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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9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 후 제25주)
다시, 중심을 향하여
삿4:1~7; 살전5:1~11; 마25:14~30
지난 주일 추수감사절을 지나고, 다음 주일 올해 교회력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 왕 주일”을 기다리면서, 올 한 해도 빨리 저물어 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갑자기 찬바람까지 부니까 더 실감이 납니다. 올해 유난히 빠르게 지나간 것 같은 날들을 뒤로 하면서 시편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오늘 “예배의 부름”으로 읽어드린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시온 산과 같아서 흔들리는 일 없이 영원히 서 있다”(125:1)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하나의 시가 떠올랐습니다.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였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서로 다른 것 같은 두 시 사이에서 또 하나 생각난 글귀가 있었습니다. “하나의 중심 주위를 돌면서 내 생각은 항상 변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어딘가 다른 곳에서 그 중심을 보고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일관성이 없다고 비난을 받겠지만, 그런 비난을 들을 때 나는 더 이상 거기 있지 않을 것이다.” 토머스 머튼이 말년(64.1.25)에 쓴 일기의 한 대목입니다.
시편 기자는 “흔들림 없이 서 있는 시온 산”을 찬양했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흔들리는 일 없이 영원히 서 있는 시온 산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도종환 시인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냐”고 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아름다운 꽃도 다 흔들리면서 피고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서로 맞지 않는 것 같은 이 두 개의 시를 하나로 모아 준 것이 토머스 머튼의 자기고백이었습니다. “나는 하나의 중심 주위를 돌면서 항상 변했고, 그래서 항상 다른 어딘가에서 그 중심을 보았다. 사람들이 볼 때는 일관성이 없다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미 그 비난을 받는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다.”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향해 나가는 움직임을 평생 잃지 않았던, 죽어 있는 사람이 아니고 기계 같은 사람도 아닌, “살아있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난 일 년, 흔들리면서도 꽃을 피우고 줄기를 세우는 쪽으로 움직였나요? 언제나 흔들리는 중에도 “중심을 향해 나가는 움직임”을 계속 하고 있습니까? 오늘 한 해의 뒷자리에서 우리 움직임의 궤적을 다시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시온 산과 같아서 흔들리는 일 없이 영원히 서 있다”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말이 아닌 삶으로 살아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호수아기에 이어 사사기 말씀을 읽었는데요, 여호수아와 사사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는 역사적 사건은, 사실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쳤을 거라는 것이 이스라엘 역사학자들의 견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단번에 그리고 한꺼번에 가나안 땅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여호수아기에서는 이렇게 나오지요), 지파별로 각개전투 하듯이 여러 곳에서 오랜 시간을 걸쳐 이런저런 방법으로 땅에 들어갔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적어도 200년의 시간 동안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은 지역부터 서서히 스며들어가는, 때로는 전쟁을 통해서 이루어진 좀 더 복잡한 사건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간 지 200여년 후 다윗시대 쯤 가서야 비로소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그 전까지는 가나안 땅에 여전히 점령하지 못한 땅들이 있었고 그래서 계속해서 그들과 교전 내지는 협상을 해야 했습니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이런 200년간의 혼란기를 돌아보면서, 두 개의 역사를 기록하는데, 여호수아라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에 대한 신실한 신앙을 지키며 가나안 땅에 일사불란하게 들어가는 밝은 쪽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 여호수아기이고, 하나님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하나의 구심점이 없이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삿17:6; 21:25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행하였다.”) 행했던 어둡고 혼란한 역사를 기록한 것이 사사기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관점을 신명기적 관점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때는 완전한 정복을 가져오고, 불순종할 때는 불완전한 정복과 타민족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교훈을 이 두 역사서를 통해 보여주려는 것이지요. (이런 역사를 오늘날의 전쟁 개념,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의 전쟁으로 이해하면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민담이나 영웅담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사기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초기 정착기 왕이 있기 전에 사사(판관, 쇼페트, 사팟)라는 지도자가 활동하던 이야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런데 사사기는 항상 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있는 책입니다.
