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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의 <향수>는 번안 작품이다?
창조적 모방을 위하여
- 정지용의 [鄕愁]를 중심으로
Ⅰ. 모방과 표절
예술 행위 혹은 예술 작품의 표절시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저질시비가 종종 있는 대중가요로부터 소위 국전의 수상작이라는 고급 예술작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심심찮게 이 표절시비를 보아 왔으며, 이러한 현상은 문학작품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이 얼마 후 외국 작가의 작품을 모방한 것으로 판명이 된다든지, 베스트셀러 대열에 낀 어느 소설이 국내 몇몇 작가의 작품을 조사 하나 틀리지 않게 짜집기한 것으로 독자에 의해 고발된다든지 하는 것은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근년의 일이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일은 모방과 표절은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방은 말 그대로 모방이다. 남의 것을 본떠서 하는 행위이다. 즉 남의 것을 이용하되 결과는 그것과 똑같지 않다는 것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격언처럼, 모방은 또 다른 창조를 전제로 해야 한다. 모방이 이러한 창조로 나아가지 못하고 단순한 모방에 그칠 때, 우리는 그것을 아류라고 부르며 폄하하게 됨은 물론 나아가 표절이라고도 한다.
표절은 글자 그대로 남의 것을 허락없이 베끼는 행위이다. 근래에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어색한 사조 아래 남의 것을 그대로 베끼는 행위가 모든 예술 작품에 성행하다시피 하고 있으나, 그러한 행위를 통해 또 다른 예술적 창조를 하지 못하면 그것은 단순한 베끼기에 불과할 것이며, 이는 바로 무슨무슨 사조라는 그럴싸한 이름 아래 숨겨진 표절에 해당하는 것이다.
모방이든 표절이든 예술가에게는 특히 경계해야 할 일이다. 남의 영감을 이용하여 나의 작품을 완성하겠다는 것은 결국 남의 피와 땀을 거저 먹겠다는 도둑 심보에 다름 아니다. 이는 법의 문제보다 양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남의 것을 모방 혹은 표절하여 또 다른 예술적 창조를 이루었는지의 여부를 가리는 것은 비평가나 독자의 몫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방이나 표절을 한 당사자가 더욱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예술가의 예술행위는 모방이나 표절에서 시작한다는 데에 있다. 모든 예술행위, 예술작품이 자연을 모방한 것이라는 문학에서의 '모방론'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천재가 아닌 이상, 공자가 이른 대로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가 아닌 이상 예술가들의 학습기 혹은 습작기 작품은 앞 선 예술작품을 모방하거나 표절하면서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그가 문학 소년 혹은 문학 소녀였을 시절에, 소월이나 윤동주, 혹은 만해나 미당의 여러 시에서 따온 구절들을 적당히 배열해 놓고 시를 썼다는 쾌감에 젖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방과 표절을 통한 학습기와 습작기를 거치면서 예술가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찾게 되고, 그 목소리가 뚜렷하면 뚜렷할수록 그는 개성있는 예술가로 평가받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술행위에서 모방과 표절은 있을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모방이나 표절이어서는 참다운 예술행위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의 모방과 표절은, 그것을 빌어 또 다른 예술적 창조를 이루어낼 때에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창조적인 모방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 이제 문제는 어떻게 모방하고 표절을 하여 예술적인 창조로까지 나아가느냐에 있다. 이러한 물음에 적절한 답을 하기는 쉽지 않다. 이에 정지용의 [향수]와 이 작품이 모방한 것으로 짐작되는 트럼블 스티크니의 [추억]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답을 대신하려 한다. 먼저 트럼블 스티크니의 생애와 그의 [추억]이란 작품을 소개하고, 이어서 정지용의 생애와 [향수]를 제시한 다음, 두 작품의 비교 분석을 통해 창조적 모방의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하고자 한다.
Ⅱ. 트럼블 스티크니와 [추억]
미국의 시인 트럼블 스티크니(Joseph Trumbull Stickney)는 1874년 6월 20일 제네바에서 태어나 다섯 살까지 스위스와 이탈리아에서 살다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왔다. 그의 아버지(Austin Stickney)는 트리니티 대학의 라틴학과장이었고, 어머니(Harriet Champion Stickney)는 코네티컷 주지사의 직계 후손이었다. 그의 부모가 오랜 동안 주로 외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클리브돈과 뉴욕에서의 1,2년을 제외하면, 스티크니는 어린 시절을 주로 유럽에서 보냈다. 게다가 하바드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의 유일한 선생이었다.
