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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6:1-13
▣ 분리-고린도후서 6장-
6-9장에서는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일련의 사랑의 권고로 구성되어 있다. 6장 1-13절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자기의 생애와 사역을 검토해 보고 마음을 넓혀 그를 용납할 여지를 갖게 되도록 권고한다. 6장 14절-7장 1절(장이 여기서 나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에서 분리될 것을 권하고 있는 반면, 7장 2-16절에서는 화해를 탄원한다. 8-9장은 유대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헌금에 대해 다루며 그들의 협력을 호소한다.
이제, 6장에 나오는 두 가지의 호소를 살펴보자.
1. 조사할 것에 대한 호소(6:1-13)
지금까지의 다섯 장에서 바울이 자기의 생애와 사역을 변호하고 있었음을 기억하자. 고린도에 있는 그의 대적들은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방법과 동기들이 그릇되었다는 문제로 그를 비난하였다. 5장에서의 그의 마지막 언급은 화해의 사역을 다룬다. 따라서 그가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에게 화해를 청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라고 호소한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그는 죄인들에게(5:20) 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도(6:1) 간청한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받는다는 일은 얼마나 비극인가 ! 고린도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갓난 아이로서, 성숙지 못한 성도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은혜와 지식 가운데서 성장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목회자(바울)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의 사역에서 유익을 얻지는 못하였다 !
어떤 사람이 스펄젼(spurgeon)에게 그의 생애를 글로 쓸 것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하자, 그는 “나의 생애를 하늘에 쓰시오. 나는 숨긴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라고 대꾸하였다. 바울은 그의 생애와 사역에서 숨길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였으며, 사역에 의심을 일으키지 않도록 애써 왔다. 3-10절에서 바울은 그의 사역이 흠이 없음을 증명하는 몇 가지 논점을 제시한다.
그가 치른 전쟁(3-5절)-“견디는 것“(인내)은 흔들의자에 하릴 없이 앉아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라, 장애물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위해 돌진하는 전쟁 중인 군사의 모습이다. 그리스도께 순종하기 위하여 바울이싸운 싸움은 사역에 있어서 진실하고 이타적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난은 그가 불순종하였거나 징계가 필요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그가 순종적이며 사단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에 오는 것이었다.
“매맞음“이란 바울이 견뎌야 했던 매질을 뜻하는 것이며, “요란한 것“이란 그가 폭도들을 직면했던 일들을 말한다. “수고로움“이란 자신과 그의 동료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밤낮 고생하는 그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자지 못함“이라는 말은 기도와 말씀의 사역을 위해 잠자지 않고 깨어 있었음을 묘사하고 있으며, “먹지 못함“은 양식이 없어 먹지 못하고 다닌 때가 종종 있었음을 시사한다. 가짜 목회자로서 이처럼 호된 일을 견뎌내려는 사람이 없을 것임은 분명하다 !
그가 사용한 무기들(6-7절)-바울의 성품과 행동은 언제나 그리스도인다왔다. 그는 깨끗한 손과 깨끗한 양심을 지니고 있었고, 성도들을 향한 그의 사랑은 “꾸민 것“이 아닌 정직한 것이었다. 그는 사단을 패배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사용하였다. 부정직한 목회자들은 자신의 일을 진전시키기 위하여 육신적인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그가 얻은 명성(8-10절)-우리는 여기서 역설, 또는 반대가 되는 언급들을 연속적으로 보게 된다.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성도들과 죄인들의 눈에 다르게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죄인이 어떤 한 가지 시각으로 그를 본다면 성도는 다른 시각으로 그를 본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각기 다른 견해들을 가지고 보는 것과도 같다.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에게 팔렸다고 설명하는 것은 얼마나 감동적인 표현인가 !
바울은 그들에게 자기의 사랑을 상기시킴으로써 이 호소를 끝내고 있다. 그는 마음을 넓혔으나 그들의 마음은 좁았다. 바울은 그의 영적인 자녀들에게, 자기가 그들을 용납한 것같이 사랑 안에서 그를 용납하라고 호소한다."
고후 6:14-7:1
2. 분리를 위한 호소(6:14-7:1)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은 영적인 것이었다. 교인들은 세상에서 살고 있었으며 그리스도인들답게 살고 있지 않았으며, 죄와 타협하고 있었다. 바울은 분리를 위한 두 가지 주된 논점을 제시한다.