(어떤) 사사가 죽은 후에(에훗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 보시는 앞에서 악한 일을 저질렀다(중심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누구의 손에(이방 민족이 나옴, 가나안 땅 야빈의 손에) 백성들을 몇 년 동안 내주었다(20년 동안),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심하게 억압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께 울부짖었다, 그리고 나서, 사사들의 이야기(영웅 민담)가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사사가 이방민족을 멸망시키고 몇 년 동안 전쟁 없이 평온하였다(4장 마지막 절, 23~24절과 5장 마지막 절 31절에 나옵니다, “가나안 왕 야빈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는 40년 동안 전쟁이 없이 평온하였다”). 사사기에는 이런 틀 속에 12명의 사사들의 이야기(영웅담)가 실려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야기는 “드보라”라고 하는 여자 사사 이야기인데, 12명의 사사들 중에 유일한 여자 사사였습니다. “드보라”라는 여인은 전임 사사였던 에훗이 죽은 후에 부름 받았습니다. 에훗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들어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야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해낸 여사사였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다음에 드보라가 어떻게 싸웠는지를 길게 이야기하는데, 아주 잔인하고 끔찍한 방식으로 가나안의 야빈 왕의 장군 시스라를 죽이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옛 영웅담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묘사입니다. 그리고는 5장에서 드보라의 승리의 노래가 나옵니다.
저는 오늘 이 이야기를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방법으로 접근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에훗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주님 보시는 앞에서 악한 일을 저질렀다”(삿4:1) 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중심을 잃어버리고 다시 길을 잃어버렸다고 새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이방의 다른 신들, 곧 우상을 따라갔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각과 마음이 흐트러져, 세상의 힘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현란하고 반짝거린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정신을 팔리고 거기에 자신들의 안위를 의탁하려고 했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이 이방의 다른 신들을 따라갔다, 우상을 따라갔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생각과 마음은 흐트러져서 세상에 힘 있는 것들에 자신들을 의탁하게 되면, 거기에 따른 모든 행위의 결과들은 “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사기의 결론으로 나오는 말,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삿21:25)는 말씀은, 바로 중심을 상실한 사람들이 여러 개의 중심을 가지고 혼란스러워하는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백성들은 고통 속에서 부르짖고 새로운 사사가 등장합니다. (이 사사는 늘 구심점 역할을 합니다. 그가 중심 그 자체는 아니지만, 중심을 향하도록 인도하고 인물입니다.) 오늘 본문은 에브라임 사람 드보라였습니다. 드보라가 라마와 베델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앉아 있으면, 이스라엘 자손이 그에게 나아와 재판을 받았다고 하지요. 드보라가 에브라임 산지에서 이스라엘을 40년을 다스렸다고 하는데(삿4:31), 가나안 왕 야빈을 물리친 후에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이지요. 전시에는 군사적 행동을 하고 평시에는 백성들이 들고 오는 여러 가지 소송들을 현명하게 분별하고 판단하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40년 동안 앉아있다 보니 드보라가 앉아있던 종려나무에 이름이 붙었습니다, “드보라의 종려나무”였습니다. 백성들은 그 종려나무를 중심으로 해서 사방도처에서 다가와 현명한 재판을 받곤 했습니다.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이것은 만다라의 형상 같기도, 하고 아빌라의 데레사가 말하는, 중심에 하나님의 궁방이 있고 겹겹이 궁방이 둘러싸고 있는 “영혼의 성”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조금 더 나간다면 이것은 중심에 있는 “참자기”의 이미지이고, 그리스도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이 중심이 있었을 때, “그 땅에는 40년 동안 전쟁 없이 평온하였다.”(삿5:31)고 합니다.
