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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힐 소설경(維摩詰所說經) (무비 스님 강설)
一. 불국품
8, 보적의 게송
爾時에 一切大衆이 覩佛神力하고 歎未曾有하며 合掌禮佛하고 瞻仰尊顔하되 目不暫捨러라 長者子寶積이 卽於佛前에 以偈頌曰 目淨修廣如靑蓮하고 心淨已度諸禪定이라 久積淨業稱無量하사 導衆以寂故稽首니다 그때에 일체 대중이 부처님의 신력을 보고 처음 보는 미증유한 일이라고 찬탄하며 합장하고 부처님께 예배하며 존안을 우러러 보며 눈을 잠간도 떼지 않았다. 장자의 아들 보적이 곧 부처님 앞에서 게송을 설하였다.
눈은 길고 넓어 마치 푸른 연꽃 같고 마음은 텅 비어 모든 선정을 다 성취하였네. 오랫동안 청정한 업을 쌓아 한량이 없으시어 고요히 대중들을 인도하실세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유마경 법회에 맨 먼저 등장하는 장자의 아들 보적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을 찬탄하는 노래가 없을 수 없다. 더구나 부처님의 신통한 능력으로 보여준 것은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참으로 희유하고 미증유한 광경이었다. 먼저 부처님의 눈을 찬탄하였다. “길고 넓은 모습이 마치 푸른 연꽃과 같다.”라고 하였다. 관상학에도 안장유학(眼長有學)이라 하였다. 눈이 길면 학문이 있고 지혜가 있다는 뜻이다. 푸른 연꽃은 인도에도 흔치 않는 귀한 꽃이다. 다음으로는 텅 빈 마음을 찬탄하였다. 지극한 선정이 아니면 마음이 텅 빌 수 가 없다. 마음이 텅 비어야 모든 중생들의 마음을 다 담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오랫동안 청정한 업을 쌓아서 부처님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불교는 한마디로 좋은 업을 짓는 것을 배우는 종교다. 좋은 업이란 자신에게 좋고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일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복을 짓는다. 또는 공덕을 닦는다. 라고 한다. 부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위해서, 또는 남을 위해서 부디 공덕을 닦으라고 가르친다. 공덕을 닦는 일도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와 같은 복덕과 지혜를 몸소 보여줌으로서 대중들을 선업으로 인도한다. 부처님의 이와 같은 사실들을 잘 알게 되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고 존경심이 우러나리라.
旣見大聖以神變으로 普現十方無量土하며 其中諸佛演說法커늘 於是一切悉見聞이니다
큰 성인이 신통과 변화로 시방의 한량없는 국토를 널리 나타냄을 이미 다 보며 그 가운데 모든 부처님이 법을 연설하는데 여기에서 모든 것을 다 보고 듣습니다.
하나로 통일된 일산 속에 시방의 한량없는 국토가 다 나타난 것을 보며 부처님이 설법하시는 것까지 다 보고 듣는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 사물을 보고 소리를 듣고 어떤 문제를 생각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본연의 능력을 찬탄하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이렇게 글을 보고 읽고 찬탄하고 비판도 하고 환희심도 낼 줄 아는 이 본래의 능력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신통력이다. 이 사실과 이 능력을 제외하고 달리 무슨 신통변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있다면 그것은 마귀의 술법이리라. 法王法力超群生하사 常以法財施一切하며 能善分別諸法相하나 於第一義而不動이로다 已於諸法得自在일세 是故稽首此法王이로다
법왕의 법력은 온갖 중생들을 다 뛰어넘으시어 항상 법의 재물로써 일체 중생에게 보시하며 모든 법의 행상들을 능히 잘 분별하나 제일의에는 움직이지 않도다. 이미 모든 법에 자유 자재함을 얻었나니 그러므로 이러한 법왕에게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부처님이 다른 사람과 다르고 특별한 점은 세상사와 인생사에 대한 바르고 참된 이치를 깨달아 그것을 또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베풀고 보시하는 점이다. 인생에 대한 참되고 바른 이치, 즉 진리를 가르치고 진리를 보시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대시주자(大施主者)라고 불렀다. 온갖 법을 무수한 중생들의 수준과 근기에 맞추어 방편을 써가며 설명하더라도 제일의(第一義)에는 흔들리자 않는다고 하였다. 제일의란 제일의제, 진제, 승의제라고도 한다. 제일의의 진리와 열반, 진여, 실상, 중도 등의 진리를 이른다. 즉 부처님이 깨달으신 궁극적 경지를 잃지 않고 방편을 설한다는 뜻이다. 누구나 설법을 함에 있어서 불교의 궁극적 종지를 굳게 지키며 설법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만약 근기를 맞춘다고 하여 불교의 큰 종지를 잃어버리고 사람들의 수준에만 따라간다면 삿된 법을 설하게 되고 외도의 법을 설하게 되기 때문이다. 조심하고 삼가며 또 조심하고 삼가야 할 일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분이기 때문에 법의 왕이다. 머리 숙여 예배드리지 않을 수 없다.