1895년 문학사학위를 받은 스티크니는 곧 프랑스로 가 소르본느 대학에서 7년 동안 희랍 문학과 산스크리트 문학을 공부했으며, 1903년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그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은 후 3개월 간 그리스에 있다가 하바드 대학 희랍문학과의 강사로 돌아왔는데, 이때 이미 그는 한 권의 시집을 출간({Dramatic Verse} 1902년)했으며, 또 계속적으로 시작을 하는 한편 그리스의 비극시인인 이스킬러스(Aeschvlus)의 시를 번역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티크니는 하바드 대학의 강사이자 결혼을 앞 둔, 온 세상이 그의 앞에 활짝 열려있던 30세의 나이에 아깝게도 뇌종양으로 죽고 만다. 이때가 1904년 10월 11일이었다.
그가 죽은 이듬 해인 1905년 그의 친구들이 스티크니가 생전에 출간한 시집에 그의 유작들을 미완성인 채로 묶어 {트럼블 스티크니의 시들}({The Poems do Trumbull Stickney})이란 제목으로 다시 출간했는데, 이것이 그가 남긴 작품 전부이다. 흔히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요절한 시인들에게 올바른 평가가 아닌 잘못된 동정을 보내는 경향이 있으나, 스티크니의 경우에는 당시 빈틈없는 비평가로 알려진 브룩스(Van Wyck Brooks)나 윌슨(Edmund Wilson)으로부터도 '약속의 시인이자 실행의 시인'이라고 칭송될 정도로 찬사를 받았다.
친지들의 회고에 의하면 스티크니는 키가 크고 말랐으며 이름다운 음성을 소유한 우아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부끄러움을 잘 타고 친구들 간에는 인정 많은 사람으로, 자연에 대한 우울함은 있었으나 유모어로 넘친, 청년 시인의 한 본보기였다고 한다. 반면 그는 진정한 학자이자 음악가로서, 그의 바이올린 솜씨는 아마츄어 수준을 넘어 거의 천재적이었으며, 아름다운 회색 눈과 당황해 하는 슬픈 얼굴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문학의 경우 특히 '내가 진실로 관심을 두는 것은 바로 시'라고 말할 정도로 스티크니는 시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스티크니의 친구이자 유고시집의 편집에 참여했던 무디(William V. Moody)의 말에 따르면 '그는 동서양의 사고를 새로이 종합한 자신만의 시를 쓰기를 꿈꾸어 왔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는 포우(Poe)나 스윈번(Swinburne)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며, 시의 리듬의 경우 종종 와그너(Richard Wagner)의 시에서 빌려오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은 그의 대표작인 [추억]이란 시이다.(시행의 번호는 분석의 편의상 필자가 붙인 것임)
Mnemosyne
A-① It's autumn in the country I remember.
B-① How warm a wind blew here about the ways!
② And shadows on the hillside lay to slumber
③ During the long sun-sweetened summer-days.
④ It's cold abroad the country I remember.
C-① The swallows veering skimmed the golden grain
② At midday with a wing aslant and limber;
③ And yellow cattle browsed upon the plain.
④ It's empty down the country I remember.
D-① I had a sister lovely in my sight:
② Her hair was dark, her eyes were very sombre;
③ We sang together in the woods at night.
④ It's lonely in the country I remember.
E-① The babble of our children fills my ears,
② And on our hearth I stare the perished ember
③ To flames that show all starry thro' my tears.
④ It's dark about the country I remember.