원리로부터 이끌어낸 논점(13-16절)-반대가 되는 것끼리는 서로 교제할 수가 없다는 것이 이 생의 근본적인 원리이다.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말은 레위기 19장 19절에 나오는 모세의 권고를 생각나게 한다. 이 고린도사람들은 결혼과 사회 생활과 사업, 기타 다른 방식에 있어서 불신자들과 멍에를 같이 하고 있었으며,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간증을 상실하고 있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똑같이 살아간다면 어떻게 세상에 증거할 수 있는가?
여기에 나오는 의와 불의, 빛과 어두움, 그리스도와 벨리알(사단의 구약 명칭), 신자와 불신자(라틴어로 “이단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 등과 같은 연속적인 상반된 일들에 대하여 살펴보자. 오늘날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교회가 세상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환심을 사고 세상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식이다. 이보다 더 진리에서 거리가 먼 것도 없다 !
죄와는 분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고립이나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세상의 더러운 것에서 지키는 것을 뜻한다. 물에 배가 떠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배에 물이 들어올 때에는 주의하라 ! 바울은 레위기 26장 11-12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신자와 동행하시기 때문에 신자가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의 문제는 그가 하나님과 가지는 교제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밝힌다.
약속으로부터 이끌어낸 논점(17-18절)-하나님은 자신을 순전하게 유지하는 사람을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세속성이라도 것은 미묘한 것이어서, 그리스도인이 모르는 사이에 점차적으로 다가온다. 처음에는 세상과 벗하게 된다(약 4:4). 다음으로는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요일 2:15-17), 그런 다음에는 세상에 순응하게 된다(롬 12:1-2).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하나님께로 분리시키는 사람들을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사 52:11 참조). 타협적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것과, 삶을 정결케 할 유일한 경험인 성령 안에서의 보다 깊은 교제를 잃게 된다.
7장은 6장을 끝내는 구절로 시작한다. 이 구절은 바울이 개인적인 거룩함에 대하여 한 말을 치밀하게 요약하고 있는데, 일련의 “쌍“(Duets)으로 되어 있다!
분리를 위한 두 가지의 동기-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극진히 사랑함“)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다. 우리의 생활에 이 두 가지는 언제나 작용해야만 한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의 생활을 깨끗하게 한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건전한 두려움이 동기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가르치기 위하여 징계를 하셔야만 한다.
두 가지의 책임-우리는 소극적인 면으로는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해야만 하며, 적극적인 면으로는 거룩함에 이르러야 한다. 하나님께 우리를 정결케 해주시도록 간구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시 51:2/시 51:7). 요한일서 1장 9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를 완전히 정결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우리는 또한 주님을 불쾌하게 하는 모든 것을 우리의 생활에서 씻어내야만 한다. 이사야 1장 16절은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게 하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처리할 문제를 하나님께서 제거해 주시도록 기대해서는 안 된다. “만일 네 손이 너를 실족케 하면 찍어 버리라“ 이같이 함으로써,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거룩함 가운데서 성장할 수 있다.
두 종류의 죄-육신의 추행이 있듯이 영적인 추행이 있고, 마음가짐의 죄와 마찬가지로 행위의 죄가 있다. 탕자는 육신의 죄를 지었으나 그의 형은 무서운 심령의 죄를 범하였다(시 51:17 참조).
분리는 소극적이며, 온전한 거룩함이 적극적이다. 죄에서는 분리되어 있지만 개인적인 거룩함에서 성장하지 못하며 성령의 열매들을 맺지 못하는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보기란 참으로 슬픈 일이다. 바리새인들은 죄로부터 분리되어 있었으나, 그들의 삶에는 사랑과 마음으로 나는 순종이 결여되어 있었다. 분리는 우리를 죄로부터 떨어지게 하지만, 분리가 우리를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고립시켜서는 안 된다."
고후 7:1-6
▣ 바울의 모습-고린도후서 7장-
2장 12-13절에서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디도와 더불어 가진 경험을 말하기 시작했는데, 본 장에서 그 이야기를 완결짓는다. 1-2장에서 종종 위로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여기서 다시 나타나게 된다(4-7, 13절). 본 장에서 호소하는바는 고린도 사람들이 바울과 화해하라는 것이다. 그들은 비관적이고 불순종적이었으나 이제는 그를 받아들이고 그와 다시 교제를 나눌 때이며, 특히 앞으로 그가 방문할 것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래야 할 것이었다.