인연인 까닭에 모든 법이 생기며
說法不有亦不無나 以因緣故諸法生하며 無我無造無受者나 善惡之業亦不亡이라
설법은 있지도 않고 또한 없지도 않으나 인연인 까닭에 모든 법이 생기며 나도 없고 지음도 없고 받는 자도 없으나 선과 악의 업은 또한 없지 않도다.
≪금강경≫에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이 있다. 나는 쉽게 설명하기를, “부처님의 재산은 두 가지인데 진리를 깨달은 것과 그 진리를 설한 것이다.” 그러나 ≪금강경≫에는 그 “깨달음을 얻음도 없고 그 깨달음을 설한 것도 없다.”고 하였다. 한 차원 달리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보적의 게송에도 부처님의 설법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인연으로 인하여 종종의 법이 생기고 인연으로 인하여 종종의 법이 소멸하기 때문이다. “나도 없고 지음도 없고 받는 자도 없으나 선과 악의 업은 또한 없지 않도다.”라고 하였는데 불교를 잘 못 이해하여 모든 것이 공무(空無)한 것으로만 오해할까 염려하여 “선과 악의 업은 또한 없지 않도다.”라고 강조하였다. 유형한 것이나 무형한 것이나 모두가 있음과 없음의 양면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중도(中道)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마군들을 항복받고
始在佛樹力降魔하고 得甘露滅覺道成하며 已無心意無受行하야 而悉摧伏諸外道로다
처음 보리수 아래서 마군들을 항복받고 감로의 열반을 얻고 깨달음을 이루고 나니 심의식과 수상행이 벌써 사라지고 모든 외도들까지 다 항복받았도다.
부처님께서 6년의 고행을 마치고 7일간 보리수나무 아래서 선정에 들어 마군을 항복 받고 큰 깨달음을 이루게 된 내용을 간단하게 밝힌 부분이다. ≪반야심경≫에는 깨달음의 내용을 공(空)으로 설명하고 인생문제의 해결도 공으로 설명하였다. 그래서 그 공에는 눈과 귀와 코와 혀 등등도 없고, 물질 소리 향기 맛 등등도 없고, 심의식과 수(受)상(想)행(行)식(識)도 없다고 하였다. 이곳 게송과 꼭 같다. 그것으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마군과 갈등과 시시비비 등의 문제들을 다 잠재울 수 있었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나는 없다.”라는 문제해결의 열쇠다. 자기문제 해결에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하여 자신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였다.
三轉法輪於大千하시니 其輪本來常淸淨이라 天人得道此爲證하니 三寶於是現世間이로다
대천세계에 법륜을 세 번 굴리시니 그 법륜은 본래 항상 청정함이라. 천신과 사람들이 도를 얻어 깨닫게 되니 삼보가 이로부터 세간에 나타남이라.
강설 ; 부처님은 위에서 설명한 대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세상에다 문제[苦, 煩惱]를 해결하는 법을 설하셨으며, 처음의 대상은 5비구였다. 설법하시는 부처님과 설하는 법의 내용과 설법을 듣는 제자들, 이렇게 해서 삼보가 비로소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처음에는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를 설하였는데 설법하는 방법은 세 가지 방향에서 설하였다. 그것을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세 번 굴린다하여 삼전법륜(三轉法輪)이라 한다. 시전(示轉), 권전(勸轉), 증전(證轉)이다. 시전이란, 범부들은 늘 고통 속에 산다는 것을 설명해 보이고[示], 성인들은 늘 행복과 즐거움을 누린다는 것을 설명해 보이는 것이다. 권전이란, 사람들에게 빨리 수행을 해서 고통을 없애고 즐거움을 얻으라고 권장[勸]하는 설법이다. 증전이란, 부처님께서 스스로 깨달음을 성취하여 모든 고통을 떠났으며 일체 낙을 누리고 있음을 증명[證]해 보이는 설법이다. 이것이 법을 설하는데 반드시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이다. 장자의 아들 보적은 부처님 설법의 이러한 과정들을 자세히 상기하면서 찬탄하고 예경하는 것이다.
以斯妙法濟群生하시니 一受不退常寂然이라 度老病死大醫王이여 當禮法海德無邊이로다
이 미묘한 법으로써 온갖 생명들을 제도하시니 한번 받아가지면 물러서지 않고 항상 적연함이라.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해결하시는 큰 의왕이시니 법의 바다 가없는 공덕에 마땅히 예경합니다.
