(耽羅)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반도(半島) 제주도(濟州道)일 수 없는, 여러 증거(證據)들을 제시(提示)하고, 설명(說明)하였다. 이를 토대로 다시 한 번 정리(整理)를 해 보기로 하자.
「제주도(濟州道)라는 섬(島)의 형성(形成)」은, 이미 수천(數千)년에서 수만(數萬)년, 또는 수십만(數十萬)년 전(前)에, 갖춰진 것이니만큼, 「그 산천(山川)의 지세(地勢)나 기후(氣候), 거기에 따른 초목(草木)과 금수(禽獸), 백성(百姓)들의 풍속(風俗)등은 쉽게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행성(行星)의 곳곳의 인간사(人間事) 모든 것들은,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된 것들에서 예외(例外)되는 것들이 별로 없다. 대부분(大部分)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는 것이다. 수천(數千)년 전(前)의 생활(生活)을 그대로 답습(踏襲)하고 있는 곳도 수없이 많다.
○ 이러한 것들이 일반적(一般的)인 예(例)임도, 「조선사(朝鮮史) 이야기만 나오면, 외계인(外界人)이나 신(神)들이 살아왔던 전설(傳說) 또는 신화(神話)같은 이야기처럼, 도무지 이해(理解)할 수 없는 땅(地) 이야기가 나열(羅列)되고, 거기에 따른 종족(種族), 부족(部族), 풍속(風俗), 기후(氣候), 동식물(動植物), 특산물(特産物)등이 펼쳐지며, 하천(河川), 산(山)과 산맥(山脈)에 이어 동서남북(東西南北) 방향(方向)이 어지럽고, 특이지형(特異地形)인 사막(沙漠)과 많은 호수(湖水)등이 있었다.」고 전(傳)하는데,
실제(實際)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있었다는 반도(半島)와 그 부속(附屬)도서(島嶼)에는, 이렇게 많은 것들이 존재(存在)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반도(半島)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있었던 땅(地)이 아니기 때문에, 수천(數千)년 전부터 선인(先人)들에 의해 기록(記錄)된 내용(內容)과 합치(合致)될 수 없다.」는 결론(結論)에 도달(到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 특이지형(特異地形) : 사막(沙漠), 호수(湖水), 늪, 초원(草原), 평야(平野), 대산(大山), 산맥(山脈), 협곡(峽谷), 바다(海), 반도(半島), 섬(島)등등은 수천(數千)년 전의 이야기와 오늘날의 것이나 거의 일치(一致)한다.
㈏ 기후대(氣候帶) : 열대(熱帶), 온대(溫帶), 한대(寒帶) 또는 아열대(亞熱帶), 사계절(四季節) 등 역시 수천(數千)년, 또는 수백(數百)년 전에 기록(記錄)된 것과 일치(一致)한다.
㈐ 금수(禽獸)와 식물(植物)등의 모든 것들 : 코끼리. 물소. 호랑이. 사자. 코뿔소. 순록. 낙타. 양. 공작(孔雀). 앵무(鸚鵡). 타조. 원숭이. 대모(玳瑁). 귤(橘). 감(柑)등 많은 것들 역시 일치(一致)한다.
○ 이렇게 수많은 여러 가지들이 옛 선인(先人)들이 기록(記錄)한 내용(內容)이나, 구전(口傳)으로 전(傳)하는 것들이 대략적(大略的)으로 일치(一致)하고 있는데, 특이(特異)하고 예외적(例外的)으로 조선왕조(朝鮮王朝) 이야기만 나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이게 도대체 무슨 조화(造化)속인가?
○ 전혀 다른, 이해(理解)할 수 없는, 그 이야기를 오늘도 시작(始作)해 보려한다. 탐라(耽羅)에 대한 이야기다. 소개(紹介)하는 이러한 내용(內容)이 「반도(半島) 제주도(濟州道)속의 이야기인지, 전혀 다른 곳의 이야기」인지는, 이 글을 보는 분들이 전적(全的)으로 판단(判斷)할 일이다.