본 서신의 초두에서 바울은 디도를 기다리면서 에베소에 남아 있을 때 부딪힌 시련에 대하여 말했으며 고린도교회의 상황에 대해 염려하였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위로하시고 기쁨을 주셨는지를 설명하는데, 세 가지의 위로가 언급된다.
1. 디도의 도착으로 인한 위로(7:1-6)
“우리를 영접하라“는 말은 직역하면 “너희 마음에 우리를 위한 여지를 만들라“는 뜻이다(6:11-12 참조). 바울은 그의 정결한 생활과 정직한 사역에 대하여 다시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은 그들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서둘러 확신시킨다.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자신의 생활에 있어서 생명의 일부가 되는 사람들을 어떻게 정죄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우리는 바울이 고민스럽게 실망할 만한 상황에 처해 있었음을 확실히 보게 된다(5절). 디도는 어디 있는가? 고린도의 상황은 어떠한가? 에베소에 설립된 교회는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모든 문제와 그 밖의 많은 문제들이 마게도냐로 여행하는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디도의 도착은 바울에게 큰 위로의 근원이 되었다. 바울은 자신이 “내던져졌다“고 시인했지만 그의 친구의 도착은 그에게 큰 위안을 가져왔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서로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짐을 서로 지고(갈 6:2), 서로를 격려하며(히 10:25), 서로를 섬겨야 한다(벧전 4:10-11).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내보내셨다.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봉사에 있어서도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혼자 있는 그리스도인은 실패한 그리스도인인 경우가 많다. 전도서 4장 9-12절은 “둘이 하나보다 낫다“고 진술한다. 그리스도인이 서로를 격려하는 것은 얼마나큰 특권이며 책임인가 ! 엘리야가 자신을 하나님께 충성된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는 타락하기 시작했다. 요나가 혼자 있게 되었을 때 씁쓸한 기분을 진전시켰던 것을 기억하라."
고후 7:7-12
2. 고린도 사람들의 순종을 통한 위로(7:7-12)
잠언 25장 25절은 “먼 땅에서 오는 좋은 소식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고 말한다. 디도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은 하나의 큰 위로였다(행 28:15).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위로는 바울의 엄격한 편지가 결실을 맺었다는 좋은 소식을 듣는 것이었다. 7절은 바울의 편자로 인한 결과를 나열하고 있다. 그들은 바울을 다시 보려는 열렬한 욕망을 가졌고 그들이 죄를 통회하였으며, 바울을 향한 그들의 사랑이 다시 불붙었고 회개하고 위반자를 징치하였다(8절).
고린도전서 5장에서 교회 내의 간음자에 대한 바울의 명령을 읽어보라. 11절에서 바울은 다른 몇 가지 반응들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들은 바울에게 순종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그들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정결케 되기를 추구하였으며 죄에 대한 분노를 나타내었고, 우쭐대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전 5:2 참조).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치하실 것을 두려워했으며 강한 결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였다. 11절의 “벌하다“는 것은 개인적인 증오라는 개념을 전하고 있지는 않다. 위반자는 적절히 벌을 받아야 함을 시사한다.
바울은 여기서 회개에 관한 중요한 교리를 가르친다. 바울은 회개와 후회사이에 방대한 차이가 있다고 언급한다. 회개는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인간을 하나님께서 더욱 가까이 끌어 당기는 슬픔이며, 죄를 고백하고 버리게 하는 자리로 인도한다. 반면에 후회는 세상에서 와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몰아가며 사단의 손에 붙이게 한다. 예를 들면, 베드로는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으나, 유다는 후회하여 자신의 생명을 끊었다.
거룩한 슬픔은 유익한 것이다. 이는 생명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세상의 슬픔은 죽음으로 인도한다. 오늘날 자살이 많이 일어나는 이유는 사람들이 참된 회개와 하나님의 은혜로운 용서를 알지 못하는 데에 있다.
12절에서 바울은 잠시나마 유감스러웠을 엄격한 편지를 쓴 것은 그들을 향한 자기의 사랑을 입증하기 위한 것임을 시사한다(6절). 이 편지를 쓴 것은 위반자를 바로 잡기 위한 것과 그로 인해 해를 당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한 자신의 관심과 염려를 입증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교정하는 일을 피하고 사실을 직면하지 않는 영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나 주님을 진지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그 곳의 신자들이 영적인 손실로 인해 고난을 당하게 될까 봐 걱정하고 있었으며(9절의 “해“) 그의 호된책망은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그들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었다."
