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예수님의 산상설교, 즉 산상수훈 중에 팔복, 마지막 여덟 번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태복음 5:10)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본문을 “복되도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여,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의”라는 말은 헬라어 “디카이오쉬네”입니다. 히브리어 “쩨대크”입니다. 이미 우리는 팔복 중에 네 번째를 설교할 때“의”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드렸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의”는 언약 속에서 하나님 공동체의 번영과 평화를 증진하게 시키려는 일련의 생각과 행동을 의미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핍박받는다”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0절의 “의를 위하여(에네켄 디카이오쉬네)”와 12절의 “나로 말미암아(에네켄 에무)”는 평행을 이룹니다. 따라서 의 때문에 받는 핍박은 예수님 때문에 받는 핍박입니다. 결국 핍박을 받는 데에 있어서 “의를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예수님을 위하여”는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왜 “하나님의 나라 위하여”가 “예수님을 위하여”가 됩니까? 바울서신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10회 등장합니다. 많이 등장할 것 같은데, 이상할 정도입니다. 바울서신을 보면 제일 많이 등장하는 표현이 “예수님 안에”(헬라어: 엔 크리스토)인데, 약 150회입니다.
바울 사도의 머리 안에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과 “예수님 안에”라는 표현이 전혀 다른 말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 안에 있습니까?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된 엄청난 일, 즉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하심으로 새 창조에 대한 것이 이루어진 것을 믿을 때 예수님 안에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울의 복음 핵심입니다.
요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의 고별설교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즉,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감람산 가셔서 대제사장 기도를 드리기 직전에, 그 어간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느냐면, 때가 이르면 유대인들로 인해서 제자들이 회당에서 쫓겨나고 핍박받는 일이 일어날 텐데, 그때 유대인들이 이것이 “하나님을 위한 섬김, 즉 서비스의 일이다”라고 말하는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핍박, 고난받는 일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너희보다 나를 먼저 핍박했기 때문이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 자라면 사랑했을 텐데,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이니 이상히 생각하지 말아라. 결국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을 핍박하는 것은 이상한 일도, 잘못된 일도 아니다. 당연한 일이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는 자들”(헬라어: 호이 데디오그메노이)는 분사, 완료 수동태로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핍박이 이미 왔고 현재도 겪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은 자들에 의해 받는 핍박을 암시합니다. “핍박을 받는 자들”은 복수로 표현합니다. 핍박의 상황이 일반화되어서 많은 사람이 박해 가운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목마름, 갈급함이 있어서,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핍박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당연합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있다는 강력한 반증입니다.
베드로전서 3:14절을 보면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을 보면 의인의 고난은 주요주제입니다(역대하 34:16, 열왕기상 19:10~14, 느헤미야 9:26, 예레미야 2:30, 시편 7편, 31:15, 69:26, 109:16). 이사야 51:7절을 보면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내게 듣고 그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들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유대 문헌을 보면 의인들이 핍박받게 될 것과 고난받는 의인을 격려하는 본문들이 나옵니다.
그러면 본문에서“핍박”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11절을 보면 “욕하고 박해하고”에서 잘 드러납니다. 핍박은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입니다. 결국 핍박은 폭력의 모든 언어로 인한 고통과 고난을 암시합니다.
그러면 왜 핍박받습니까? 12절을 보면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라고 말씀합니다. 이 선지자들은 구약성경의 여러 선지자를 암시합니다. 이 선지자들이 박해받았음을 소개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선언하는 일이 그 임무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핍박이 있었다는 일은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오늘날 왜 핍박이 없을까요? 복음 사역이 왕성하게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 사역, 즉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을 열심히 감당하는 교회에는 핍박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현재 이슬람권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일찍 복음이 들어갔고, 교회들이 세워진 나라들에서 빈번하게 듣는 소식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복음을 왕성하게 전하는 교회들로부터 핍박받는다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방해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리고 있습니다.
팔복은 주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분이 살아냈던 동일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말씀합니다. 그 가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이 변화들은 세상에서 환영받거나 칭찬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은 도리어 이런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가치로 변화되기를 원하면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그리고 박해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당연합니다. 이 팔복은, “의를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삶은 반드시 우리가 추구하고 살아내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라고 축복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