➠ 아래 원문(原文)의 저자(著者)는, 다른 나라(他國) 사람이 아닌,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신민(臣民)이었다는 것을 미리 알려두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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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記 言 48 續 集 / 四 方 二 / 耽 羅 誌 :
《乇羅.南海中小國.中略.忠烈王元年.元置耽羅摠管.放牛,馬,駱駝,驢,羊.二十年.罷摠管屬高麗.高麗寘濟州牧.後六年.元更置軍民萬戶.放廏馬.旋棄之.恭愍王二十一年.元復置萬戶府.元亡.復屬高麗. : 모라(牟羅)는, 남해(南海)의 소국(小國)이다. 중략. 충렬왕(忠烈王) 원년(元年)에, 원(元)에서 탐라총관을 두고는 소. 말. 낙타. 양. 나귀를 방목하였다. 20년에, 총관(總管)을 파하니, 고려(高麗)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는 제주 목으로 받아들였다. 후 6년에, 원(元)이 이름을 바꿔 군민만호를 설치하였으나, 방목한 말들을 방치하였다. 공민왕(恭愍王) 21년에, 원나라에서 “만호부”를 다시 두었으나, 원(元)이 망해, 다시 고려(高麗)에 속하게 되었다. 州在頭無嶽北.北地常多北風.樹木之植.皆偃向南.旌義,大靜二縣.在嶽南.南地無風多瘴霧.晝晦. : 주(州)는 두무악(頭無嶽) 북쪽에 있는데, 북쪽 지역은 늘 북풍이 심하게 불어 나무를 심어 놓으면 모두 남쪽을 향하여 쓰러진다. 정의ㆍ대정 두 고을은 두무악의 남쪽에 있는데 그곳에는 심한 바람은 불지 않으나, 장기(瘴氣)를 품은 안개가 많아 낮에도 어두울 정도이다. 中略.釜嶽東.爲長兀嶽.高與釜嶽齊.上有深淵.水旱行禱.山高.五月積雪.八月襲裘.州東五十里.長沙堆。부악의 동쪽이 장올악(長兀嶽)인데 그 높이는 부악과 같다. 그 위에는 깊은 못이 있어 장마가 지거나 가뭄이 들 때 거기서 기도를 올렸다. 또한 산이 높아서 5월에도 눈이 쌓여 있으며 8월에는 털옷을 입어야 한다. 주의 동쪽으로 50리에는 장사퇴(長沙堆)가 있다.》
《州縣之居.皆山麓海上.其土皆沙礫.唯州旁廣壤赤埴。其地多壽考.其俗好淫祠.男少女多.女執男役.有女丁之號.島人皮服.海妻無裙.布繫一尺. : 주ㆍ현의 거주지가 모두 산기슭과 바닷가이다. 그러므로 그곳의 토지는 모두 모래와 자갈뿐이지만, 주의 곁에 있는 광양(廣壤) 땅만은 붉은 진흙이다.》
《其穀宜黍,稷,菽,麥.其貨.璸珠,玳瑁,螺具.其魚.鰒魚,鮫魚,望魚,胎化無卵育.其果.橘,柚,橙,柑,梔,榧.產良馬。: 그곳의 곡식으로 알맞는 것은 기장ㆍ피ㆍ콩ㆍ보리이며 재화로는 빈주(璸珠)ㆍ대모(玳瑁)ㆍ나패(螺貝)이고 고기는 복어(鰒魚)ㆍ교어(鮫魚)ㆍ망어(望魚)인데 태생(胎生)이고 알에서 부화(孵化)된 것은 없다. 과일은 귤(橘)ㆍ유자(柚子)ㆍ등자(橙子)ㆍ감자(柑子)ㆍ치자(梔子)ㆍ비자(榧子)이며 좋은 말이 생산된다.》
《山高海惡.其人業射獵漁釣.不用網罟.山麓之地.多石少土.耕種者踏田.多蟲蛇.蝍蛆尺餘.出香鼠. 산은 높고 바다는 좋지 않아 그 인민들은 수렵과 고기를 낚는다(釣: 낚시 조). 그물망을 사용할 줄 모른다. (중략). 벌레와 뱀이 많은데, 지네(蛆:구더기 저. 蝍: 지네 즉)의 크기가 한 척 여나 되는 것도 있으며, 또 香鼠(향서: 향 쥐)도 난다.》