시의 제목인 'Mnemosyne'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뮤즈신의 어머니이자 '기억의 여신'의 이름이다. 우리말로 옮길 때, '기억'보다는 '추억'이라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즉,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바로 '추억'이다. 어설프게나마 이 시를 우리말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추억
지금은 가을이 오는 내 추억의 고향
따사로운 바람결은 길모퉁이 스치고
향그러운 태양의 긴 여름날
산마루엔 그림자 누워 졸던 곳
지금은 추운 내 추억의 고향
날씬하게 기울은 제비 날개
한낮에 금빛 곡식물결 박차고 소소떨고
누런 소 넓은 들에 풀 뜯던 곳
지금은 비인 땅 내 추억의 고향
칡빛 머릿단에 수심 짙은 눈망울
내가 보아도 사랑스러운 내 누이와
밤이면 숲 속에서 노래부르던 곳
지금은 쓸쓸한 내 추억의 고향
어린 자식들 도란거리는 소리 내 귀에 가득한데
난로 속 남은 재 응시하면
눈물 속에 별인양 불꽃이 반짝이던 곳
지금은 어두운 내 추억의 고향
원작이 이미지보다는 운율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음송 형식의 시이기에, 그 운율을 살려 번역하기는 다소 어려운 일이다. 엉성한 번역이었지만 향토적인 고향의 모습은 충분히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시를 김현승은 그의 수필 [가을에 생각나는 詩들]에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그 많은 추억의 시편들 가운데서도 생각나는 것은 미국 시인 트럼블 스티크니의 걸작 [추억]이다. (중략) 얼마나 다사롭고 눈물겹게 만드는 추억의 시편인가? 이 시 한줄 한줄은 민감한 독자들의 추억을 오래도록 사로잡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끝 연 마지막 두 행은 얼마나 눈물겹고 감각적인 표현인가?
김현승이 지적한 것은 '가을'에 생각나는 시이다. 그의 가을과 관련한 시에서 느낄 수있는 것처럼, 그가 이 시를 택한 것은 'Mnemosyne'라는 제목과 함께 'It's autumn in the country I remember.'라는 시행, 그리고 시 전체적인 분위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만큼 이 시는 가을과 함께 고향에 대한 '추억'을 느끼게 해주는 좋은 시이다.
Ⅲ. 정지용과 [향수]
정지용은 1902년 5월 15일(음력)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농가에서 아버지 정태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한약상을 경영하여 농촌에서는 비교적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내지만, 불의에 밀어닥친 홍수의 피해로 가세가 갑자기 기울어져 가난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학동이 정지용의 시를 빌면서 소개한 정지용의 고향은 이런 곳이다.
천재 시인 정지용이 태어난 곳은 실개천이 지즐대며 흐르는 농가마을이다. 지금은 문명의 때를 타고 그 원초적인 자연조차도 과도기적인 열병으로 진통하는 마을로 변해가고 있으나, 그 당시로는 소박하고 인정미 넘치는 그런 마을로 온통 전설의 바다를 이루어 출렁이고 있었다.
정지용이 태어나서 자란 마을 뒤로는 높고 한일자로 뻗어간 '일자산'이 있다. 그 산의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실개천을 이루고 청석교 밑을 지나 들판을 가로질러 동쪽 끝으로 흐르고 있다. 그 산기슭에 자리한, 그가 태어나서 자란 집은 일자산의 계곡에서 이어지는 개천을 따라 산 정기가 곧바로 뻗어있는 것도 같지만, 범상의 눈엔 그것이 잘 보이질 않는다.
1913년 그의 나이 12세 때에 혼인을 하여 이곳에 살았고,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1914년)하고 4년간 한문을 수학하면서도 이곳에서 살았다. 어쨋거나 정지용은 그가 태어난 이곳에서 유년기는 물론, 휘문고보를 거쳐 동지사대학을 마치고 모교인 휘문고보에 교사로 취임하여 서울로 이사할 때까지 살았다. 그러나 이는 주소지일 뿐, 실제는 14세이후 고향을 떠나 객지의 고달픈 삶을 영위했다.
정지용의 문학적 재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18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이다. 선배로 홍사용, 박종화, 김영랑 등이 있었고, 후배로는 이태준이 같은 학교에 다녔다. 1학년 때의 성적이 88명 중 1등을 할 정도로, 창가나 체조 등 실기과목을 제외하면 전 과목에 걸쳐 고루 성적이 우수했으며, 특히 영어와 작문에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었다. 이는 후에 동지사대 영문학부에 진학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집안이 넉넉하지 못한 그는 교비생으로 휘문고보를 나녔다.
