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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자료(2) 스크랩 ‘정치경제학 비판’과 21세기 금융공황
hotlip 추천 0 조회 46 08.01.05 00: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정치경제학 비판’과 21세기 금융공황

- 자본주의의 한계와 21세기의 맑스

 

곽노완 ‧ 서울대 강사 / 철학




1. 들어가기 :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공황


2차 세계대전 이래 장기호황을 구가하던 자본주의체제는 73년도 오일쇼크 이래 종말을 고하고 21세기에 들어선 새로운 ‘공황’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1973년은 신자유주의의 현실적 출발점을 알리는 해이기도 하다. 미국공화당의 닉슨 정부가 1971년에 달러화의 금태환을 거부하고 1973년에 브레튼우즈 체제의 파기를 선언하여 상품화폐시대에 최후의 종지부를 찍고 중앙은행권을 신용화폐에서 진짜화폐로 그리고 동시에 고정환율제를 자유변동환율제로 전환시킴으로써 화폐자체가(즉 외환이) 상품(자유로운 거래와 투기의 대상)이 된 것이다.1) 나아가 1973년은 케인즈주의에 입각한 정부개입적 경제정책을 기각하고 국유기업과 공공서비스가 사적인 자본의 수중으로 이양되는 신자유주의의 원년이기도 하다. 바로 직전에 미국 닉슨 대통령조차 “우리는 모두 케인즈주의자가 되었다”고 선언할 정도로, 케인즈주의가 자유주의를 포섭했던 상황이 순식간에 신자유주의가 케인즈주의를 포섭하는 상황으로 돌변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노동자단체결성이 허용된 1825년 이래 강화된 노조의 조직화도 다시 비정규직의 확산 및 해고의 자유화와 더불어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가 자유로운 개인들의 시장에 내맡겨지는 추세가 급격히 강화되었다.

 

자본주의 시장이 즉각적인 균형을 달성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시장은 점점 진화해가는 최상의 기제이며 따라서 모든 영역을 ‘자유로운’ 계약이 이루어지는 상품시장으로 내맡겨야 한다는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적 교리가 케인즈주의와 사민주의까지 포섭하면서, 금융‧공공영역‧노동력이 모두 시장에 내맡겨지는 추세가 아직껏 현실자본주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21세기 들어 사민주의 안에서 신자유주의 추종파와 좌파 세력 간에 균열이 생기면서 헤게모니를 상실해가는 보수적 신자유주의가 발악을 하거나(미국 공화당과 부시), 신자유주의 추종세력이 대세를 이루는 사민주의의 몰락이 나타나고 있긴 하지만(영국 노동당의 블레어와 독일 사민당). 한국의 열우당과 노무현 정부는 이러한 스펙트럼에서 중간쯤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한계에 다다라서 무너져가는 달러화중심의 세계경제체제에 목숨 걸고 매달리면서(한미 FTA) 미국 공화당과 월가라는 신자유주의 세력이 지배하는 체제가 영구적으로 지속될 것이라는 교조아래 미국중심의 신자유주의 세계체제에 편승하려고 하고 있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신자유주의가 발흥한 시점이 20세기 전반기라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이론가 하이에크는 이미 1930년대부터 계산논쟁을 통해 사회주의의 불가능성을 비판하면서 극단의 시장만능주의‧신자유주의를 이론화시켜왔던 것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가 70년대 중반 이래 친화성을 갖고 있는 기존의 통화주의, 공급측 경제학, 합리적 기대론 등과 결합하면서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 이래 GATT(90년대 중반이후 WTO)와 IMF, World Bank 등을 매개로, 그리고 이러한 효과가 현실사회주의 블럭의 붕괴에 의해 증폭되면서 사민주의까지 포섭하고(이른바 제3의 길), 사회성원들을 주술적으로 코드화시키면서 현실에서 주도적인 흐름을 형성해왔던 것이다. 미국 사대주의와 민족주의가 착종된 변종 신자유주의세력인 노무현 정부는  그처럼 신자유주의에 의해 전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코드화된 세력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코드화되어 있음은, 중동은 물론 유럽과 남미에서 와해되고 있는 미국의 헤게모니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세계지배가 전능하며 갈수록 강화될 것이고 따라서 한국은 그에 빌붙어야 된다고 신봉하고 있는 점에서 드러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한계는, 금융시장이 투기자본으로 넘쳐나며 교육‧의료‧물‧전기‧통신 등 공공영역이 민영화와 사적인 자본의 이윤논리로 지배되고, 비정규직과 실업자의 확대재생산과 지구적인 차원에서 남북의 격차 확대 등 부익부 빈익빈의 구조화, 전쟁, 생태계의 파괴 등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한계’라기보다는 오히려 ‘폐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문제들은 신자유주의가 해결할 과제로 설정조차 하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신자유주의 세력은 그러한 문제들이 더욱더 커져야 세상이 잘 돌아간다고 믿고 있기 있다. 신자유주의의 ‘한계’는 그들의 목표와 기획이 오히려 그들의 붕괴와 몰락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찾아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미국 보수세력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한계는, 유엔을 통한 그들의 정치적 헤게모니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달러화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경제체제가 붕괴의 전조를 보이고 있으며(Euro화의 부상과 달러화의 약세) 미국의 앞마당인 중남미에서 금융공황이 구조화되고 그 여파로 좌파 사회주의정권의 부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나아가 유가를 낮추겠다는 이라크 침공의 기획도 오히려 유가를 폭등시킴으로써 미국 내 자유주의세력마저 미국 공화당의 부시정부에 대한 기존 지지에서 이탈하고 있고, 화석에너지정책과 배기가스제한에 대한 미국부시정부의 거부는 지구의 온난화와 이상기후를 야기하고 생태계의 파괴뿐만 아니라 기후변동을 야기하여 대규모 인명피해를 수반하는 자연재앙을 불러들이고 있다. 이제 미국의 신자유주의세력에게 남아있는 수단은 군사적 지배뿐이고 이마저도 유럽과 중국 등의 반대에 부딪쳐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처지이다. 이는 미국과 신자유주의 세력이 몰락하고 있다는 전조이기도 하다. 소련의 급작스런 몰락에서 보듯이, 미국과 신자유주의의 몰락도 그렇게 급작스럽게 찾아올 수 있다. 아니 일본, 중국, 대만, 한국 등 동아시아 4개국만이라고 이미 기축외화를 달러화가 아닌 다른 통화로 바꾸었다면 순식간에 달러화는 10분의 1, 100분의 1로 가치가 하락하였을 것이고 미국은 이미 소련과 유사하게 몰락했을 수도 있다.2)     