《乇羅火脫餘鼠.其間海水深黝.多烈風高浪.每春夏南望水宗外.高檣,大䭵過者無數. : 탁라ㆍ화탈(火脫)ㆍ여서(餘鼠) 사이에는 바다가 깊고 검푸르며 매서운 바람과 높은 파도가 많다. 매양 봄과 여름에 남쪽 수종(水宗) 밖을 바라보면 높은 돛을 단 큰 선박들이 무수히 지나간다. 此黑齒之夷.通中國之路.亦海外諸蠻夷物貨所通.西南望白海.崔溥漂海東風七晝夜.至白海.其外大琉球. : 여기는 흑치(黑齒)의 오랑캐들이, 중국과 통상하는 길목이며, 또한 해외 여러 만이(蠻夷)들의 물화가 유통되는 곳이다. 서남쪽으로는 백해(白海)와 마주하고 있는데 ,최부(崔溥)가 바다에서 표류(漂流)하다 동풍을 타고 7일 만에, 백해에 도착하였다 한다. 그 밖으로 대유구(大琉球)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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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立齋【강재항(姜再恒) : 1689년(숙종15) - 1756년(영조32)】先生遺稿卷二 / 詩 ○ 七言古詩 편의 “耽 羅 姜 二 子 者. 中 略)”에 이런 내용이 있다.
《橘 柚 家 千 戶 : 귤(橘)과 유자(柚)를 재배하는 집이 1천호이며, 중략(中略), 篁 竹 林 間 三 萬 戶 : 황죽(篁竹) 숲 사이에 3만호가 있다.》고 말이다.
(3) 귤 원(橘 園)에서 읊다 / 청음 집 제5권
만 대나무 빽빽하게 얕은 담을 둘러 있고 / 萬 竹 森 森 護 短 墻
귤나무는 무수하게 줄지어서 숲 이뤘네. / 橘 林 無 數 擁 成 行
많고 많은 푸른 잎 새 늦봄 비에 젖어 있고 / 津 津 綠 葉 三 春 雨
밝고 밝은 금 구슬은 한밤 내내 서리 맞네 / 的 的 金 丸 一 夜 霜
병든 객은 허연 머리 돌려보매 갈증 멎고 / 病 客 白 頭 回 止 渴
예쁜 여인 옥수 들어 따자 향기 생겨나네. / 佳 人 玉 手 摘 生 香
고이고이 포장해서 푸른 바다 건네 보내 / 輕 包 重 裹 浮 滄 海
매년마다 시월이면 상방에다 진상하네. / 十 月 年 年 進 尙 方
➊ 전회(前回)에도 설명한 것처럼, 반도(半島) 제주(濟州) 땅에서, 귤(橘)나무를 재배(栽培)하기 시작한 것은 1,900년 이후(以後)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以前) 17세기, 18세기에도 탐라(耽羅)에서는 대규모(大規模)로, 귤(橘)과 유자나무(柚)를 재배(栽培)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이곳 반도(半島) 탐라(耽羅)에서 귤(橘)과 유자(柚子)가 대규모(大規模)로 생산(生産)되었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기록(記錄)이다.
➋ 또, 황죽(篁竹)으로 둘러싸인 숲 사이사이에 3 만호(萬戶)가 자리 잡고 살았다는 이야기다. 황죽(篁竹)이란 대나무 숲을 말하는데, 반도(半島) 탐라(耽羅) 땅에 ‘대규모 대나무 숲’이 있었다고 하였다. 반도(半島) 탐라(耽羅)땅에 대규모(大規模) 대나무 숲이 있었다는 정황(情況)이나 또 그 흔적(痕迹)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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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조그만 영토(領土)안에서 조차, 조선사(朝鮮史)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이해(理解)할 수 없는 이야기로 꽉 차 있는 것이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이야기다. 위에서 언급(言及)한 산물(産物)들이 자생(自生)할 수 있는, 지형지세(地形地勢)와 자연환경(自然環境)을 가진 곳이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영역(領域)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반도조선(半島朝鮮)이란 조작(造作)의 산물(産物)일 뿐이다.