강설 ; 부처님께 예경할 때 “지극한 마음으로 이 목숨 바쳐 귀의하고 받드옵니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깨달으신 법은 무상심심미묘법이며, 불가사의한 법이며, 최상의 깨달음의 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무수한 생명들을 교화하고 제도하기 때문이다. 그 미묘한 법을 한번 받아드리면 결코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인간에게서 가장 어려운 문제인 늙음의 문제와 병고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까지 해결하기 때문이다. 그 가르침은 바다처럼 넓다. 그로인한 임(任)의 공덕은 끝없이 넓기 때문이다. 이 어찌 이 목숨 다해 귀의하지 않으랴. 보적이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는 게송은 이 한 게송만으로도 만고에 빼어난다.
毁譽不動如須彌하야 於善不善等以慈로다 心行平等如虛空이라 孰聞人寶不敬承이리요
비방과 칭찬에 움직이지 않는 것이 수미산과 같고 선한 사람 악한 사람 평등하게 자비로써 대하시니 마음과 행동이 평등하여 허공과 같아라. 사람 중의 보배를 듣고 그 누가 공경하여 받들지 않으리오.
강설 ; 부처님은 만행만덕을 두루 갖추신 천하에서 제일가는 세존이시지만 놀랍게도 비방도 많이 들었고, 음해도 많이 당하셨다. 다 이유야 있었겠지만 어떤 이는 언덕에서 바위를 굴려 살해를 하려하기도 했었고, 사나운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부처님 앞에 풀어 놓기도 하였다. 어떤 여자는 거짓으로 아기를 밴 모습을 하고 와서는 부처님의 짓이라고 음해도 하였다. 외도들이 부처님께 귀의하자 그들의 스승들이 몰려와서 숱한 욕설과 비방을 하기도 하였다. 반대로 저 삼십삼천보다도 더 높이 칭찬을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에 대해서 마치 산중에 왕인 수미산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선한이든 악한이든 모두에게 한결같은 자비심으로 평등하게 대하였다. 이처럼 그 마음 씀씀이가 허공과 같았다. 이러한 사실을 보고 들어 안다면 그 누가 존경하여 받들지 않겠는가.
今奉世尊此微蓋하니 於中現我三千界와 諸天龍神所居宮과 乾闥婆等及夜叉하며
지금 이 작은 일산으로 세존께 받들어 올리나니 그 가운데 우리가 사는 삼천대천세계도 나타나며 온갖 하늘과 용과 신들이 사는 궁전도 나타나며 건달바와 야차도 나타납니다.
강설 ; 옛-말에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는다고 하였다. 또 중국 춘추 시대 초나라 종자기(鍾子期)라는 사람은 당시 거문고의 명인이었던 백아(伯牙)의 친구로서, 그의 거문고 소리를 잘 알아들었다고 한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자기의 음악을 이해하여 주는 이가 없음을 한탄하여 거문고 줄을 끊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요즘 우리나라의 불자들은 부처님을 공경하여 예배를 드리는데 백배 천배 만 배 심지어 백만 배까지 절을 하는 사람도 있고, 혹은 돈을 올리고 쌀을 올리고 과일, 떡, 꽃, 갖가지 음식 등등을 올리면서 부처님께 공양을 드린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경험과 지식을 동원하여 알고 있는 대로 공경을 표현한다. 그런데 보적은 동료들이 하나씩 들고 온 5백 개의 일산이 하나로 만들어진 큰 일산 하나를 부처님께 공양 올렸다. ≪유마경≫을 설하는 부처님의 뜻은 우주만유가 궁극적으로 둘이 아닌 절대평등의 세계임을 이해시키려는 데 있다. 거기에서 또한 동체대비(同體大悲)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 뜻을 잘 알고 있는 보적은 그 의미를 하나의 일산으로 상징하여 부처님께 공양 올림으로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이 되었다. 이보다 더 부처님의 마음에 드는 공양은 있을 수 없다. 뜻에 맞는 공양, 그가 참으로 좋아할 공양, 그분의 속 깊은 마음을 꿰뚫어 본 공양이야말로 진정한 공양이며 참다운 불공이리라.
悉見世間諸所有는 十力哀現是化變이라 衆覩希有皆歎佛일세 今我稽首三界尊하나이다
세간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것은 열 가지 힘 가지신 부처님이 연민으로 이러한 변화를 나타낸 것입니다. 대중들은 희유함을 보고 모두 부처님을 찬탄하니 지금 저는 삼계의 어른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강설 ; 부처님의 지혜와 덕을 표현하는 데는 여러 가지가 있다. 여기서는 열 가지 힘[十力]을 가지신 분이라고 하였다.
그 열 가지 힘이란,
①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 도리와 이치가 옳고 그른 것을 다 아는 지혜의 힘, ② 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 일체중생의 삼세 업보를 다 아는 지혜의 힘. ③ 정려해탈등지등지지력(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 여러 가지 선정과 해탈과 삼매를 다 아는 지혜의 힘. ④ 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 중생들의 근기가 높고 낮음을 다 아는 지혜의 힘. ⑤ 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 중생의 여러 가지 지해(知解)를 아는 지혜의 힘. ⑥ 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 중생들의 여러 가지 경계를 다 아는 지혜의 힘. ⑦ 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 여러 가지 행업(行業)으로 어디에 가서 나게 되는 것을 다 아는 지혜의 힘. ⑧ 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 숙명통으로 중생의 가지가지 숙명을 다 아는 지혜의 힘. ⑨ 사생지력(死生智力), 천안통으로 중생이 죽어서 태어날 때와 선한 곳과 악한 곳을 걸림 없이 다 아는 지혜의 힘. ⑩ 누진지력(漏盡智力), 온갖 번뇌와 습기를 영원히 끊어 없애는 지혜의 힘이다.
