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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8;35-43. 끝이 난 상황에서의 포기하지 않으려면? 2024. 9. 8.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동을 합니다. 그런데 이동하시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이동을 알게 된 사람과의 대화가 나오고 거기에 서로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것을 주고받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과 바디메오의 이야기이고 바디메오에게 임한 기적입니다. 바디메오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날아오르는 연줄을 끊으면 더 높이 날고, 더 멀리 갈 줄 알았는데 땅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울타리를 제거하면 자유로움을 만끽할 줄 알았는데, 어두움의 영역이 미치는 올무가 되었습니다. 서로 다름이 아닌 하나를 위하여 관심(關心)을 멀리했더니 하나가 아닌 남남이 되었습니다. 편하기 위하여 간섭을 안했더니 곧바로 외로움이 뒤쫓아 왔고, 바라는 것을 내려놓으면, 자족할 줄 알았는데, 삶에 활력을 주는 열정이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편안(便安)을 추구하면 권태(倦怠)가 따라오고, 편리(便利)를 추구하면 나태(懶怠)가 뒤 따라 옵니다. 그러니까? 불편하게 하던 것들이 사실은 반드시 있어야 할 것들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오래 사는 것을 결정할 수는 없지만, 보람 있게 사는 것은 다짐할 수가 있습니다. 내 얼굴의 모양은 선택할 수 없지만, 표정은 관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어지는 환경은 나의 몫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마음과 자세는 나의 몫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을 받고 기적을 만들고 은혜를 덧입고 거기에 더하여 받을 수 있는 믿음과 신앙에는 항상 원칙이 있고, 원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든지 원칙과 원리를 알면 일하기는 훨씬 쉬워집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도 적용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제이든지 원리와 원칙에 대하여 충분한 식견을 쌓을 필요가 있습니다. 원리와 원칙을 내 몸의 일부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과 신앙의 생활에도 적용이 되는데, 중요한 것이 간절한 소망에 대한 원리입니다. 어떤 경우일지라도 간절한 소망은 포기하지 않아야 되고, 간절한 소망에 대한 원리와 원칙을 늘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이든지 탑승을 하면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것을 기대하고 승선하지요. 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망을 가질 때는 응답을 기대하고 소망을 간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소망이 아니라 독백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응답받기 위해서는 올바른 신앙적 지식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 동안 소망과 비전이 무엇이며, 그 결과가 어떻다는 말씀을 수도 없이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그 간절한 소망가운데 어떤 시스템이 작동하는지를 정확하게 안다면 우리의 소망은 훨씬 더 힘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 보통 무엇인가를 잘 한다고 할 때, 잘 한다는 뜻은 두 가지입니다. very often과very well입니다. very often 은 횟수가 잦다는 것이고 very well 은 테크닉이 좋다는 내용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는데도 성적이 오르지 않고, 연습을 많이 하는데도 실력이 늘지 않는다면 거기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원리를 모르거나 기본이 안 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디매오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나름 소망의 원리를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그 소망을 마음속에 간직했습니다. 출생 이후에 한 번도 내려놓은 적이 없습니다. 물론 본인이 이 모든 것을 파악하고 달려 들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되어 진 과정을 보면 이루어지는 소망의 원리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바디메오는 소망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떻게 다시 기대한 삶을 살게 됩니까?
1. 첫째로 끝이 난 상황에서도 소망이 품고 있는가? 여러분,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가는 사람은 거절을 당한 경우가 없습니다. 무엇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거절을 하신 본문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필요인 소망을 채워 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인이나 가나안 여인에게 외형적으로 거절했던 적이 있지만 그것은 그들의 믿음을 테스트 해 보기 위한 거절이었습니다. 거절을 위한 거절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수로보니게 여인 안에 있는 믿음을 보시고 그 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시잖아요? 이런 경우를 빼 놓고는 거절당한 경우가 없습니다. 수많은 각색 병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는데 한 번도 거절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백부장은 종교적인 관계로 껄끄러운 사이입니다. 