고후 7:13-16
3. 그들이 디도를 영접한 데서 오는 위로(7:13-16)
디도는 바울을 만나자 기쁨이 넘쳤다. 그가 기뻐한 것은 고린도 교회가 그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교회는 젊은 디모데에게 그처럼 관대하지 못했었다(고전 4:17). 그런 일이 없었다면 디도가 파송되는 일이 결코 없었을 것이었다(고전 16:10-11 참조).
바울은 디도에게 고린도 교회를 자랑했었는데 이제 이 “경건한 자랑“은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그의 동역자에게 보인 사랑으로 인하여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 디도를 그처럼 따뜻하게 영접한 것은 바울을 영접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고린도를 다음에 방문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 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디도를 “두려움과 떨림으로“ 영접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바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며, 순종함으로 그 말씀에 머리를 숙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말씀에 떨기를 원하신다(사 66:2). 퍽 이상한 일이지만,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첫 사역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다(고전 2:3). 그들은 디도를 하나님의 종으로 존경하였으며 그의 지도력을 주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 들였다(살전 2:13/살전 5:12-15).
“너희를 영적으로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히브리서 13장 17절은 명령하고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을 대하는 방법을 보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대하는 방법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주님의 종은 주님을 대신하기 때문이다(고후 5:20/요 13:20).
성경 전체를 읽어 나가며, 하나님의 백성이 순종할 때에는 하나님의 종들이 기뻐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굴을 돌릴 때에는 그 종들이 부담감을 가진 것을 눈여겨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모세는 백성들의 반역으로 인해 포기하고 싶은 느낌을 종종 받았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인하여 비통하게 눈물을 흘리며 울었고, 예수님 자신도 유대인들이 그들의 구원의 날을 모르는 것으로 인하여 우셨다. 바울의 사역 또한 눈물의 사역이었다(행 20:19/행 20:31).
하나님의 종들은 인간으로서, 그 안에 보물을 지니고 있는(고후 4:7) “질그릇“이며, 생활이 가져올 수 있는 모든 실망과 실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있어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기“(히 13:7)란 대단히 중요하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히 13:17). “너희를 인도하는 모든 자들에게 문안하라“(사랑으로 인사하라 - 히 13:24).이제 그의 비판자들에게 해답하며 그의 사역을 변호하고, 교회의 사랑을 확신한 다음에, 바울은 유대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선교 헌금의 문제로 넘어간다. 영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물질적인 것들을 받아내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그들에게 누를 끼치고 그리스도를 해롭게 하는 원인이 된다. 많은 교인들이 가난에 시달리게 된 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빈약하기 때문이다. 처리되어야 할 죄가 있다."
고후 8:1
▣ 주님의 일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고린도후서 8장-
8장과 9장은 바울이 유대에 사는 가난한 신자들을 위하여 그가 받은 선교 헌금에 대해 다룬다(고전 16:1-3/롬 15:25-28). 왕국의 계획이 사도행전 2-10장에서 효력을 발하고 있을 때, 이 유대인 신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들을 공유하며 살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왕국에 대한 실물교습이었다. 왕국이 제쳐졌을 때, 그리고 교회가 무대에 등장했을 때 이 그리스도인 공산 체제는 사라졌고, 성도들은 가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바울은 이 사람들에게로 헌금을 가져갔다.
이 두 장은 그리스도인의 드리는 일에 있어서, 그 원리들과 약속들을 제시한다. 바울이 헌금에 대하여 지시하는 바에 유의하자.
1. 헌금은 교회로 가져와야 한다(8:1)
신약 성경에서의 헌금은 교회 헌금이다. 바울은 개별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교회들을 본보기로 하고 있다. 18-19절과 23-24절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교회이다. 그리스도인의 헌금은 교회 헌금이며, 십일조와 헌금을 하나님의 창고인 지교회로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6장 2절에서 바울이 그들에게 제시한 내용과 똑같다. 그 주일의 첫날에(주일날) 신자들(주님의 백성)은 (주의 십일조와 헌금) 헌금을 교회(주님의 집)로 가져와야 한다. 고린도전서 16장 2절에 나오는 “저축하여 두어서“라는 말은 말라기 3장 10절에 나오는 “창고“라는 단어와 같은 뜻이다.