2015년 11월 19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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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탐라는 대륙조선사의 단골메뉴 중 하나이군요...
조선 중종 때부터 진상을 위한 (귤)공과원이 운영 관리되었고, 당시 공과원의 하나였던 탐라의 용동 과원에는 한때 44그루의 귤나무가 있었지만 현재는 8그루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귤 과원 주위에는 대나무숲이 "방풍림"으로 조성되었고, 대나무는 귤 저장에도 유용해 대나무잎의 찬 성질을 이용하여 귤을 상자에 담을 때 댓잎을 깔기도 하며, 아예 대숲에 귤을 저장하기도 하였다고....
요즘에는 방풍림도 대나무 대신에 삼나무를 심어 조성한다고...
탐라 오등의 한마을인 "죽성"은 대나무가 많다는 데서 명칭이 유래하였다고...
단골메뉴라는 말은 좀 그렇네요.
특정지방, 특이지형, 종족, 부족등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면서 한 번에 많은 량을 올릴 수 없으므로 나누어 올리고 있는 것 뿐입니다. 많은 자료가 있으나 카페에 올리는 경우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양해바랍니다. 건강하세요.
반도의 탐라가 가짜라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이 카페 저 카페에서 자주 언급되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인데도 탐라의 구체적인 위치는 통일된 견해가 아직까지도 없으니 답답하네요...
자주 등장하므로 "단골메뉴"라고 하는 겁니다.
기분이 나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기분 나쁠 이유가 없습니다. 단골메뉴가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 일이니까요. 대륙조선사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그럽습니다. 오해없기를 바랍니다.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산이 높아 오월에도 눈이 쌓여 있으며~~
이 말을 두 가지 관점으로 생각해 보면
우선이 말이 fact일 경우 .... 동남아 일대의 섬에는 존재할수 없읍니다. 다만 사천성, 귀주성쪽은 워낙 산이 높으니 가능성은 있지만 바다의 수로에 많은 배가 다닐수 없음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fact가 아닐 경우(즉 왜곡된 말일경우) ; 반도의 현 제주도를 염두에 둔 말일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탐라(제주)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아열대 지방과 관계가 많은 글이 나오고 흑치의 오랑케들이 다녔다는 말로보아 지금의 해남도가 가장 가깝지 않나 생각합니다.
제 지인이 10여 년 전에 해남도에 갔었는데요 바다가 우리나라 서해안처럼 뻘이래요 바다는 볼게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마포대사 해남도의 지리적, 자연환경등을 보면 역사상으로 탐라와 매우 흡사한 조건을 갖췄다고 봅니다. 특히 고려와 송과 왜가 요충지 땅인 탐라를 두고 벌인 사건들을 원사에서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만, 실제 그곳을 방문하여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유보할 생각입니다. 마포대사님께서는 요즘 매우 바쁘신가 봅니다. 바쁘시더라도 늘 건강을 챙겨야 합니다. 항상 건강하게 뵙기를 청합니다.
@마포대사 하나 중요한 것은 "제주"와 "탐라"가 서로 다른 지역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확실한 고증이 없어 가설조차 내기가 힘듭니다.
@문 무 예 저도 서로 다른 곳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실록에서 제주로 검색을 해보면
섬이 생겨난 유래 같은게 나오는데 바다에서 갑자기 바위가 솓았다는 것을 보았는데
육지에서 육안으로 보았을 정도면 지금 반도 제주도는 될수가 없고 탐라도 될수 없다고 봅니다
화산으로 만들어진 섬은 사람이 먹고 살수있는 환경이 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죠.
탐라는 역사가 유구하잖아요 삼국사기에도 나오는데요.