이러한 지혜의 힘을 가지신 부처님이 중생들을 연민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와 같은 변화의 모습을 나타내 보였다. 불교는 자비다. 온 세계가 나와 한 몸[世界一蓋]이라는 유마경의 큰 뜻이라야 깊은 자비심이 나오기 때문이다.
大聖法王衆所歸라 淨心觀佛靡不欣하며 各見世尊在其前하나니 斯則神力不共法이로다
큰 성인 법의 왕은 중생들의 귀의할 바라 청정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뵙고 모두 기뻐하도다. 각자가 세존을 뵙되 눈앞에 있는듯하니 이것은 신령한 힘이며 특별한 법이로다.
강설 ; 부처님은 분명히 성인 중에 성인이시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 중에 마음을 지닌 사람은 만물 중에 가장 위대하다. 부처님이라고 부르든 사람이라고 부르든 신이라고 부르든 그가 또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텅 빈 청정한 마음으로 그 진실을 관찰해보면 참으로 신기하기 이를 데 없다. 참으로 놀랍고 불가사의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늘 인불(人佛)이라 하고 인신(人神)이라 하고 인천(人天)이라 한다. 부처님이라 하든 신이라 하든 천이라 하던 그것이 어디 멀리 있는 것이겠는가. 바로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것이며, 내 눈으로 보고 있는 이 능력 이 사실인 것을. 그래서 게송은 “이것은 신령한 힘이며 특별한 법이로다.”라고 하였다.
佛以一音演說法하시니 衆生隨類各得解하야 皆謂世尊同其語하나니 斯則神力不共法이로다
부처님은 한 가지 음성으로 법을 연설하시나 중생들은 종류 따라 각각 알아듣고는 모두들 세존의 말씀이 같다고 하나니 이것은 신령한 힘이며 특별한 법이로다.
강설 ; 부처님은 한 가지 음성으로 설법하시지만 중생들은 사용하는 언어가 여러 가지다. 여러 가지의 언어를 사용하는 온갖 중생들이지만 부처님의 말씀을 다 자기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이해한다. 그리고는 부처님이 자신들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신다고 말한다. 참으로 “신령한 힘이며 특별한 법이다.”
佛以一音演說法커늘 衆生各各隨所解하야 普得受行獲其利하나니 斯則神力不共法이로다
부처님은 한 가지 음성으로 법을 연설하시나 중생들은 제각각 종류 따라 알아듣고는 두루두루 받아 행하여 이익을 얻나니 이것은 신령한 힘이며 특별한 법이로다.
강설 ; 부처님은 한 가지 법을 설하시지만 중생들은 각각 이해하는 바가 다르다. 사무를 보는 사람은 사무를 보는 일과 연관시켜서 이해하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일로 연관시켜서 이해하고, 공업을 하는 사람들은 공업을 하는 것과 연관시켜서 이해한다. 상업을 하는 사람들은 상업을 하는 일과 관계를 지어서 이해한다. 사용자는 사용자대로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다 그들 나름대로 받아드리지만 모두가 이익을 얻는 것이 불법이다. 필자도 법문을 하고 나면 그 법문은 꼭 자신을 위해서 한 말씀 같다고 토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참으로 “신령한 힘이며 특별한 법이다.”
佛以一音演說法하시니或有恐畏或歡喜하며 或生厭離或斷疑하나니 斯則神力不共法이로다
부처님은 한 가지 음성으로 법을 연설하시나 어떤 이는 두려워하고 어떤 이는 기뻐하며 혹은 생사를 싫어하여 떠날 생각내고 혹은 의혹을 끊나니 이것은 신령한 힘이며 특별한 법이로다.
강설 ; 부처님은 한 가지 법문을 하시지만 그것을 듣는 중생들은 여러 가지다. 혹자는 설법을 듣고 그 내용을 지키지 못하여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고, 혹자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생각하여 환희(歡喜)심에 넘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진정으로 속된 세상사를 싫어해서 떠날 것을 결심하기도 한다. 석가세존의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출가수행을 결정한 사례들은 참으로 많았다. 5비구 다음에 여섯 번째로 출가한 야사라는 청년이 그와 같은 예다. 또 출가한 아들을 찾으려 왔던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는 평생 부처님께 귀의하겠다고 서원을 세운 사람들이다. 야사의 부모가 귀의하여 부처님 앞에 맹서한 게송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위대하셔라 세존이시여! 위대하셔라 부처님이시여!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길 잃은 사람에게 길을 가리켜 주시며, 어둠속에서는 등불이 되어주시고 눈이 있는 사람에게는 와서 보라하시며, 갖가지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시는 부처님! 이제 저의 부부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스님들께 귀의하겠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희 부부를 재가 불자로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불, 법, 승, 삼보님께 귀의하겠습니다.