 

미국 외에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한계는 1997-8년 한국 등의 외환위기, 그 이후 멕시코와 아르헨티나, 터키, 러시아의 외환‧외채위기, 그리고 그 이전 1992년 서유럽의 환율위기 등에서 나타난 바 있다.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로 나타난 위기에 대한 대응이 다시 더욱 강화된 신자유주의적 민영화와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으로 나타나면서 비정규직과 실업자의 폭증으로 인한 수요감소와 투자감소의 불경기 → 비정규직‧실업증가 등의 악순환이 진행되고 있음은 이미 익히 알려진 대로이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확장으로 인해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자본주의적 시장의 확대는 1973년 이래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확장으로 나타나는데, 이미 외채위기‧, 환율위기‧외환위기 등 다양한 금융공황을 양산하였으며 달러지배체제 자체의 붕괴로 치닫고 있다.

 

1973년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더불어 자본주의의 공황은 오일쇼크를 제외하곤 주로 외채위기‧환율위기‧외환위기 등 금융공황으로 인해 촉발되었고 오일쇼크마저도 자본주의적 신용제도와 금융제도를 통해서만 “급작스러운 재생산의 중단” 즉 공황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사실 이미 맑스가 밝히고 있듯이, 1866년 이래 자본주의적 공황은 주로 금융공황의 형태를 띠고 있다(MEGA II.5/540; MEW 23/697 참조).3) 역사적으로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맑스에게서 자본주의에 특유한 공황은 신용제도 등 금융제도 및 금융시장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필수적인 요건으로 한다.4) 이런 점에서 ‘이윤율 저하론’, ‘과잉축적론’, ‘과소소비론’, ‘생산재 부문과 소비재 부문의 불비례설’ 등 산업자본의 축적과정에서 완결된 전통적 맑스주의 공황론을 구성하는 시도들은 맑스에 못미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맑스가 자신이 기획하고 집필한 “정치경제학 비판” 체계에서 완결된 공황론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맑스가 쓴 공황론의 요소들의 합집합을 추출하고 하나의 체계로 재구성한다고 해서 완결된 공황론이 구성되는 것도 아니다. 맑스가 공황에 대해서 이론화하고 있는 부분들은 2가지 이상의 모순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21세기 공황을 분석하는 데 이론적인 한계와 난점을 안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는 민스키, 칼레츠키, 폴 크룩만 등 중립적인 금융기관과 산업자본의 신용관계 및 이자율로 금융공황을 환원시키는 다양한 케인지안들보다 21세기 자본주의 금융공황을 분석하는 데 더 강력한 이론적 기초들을 제공해 준다. 뿐만 아니라 금융공황의 계기로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신용관계에 산업자본의 경쟁, 금융자본 및 산업자본의 경쟁, 금융시장의 투기적 발전 등을 추가하는 브뤼노프, 파인, 해리스, 클라크, 크로티, 이토, 라파시스타스, 알트파터, 후기 아글리에타 및 리피에츠, 하인, 미하엘 하인리히 등 현대 맑스주의 금융이론가들보다 앞서는 분석틀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21세기 금융공황과 자본주의의 한계를 밝히는 이론적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글은 맑스적 출발점에 기초하여 또 그것과 대결하면서 21세기 자본주의의 공황을 분석할 이론틀을 정식화하고, 그러한 분석과 관련하여 새로운 대안사회경제의 요소들의 일부를 부각하려는 시도이다.



2. 공황론의 에피스테몰로기


1) 공황의 서술차원과 ‘정치경제학 비판’


우선 <자본>의 부제이기도 한 ‘정치경제학 비판’의 체계와 공황의 관계를 살펴보자. 이는 두 가지 이론적 문제를 포함하는 주제이다. 첫째는 ‘정치경제학 비판’ 체계에서 ‘비판’과 ‘공황’의 관련을 밝히는 문제이다. 둘째는 <자본>의 서술방법과 '플란'Plan에 따라 공황의 서술방법과 서술되는 지반을 밝히는 문제이다.