황죽(篁竹)...아마도 이 대나무로 '생황'이란 악기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백과사전에 임진왜란 이후에 우리나라에서 만들지 않았다 나오는데 ...좀 야릇합니다. 반도사관의 관점이겠죠.... 여기서의 우리나라는 반도이고 제주는 현 제주인데 지금의 제주에는 황죽(篁竹)이 없으니 말입니다. 황죽...............황죽이 구체적으로 어떤 대나무인지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한것 같습니다....
篁(황)을 홍자옥편에서 찾아보면, <대포기 황. 대밭 황>이라고 했기에 "대숲"이라고 번역들을 합니다. 문제는 "황죽"이 대나무의 일종을 말하는 것인지, 일반명사로 대나무 숲을 말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제주도에는 토질 상, 자연환경으로 볼 때, 많은 대나무 숲이 있고, 대나무 숲과 대나무 숲사이에 '3만호가 산다'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지금 인터넷을 보니 황죽이란 대나무 일종도 있다고 하는데, 20m씩이나 자란다고 하는데, 충청도 이남지방에서 자란다고 합니다. 다방면으로 알아보도록 해보겠습니다. 회원님들, 늘 건강하게 지내시길 기원드립니다.
제주가 어디일까....생각해봤습니다.
고려의 삼별초가 강화, 진도, 제주도로 이동하면서 대몽항전을 계속했고 결국 실패(?)했습니다. 같은 시기 송나라가 원에 붕괴되고 저항세력(남송)이 남으로 이동하면서 대몽항쟁을 계속했는데 그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젔던 곳이 바로 상양시전투입니다. 이곳에서 약 5년간 치열한 전투가 있었고 이곳이 무너지자 수도인 입안이 몇 년후 함락되어 사실상 남송은 멸망하고, 남은 저항세력이 지금의 광동성등 중국남부에서 계속저항을 합니다. 그러다 애산전투를 끝으로 결국 평정되고 말죠....
고려사의 삼별초와 시기별로 보나 사건 내용으로 보나 너무 유사 합니다. 상양시는 강화도요, 입안(항주?)은 진도, 그리고 애산전투가 있었던 해남도는 제주도로 대비하여 생각할수 있죠....반도사관으로 보아도 비슷한데... 대륙고려의 관점으로 보면 남송의 저항과정은 삼별초의항쟁입니다(남송의 위치를 현 중국 남부로 가정했을 때). 삼별초가 마지막 저항했던곳이 제주도인데 원과 남송과의 마지막 전투인 광동성남부의 애산전투에서 무척 치열한 전쟁을 햇다 하더군요.(세계4대 해전(厓山海戰)이라네요...) 대몽 항전이 하나의 사건이라면 마지막 저항지였던 제주는 현 광동성 앞바다에 있었을 것이며 그곳은 해남도일 것이다 라는 거죠...
또 하나 추가하고 싶은 말은 얼마전에 여행프로그램에서 베트남의 하롱베이에 관한 프로를 보았는데 지금의 북쪽베트남 사람들이 원나라와 싸우다 패하여 지금의 유명관광지인 하롱베이의 여러 섬들 사이로 숨어들었다는 내용이 잠깐 나왔었읍니다. 이곳에 숨어들면 잘 찾지 못한다 하네요.....
어쨌든, 남송과 원나라와의 치열한 전투가 광동성과 해남도 일대에서 있었고 이런 사건이 대륙고려의 관점에서보면 삼별초의항전으로 짧게 묘사된 것이 아닌가 하며 이것이 맞다면 제주도는 현 해남도가 유력하다는 것입니다.
상양시는 강화도이고 입안(항조우?)은 진도쯤, 그리고 해남도는 제주도... 이렇게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단순히 제 추측입니다..)
삼별초와 송 말기의 상황이 아주 흡사하다!
정말 예리한 분석이라고 판단됩니다. 해남도는 제주 또는 탐라!
송말기 원과의 항쟁스토리와 삼별초 항쟁등을 함께 검토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