오늘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나는 십일조를 교회로 가져가지 않고 성령께서 내게 어디로 보낼 것인가를 말씀하시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성경과 동떨어지게 지시하시는가?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실수를 범하고 있다. 즉, 십일조는 그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또한 성령은 그의 말씀에서 십일조를 그의 창고에 가져오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신령한 헌금은 성경에 근거한 헌금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십일조와 헌금을 지교회에 내지 않는다면 그의 마음은 지교회에 있지 않은 것이다(마 6:21). 지교회 밖의 개별적인 헌금은 사람들을 높이고 그들의 인정을 받지만, 지교회는 주님을 높이고 그의 사역을 지원한다. 어떤 그리스도인의 예배에서 “우리에게 헌금을 보내 주시면 특별한 기념품을 받게 될 것입니다 !“라고 광고할 때 우리는 그 사람들의 동기가 옳은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고후 8:2-9
2. 헌금은 마음에서 우러나야 한다(8:2-9)
그리스도인의 헌금은 영적인 확신에 의존하는 것이지 물질적인 환경에 의존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 교회들은 가난하였고 무서운 고난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헌금을 통하여 서로 나누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이것으로는 나 자신을 지켜야 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도움을 얻게 되는 것을 즐거워하였다.
그들은 헌금을 은혜로 본다(8:1/8:6/8:7/8:9/8:19/9:8 참조). 그리스도인의 헌금은 마음에서 넘쳐나는 것이며, 온전히 거저 주신 구원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자발적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고린도 사람들은 많은 영적인 축복들로 풍성하게 되었으며(7절), 바울은 이 은혜, 곧 바치는 은혜를 나타내도록 그들에게 강권하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에 속해 있다고 고백하면서도 주님께 충성스럽게 바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본다. 믿음, 설교, 증거, 말씀 연구 등과 같은 일들이 바치는 은혜를 대신하지는 않는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만을 본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보기로 제시한다. 그리스도는 얼마나 풍부하신 분으로서, 얼마나 가난하게 되셨는가 ! 상세한 내용을 빌립보서 2장에서 찾아보라. 준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전 생애와 사역을 주는 일에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고후 8:10-15
3. 헌금은 비례적으로 측정되어야 한다(8:10-15)
고린도 교회에서는 한 해 전에 헌금을 제안하였고 기꺼이 헌금에 참여하도록 광고하였다. 디도는 이 계획을 시작에 옮기는 일을 도왔는데(6절) 이제 바울은 그들이 시작한 일을 끝내도록 권고하고 있다. 십일조를 바치기로 약속하고 열외로 떨어져 나가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가 ! 그들이 다른 채무 관계에도 이러한 자세를 취한다면 옥에 갇히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바울은 비례적인 헌금의 원리를 분명하게 펼치는데, 그 원리의 내용은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신 대로“라고 제시했던 고린도전서 16장 2절에서와 같다. 십일조는 바치는 일에 있어 가장 정당한 방식이다. 십일조는 사람의 것을 훔쳐가는 것이 아니며,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게 똑같이 정당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바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허용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정해진 몫이 아니라 비례이다. 이 계획에 있어서 “동등해질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십일조인 것이다(14절).바울은 출애굽기 16장 18절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순종할 때 축복하셨던 것같이, 바치는 일에 있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축복을 받게 될 것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바쳐야 할 마땅한 분량을 드린다면, 100의 10%를 바친 그리스도인보다 500의 10%를 낸 사람에게 더 축복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십일조를 반대하는 사람은 바치는 일에 있어 유일한 공정한 방식을 반대하는 것이다."
고후 8:16-24
4. 헌금은 정직하게 다루어야 한다(8:16-24)
바울은 이 선교 자금을 오용하는 일로 그를 비난하는 사람이 없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 그래서 그 교회로 하여금 이 돈을 관리할 세 명의 대표들을 지명하도록 했다. 지명된 사람들은 디도(16-17절)와 다른 형제와(18-19절), 또다른 조력자(22절)였다. 이 일은 사무를 잘 처리한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 조직체들이 재원을 비사무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모든 돈은 영수 처리가 되고 기록되어야 한다. 이 재원은 두사람 이상이 회계해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이것을 오용하거나 또는 돈을 취급하는 데 있어서 부주의하여 그의 능력과 간증을 잃는 일이 많다.