첫째로, ‘비판’과 ‘공황’의 관련에 대해서는 최근 알트파터와 하욱이 상이한 입장을 대변하면서 이론적으로 고찰한 바 있다. 그들에 따르면 근원적으로 정치경제학 ‘비판’으로서 “<자본>은 공황론이다.”(Altvater 1992a, 41 그리고 Haug 2005, 108도 참조) 이러한 주장은 레닌을 포함하여 <자본>의 핵심을 잉여가치론으로 이해하는 전통적 맑스주의 이론가들에게는 낮선 테제이다.5) 더구나 <자본>에서 잉여가치론은 상대적으로 체계화되어 있음에 비해 공황론은 덜 체계화되고 완성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더더욱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자본>의 핵심테제가 무엇이냐를 놓고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선택은 논자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다. 그리고 사실 그러한 차이 자체는 이름을 무어라고 붙일 것인지와 마찬가지로 맹목적이고 소모적인 논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잉여가치’의 분석도 <자본> 1권에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3권의 ‘이윤’으로 전화 그리고 나아가 기업가이윤‧이자‧지대로의 분화로 진행되면서 풍부해진다는 점, 또한 ‘가치 개념’, ‘노동력의 가치크기’, ‘전형문제’ 등과 관련하여 다양한 해석가능성과 수많은 논쟁점을 그 안에 내포한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완성된 체계라 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분명한 점은 잉여가치론만으로는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한계에 대한 이론적 ‘비판’으로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정치경제학 비판’으로서 <자본>에서 비판의 대상은 자본주의 생산관계 자체와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다(곽노완 2006b, 201 참조). 자본주의 자체의 한계에 대한 ‘비판’은 맑스 스스로 <자본> 1권 2판 서문에서 강조했듯이 무엇보다도 ‘공황’과 가장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6) 뿐만 아니라 노동가치론과 잉여가치론은 맑스와는 다르지만 스미스와 리카도의 고전정치경제학에서도 제기되는 이론적 테제인 반면 맑스가 ‘공황’을 논의하는 '이론틀'7)은 고전정치경제학의 이론틀과 완전히 단절된 지평위에서 구성된다. 이는 스미스와 리카도의 고전정치경제학이 자본주의적 세계 ‘공황’을 역사적으로 모른 채 집필되었고8), 그들과 달리 맑스가 처음으로 ‘공황’을 통합적인 이론적인 체계로 통합하여 ‘정치경제학 비판’ 체계, 곧 독자적인 ‘이론틀’과 이에 기반하여 새로운 자본주의 이론을 구성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역사적 조건 말고도 더 중요한 점은 맑스가 스미스나 리카도와는 달리 자본주의를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따른 생산관계가 아니라 역사적인 과정에서 형성되었고 내재적인 한계를 갖고 있으며 소멸될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본주의의 내재적인 한계는 필연적으로 공황을 확대재생산하며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을 강화시킬 수밖에 없다는 점에 있다.

 

 맑스의 공황론이 서 있는 이러한 ‘이론틀’은 고전정치경제학의 자연주의적인 지반을 뒤엎는 독자적이고 혁명적인 이론틀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치경제학 비판’으로서의 ������자본������은 기존의 고전정치경제학과는 달리 독자적인 이론틀에 입각하여, 자본주의의 발전경향 속에서 ‘공황’의 필연적인 확대재생산을 이론화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즉 자본주의의 이론적 분석으로서 새로운 이론틀과 더불어 새로운 자본주의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 맑스에게서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의 내용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곽노완 2006a, 211-219 참조).  


둘째로, <자본>의 서술방법과 플란(Plan)이 ‘공황’의 서술방법 및 서술의 지평과 관련되는 부분에 대해서 살펴보자. ‘공황’에 대한 서술이 <자본>의 핵심내용을 이룬다면, <자본>의 독특한 서술방법에 대한 이해는 ‘공황’에 대한 서술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한 가지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정치경제학 비판’ 서술범위와 체계가 <요강>(1857-8년) 및 1859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이래 1861-3년의 <자본> 1권 초고 및 <잉여가치학설사> 초고와 1863-5년의 <자본> 3권 초고를 거쳐 <자본> 1권(1867년) 및 1877-8년의 <자본> 2권 초고까지 결정적으로 네 차례 변동되었고, 그 이후에도 한 차례 더 변동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플란 변경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서술범위만의 변동을 의미하지 않고 그 밑에 깔려있는 이론틀의 변동을 포함하고 따라서 이론틀의 변경과 그에 따른 서술방법의 변경을 읽어낼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자본>에서의 ‘공황’의 서술범위와 서술 기반이 결부되어 있다. 로스돌스키가 1968년에 <요강>을 분석하면서 이와 관련된 해석을 제시한 이래9) 이른바 ‘플란논쟁’은 현재까지 진행되면서 맑스주의 논쟁사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글에서 이 논쟁의 전모를 살펴볼 수는 없고 ‘공황’과 관련되는 최소한의 수준에서 짚어보고자 한다. 맑스가 ‘공황’을 다루려는 계획은 5단계에 걸쳐 범위가 바뀌어 왔다고 할 수 있다.

 

1단계는 <요강>(1857-8년)부터 1859년까지에 걸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체계에서 ‘자본일반’이 서술된 다음 경쟁과 임노동 등등을 다루고 맨 마지막 부분에 따로 ‘공황’에 관한 장을 넣을 것으로 기획한다.10) 이 때 플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념어는 ‘자본일반(Kapital im allgemeinen)’과 ‘경쟁(Konkurrenz)’이다. ‘자본일반’이란 ‘가치’와 ‘화폐’와는 구별되는 차원에서 ‘자본’들에 공통된 내용을 가리키고 따라서 개별자본들 사이의 차별성이나 관계 곧 ‘경쟁’은 배제한다. 그러나 ‘자본일반’은 “현실적 운동의 관념적 표현”으로서 “자본의 성립과정”은 포괄한다(II.1.1/229; 42/231). 여기서 맑스의 철학적인 이론틀과 관련하여 두 가지 난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개별자본에 공통된 내용으로서 ‘자본일반’은 고전철학적인 ‘본질주의’ 및 ‘귀납주의’의 잔재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별자에 공통적인 것으로서의 일반 즉 상위개념을 추출하는 것은 전형적인 귀납주의적 사유방식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렇게 추출된 공통성이 진짜로서의 ‘본질’이고 차이들은 모두 ‘비본질’이라고 간주한다면, 플라톤의 이데아론 이래 지속되어 온 철학적 ‘본질주의’라 할 수 있다. 중세의 유명론과 실재론의 논쟁사에서 실재론은 이러한 관념적 ‘본질’의 실재를 주장하는 교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고전철학적 이론틀이 갖는 난점은 뻔한 분류의 체계에 뭔가 심오한 지식이 숨겨져 있다고 보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노마’라는 사람은 동물과 달리 이성과 도덕심을 갖고 있다. ‘개발아’라는 사람도 노마만큼은 아니지만 이성과 도덕심을 갖고 있다. ‘온달’이라는 바보도 이성과 도덕심을 갖고 있다. ‘나리자’라는 여자도 이성과 도덕심을 갖고 있다. (...) 고로 모든 사람은 동물과 달리 이성과 도덕심을 갖고 있다. 따라서 사람의 본질 곧 사람을 사람이게끔 해주는 것은 이성과 도덕심이다. 그러면 이성은 또 무엇이고 어떤 것들로 분할되는가?” 등등의 고전철학적 사고방식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사실 아무런 지식도 주지 않고 독단적 교의로 빠지기 십상이다. 가치 및 화폐와 구별되면서 개별자본들에 공통적인 것들을 맑스가 ‘자본일반’이라고 부를 때, 여기에는 비록 자본의 성립과정이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아직 고전철학적인 공통성의 ‘본질주의’의 잔재가 남아있다. 이는 어떤 순수한 본질을 이미 거부하고 있는 당시 맑스의 이론틀에 입각할 때 유지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개별적인 것들의 공통적인 것으로서 본질을 기각하고, 사람의 본질을 “관계의 총체”(3/7)로, 사회를 “개인들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맺고 있는 관계들과 관련들의 총계”(II.1.1/188; 42/189)로 간주하는 새로운 이론틀에 입각해 있었기 때문이다. 즉 개별자들의 동일성을 전제하는 ‘공통적 본질’을 기각하고 오히려 ‘관계’의 중첩‧다면성과 경향성‧역동성을 사회이론의 대상으로 확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이론틀이 점점 분명해지면서 공통성으서의 ’자본일반’이라는 용어뿐만 아니라 기존의 서술체계 전체가 파열되고, 자기의 독특한 이론틀에 걸맞는 서술체계로 대체됨은 당연한 일이었다.      