출가한 아들을 찾으려 왔다가 이와 같은 신심을 일으켜 첫 재가신자가 된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었다. 진실로-진실로 “신령한 힘이며 특별한 법이라.”고 찬탄을 금할 수 없는 일이다.
稽首十力大精進하며
큰 정진으로 열 가지 힘을 얻으신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강설 ; 부처님의 위대하심을 설명하는 데는 여러 가지가 있다. 특히 이 유마경에는 열 가지 지혜의 힘[十力]을 많이 강조하였다. 앞에서 보살들의 덕행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이미 나왔지만 좀 더 익숙하게 공부하기 위해서 다시 설명한다.
①,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 도리와 이치가 옳고 그른 것을 다 아는 지혜의 힘, ②, 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 일체중생의 삼세 업보를 다 아는 지혜의 힘. ③, 정려해탈등지등지지력(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 여러 가지 선정과 해탈과 삼매를 다 아는 지혜의 힘. ④, 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 중생들의 근기가 높고 낮음을 다 아는 지혜의 힘. ⑤, 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 중생의 여러 가지 지식과 이해를 다 아는 지혜의 힘. ⑥, 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 중생들의 여러 가지 경계를 다 아는 지혜의 힘. ⑦, 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 중생들의 여러 가지 행업(行業)으로 어디에 가서 나게 되는 것을 다 아는 지혜의 힘. ⑧, 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 숙명통으로 중생의 가지가지 숙명을 다 아는 지혜의 힘. ⑨, 사생지력(死生智力), 천안통으로 중생이 죽어서 태어날 때와 선한 곳과 악한 곳을 걸림 없이 다 아는 지혜의 힘. ⑩, 누진지력(漏盡智力), 온갖 번뇌와 습기를 영원히 끊어 없애는 지혜의 힘.
부처님을 찬탄하는 보적의 게송이 여기까지 이르러서는 머리를 숙여 절을 하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쳐서 넘쳐나는 심정을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한 가지씩 찬탄할 때마다 곧바로 “머리를 숙여 예배합니다.”라고 하였다.
稽首已得無所畏하며
이미 두려울 것 없음을 얻은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강설 ; 부처님을 찬탄하는 데는 네 가지 두려움 없음을 빼 놓을 수 없다. 앞에서 보살들의 덕행을 이야기 하는 데서 이미 나왔다. 수행은 반복이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것도 반복함으로 우리들의 의식 속에 깊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옛사람의 말에 신야자 불과습자지문(神也者 不過習者之門)이라 하였다. 무엇이든 신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오로지 반복해서 익숙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세상의 많은 달인들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다. 무수히 반복하고 또 반복하여 이뤄진 능력이다.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란 없다.
부처님이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어떤 악한 사람을 만나거나 설법을 하더라도 전혀 의심하거나 두려울 것 없이 당당하다는 뜻이다. 즉 사무소외(四無所畏)다.
①, 정등각무외(正等覺無畏), 깨달아 정각에 오르는데 두려움이 없다. ②, 누영진무외(漏永盡無畏), 온갖 번뇌를 끊어 두려움 없다. ③, 설장법무외(說障法無畏), 설법하는데 비난을 받는 장애가 있어도 두려움이 없다. ④, 설출도무외(說出道無畏), 고통을 끊어 해탈에 이르는 사제와 팔정도를 설하는데 장애가 있어도 두려움이 없다.
천하의 세존이 무엇엔들 두려움이 있겠는가. 부처님은 당연히 온갖 것에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부처님을 찬탄하면서 반드시 등장하는 내용이다.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를 하는 이유가 충분하고도 남는다.
稽首住於不共法하며
특별한 법[不共法]에 머무신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강설 ; 부처님의 위대하심을 특별한 법, 즉 열여덟 가지 특별한 법[十八不共法]으로도 표현한다. 이 역시 보살들의 덕행을 나타내는 내용에서 나온 것이다. 부처님의 열여덟 가지 공덕법이라고도 한다.