20-21절은 이 부분의 중심 구절이다.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어떠한 고발의 기회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아신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며, 대적에게 부정직하다는 고발을 당할 기회를 주어서도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지교회에서 기록을 하고 봉투를 사용하며 영수증을 주는 것이라면 “신령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진리에서 거리가 멀다. 만일 영수증을 받지 않는다면 십일조와 헌금이 결국 교회로 들어가고 있는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마음으로부터 정직하게 내려는 사람은 봉투를 사용하는 것이 사무적이고 정돈된 방식이므로 이를 사용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내가 내는 것을 알 권리가 없기 때문에 난 봉투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도 전혀 내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내가 보험증서나 세금고지서 같은 것들에 돈을 지불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가? 바울은 이러한 헌금들이 적절하게 존중을 받아야 하며 적절하게 취급해야 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했으며, 지교회 안에서 우리도 이같이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혼란을 지어내시는 분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나 교회에서는 재정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사역들에 돈을 지원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요한 데가 있다“는 사실이 헌금의 충분한 동기가 되지는 못한다. 그 돈이 정직하게 처리되며 지혜롭게 사용된다는 증거가 있어야만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의 사역들이 하나님께서 인준해 주신 일이 없는 계획에 돈을 낭비한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일들을 지원할 의무는 없다. 내가 꾸지 않은 빚을 갚을 필요는 없다. 성경적이라는 점 외에도 교회에 내는 것이 가장 좋으며 안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목회자와 집사들은 사역들을 조사하여 그 사역들이 얼마나 건전한지 알아볼 수 있다. 목회자는 본 교회에서 필요한 경우를 알고 있으며 어떤 사역이 가짜이며 어떤 사역이 진실한 사역인지를 알고 있다. 만일 지도자들을 신뢰한다면 교회는 그들을 따라야 한다."
고후 9:1-5
▣ 뿌리는 일과 거두는 일-고린도후서 9장-
8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의 바치는 일을 논의했는데, 이제는 하나님께 바치는 일에 충성했을 때 요구할 수 있는 약속들에 대해 설명한다. 이 두 장에서는 사람에게 짐을 지우는 법적인 채무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은혜와 축복으로서의 헌금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바치는 문제로 어려움을 당한다면 그의 마음에 무엇인가 잘못이 있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삼중의 약속을 살펴보자.
1. 바치려는 의지는 다른 이들에게 축복을 끼친다(9:1-5)
8장 1-5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며 격려가 되도록 마게도냐 교회를 사용했는데, 이제는 마게도냐의 교인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고린도인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에게 격려가 되어야만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너그러움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을 했었는데(8:24), 이제 그는 고린도 사람들이 그를 당황하게 하지 않을 것을 확실히 하고 싶었다. 바울은 그들이 마음에 준비가 되어 있고, 선교 헌금을 바치려는 의지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 그 같은 일을 그들에게 상기시키고자 하였다.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격려하였느니라).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간증이다. 불행하게도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릇된 길로 사람들을 충동질한다. 히브리서 10장 24절은 선한 일을 하도록 우리가 서로를 격려하라고 강권한다. 고린도인들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이런 일이다.
한 해 전에 바울은 그들에게 선교 헌금을 모으도록 강권하였으며 그들은 지원할 것을 서약했었다. 이 사도는 다른 교회들을 격려하기 위해 이들의 열성을 본보기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약속한 바를 상기시키고 있다. “만일 너희가 이 일에 참여하지 않으면 다른 교회들을 실의에 빠뜨릴 것이며 전체 헌금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바울은 이 헌금을 장려금 곧 축복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바울은 헌금이 목에 걸린 멍에가 아니라 축복이 되며, 또한 축복을 받는 기회로 볼 수 있기를 원하였다. 바울의 편에서 볼 때 헌금은 축복의 문제이지 탐욕(욕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왕왕 헌금의 중요성을 오해한다.주는 일은 받는 사람이나(9:12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함) 나누는 사람에게 축복이 되듯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축복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지교회에 바치는 일에 충성할 때,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에 순종하도록 격려를 하게 된다."