 

2단계는 과도적인 시기로 1861-1863년이라 할 수 있다. 이때는 맑스가 아직 애초의 서술범위를 ‘자본일반’으로 축소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자본일반’에 결정적이고 일반적인 ‘경쟁’이 포괄되고 애초 ‘임노동’ 일부를 포함하며 지대에서 다루고자 하는 일부가 포함되는 등 ‘자본일반’의 외연이 점차적으로 확장되는 시기이다(II.3.5/1623 참조). 이 단계에서 적어도 ‘공황’의 가능성들은 ������자본������ 1권에 ‘자본일반’의 한 부분으로 포함되고 ‘현실적 공황’은 ‘신용’과 더불어 현실적 경쟁이 분석될 ‘자본일반’ 외부로 곧 ‘정치경제학 비판’ 외부로 밀려난다.     

 

3단계는 1864년-1878년까지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자본일반’이라는 용어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개별자본의 공통성이 아니라 ‘사회적 총자본’(II.5/507; 23/658, II.4.2/242; 25/175, 24/108, 24/139, 24/282)이 맺고 있는 관계의 지배적인 경향으로서 ‘자본의 일반적 본성Natur’(II.4.2/178; 25/119),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내적 구조 말하자면 이상적 평균’(II.4.2/853; 25/838), ‘자본의 내적 본성’(II.5/255; 23/335) 등의 용어들이 등장한다. 맑스는 여전히 ‘일반적’, ‘내적’, ‘본성’ 등등의 용어가 갖는 모호성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변화는 벌써 이론틀의 변화와 정교화를 드러내주는 징표들이다. 이시기 ‘일반적’이라는 용어는 맑스에게서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의미로 쓰인다. 곧 때로는 ‘단순하거나 기본적인 공통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다른 곳에서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의미로(II.6/709 ;23/28), 또 다른 곳에서는 ‘지배적인 경향’을 지칭하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II.1.1/26; 42/24, II.5/493; 23/553, II.5/415; 23/553, 24/38f.). 단순하거나 기본적인 공통성을 의미할 때, ‘일반적’이란 용어는 교집합(A∩B∩C...)에 해당하는 부분을 의미한다. 그런데 ‘일반적’이라는 용어가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의미로 쓰일 때는 합집합(A∪B∪C...)을 뜻한다. 곧 ‘일반적allgemein’이라는 용어는 우리말에서처럼 독일어에서도 거의 정반대의 뜻들을 가지는 모호한 말이다. 따라서 저자들 스스로 이 용어를 모호하게 나아가서 스스로 속으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엄밀한 일관성을 갖고 사용하기 힘들기 때문에 문맥에 따라 좀 더 분명하게 일관성을 갖는 용어로 대체하거나, 저자가 의미를 정의해주고 일관되게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11) 그런데 맑스는 다른 의미로 ‘일반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지배적인 경향성’을 지칭하는 경우로 이는 맑스에게 고유한 사용법이라 할 수 있다. 1857-9년 단계에 ‘자본일반’이 압도적으로 ‘개별자본에 기본적이고 공통적인 내용’을 뜻한다면, <자본> 3권 초고에 나오는 ‘자본의 일반적 본성’은 ‘사회적 총자본이 맺고 있는 관계들의 지배적인 경향’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이라는 동일한 용어가 다른 의미로 사용되면서 ‘정치경제학’의 구도가 단순히 변화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론틀에 입각한 새로운 이론으로 단절적으로 변혁된 것이다. 1863년 이후 ‘정치경제학 비판’의 기획과 <자본>은 서술과정은 이전처럼 ‘개별자본에 기본적으로 공통적인 내용에서 다수자본을 다루는 과정으로의 진행’이 아니라, 처음부터 사회적 총자본의 차원에서 ‘기본적이고 단순한 관계들로부터 복잡한 관계들의 경향성과 역동성으로의 진행과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12) 이렇게 볼 때, 개별자본이 아니라 사회적 총자본이 맺고 있는 관계에서만 이론화될 수 있는 ‘공황’을 따로 독립된 장에서만 다루지 않고 최소한 기본적인 계기들은 서술의 매 단계에서 각각의 차원과 관련하여 점차적으로 다루는 1863년 이후의 ‘정치경제학 비판’ 기획이 이해될 수 있다. 이렇듯 ‘플란’이 변경되면서 ‘공황’의 기본적인 관계와 경향은 ‘공황의 가능성’ 부분을 넘어서며 ‘신용’의 기본내용과 더불어 2단계보다 더 체계적으로 ‘정치경제학 비판’ 체계에 편성되며,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공황론’은 ‘정치경제학 비판’ 체계 밖으로, 이후 별도의 과제로 넘겨진다.13) 실제로 <자본> 1권 1장의 맨 앞에 등장하는 ‘상품’은 자본주의 이전 단순생산시대의 상품이거나14) 개별자본의 상품이 아니고, 나아가서 산업자본만의 상품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아직 화폐와 자본이 분석되진 않았지만, 그 ‘상품’은 사회적 총자본의 상품관계전체의 단순한 범주인 것이다. 그리고  <자본> 1권 1장에서 상품에 대한 서술이 종결되는 것도 아니다. ‘상품’의 점점 복잡한 관계는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을 거쳐 <자본> 3권에서 ‘가격과 이윤’, ‘평균이윤’ 등과 관련되어, 그리고 ‘가공자본’으로서의 ‘상품’까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분석된다고 할 수 있다. ‘공황’도 마찬가지다. <자본> 1권 3장에서 이미 상품과 화폐의 교환과 관련하여 ‘공황’의 단순한 관계와 ‘가능성’이 서술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II.5.74; 23/128 참조). ‘공황’의 가능성과 필연성도 관련하여 <자본> 3권 신용과 가공자본이 다루어지는 부분까지 계속 복잡해지는 관계들이 분석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에서 ‘공황’에 대한 맑스의 분석은, 하나의 통일된 체계를 이루기보다 부분적으로 모순적이기도 하다.15) 이러한 사정은 서로 상이하고 모순된 맑스주의 공황론들이 생겨나는 기반을 이룬다. <자본> 2권의 재생산표식에서 완결된 공황론을 추출하려는 ‘불비례설’(로자 룩셈부르크), 3권의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에서 완결된 채로 추출된 ‘과잉축적론’(정통파와 근본주의)이나 ‘과소소비론’(스위지) 등은 ‘공황’의 부분적인 계기들을 절대화시키는 시도라 할 수 있다.16)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맑스의 전체적인 ‘공황’ 논의에 못 미칠 뿐만 아니라 현대의 ‘공황’ 특히 ‘금융공황’을 분석하기에는 너무 부분적이다. 더구나 맑스의 ‘공황’ 논의는 부분적으로뿐만 아니라 근원적으로도 이원적인 긴장을 갖고 있다. 그것은 산업자본이 사회적 총자본을 대표하며17) 공황의 원인은 산업자본의 재생산과 축적과 관련된다고 보는 이론틀 vs. 사회적 총자본은 산업자본‧상업자본‧은행자본을 모두를 포괄하므로 공황은 신용과 가공자본을 포함한 자본전체의 관련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는 이론틀의 모순과 긴장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보다 상세히 살펴볼 것이다.    