①, 신무실(身無失), 몸이 실수가 없고. ②, 구무실(口無失), 입이 실수가 없고. ③, 의무실(意無失), 생각이 실수가 없고. ④, 무이상(無異想), 두 가지 생각이 없고. ⑤, 무부정심(無不定心), 선정을 여읜 마음이 없고. ⑥, 무부지이사(無不知已捨), 알고서 버리지 않는 것이 없고. ⑦, 욕무감(欲無減), 하고자 하는 욕망이 감함이 없고. ⑧, 정진무감(精進無減), 정진이 감함이 없고. ⑨, 염무감(念無減), 억념함이 감함이 없고. ⑩, 혜무감(慧無減), 지혜가 감함이 없고. ⑪, 해탈무감(解脫無減), 해탈이 감함이 없고. ⑫, 해탈지견무감(解脫知見無減), 해탈지견이 감함이 없고. ⑬, 일체신업수지혜행(一切身業隨智慧行), 온갖 몸으로 하는 일이 지혜를 따르고. ⑭, 일체구업수지혜행(一切口業隨智慧行), 온갖 말로 하는 일이 지혜를 따르고. ⑮, 일체의업수지혜행(一切意業隨智慧行), 온갖 뜻으로 하는 일이 지혜를 따르고. ⑯, 지혜지견과거세무애무장(智慧知見過去世無碍無障), 지혜로 지나간 세상일을 아는 것이 걸림이 없고. ⑰, 지혜지견미래세무애무장(智慧知見未來世無碍無障), 지혜로 이 다음 세상일을 아는 것이 걸림이 없고. ⑱, 지혜지견현재세무애무장(智慧知見現在世無碍無障), 지혜로 지금 세상일을 아는 것이 걸림이 없는 것들이다.
부처님은 이러한 점이 뛰어나시기 때문에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稽首一切大尊師하며
일체대중들에게 큰 스승이신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강설 ;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게송은 “천상천하무여불 시방세계역무비 세간소유아진견 일체무유여불자(天上天下無如佛 十方世界亦無比 世間所有我盡見 一切無有如佛者)라는 글인데, 즉 천상과 천하에 부처님 같은 분 없고 시방세계에도 또한 비교할 분 없네. 세간에 있는 모든 분들을 내가 다 보았지만 그 누구도 부처님과 같은 분 없어라.”라는 뜻이다. 대웅전의 주련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어 부처님의 존귀함을 표현한다. 또 “삼계의 대도사요 사생의 자비하신 어버이다.”라고도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머리를 숙여 예배합니다.”라고 한다.
稽首能斷諸結縛하며
능히 모든 결박을 끊은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강설 ; 불교의 이상은 해탈이다. 모든 속박, 모든 구속, 모든 결박으로부터의 벗어남이다. 부처님의 가장 부처님다운 점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탈에 있다. 부처님은 왕후장상이라는 벼슬 따위로부터 일찍이 벗어난 분이다. 부귀영화로부터 멀리 떠난 분이다. 남의 비방과 칭찬으로부터 해탈한 분이다. 온갖 번뇌와 생사와 열반에까지 전혀 흔들림이 없는 분이다. 이와 같은 불교의 진정한 이상을 다 이루신 분이기 때문에 진실로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稽首已到於彼岸하며
이미 저 언덕에 이르신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강설 ; 피안이란 저 언덕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세계인데 미혹의 이 언덕에 대하여 깨달음의 저쪽 언덕을 뜻한다. 이 언덕이 병고가 많고, 문제가 많고, 장애가 많은 세계라면 저 언덕은 병고를 이미 병고로 보지 않고 훌륭한 가르침으로, 또는 새로운 눈뜸의 방편으로 완전히 활용하여 전화위복으로 만드는 일이다. 온갖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난다면 그 문제들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이 아니고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하여 보다 다른 차원의 길을 가는 일이다. 생사라는 장애 속에서 생사가 없음을 보는 안목이다. 번뇌라는 장애 속에서 자유를 누리는 일이다. 손해를 보되 보다 다른 차원의 이익을 얻는 일이다. 정리하면 인생의 밝은 낮과 같은 시간보다 어두운 밤과 같은 시간을 훨씬 더 잘 활용하는 안목이다. 세존은 이미 이러한 경지를 터득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稽首能度諸世間하며
능히 모든 세간을 제도하신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강설 ;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뜻은 세상의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다. 제도란 무엇인가? 인생과 세상에 대해서 삿되게 보고 그릇되게 생각하는 것들을 모두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부처님이 터득하신 지혜를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게 해주고, 그 속에 들어가게 해 주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부처님의 지혜란 무엇인가? 무지몽매하고 탐진치(貪瞋痴)와 온갖 번뇌로 뒤범벅이 되어있는 듯이 보이는 사람을 위대한 부처님으로 보는 견해이다. 곧 사람이 그대로 부처님임을 아는 지혜다. 이 사실을 모르면 제도하였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세상을 제도하였다는 것은 곧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부처로 살아가는 경지이다. 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가? 별별 모습의 인간들을 그대로 부처님으로 승격시켰으니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稽首永離生死道하사오니
영원히 생사의 길을 떠난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강설 ; 불교수행에는 여러 가지 목표가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생사를 벗어나는 일이다. 부처님이 출가를 하신 동기도 늙고 병들고 죽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불교를 통해서 인간사 일체 문제를 다 해결하였다 하더라도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면 불교궁극의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히 생사의 길을 떠난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라고 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불자들이 잘 하고 있는 절, 기도에 열중하는 사람들이나, 저 어느 나라 사람들처럼 수 백리를 가면서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이나, 천배 만 배 온 몸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위와 같은 사실들에 대해서 우러나는 존경심을 감당할 수 없어서 절을 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을 만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서 스스로 “내가 이제 쉴 곳을 얻었구나. 내가 이제 진정으로 이 목숨 바쳐 귀의 할 데가 생겼구나. 내가 이제 죽을 곳을 얻었구나.” 라는 심정으로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에 머리 숙여 예배하여야 하리라.