박팔양의 기록에 의하면 이 때(1918년) 이미 휘문고보, 중앙고보, 일고, 고상, 법전 등의 학생들이 모여 문학동인을 결성, 등사판 문예동인지인 {요람}을 발간하기도 했다는데, 휘문고보의 중심 학생이 정지용이었다고 한다. 이 {요람}을 통해 정지용은 많은 습작을 발표하였다.
한편 1922년에는 휘문고보의 재학생과 졸업생이 함께하는 문우회의 학예부장을 맡아 {휘문} 창간호의 편집위원이 된다. 이듬해 3월 휘문고보 5년제를 졸업하고, 4월에는 일본 경도에 있는 동지사대학 영문학부에 진학한다.(이하 정지용의 생애는 이 글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에 생략한다.)
이러한 정지용의 삶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먼저 그는 농촌 출신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연과 벗삼아 유년시절을 보냈다는 것이 된다. 다음으로 그는 14세 이후 객지 생활을 통해 누구보다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컸으리라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휘문고보 시절 이미 시인의 자질을 보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영어와 작문에 능통하여 영문학부를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했다는 사실은 이 글에서 밝히고자 하는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다.
정지용의 초기 시의 대표작인 [향수]는 1927년 3월 {조선지광}에 발표되지만 작품 말미에 1923년 3월에 쓴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박팔양의 기록에 의하면 1918년에 시작한 {요람} 동인지가 1923년까지 약 10호 정도 나왔으며, 여기에 [향수]를 비롯한 그의 여러 작품이 실렸다는데,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정지용의 동시나 민요풍의 여러 시편들이 [향수]와 함께 이미 {요람} 동인지 시대인 1918년부터 1923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다.
{조선지광}에 발표된 [향수]는 이렇다.(표기는 모두 {조선지광}에 실려있는 그대로이며, 시행의 번호는 분석의 편의상 필자가 붙인 것임)
鄕 愁
Ⅰ-① 넓은 벌 동쪽 끄트로
② 녯니야기 지줄대는 실개천 이 회돌아 나가고,
③ 얼룩백이 황소 가
④ 해설피 금빗 게으른 우름 을 우는 곳,
⑤ ------ 그 곳 이 참하 꿈엔들 니칠니야.
Ⅱ-① 질화로 에 재 가 식어 지면
② 뷔인 바 테 밤ㅅ바람 소리 말 을 달니고,
③ 엷은 조름 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
④ 집벼개 를 도다 고이시는 곳,
⑤ ------ 그 곳 이 참하 꿈엔들 니칠니야.
Ⅲ-① 흙 에서 자란 내 마음
② 파아란 한울 비치 그립어 서
③ 되는대 로 쏜 화살 을 차지러
④ 풀섭 이슬 에 함추룸 휘적시 든 곳,
⑤ ------ 그 곳 이 참하 꿈엔들 니칠니야.
Ⅳ-① 傳說바다 에 춤 추는 밤물결 가튼
② 검은 귀밋머리 날니 는 누의 와
③ 아무러치 도 안코 엽블것 도 업는
④ 사철 발 버슨 안해 가
⑤ 가운 해쌀 을 지고 이삭 줏 든 곳,
⑥ ------ 그 곳 이 참하 꿈엔들 니칠니야.
Ⅴ-① 한울 에는 석근 별
② 알수 도 업는 모래성 으로 발 을 옴기고,
③ 서리 막이 우지짓 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④ 흐릿한 불비체 돌아안저 도란도란 거리는 곳,
⑤ ------ 그 곳 이 참하 꿈엔들 니칠니야.
유행가의 노랫말로 쓰일 정도로 친숙해 진 이 시에서 우리는 정지용의 고향을 그리는 마음과 함께, 그가 그리워했던 고향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즉, 평화롭고, 사랑스럽고, 정겨운, 지극히 향토적 서경이 그것이다.
시 전편에 유년 시절의 추억이 담겨져 있으며, 한가로운 서경과 함께 아버지, 누이, 그리고 안해와 그들이 '돌아안저 도란도란거리는' 행복한 고향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서경과 서정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이 시는 정지용 개인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마음의 고향이라 할 만큼 우리들의 정서와 부합되는 것이다.