 

플란 변경과 관련한 4번째 단계는 1878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이때는 1873년 9월 증권시장의 몰락과 더불어 시작한 공황이 미국과 대륙에서 지속되고 급기야 영국의 산업공황으로 점화된 시점이다. 당시 <자본> 2권의 출간을 준비하던 맑스는 작업을 중단하고, 당시 공황이 정점에 달하고 이에 대한 분석이 완수되기 전까진 2권을 출간하지 않겠다고 1879년 4월 10일 다니엘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밝히고 있다(34/370f.). 그 전까지 ‘정치경제학 비판’의 체계에 ‘공황’의 기본적인 계기들만을 분석하려고 했으나, 이제 ‘플란’을 바꿔 공황의 보다 복잡하고 발전된 계기들 중 이론적인 부분을 보다 포괄적으로 ‘정치경제학 비판’ 내로 통합하려고 했던 것이다(Krätke 1999, 42ff.). 그런데 1878년에 영국까지 번진 공황은 쉽사리 종결되지 않고 중간에 부침은 있었으나 1890년대 초반까지 장기간 만성적으로 지속된다. 곧 맑스 사후까지(맑스는 1883년에 죽었다) 1870년대의 공황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자본> 2권과 3권은 완결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엥엘스가 맑스 사후 편집한 <자본> 2권은 주로 1877-78년 초고를, 3권은 1865년 초고를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1878년 이후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체계에 포함되거나 별도로 다루어지더라도 ‘공황’에 대해 변화된 맑스의 분석은 반영되어 있지도 알려져 있지도 않다.


2) 공황의 정의 


앞의 주 4)에서 보았듯이, 맑스에게서 공황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고유한 현상이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 생산산계가 지배적으로 되기 이전에는 공황이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공황은 역사적으로 1825년부터 발발하기 시작하였다(II.6/702; 23/20 참조). 공황이 자본주의에 고유한 것이라면, 이는 자본주의 이후 곧 사회주의나 꼬뮨주의에는 공황이 없을 것이란 점을 함의한다. 물론 자연재앙이나 전쟁 등으로 인한 재생산의 감소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용과 투기를 포함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극복되어 있다면 재생산의 감소가 공황으로 나타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맑스의 말대로 공황은 “생산과정의 급작스러운 중단”(II.4.2/324; 25/260) 내지 “급작스러운 감가와 재생산과정의 현실적 중단 및 교란 그리고 이와 함께 재생산의 현실적 감소”(II.4.2/328; 25/264f.)이고, 이를 통한 생산력의 가공할 낭비이기 때문이다. 즉 재생산의 감소만이 아니라 ‘급작스러운’ 재생산과정의 중단, 생산능력이 있음에도 생산능력이 멈춰서는 것이 공황의 요건이기 때문이다.18) 재생산과정의 ‘급작스러운’ 중단은 순식간에 생산단위의 상당수가 파산하여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있음에도 활동을 멈추어지는 것을 의미하고, 이러한 공황의 발발은 맑스가 말한 대로 신용제도의 발전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현실화될 수 없다(II.4.2/328; 25/264).