종교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이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 주고, 또 회당장이 예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딸을 위하여 예수님께 나아 왔을 때 예수님은 기꺼이 동행하여 사랑하는 딸을 고쳐 주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 주었습니다. 유대 사람이나 이방 사람들, 모두가 예수님께 나왔던 사람들은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어느 누구이든지, 어느 민족이든지 예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은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소망과 목적을 위하여 기도할 때 사실 우리에게는 어떤 근원적인 의구심이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이 기도가 정말 응답이 될까? 왜 그렇게 됩니까? 어떤 인간관계 속에서 거절을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거절당하면서 그것이 상처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무엇인가를 부탁하거나 누구를 상대해야 되는 경우에 거절을 당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을 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 앞에 나아갈 때도 그 틀을 그대로 갖고 나가기가 쉽습니다. 사람에게 거부되고 사람에게 거절당한 상처가 있어서 예수님께도 그런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소망을 가지고 기도는 해 보지만 이런 기도 하면 뭐하나, 들어주시기는 하려나? 그런데 예수님은 마7:7 구하는 자에게 주실 것이고, 찾는 이는 찾을 것이고, 두드리는 이에겐 반드시 열린다고 주님이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소망을 가지고 담대히 구해야 합니다. 어느 농부가 대나무를 심었습니다. 첫해에 아무것도 돋아나지 않았고 둘째 해에도 셋째 해에도 넷째 해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섯째 해가 되었을 때에야 대나무의 싹이 지면을 뚫고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일단 죽순(竹筍)이 돋아 오르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한 자, 30센티가 넘게 자랐습니다. 그리고는 불과 여섯 주 만에 15m 이상이나 자랐습니다. 농부가 심은 대나무는 중국 동부에서 자라는 모소라는 품종인데 이 ‘모소’는 싹을 틔우기 전에 뿌리가 수십m까지 뻗습니다. 그리고는 대나무는 일단 땅속줄기에서 돋아나면 뿌리에서 보내주는 영양분을 공급받아 순식간에 자라게 됩니다. 4년이란 기간은 튼튼한 뿌리를 내리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대나무는 위로 자라기 전에 아래로 먼저 자랐습니다. 위로 성장하기에 앞서 아래로 먼저 튼튼한 뿌리를 먼저 내리고 그 뿌리의 힘을 바탕으로 위로 성장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어떻습니까? 아래로 뿌리를 내리기 전에 서둘러 위로 내뻗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마치 뿌리가 약한 나무의 형세와 같은 삶을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면세계를 확고히 다진 이후에 닦은 역량만큼 쓰임 받겠다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신앙적 실력을 쌓은 후에 그 실력만큼 쓰임 받겠다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오늘 바디매오가 그랬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소문에 의하면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가면 다 고쳐 주신다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너무 많은 군중들이 모여 있어서 거기를 뚫고 예수님 앞에 나가기는 불가능했습니다. 어떻게 하지요? 소리를 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변 사람들이 꾸짖지요? 그런데도 아랑곳없이 또 주님을 부릅니다. 그러자 주님이 그 자리에 머물러 서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고쳐 주셨습니다. 바디메오는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고 자기를 찾아오도록 했습니다. 이런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용납하실 줄 믿고 나아가며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가시던 걸음을 멈추고 찾아오셔서 응답하십니다. 오늘 바디매오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에게 허물이 있고 죄의 속성이 있을지라도, 아무리 그렇더라도 예수님을 향하여 부르짖고, 그 어떤 장애물이 있을지라도 나아가면 응답해 주십니다. 그런데 왜 안 될까요? 이유는 스스로 주님 앞에 면목이 설 때까지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깨끗해지고 변화됐을 때 주님 앞에 나갈 수 있고 그런 후에 기도해야 응답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십니다. 거절이 없으신 주님이십니다. 믿어야 합니다. 이런 나아감이 없는 소망은 허공에 부르짖는 소리가 될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습이 어떠함에 관계없이 거절하지 않으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 앞에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소망의 열매는 누구로부터 오는가? 주님입니다. 그런데 소망이 이루어지려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기도가 시너지 효과를 냅니다. 소망가운데 믿음과 간구를 동반하면 빨리 세움을 입고 빠른 시간 안에 소망을 이룹니다. 무엇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 시키게 됩니까? 여러분, 체력이 없는데 기술이 있어봐야 별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도 믿음이라는 동반이 없으면 별 효과가 없습니다. 간절한 소망도 믿음이라는 신앙이 동반 되지 않으면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소망을 이루는 두 번째 원리입니다. 주님과 만난 모든 사람들이 현장에서 응답을 받았던 것은 거의 이런 방법이 적용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디메오에게 무엇을 확인하시지요? 