Ⅳ. [추억]과 [향수]의 거리
앞에 소개한 트럼블 스티크니의 [추억]과 정지용의 [향수]는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어, 누가 보아도 [향수]가 [추억]의 모방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살 수 있다. 두 시인의 생애와 관련하여 두 작품의 창작 연대와 그 구조를 분석해 보면 이는 분명해진다.
우선 생애와 관련지어 볼 때, 정지용의 습작기는 그가 휘문고보에 입학하던 1918년에서 일본 경도의 동지사대 영문학부에 수학하던 1925년 사이가 된다. 당시 문학도로서 접할 수 있는 현대시는 대략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엽의 국내외 시이다. 식민지 시대인 만큼 일본 시인과 함께, 서구 시의 대표라 할 프랑스 상징주의 시는 물론 영미시를 접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더구나 앞에서 소개한 트럼블 스티크니는 미국의 근대시가 현대시로 전환하고 있던 1900년대 초의 과도기에 나와 활동한 대표적인 시인의 한사람임은 물론, 요절한 시인으로 젊은이들에게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던 시인이었다. 게다가 정지용은 영어에 능통하고 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1923년 3월 [향수]를 쓰기 전에, 정지용은 스티크니의 [추억]을 읽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게 된다.
다음으로, 이러한 추측은 앞에 소개한 [추억]과 [향수]의 구조 및 기법을 견주어 보면 더욱 신빙성을 획득하게 된다. 우선 외형상으로 무척 닮아 있다. 전체 5연의 구성은 물론 매 연이 끝나며 후렴구의 형식 1행이 반복되는 것이 그렇다.
먼저 스티크니의 [추억]을 보자. 형식 면으로 볼 때, 시 전체 내용을 아우르는 한 행(A)을 독립된 하나의 연으로 처리하면서 전체를 5연으로, 한 연은 3행과 후렴구 형식의 1행으로 구성하고 있다. 이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음송시의 전형이다.
이러한 음송 형식은 각운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매 연의 끝에 나오는 후렴 형식의 1행(B-④, C-④, D-④, E-④)은 It's로 시작하여 항상 remember로 끝난다. 게다가 B연에서는 1행의 ways와 3행의 days, C연에서는 grain과 plain, D연에서는 sight와 night, 그리고 E연에서는 ears와 tears를 통해 매 연마다 1행과 3행의 각운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행 구분과 동음어의 반복을 통해 정형시 혹은 음송시의 전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정지용의 [향수] 역시 전체 5연으로 구성된 하나의 정형을 이루고 있다. 스티크니의 [추억]처럼 시 전체 내용을 아우르는 독립된 연은 없다. 그러나 매 연마다 4(5)행으로 묘사하고 있는 고향의 모습은 모두 '.....는(든) 곳'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후렴구 형식의 1행은 그러한 고향의 모습, '그 곳 이 참하 꿈엔들 니칠니야.'의 반복이다.
따라서 [향수]의 전체적인 시형식은 [추억]의 한 변형으로 볼 수 있다. [추억]의 5연 형식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그 모습을 5개의 연에 균등하게 분배했고, 각운의 맛을 살리려 매 연의 4(5)행은 '.....는(든) 곳'으로 끝맺고 있다. 게다가 [추억]에서는 매 연의 끝에 나오는 후렴형식의 1행은 It's로 시작하여 항상 remember로 끝나지만 그 내용은 서로 상이한데, [향수]는 이를 하나로 통일하여 5회에 걸쳐 반복함으로써 '향수'를 더욱 절실하게 표현하며 운은 물론이요 그 맛을 살리고 있다.
결국 [향수]의 형식은 [추억]의 그것을 빌어 나름대로 변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시의 내용을 보자. [추억]의 전체적인 내용은 내가 기억하는 고향의 가을은 이러이러한 곳(각연의 ①②③)이었는데 지금은 춥고 cold(B-④), 텅 비어있고 empty(C-④), 외롭고 lonely(D-④), 어두운 dark(E-④) 곳이라는 것이다. 즉, 과거 기억 속의 고향과 현재의 고향이 대조를 이루며 흔히 가을이란 이미지가 주는 쓸쓸함을 더해주고 있다. 문제는 기억 속의 고향이다.