이 중심의 이미지는 헨리 나우웬이 말한 큰 수레바퀴의 이미지와도 상통합니다. 마차 바퀴에 땅과 닿는 부분은 넓은 바퀴 테지만, 이 바퀴 테는 중심으로 향해 있는 여러 개의 바퀴살로 인해 힘을 받고, 그 힘에 의해 제대로 바퀴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삶과 사랑의 중심부로 향해 가는 것이다. 내가 삶의 바퀴통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는 그것으로부터 힘과 에너지를 받는 모든 것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 나는 삶의 많은 바퀴살들에 의해 산만해져서, 바쁘면서도 생명을 주지 못하고, 모든 곳에 있으면서도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삶의 중심부에 주의를 쏟을 때, 중심에 있으면서도 삶의 다양성과 함께 연결된다.”
우리가 중심을 갖는다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중심을 향한다는 말은, 우리가 이 세상의 일들에 바쁘고 마음과 생각이 갈라지겠지만, 그럼에도 다시 자신을 리셋할 수 있는 복원력이 좋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요즘 말로 “회복탄력성” (resilience)이 좋다는 말과도 비슷합니다. 우리가 하루 일과로 피곤하고 힘들더라도 밤에 충분한 잠을 자고 난 후에 아침이 되면 정신이 새로워지고 새날을 희망 중에 기다리듯, 우리의 중심에서 오는 힘이 우리의 일상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삶을 희망 중에 바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생각과 마음이 갈라지고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중심을 향하는 마음은 그 모든 갈라지고 흩어진 것들을 다시 모아주고 다시 힘을 주어 새롭게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은 진짜 삶의 중심으로 향하는 사람이라는 말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중심을 “진짜 중심”으로 놓고 삶을 다시 짜는, 재편(재구조화)해 나가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물론 우리의 삶을 다시 짜고 재편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은 은총이고 선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이 그렇게 하시도록 그 분 앞에 자주 멈추어 서서, 우리 자신을 잘 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은총이 우리에게로 흘러들어올 때, 그것들을 막는 장애들을 우리 안에서 치워놓는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달란트의 비유가, 성취지향적인 세상에서 오해를 살 수 있겠다 싶습니다. 열심히 장사하여 많이 남긴 사람은 “착하고 신실한 종”이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는 식으로, 충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것도 외형적인 충성만을 강조하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비유의 숨겨진 핵심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세 달란트 받은 사람이 주인의 뜻에 중심을 두고 행동했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는 이 차이가 가져오는 결과를 보여주는 있는 비유입니다.
오늘 우리는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위해서 2가지를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좀 더 따듯하게 가슴을 여는 일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이 보일 때, 자신이 중심에서 벗어난 것을 보았을 때, 단호한 채찍질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 하나님의 품어주시는 날개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모자란 것, 매번 이런 식이야!” 다그치는 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간절한 탄원이 필요합니다. 건조한 명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아픔을 가지고, 따듯한 가슴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다가가는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아빌라 데레사가 크게 회심했던 사건은 어느날 아침 성당 안에 걸려있던 “에케 호모”라는 그림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던 날이었습니다. “에케 호모”는 빌라도가 재판하던 법정에서 예수님께 대해 한 말입니다. 그 뜻은 “이 사람을 보라”라는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그린 그림이지요. 고통 받으시는 예수님의 고통 속에서 데레사는 자신의 아픔과 다른 이들의 아픔을 접촉했던 것입니다.
따듯하게 가슴을 여는 일을 하게 되면, 당장의 부정적인 감정으로 전체를 호도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됩니다. 자신 안의 여러 감정들을 구별하여, 당장의 감정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휘감도록 허락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그때의 감정은 자신이 갈 방향을 알려주는 사인, 신호등이 됩니다. 이때 자신 안에 균형이 생기고, 복원력이 생기고, 중심으로 향하는 힘이 생깁니다.
두 번째, 하루 중 여러분이 중심으로 들어가는 시간, 그 암호를 기억하십시오. 잠깐 잠깐이라도 자신 안에 머무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그 암호는 “드보라의 종려나무” “영혼의 성” “수레바퀴”가 될 수 있습니다. 14세기 <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이것을 “오로지 하나님을 향한, 꾸밈없는 지향”이라고 말했는데, 꾸밈없는, 단순한 단어, 호흡, 내적 응시를 가지고 여러분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연습을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