 

‘공황론’의 담론이 논쟁을 수반할 수밖에 없지만, 이론적 성과물로 축적되고 점점 정교화되기 위해서는 우선 ‘공황’에 대한 이론적 정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공황의 급작스러움에 맑스의 언급이 대한 정의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본주의에 고유한 내재적 한계로서 공황은 사회적 총자본의 축적동기와 목적을 기준으로 하여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총자본의 축적동기와 목적은 맑스가 지적한대로 이윤의 극대화라고 할 수 있다(II.4.2/325; 25/26).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공황에 대한 최소한의 정의를 재구성하면, ‘신용을 통해 조달된 투자와 투기의 실패 때문에 자본의 파산이 급증하고 사회적 총자본의 생산이 절대적으로 감소하며 총이윤이 급작스럽게 음(-)으로 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신용과 공황의 급작스러운 발발의 관련을 명시해주며, 공황이 개별자본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총자본의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공황이 특유하게 자본주의적인 현상이라는 점, 나아가 자본주의의 투자와 투기가 신용을 통한 사회적 자금의 사적인 이용과 전유에 근거한다는 점 등을 분명히 해준다. 이러한 공황은 개념적으로든 수치상으로든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되는 시점과 다르지만 대체로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이 정의는 공황의 기준을 명시함으로써 어떤 상황이 공황의 상황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척도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완만한 불경기와 급작스럽게 발발하는 공황을 구분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불경기란 절대적인 이윤이 음으로 되는 상황이라기보다는 이윤율이 양(+)이면서 낮아지거나 낮은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불경기는 공황과 달리 완만한 경기후퇴를 의미하는 것이다. 경제성장률이 양(+)을 유지하면서 낮아지거나 낮게 유지되는 상황은 대체로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공황론이 다양한 경기순환론과 완전히 다른 이론틀에 입각한다는 점 또한 분명할 것이다. 콘트라티예프의 장기순환론이든, 슘페터의 경기순환론이든, 주글러의 순환론이든, 대다수 경기순환론은 자본주의의 재생산과 축적과정을 마치 바이오리듬처럼 점진적이고 부드러운 과정으로 간주한다. 그들이 그리는 경기순환은 4계절이 순환하는 자연과정과 흡사하다. 물론 상당수 맑스주의자들도 완만하고 중장기적인 경기후퇴를 공황과 혼동하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조절이론가들에게서 이는 체계적으로 나타난다. 리피에츠는 70년대 이래 장기 불황국면을 축적공황 내지 포드주의의 위기라고 정의한다(Liepietz 1987, 1055). 이렇게 되면 사실상 경기후퇴와 공황의 경계는 사라진다. 이러한 테제는 정통파와 자본논리학파에게도 수용된다. 예를 들어 자본논리학파의 대표적 이론가인 알트파터는 맑스의 ‘공황’ 개념을 경기순환론과 구분하면서 ‘공황’의 급작성을 주장하지만, 한편으론 70년대 이후 80년대 초반까지도 ‘거대공황’ 내지 ‘형태위기’라고 하면서 공황과 절충적으로 경기후퇴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Altvater 1983, 85 및 96). 자본논리학파에서 벗어나서 ‘화폐적 가치론’을 주창하는 미하엘 하인리히도 이러한 ‘거대공황’, ‘형태위기’ 등  알트파터의 테제를 수용한다(2006, 344 및 368 이하). 국가독점자본주의론자인 크뤼거도 ‘포드주의의 위기’라는 리피에츠의 테제를 마찬가지로 수용한다(Krüger 1998, 3). 21세기에 들어서도 맑스주의 이론가들에게 대세를 이루고 있는 ‘포드주의 위기’론은, ‘포드주의 또는 케인즈주의’식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이 정상적 국면이고, ‘포드주의’나 ‘케인즈주의’를 대체한 ‘신자유주의’ 국면은 자본주의의 예외적 국면이라는 입장을 암암리에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케인즈주의와 유사성을 갖는다. 요컨대 ‘포드주의의 위기’란 테제는 암묵적으로 포드주의의 재건 또는 포드주의와 유사한 안정적이고 고성장의 ‘정상적인’ 국면을 목표로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소위 ‘예외적인’ 국면에 대한 반대와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국면으로의 복귀를 희망하는 표명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30년 이상 지속된 국면을 ‘위기’ 또는 ‘공황’이라고 하면서 예외적이고 비정상적 국면이라고 한다면, 2차 대전 이후 약 1973년까지 30년이 못되는 소위 ‘포드주의’ 국면을 정상이라고 볼 수 근거는 무엇이냐고 되물을 수 있다. 또 비정상적이고 예외적인 국면이 어떻게 30년 넘게 지탱될 수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 보다는 오히려 1973년 이후의 저성장과 고실업의 국면도 자본주의의 정상적 국면의 한 형태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러한 저성장과 고실업의 국면이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경향으로 앞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보는 것도 현재의 추세를 추종하는 믿음에 불과할 것이다. 자본주의 안에서 고성장과 저실업의 국면이 다시 형성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경우라도 자본주의의 한계가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정의한 자본주의의 한계로서 급작스러운 ‘공황’의 과정도 자본주의의 정상적 국면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공황의 필연성이란 바로 자본주의가 예외적으로가 아니라 정상적으로 ‘공황’을 확대재생산할 수밖에 없는 축적체계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필연성은 선언으로서가 아니라 설명으로서 이론적 근거를 필요로 한다. 이 주제가 바로 공황론의 주요내용을 이룬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자. ‘공황’은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과정이지만 완만하고 중장기적인 경기후퇴와는 달리 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급작스러운 단절이고 파열이다. 그리고 이러한 파열은 자본가계급마저 자본주의의 한계와 모순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근거를 이룬다.19) 그리고 노동자계급과 대다수 다중에게는 ‘체제변혁’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하는 강력한 현실적 근거이기도 하다. 물론 변혁주체의 형성이 미비하거나 노동자계급과 다중이 자본주의체제에 정치적 문화적으로 압도적으로 포섭되어 있고 현실사회주의의 기획이 실패로 드러나는 조건에서는 공황이 곧바로 변혁적 상황으로 이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공황’의 정의와 관련하여 이미 맑스의 공황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난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바로 ‘공황의 정기적 주기성’이라는 맑스의 테제와 관련된다. 맑스는 ‘공황’이 자본주의에서 정기적이고 주기적으로 발생한다고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다.20) 맑스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배경중의 하나는 기계제 대공업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고정자본의 주기적인 교체가 공황의 주기성을 야기한다고 본 데 있다. 나아가 맑스는 이러한 주기성은 법칙성을 갖고 있기에 수학적으로 정확히 계산할 수 있다고까지 생각하고 무어라는 수학자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무어는 결국 변수가 너무 많아서 일단은 수학적으로 해결불가능하다는 답장을 보냈지만 맑스는 계속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1873년 5월 31일 맑스가 엥엘스에게 보내는 편지 33/82 참조). 맑스가 ‘공황’의 주기성을 믿었던 데는 또 한 가지 근거가 있다. 1825년에 역사적으로 처음 시작한 공황은 1836년, 1847-8년, 1858년, 1865년 등 거의 정기적으로 발발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1973년까지 28년동안 세계자본주의가 ‘공황’을 겪지 않았다는 점은 ‘공황’의 정기적이고 주기적인 발생을 위한 현실적인 근거가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도 이미 맑스 시대에나 지금에나 공황이 정기적이고 주기적으로 발발할 것이라고 테제는 정당화되기 힘들다. 우선 기계 등 고정자본의 개체가 개별기계의 차원에서는 또는 백번 양보하여 개별 자본에게는 주기적일 수 있지만, 공황이 논의되는 차원인 사회적 총자본의 차원에서 정기적이고 주기적이라는 근거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개별자본마다 고정자본의 개체시점이 다르고 나아가 확대재생산과 더불어 기존 고정자본의 개체만이 아니라 새로운 고정자본의 축적까지 고려하면, 그리고 새로운 자본들이 등장하면, 사회적 총자본의 수준에서는 고정자본에 대한 투자규모가 정기적이고 주기적이라고 단정적으로 추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황’은 10년 만에 발발할 수도 있고, 5년 만에 발발할 수도 있고, 30년 만에 발발할 수도 있다. ‘공황’의 정기적인 주기성이 자본주의적 공황의 필연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황’의 발발자체가 그리고 자본주의적 축적이 필연적으로 ‘공황’의 가능성의 축적을 수반한다는 점이 자본주의 안에서 공황의 필연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공황의 정기적이고 주기적인 발발’이라는 맑스의 테제를 포기하더라도 맑스적 ‘공황론’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니다. 