김현승이 지적한 것처럼 [추억]의 고향은 다사롭고 눈물겨운 곳이다. 지극히 평화로운, 서정적 자아의 행복이 가득한 곳이다. 길모퉁이를 돌아 부는 바람, 졸고 있는 언덕의 그림자, 향기로운 여름날, 황금들판을 나는 제비, 풀을 뜯는 소, 검은 머리의 누이, 숲 속의 노래, 어린 자식들의 재잘거림, 별빛 같은 불꽃, 이 모든 것은 서정적 자아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향의 모습이다. 그런 곳이 지금은 춥고, 텅 비어있고, 외롭고, 어두운 곳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러기에 '추억'처럼 눈물겨울 수밖에 없다.
정지용의 [향수]는 바로 [추억]에서 서정적 자아의 기억에 내재하는 고향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황소가 게으른 울음을 울고, 질화로에 재가 식고, 아버지가 졸고 있고, 검은 머리 누이, 안해, 따가운 햇살, 하늘의 별, 흐릿한 불빛, 도란거리는 소리, 이 모두는 [추억]의 고향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바로 소재와 이미지의 차용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소재 혹은 이미지가 유사한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Ⅰ-⑤ 꿈엔들 니칠니야. A-① I remember
Ⅰ-② 회돌아 나가고 B-① blew here about the ways
Ⅰ-③ 황소 C-③ yellow cattle
Ⅱ-①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E-② the perished ember
Ⅱ-② 뷔인 바테 C-④ empty down
Ⅱ-③ 엷은 조름 B-② lay to slumber
Ⅳ-② 검은 귀밋머리 날니는 D-② hair was dark
Ⅳ-② 누의 D-① a sister
Ⅳ-⑤ 따가운 해쌀 B-③ the long sun-sweetened
Ⅴ-① 별 E-③ starry
Ⅴ-③ 우지짓고 지나가는 C-① veering skimmed
Ⅴ-④ 흐릿한 불비체 E-② the perished ember
Ⅴ-④ 도란도란거리는 E-② babble
한 편의 시에서 이렇게 많은 유사점을 찾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예는 바로 [향수]가 [추억]을 모방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특히 Ⅴ-①과 Ⅴ-④의 소재와 분위기는 E-①②③을 그대로 빌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Ⅲ연을 제외하면 모든 연이 [추억]의 전 연의 여러 행에서 그 소재와 분위기 혹은 이미지를 빌어 온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향수]는 분명 [추억]의 형식을 빌었고, 소재와 이미지를 차용했다. 즉 모방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의 구조와 기법을 빌었을지언정 그 주제와 감흥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특히 서정적 자아의 모습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추억]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과거와 현재의 대조이다. 서정적 자아는 현재 고향에 돌아와 있다. 그리고 지금은 가을이다. 그런데 고향의 모습이 너무 변해버렸다.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고향의 모습은 평화롭고, 아름답고, 따뜻한 곳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구태어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을씨년스럽고, 공허하고, 외롭고 어두운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기에 김현승의 지적대로 다사로우면서도 눈물겨운 모습이다.
그러나 [향수]는 과거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음에도 이를 현재와 대조시키지 않는다. 서정적 자아도 고향이 아닌 타향에 있다. 타향에서 고향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적 자아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고향의 평화롭고, 아름답고, 정겨운 모습들 만을 생생하게 그리면서 이를 현재까지 지속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그 곳 이 참하 꿈엔들 니칠니야.'를 반복함으로서 '향수'를 더욱 절실하게 할 뿐이다.
또한 서정적 자아의 시각의 경우 [추억]은 B, C, D, E로 진행하면서 원경에서 근경으로 집중된다. 그러나 [향수]는 원경과 근경이 혼합되어 있다. Ⅰ연은 원경, Ⅱ연은 근경, Ⅲ연은 다시 원경으로 나가다가 Ⅳ연과 Ⅴ연은 다시 근경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원경과 근경의 혼합을 통해 [추억]처럼 서정적 자아의 시각이 자연에서 인간으로, 즉 고향의 모습에서 가족의 모습으로 집중된다. 특히 [향수]는 [추억]의 누이와 어린 자식들만이 아니라, 아버지, 누이, 안해 그리고 그들이 모여앉아 도란거리는 모습을 통해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정겨운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비록 정지용의 실제 고향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다소 서구적인 '말' 달리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지만, 당시 조선의 농촌에서 느낄 수 있는 향토적인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깔려있다. 즉 정지용은 비록 [추억]의 여러 면을 모방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조선의 농촌에 걸맞는 분위기와 감흥을 창조해 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창조적인 모방인 것이다.