고후 9:6-11
2. 바치려는 의지는 자신에게 축복이 된다(9:6-11)
바울은 그의 논점을 설명하기 위해 여기서 농사에 있어서의 원리를 사용한다. 풍성하게 씨를 뿌리는 농부는 풍성하게 거둔다(잠 11:24/눅 6:38/갈 6:7-8 참조). 여기서 “풍성하게“(또는 “아낌없이“-Bountifully)란 말은 5절에서의 “장려금“(한글 성경에서는 “연보“-Bounty)과 같은 단어이다. 아낌없이 뿌리는 것은 축복을 뿌리는 것을 의미하며, 풍성하게 거둔다는 말은 “축복을 거둔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빚을 지지 않으신다. 우리가 충실하게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축복하시는 일에 충실하시다.
7절은 흔히 잘못 적용되곤 하는 구절이다. 바울은 우리가 얼마나 많이 바칠 것인가를 말하지 않고 어떻게 바칠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그는 8장 12-15절에서 얼마나 많이 되돌려 드릴 것인지에 대해 말하였는데, 그것은 가진 바 소유에 따라 비례적으로 바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까워하며 바치거나 법적인 채무의 감정으로 바친다면, 바치는 데에 따른 축복을 잃는 것이다. 바치는 것은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야 하며, 하나님은 즐겨(헬라어로는 “유쾌하게“)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 구절을 들어 마음에 목적한 바를 기쁘게 바치는 한, 우리가 얼마만큼을 바치는가는 문제가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 기쁘게 바치는 마음이 순종하는 마음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드리는 데 있어서 우리의 마음은 충실하고도 기뻐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른 동기로 바른 액수를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8절에서 “모든 은혜, 항상, 모든 것, 넉넉함, 모든 착한 일“ 등, “모든“이란 말이 여러 번 나오는 것을 눈여겨보자. 빠뜨린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넉넉함“이란 단어는 3장 5절, 12장 9절에서도 나온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2:6), 물질적으로(9:8) 또한 육체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는 데에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대처하시나, 이는 다만 우리의 즐거움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봉사하며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모든 착한 일에 풍성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일을 해야 한다고 권고한다(엡 4:28). 바울은 여기서 시편 112편 9절과 이사야 55장 10절을 참고로 하여, 하나님은 바치는 일에 충성된 사람을 축복하신다는 것을 입증한다. 하나님은 씨를 공급하셔서 씨뿌리는 사람이 먹을 것을 만들고도 다른 사람들을 먹일 수 있도록 더 많은 씨를 뿌리게 하신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주는 사람은 그만큼 잃는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일이 그처럼 되지는 않는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주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 말들은 우리가 하나님과 거래를 하라거나 십일조를 하나님의 축복을 사들이는 수단으로 보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말씀에 대한 우리의 신지를 표현하는 기회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3. 바치려는 의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9:12-15)
바울은 고린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지닌 영적인 부요함에 대하여 몇 번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인가!(고전 1:5/고전 4:8/고후 8:9/고후 9:11) 하나님은 우리를 부요케 하시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부요케 하고,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감사와 영광을 받으신다. 바울은 이 헌금을 분배하는 일이 성도들에게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지적한다.
13절은 유대인들이 이 헌금을 받는 일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인지에 대하여 두 가지의 이유를 진술하고 있다. 즉, 바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을 표하는 것이며, 그들의 자유로운 헌금이 그들과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받는 사람들은 되돌아서 그 교회들을 위하여 기도할 것이며 그들을 더욱 사랑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헌금의 배후에는 매우 실용적인 사상이 들어 있다. 바울은 그가 설립한 이방인 교회들을 고국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맺어 주고 싶어했으며, 이 헌금은 바울이 유대인의 원수가 아니라는 점과, 종족의 구별을 넘어 교회 안에 있는 통일성을 입증할 것이었다.
바울은 찬양하는 말로 본 장을 끝맺는다. 그는 바치는 일(연보)에 관하여 써왔는데,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가득 차서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외친다. 이 은사란 물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물이며 또한 그가 가지신 영원한 생명의 선물이다.
이 두 장을 읽으면 반드시 바치는 일에 대한 태도가 새로와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결국에 가면, 이것은 “물질적인 것“이고 저것은 “영적인 것“이라고 나누는 일은 없게 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영적인 목표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바울은 바치는 일은 부담이 아니라 축복임을 가르친다.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헌금은 생활을 풍성하게 하며, 하나님의 축복의 샘을 열어 놓는 것임을 보여 준다. 바친다는 것은 은혜이며(8:1/8:6-7/8:9/8:19/9:8/9:14), 은혜를 이해하는 그리스도인은 바치는 법도 이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