悉知衆生來去相하고 善於諸法得解脫하며
중생들의 가고 오는 모습을 다 알고 모든 법에서 해탈을 잘 얻었으며
강설 ; 부처님의 능력과 그 공덕과 지혜의 힘은 앞에서도 몇 번 밝혔다. 여기에서는 특히 중생들의 가고 오고하는 모습을 다 아는 것과 모든 경계와 모든 일에 대해서 시원하게 벗어난 해탈의 능력을 말하였다. 중생들을 교화하려면 중생들이 무슨 업을 지어서 그 업에 따라 어디를 흘러 다니는지, 지금의 생각은 무엇에 이끌리고 있는지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아야 그것에 맞추어 교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교의 교화란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해탈에 있다. 다른 사람을 해탈하도록 가르치려면 자신이 먼저 해탈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길이다. 이 또한 머리 숙여 예배해야할 부처님의 위대한 점이다.
不着世間如蓮華하고 常善入於空寂行하며
세간에 집착하지 않음이 마치 연꽃과 같고 항상 공적한 행에 잘 들어갔으며
강설 ; 부처님을 표현하고 불교를 표현하고 불교적 삶을 표현하는 가장 간단하고 명료한 비유가 있다. 그것은 연꽃이다. 연꽃을 불교의 꽃,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라고 한다. 연꽃을 왜 불교의 꽃이라고 하는가? 연꽃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일반적인 뜻은 순결, 군자, 신성, 청정이지만 불교에는 사연도 많고 의미도 깊다.
부처님께서 룸비니동산에서 처음 태어나시던 날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신 후, 오른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오당안지(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吾當安之)”라고 외치하실 때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올랐다고 한다. 또 부처님이 어느 날 영산회상에서 수많은 청중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을 때 부처님은 말없이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대중들에게 보이셨다. 이때 다른 사람은 모두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하였지만, 오직 가섭존자만이 부처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미소로써 답하였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염화미소 이심전심 교외별전 열반묘심(拈花微笑 以心傳心 敎外別傳 涅槃妙心)의 도리다.
그리고 사찰이든 부처님이 앉아계시는 좌대와 탁자, 불탑과 석등, 주춧돌과 추녀의 서까래, 범종과 단청이며 부처님오신 날을 봉축하는 연등 행시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연꽃이다. 인도에서 연꽃의 개념은 만물을 탄생시키는 창조력과 생명력을 지니며, 연꽃이 맑고 깨끗하며 여느 꽃과 달리 진흙 속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꽃잎이 크고 많으며 아름답기 때문에 가장 보배로운 꽃으로 간주되고, 꽃이 피는 동시에 열매를 맺기 때문에 부처님이 설하신 인과(因果)의 이치와 부처님의 고결한 삶은 반드시 시시비비가 뒤끓는 오탁악세에서 꽃피운다는 의미와 잘 맞아 불상의 받침대는 반드시 연꽃으로 표현한다.