Ⅴ. 창조적 모방을 위하여
앞에서 정지용의 [향수]는 미국의 시인 트럼블 스티크니의 [추억]을 모방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나 단순한 모방도 아님을 아울러 밝혔다.
두 작품의 발표 연대와 정지용의 생애로 미루어 분명 정지용은 습작기에 트럼블 스티크니의 [추억]을 접했고, 그는 이 시를 매우 감명 깊게 읽은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분명 이 시를 염두에 두고 [향수]를 썼을 것이다. 시의 형식이나 소재 그리고 이미지를 빌었음이 분명하다. 이를 두고 정지용의 [향수]가 모방작이라거나 번안 작품이라 폄훼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더욱 분명한 것은 그가 스티크니의 시를 단순히 번역이나 번안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지용은 [추억]을 읽으며 스티크니가 사용한 시의 구성 기법, 행과 연의 구분, 후렴구의 기능, 그리고 소재와 이미지를 완전한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런 연후에 이를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조선의 농촌, 자신의 고향의 서경과 서정에 맞게 재창조한 것이다.
[향수]에는 [추억]에서 읽을 수 있는 cold, empty, lonely 그리고 dark와 같은 춥고, 공허하고, 쓸쓸하고, 어두운 가을을 찾을 수 없다. 언제 읽어도 정겹고 따뜻한 고향이 머리 속에 그려지는 것은, 비록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모방을 했다고 하더라도, 정지용은 이를 통해 조선에 어울리는 서경과 서정을 창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창조적인 모방을 하였다는 것이다.
정지용의 [향수]가 미국 시인의 시를 모방하였다는 것을 밝히면서도, [향수]가 아름다운 시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스티크니의 [추억]을 읽고, 이를 통해 자신의 고향을 생각했고, 정지용은 [추억]의 제요소를 빌어 자신의 고향을 그렸다. 구성기법, 소재, 리듬, 이미지는 물론 구체적인 시어까지 빌면서도 그는 이를 온전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고향을 그렸다. 그리하여 전혀 새로운 조선의 서경과 서정을 읊었다.
모방은 하되 단순한 모방이 아니며, 하다못해 시어까지 그대로 빌면서도 그 시어의 쓰임이 시 전체의 내용 속에 용해되어 있도록 만들었다. 정지용은 그가 느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 - [향수]를 스티크니가 창조해 놓은 [추억]을 통해 재창조해 낸 것이다. 이는 바로 창조적인 모방인 것이다. 정지용의 천재성은 바로 이러한 면에도 있는 것이다.
창조적인 모방, 그것은 모든 예술행위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다.
* 다음의 책들을 참고하였으나 일일이 인용표기를 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1. Twentieth Century Authors,Ed. by Stanley J. Kunitz,New York,1942
2. An Anthology of Famous English and American Poetry,The Modern Library,New York,1944
3. 김현승,{고독과 시},지식산업사,1977
4. 김학동,{정지용연구},민음사,1987
[출처] 펌
한국 현대시 새 경지 연 정지용의 ‘향수’가 모작이라고?
“다채로운 기층 언어 감칠맛 나는 리듬 모국어에 대한 최고의 헌사”
원로 평론가 유종호씨 조목조목 반박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경지를 연 정지용(1902∼1950) 시인의 대표시 ‘향수’를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치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로 이어지는, 가요로도 만들어져 널리 알려진 명편이다.
◇문학평론가 유종호씨는 “중학 시절 내게 있어 정지용은 시인 중의 시인이었고 나는 그를 통해 우리말 어휘에 관심을 갖고 개개 낱말을 세세히 음미하는 버릇을 길렀다”면서 “명품을 찾아내는 것과 함께 명품을 지키는 것도 비평의 소임”이라고 밝혔다.