3. 21세기 금융공황과 맑스의 모순


1) 맑스의 ‘공황론’ 체계와 금융공황론의 위상

앞서 밝혔듯이 맑스의 공황론은 <자본> 서술단계에 따라 점차 ‘구체적’인 내용을 담는다. 여기서 ‘구체적’이란 ‘현실적’이란 의미가 아니라, 총자본이 맺고 있는 복잡한 관계의 역동성과 경향성에 대한 분석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맑스의 공황론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각 서술단계에서의 공황에 대한 언급을 통일적으로 통합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에서 공황의 분석을 통일적인 체계로 재구성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무엇보다도 서로 모순되는 테제들이 병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맑스가 생전에 <자본>을 완성된 체계로 편찬하지 않았다는 점도 작용한다. 나아가 만약 통일된 체계로 재구성할 수 있다 하더라도 현실의 공황을 곧바로 분석할 이론틀이 되기에는 빠져있는 영역이 많다. 무역과 자본의 이동, 지폐의 최종적 지불수단으로의 변화, 외환자체의 상품화 등은 <자본>의 ‘플란’에 속하지 않거나 <자본>의 테제에 반하여 공황과 관련된 새로운 조건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더욱 결정적인 이유는 <자본>의 개별적인 테제들 중에 이론적으로 지지하기 힘든 것들뿐만 아니라 근원적으로 모순적인 복수의 ‘이론틀들’이 충돌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할 때 과잉축적론이나 과소소비론, 불비례설, 이윤율저하설 등의 맑스주의 공황론들은 자체의 내적근거뿐만 아니라 영역의 차원에서 많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글에서 이러한 주제 모두를 다룰 수는 없다. 여기서는 1973년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 이후 공황의 주요 형태를 이루는 금융공황을 분석하는 이론틀과 관련해서만 맑스의 공황과 관련된 이론틀의 모순을 밝히고 이에 기초하여 맑스적으로 확장된 독자적인 금융공황론의 몇몇 요소를 정식화하는 데 제한하고자 한다.