41절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러시잖아요? 예수님이 그에게 무엇을 확인하신 거지요? 믿음입니다. 소망이 중요하지만 반드시 점검해야 될 것은 내가 믿음이 있는가? 내가 기도를 하는가? 내가 믿음으로 구하는가? 소망만 가지고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허공을 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면 힘을 얻게 됩니다. 왜일까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듣는 순간 우리 속에서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 믿음을 기반으로 해서 간구할 때 기도는 응답이 됩니다. 그래서 소망을 이룸에 있어 기도와 믿음은 늘 같이 작동합니다. 즉 말씀을 듣고 마음이 불타오르면 바로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시고, 기도할 때 어떤 말씀이 생각나면 그것은 약속인줄 알고 그 약속을 꼭 붙드십시오! 이것이 레마의 말씀입니다. 주님! 제게 믿음을 주옵소서! 그러면 소망은 응답이 됩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이 막10장에 나오는데 그 앞쪽 9장에 보면 어떤 아버지가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 주님께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별 소망을 가지지 않고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겐 능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할 수 있거든 가능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믿는 것에 능치 못함이 없는 능력이 나옵니다. 그때 그 아버지는 표현을 바꾸어서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것이 소망을 이루는 정확한 태도입니다. 소망을 이루기 위한 기도는 믿음이 있어야 응답이 되는데, 사실 우리의 믿음이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기도하면서도 늘 긴가 민가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소망을 이루기 위한 기도의 서두에 반드시 믿음을 달라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약1:6~8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래요. 만약에 의심하면 요동치는 바다 물결 같다고 합니다.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이, 두 마음을 품는,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됩니다. 소망을 이루기 위한 기도는 하지만 얻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의심이 우리 기도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기도는 언제까지 해야 되느냐? 확신이 올 때까지입니다. 하지만 확신이 안 오면 한 달이고 일 년이고 계속해야 됩니다. 소망을 위해서 기도를 할 때 기도에 동반되는 것이 믿음이란 것을 반드시 기억하시고, 기도 가운데 믿음이 있는지, 믿음으로 기도하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기도를 시작하면서 먼저 믿음 달라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망을 이루기 위한 기도 가운데 믿음이 함께 해서 어떤 기도이든지 응답 받는 기도, 그래서 소망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여러분, 모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이를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가요?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슴 뛰는 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머리도 필요하지만 가슴이 움직여야 합니다.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고 확실성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바디메오에게 세상을 보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는 것은 가슴 뛰는 일이 아닙니까? 여러분, 가슴이 뛰어야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일을 감당합니다. 가슴이 뛰어야 낙심하지 않고 가슴이 뛰어야 구하는 바를 주님께 정확하게 아뢰고 모든 역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사람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가슴이 뛰어야 지금 이전까지의 모든 것을 탓하지 않습니다. 지나온 세월을 탓하지 않습니다. 51절을 보면 주님이 앞을 못 보는 바디메오에게 너의 소망이 무엇이냐? 묻습니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가슴이 뛰느냐?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가슴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 이 말씀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가슴이 뜁니까? 절대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가슴이 뛰는 기대가 됩니까? 여러분, 사실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느냐고 묻는 것은, 상식 중에도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입니다. 물어볼 말이 아닙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바디메오에게 물으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가슴이 뛰느냐? 절대적이냐? 정확하게 자기 문제를 자기 입으로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문제를 가지고 가슴이 뛰도록 무엇을 하고, 절대적으로 소망을 하느냐? 입으로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소원을 정확하게 가슴에 품고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현실을 아주 정확하고 분명하게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가슴이 뛰는 일을 하느냐 이 말씀입니다. 