이 시에 대해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씨는 “1920년대 중반 우리 시의 상황 전반을 고려할 때 ‘향수’는 기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매+혹적인 뛰어난 작품”이라면서 “전례 없이 적정하고 다채로운 기층 어휘의 구사와 조직, 유장하면서 감칠맛 나는 리듬감, 쉽게 잊히지 않는 갖가지 정경, 복합적인 구도, 간절하면서도 애상적인 속기(俗氣)에서 자유로운 ‘향수’는 시인이 고향과 조국과 모국어에 바친 최고 헌사(獻詞)의 하나일 것”이라고 상찬했다. 이는 유종호씨가 지난달 말에 출간된 ‘현대문학’ 5월호에 기고한 에세이 ‘사철 발 벗은 아내가 -‘향수’는 모작인가?’에서 강조한 내용인데, 이처럼 원로 평론가가 새삼스럽게 ‘향수’에 대해 다시 언급하게 된 배경이 그리 간단치 않다.
근년 들어 인터넷 포털에 ‘향수’가 미국 시인 트럼블 스티크니(Joseph Trumbull Stickney·1874∼1904)의 ‘추억(Mnemosyne)’를 모방했거나 번안했다는 글이 나돌던 터에 중진 평론가까지 나서서 “모작이라는 점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보이자 유종호씨가 모방의 혐의를 제시한 대목에 대해 조목조목 명백하게 반박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 사단이 1997년 ‘충남문학’에 실린 ‘모방과 창조’라는 논문에서 시작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 글의 논거를 논리적으로 해체했다.
첫째, 소재의 동일성을 말하지만 집이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감정은 극히 비근하고 보편적인 것이고 둘째, 반복구가 같다지만 “the country I remember”와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가 내용상으로 같다고 말하는 것은 시의 특성에 대한 고려가 없는 소재주의적인 발상이며 셋째, ‘향수’의 시행 총수는 25행이고 ‘추억’의 시행 총수가 24행이니 과연 엇비슷하지만 ‘향수’와 같은 해인 1927년에 발표된 정지용의 ‘옛이야기 구절’의 총 행수도 24행이니 길이나 시행 수가 엇비슷하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일축했다. 이밖에도 외국에나 있을 법한 젖소 ‘얼룩배기 황소’에 대한 의문에 대해서도 재래종 ‘칡소’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줄 뿐 아니라 ‘추억’의 한국 번역판이 오히려 정지용의 시어로부터 영향을 받아 지나친 의역을 감수하고 ‘향수’의 시어들을 동원한, 그리하여 “엽전 시인 정지용이 죽은 스티크니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죽은 고전학자 스티크니가 동방의 청년 정지용을 모방한” 셈이라고 역공했다.
◇정지용 시인
정지용이 스티크니의 ‘추억’을 읽었을 가능성을 굳이 배제할 필요는 없지만 “‘향수’는 제 땅에 제 발로 우뚝 서 있는 우리 근대시의 수작이며 설령 선행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환골탈태한 당당한 우리의 고전”이라고 유종호씨는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향수’는 1923년에 썼지만 ‘추억’은 1929년에서야 ‘미국시선집’에 수록된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면서 “아무리 일본이 재정적으로 윤택했어도 외국 군소시인의 모든 시집을 도서관에 비치했을지 의문”이라고 ‘문학외적인 호기심’을 보였다.
그는 “명품을 찾아내는 것과 함께 명품을 지키는 것도 비평의 소임”이라며 “많지 않은 우리의 정전을 지켜야겠다는 뜻도 있지만 편향된 논평과 평가가 기초적 독해를 선행하는, 극복돼야 할 우리 쪽 오랜 관행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심정도 없지 않다”고 이 글을 쓰게 된 분명한 취지를 밝혔다. 학자들마다 떠드는 기준에 따르면 ‘실낙원’은 줄잡아 2000명의 선행 문인들에게 빚졌다고 하는데 “영향 연구나 탐색자의 부질없는 호사벽에서 나온 공허한 소동은 범세계적인 현상인 것 같다”는 원로 평론가의 지적이 크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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