연꽃의 특징과 불교적 의미를 살펴보면
첫째, 연꽃은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연꽃은 깨끗한 물에서는 피지 않는다. 더럽고 오염된 물에서만 피어나지만, 그 더러운 환경에 조금도 물들지 않고 슬기롭고 소담하게 환경을 극복하고 아름답게 피는 꽃이다. 이는 곧 부처님이 궁극적 진리를 설하신 내용, 즉 탐진치(貪瞋痴) 삼독과 팔만사천의 번뇌 망상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대로가 고귀한 부처님이라는 사실과 같다. 흙투성이의 못생긴 연근이 천하에 둘도 없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는 사실로서 그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둘째, 연꽃은 화과동시(花果同時)이다. 연꽃은 꽃이 핌과 동시에 열매가 그 속에 자리를 잡는다. 이것을 “연밥[蓮實]”이라 하는데, 꽃은 열매를 맺는 수단이며 열매의 원인인 것이다. 이 꽃과 열매의 관계를 원인[因]과 결과[果]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인과(因果)의 진리는 곧 불교교리의 근본이자, 부처님 가르침의 요체이다. 또한 불교 궁극적 가르침에 연관시켜 보면 중생은 원인이고 부처는 결과라고 할 때, 실은 부처인 결과는 원인인 중생 속에 이미 자리하고 있어서 그것을 나눌 수 없는 관계다. 즉 부처가 중생이고 중생이 곧 부처인 것이다. 화엄경의 말씀과 같이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차별이 없는 같은 것이다.”라는 이치를 연꽃이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셋째, 연꽃의 몽우리는 합장한 모습과 똑 같다. 우리들 얼굴이 피워내는 웃음의 꽃이나, 두 손을 고이 모아 가슴에서 피어나는 연꽃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연꽃이다. 합장이 피워내는 가슴의 연꽃은 부처님과 중생이 하나가 되고, 너와 내가 하나가 되며, 이상과 현실이 하나가 될 때 피어나는 가장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이다. 얼굴에서 꽃을 피워내고, 가슴에서 희망의 꽃을 피워낼 때 우리도 관세음보살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연꽃 같은 마음으로 부처님 앞에 합장하고 설 때 우리도 곧 부처임을 증명해 보인다. 이와 같이 우리도 본래로 부처임을 알아서 연꽃처럼 우아하고 청정한 삶으로 거듭나게 되니 이것이 부처님을 상징하고 불교를 상징하고 불교적 삶을 상징하는 꽃이 된 이유이다. 연꽃 한 송이로 불교의 궁극적 진리를 다 표현할 수 있으니 참으로 놀랍고 신기하다.
이 경전의 본문에서는 부처님이 “세간에 있으나 세간에 집착하지 않음이 마치 연꽃과 같다.”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세간에 집착하지 않으려면 항상 마음을 텅 비운 공적한 행에 잘 들어가 있어야 그것이 가능하다. 불착세간여연화(不着世間如蓮華)도 유마경의 명구이다.
참고로 2010년 7월7일 신문과 각 TV 뉴스에 의하면, “700년 만에 핀 연꽃”이라는 제하에 이날 오전 경남 함안군 함안박물관 수족관에 심어진 아라가야시대의 홍연이 7개의 꽃대와 함께 활짝 꽃을 피워 눈길을 끌고 있다는 것이다. 금년 7월 7일 현재 7개의 꽃대가 올라왔는데 그중 두 송이가 분홍색 꽃잎을 활짝 열었다는 소식이다. 당초에 백연이기를 기대하고 옛 지명의 이름을 따 “아라백연”이라 명명 했지만 700년이란 긴 시공을 뛰어넘어 피어난 이 홍연은 요새 홍련과는 좀 다른 꽃잎수가 적고, 길이가 다소 긴 아름답고 선명한 분홍색의 꽃을 피웠기에 “아라홍연”이라 고쳐 명명하는 한편 증식을 통해 “아라홍연”을 주제로 한 테마공원을 조성하는 등 함안군의 명물로 가꿔 나갈 계획이라는 내용이었다. 연꽃의 신비함을 또 한 번 느끼게 하는 기적이었다.
達諸法相無罣碍이시니 稽首如空無所依니다
모든 법의 행상을 통달하여 걸림이 없으며 허공과 같이 의지함이 없으신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강설 ; 부처님이 부처님 된 점은 첫째 모든 법을 통달한 것에 있다. 그리고 통달한 모든 법을 중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법의 이치와 행상들을 잘 정리하고 체계를 세우는 일이다. 설사 법을 잘 통달하였더라도 체계를 세우지 못하면 그것을 전달하는데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법이란 모든 존재와 그 존재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또한 모든 존재들의 현상뿐만 아니라 내면의 실상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투철하게 깨달아서 중생들에게 전달하는 행상, 즉 교법까지 모두 법이라 한다. 그러면서 한편 부처님은 자신이 저 허공과도 같다고 한다. 우리들 의식 속에는 부처님이 큰 산처럼 자리하고 있지만 스스로는 텅 빈 허공과 같아서 의지함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라고 하였다.
여기까지가 장자의 아들 보적이 부처님을 찬탄한 노래의 끝이다. 게송이 처음에는 부처님의 공덕만 열거하였다. 그 공덕의 내용을 들으면서 신심이 우러나는 즈음에는 머리를 숙여 예배를 한다. 신심이 더욱 고조되면 예배를 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나중에는 게송 하나하나 마다 다 예배를 한다. 그리고 게송이 끝날 즈음에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어 몇 가지 공덕을 더 노래하고 나서 절을 한번 하면서 마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시를 읽거나 소설을 읽을 때도 내용에 따라 읽는 호흡과 속도가 있다. 그 속도의 흐름을 잘 이해하여 그것에 맞추어서 읽으면 그 맛과 향기와 의미와 분위기를 더 잘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이 불교의 경전도 그와 같다. 특히 이 유마경은 더욱 그렇다. 유마거사의 설법은 유창하다. 화려하고 현란하다. 눈이 부시고 귀가 부신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저 나이아가라의 폭포수와 같다. 이러한 점을 음미하면서 경전을 읽으면 그 환희가 몇 배나 더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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