기도하는 과정 가운데 내 생각과 내 계획과 내 문제가 정리되길 원하십니다. 주신 사명과 뜻을 깨닫고 그것을 향하여 행동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말씀을 합니다. 겔36;36절 내가, 하나님께서 기도 하시기전에 다 알지만 그래도 내게, 하나님께 아뢸지니라. 그만큼 가슴이 뛰는 일을 하느냐? 내가 어떤 길을 가든지 인도해 달라는 포괄적인 기도와 함께 내 길이 아닌 것을 하나하나 지워가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 가운데 생각이 나고 그것이 행동하게 되고 그것이 곧 열매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곧 생각입니다. 이 원리는 오늘 바디매오의 마지막 한 마디에 다 들어 있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가슴이 뛰는 일입니다. 소망이 없으면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기도할 거리가 없는 사람은 그 삶이 고인 샘과 같습니다. 고인 물은 얼마 안 가 곧 썩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망을 이루기 위한 기도는 삶을 늘 흐르게 하는 원천입니다. 한 사람을 소개 합니다. 소년은 세 살 때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너무 가난해 정규학교에 진학할 수도 없었습니다. 책을 읽고 글씨를 쓰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소년은 관심은 오로지 음식을 배부르게 먹는 것이었습니다. 열네 살 때는 양복점 점원으로 들어가 재봉기술을 익혔습니다. 열여덟 살 때는 구두수선공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이 소년의 이름은 앤듀류 존슨, 알래스카를 러시아로부터 7백 20만 달러에 매입한 미국의 제17대 대통령입니다. 앤드류 존슨의 자기계발은 결혼한 후부터 시작이 됐습니다. 아내에게 글을 배워 매일 밤 책을 읽으며 교양을 쌓았습니다. 불혹의 나이가 됐을 때 그는 달변가요 명필가로 변했습니다. 링컨이 암살을 당하자 대통령직을 발휘했습니다. 이제 아무도 앤드류 존슨을 무식한 대통령이라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부족하고, 못나고, 없는 것을 탓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것 때문에 더욱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가슴이 뛰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그 인생을 가지고 영광을 돌렸습니다. 바디메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여러분에게 요구합니다. 소망이 무엇이냐?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있느냐? 끝이 났다고 말하고 결론이 보인다는 현실 속에서도 소망이 있고 그 소망이 가슴을 뛰게 하느냐? 물으시는 물음 앞에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고백하시는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러분도 그렇게 소망을 이루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4. 방해를 받더라도 소망을 향하여 부단히 전진해야 합니다. 소망을 이루기 위한 행동을 하다가 방해를 받고 저지를 당해도 죽지 않습니다. 물론 고난과 막힘이 있어도 소망을 이루고자 하는 목소리는 줄어 들으면 아니 됩니다. 그 만큼 더욱 갈망해야 합니다. 바디메오가 그렇습니다. 앞장 선 사람들이 꾸짖습니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은 그냥 살라고 합니다. 주어진 대로, 생긴 대로, 없는 대로, 그냥 있으라고 합니다. 나서면 안 된다고 윽박지르고 멸시를 합니다. 그러나 바디메오는 죽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자신의 삶과 세상을 보는 것과 바꿀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어떻습니까? 욕을 먹고 멸시를 당하고 가고자 하는 길에 딴죽을 거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소망 앞에서 꺽이지 않아야 합니다. 바디메오는 남은 인생을 아름답게 새로운 세상과 비전을 보면서 살겠다고 그 어떤 장애물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욕을 먹어도, 멸시를 받아도 남은 인생을 위해서 그 것에 게의치 않았습니다. 결국 주님으로부터 그의 소망을 이루고 주님과 함께 위대한 남은 생을 삽니다. 여러분, 기억해야 합니다. 시37;1-4. 행악 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고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히려 여호와를 인하여 선을 행하고 땅에 거하며 성실로 식물을 삼으라고 합니다. 가장 상처가 될 만한 장애물을 놓더라도, 육신을 옭아 멜지라도 끝까지 성실로 나아가면 그 소망은 힘이 될 것이고, 사는 동안 끝없이 솟아 나오는 에너지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고시엔 대회에서 교토 국제 고등학교가 우승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제약된 상황들이 있었습니까? 모든 것이 방해를 받았습니다. 고난과 막힘이 있었습니다. 기장 기본적인 운동장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요 그 학교에 입학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 무엇이 무엇입니까? 입학기준입니다. 영리함과 근성과 성실이 있느냐? 3가지 원칙과 기준입니다. 능력과 재능을 기준삼지 않았습니다. 부를 기준 삼지 않았습니다. 실력을 기준 삼지 않았습니다. 영리함과 근성과 성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영리함은 어디서 나오나요? 지혜에서 나오고 영감에서 나옵니다. 근성이 무엇인가요? 소망에 대한 결단과 결심입니다. 가슴 뛰는 일입니다. 성실이 무엇입니까? 그 어느 것 하나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100년의 역사를 지닌 고시엔구장에서의 열매입니다. 106년의 일본 전국 고교 야구대회의 우승의 영광을 차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원리와 원칙대로 신앙생활을 하시고 살아가시면서 주님을 통하여 많은 열매를 맺고, 풍성한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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