2) 금융공황의 개념과 맑스의 모순


금융공황의 개념에 해서는 논자에 따라 다양한 정의가 있을 수 있다. 이글에서는 신용‧증권‧외환‧외채 등 금융시장의 교란에서 출발하여 파산이 급증하고 재생산과 총이윤이 급작스럽게 음(-)으로 되는 상황을 포괄하여 ‘금융공황’으로 정의하고자 한다.21) 이는 금융시장에서의 교란이 모든 공황의 출발점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공황의 출발점은 전쟁, 자연재앙, 원료가격과의 급등, 주요산업분야의 과잉축적으로 인한 이윤율 저하와 파산 등 다양하다. 예를 들어 1973년과 1980년의 세계공황은 원유가의 급등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금융공황이 아니라 ‘오일쇼크’ 또는 ‘오일공황’으로 부를 수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자본주의적 신용과 금융제도를 매개로 단순한 생산감소만이 아니라 파산이 급증하면서 공황으로 발전했지만. 공황의 출발점, 나아가 공황의 원인을 하나의 근본 원인으로 환원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공황은 자본주의적 축적이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복합적인 요인들의 특정한 작용방식에 따라 발발하게 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맑스는 이미 런던의 거대은행의 파산과 무수한 사기기업의 몰락으로 촉발된 1866년의 공황이 압도적으로 금융적 성격을 갖는다고 밝히고 있다(II.5/540; 23/697 참조). 곧 전반적인 공황의 한 형태로서 금융공황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모순적이게도 제한된 금융공황의 개념을 정식화한다. 1865-5년에 쓰여진 <자본> 3권의 초고에서 그가 화폐공황 또는 신용공황이라고 명명하는 금융공황은 두 가지 상이한 상황을 지칭한다. 첫째는 화폐공황은 현실적 공황과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현실적 공황이 확장되는 국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II.4.2/595; 25/533). 이는 <자본> 1권 3판에 붙이려고 한 주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나는 테제이다:


“본문에 규정되어 있듯이 일반적 생산공황 및 상업공황의 특수한 국면으로서 화폐공황은 마찬가지로 화폐공황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종류의 공황과는 구별된다. 후자의 화폐공황은 자립적으로 발생할 수 있으나 공업과 상업에는 단지 반작용할 뿐이다. 이 공황 운동의 중심은 은행, 증권, 금융을 직접적인 영역으로 하는 화폐자본이다.”(23/152 각주 99)


그런데 이러한 테제는 ‘일반적 공황’(여기서는 전반적인 공황이라는 의미로 쓰였다-필자)은 금융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채, 생산과 상업에서 발생하고 금융은 사후적으로 이렇게 독자적으로 발생한 공황과 관련되면서 일반적 공황을 확대시키는데 기여할 뿐이라는 제한된 견해를 보여준다. 또는 금융공황은 독자적으로 발생할 수 있지만, 이 경우 공업과 상업에는 ‘단지’ 제한적으로만 영향을 미치고 따라서 일반적 공황으로까지는 확장되지 않고 금융영역에서의 교란으로만 남을 것이라는 입장을 드러낸다. 이처럼 금융공황이 전반적 공황의 부수적인 국면이거나 단지 금융영역에 국한된 교란이라고 한다면, 전반적 공황의 한 형태로서 1866년에 발발한 공황이 금융공황이라고 보는 맑스 자신의 견해와는 상당히 모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순의 충돌은 맑스의 이론틀이 일관되지 않고 계속해서 이중적이기 때문인데, 이는 뒤에서 더 자세히 보게 될 것이다.


3) 사회적 총자본의 회전과 금융자본의 회전


맑스는 사회적 총자본의 회전을 여러 단계에서 정식화하고 있다. <자본> 1권 4장에서 나오는 ‘자본의 일반적 공식’ 곧 G(화폐)-W(상품)-G'(증가된 화폐)(II.5/110; 23/170)는 사회적 총자본의 회전 및 산업자본, 또는 개별자본의 회전형태를 완결적이고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정식화라고 볼 수 없다.22) 오히려 아직 노동력의 상품화와 잉여가치의 생산이 고찰되지 않은 단계에서의 잠정적인 정식화라고 보아야 한다. 신용까지 감안한 가장 포괄적인 형태는 [G(화폐: 대부자금)-G(화폐)-W(상품: 노동력과 생산수단)‧‧‧P(생산과정)‧‧‧W'(생산된 상품)-G'(화폐: 매출액)-G'(화폐: 신용원금과 이자)]로 정식화될 수 있을 것이다.23)

 

그런데 맑스는 산업자본, 상업자본, 금융자본24) 각각의 회전 형태를 이러한 자본의 회전에서 각각 일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고 있고 여기에 큰 난점이 있다. 곧 금융자본의 회전은 G-G'의 형태(앞의 정식에서 맨 앞과 맨 뒤), 산업자본의 회전은 G-W‧‧‧P‧‧‧W'-G'(앞의 정식에서 중간) 형태로 자본부류에 따라 회전형태를 영 다른 것으로 맑스는 간주한다. 이러한 견해가 이론적으로 지지되기 힘든 이유는 자본의 한 부류로서 금융자본은 산업자본과 마찬가지로 노동력과 생산수단(건물, 현금입출금기, 집기, 컴퓨터 등)을 구매하며 노동과정 내지 생산과정(P)을 회전의 필수적인 계기로 갖고, 나아가 이자소득만이 아니라 배당소득 가공자본의 매매차익 등 다양한 이윤의 원천을 갖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금융자본의 회전형태도 자본의 회전형태가 산업자본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산업자본이든 금융자본이든 또는 상업자본이든 발전된 자본주의적 기업은 신용을 통한 투자와 축적을 필수적인 계기로 내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모두 사회적 총자본과 마찬가지로 [G-G-W‧‧‧P‧‧‧W'-G'-G']라는 회전형태를 취한다는 점에서, 맑스가 밝히고 있는 산업자본의 회전형태 [G-W‧‧‧P‧‧‧W'-G']도 적절하지 않다. 이러한 사정은 자본부류만이 아니라 모든 개별자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산업자본과 상업자본, 금융자본의 회전형태를 이처럼 사회적 총자본의 부분들로 분할하는 맑스의 견해는 상당히 모순적이다.

 

금융자본(그의 용어로는 화폐자본, 이자낳는 자본, 은행자본-필자)의 경우, 맑스 스스로 고리대금업과 구분하여 자본의 한 형태라고 명시하고 있고25) 논리적으로도 금융자본이 다른 부류의 자본과 동일하게 노동력을 구매하고 착취하는 등등의 계기를 필수적인 것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업자본이든 상업자본이든 금융자본이든 회전형태는 사회적 총자본의 회전형태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각각의 자본부류마다 차이가 있다면 회전형태가 아니라 회전형태의 ‘내용’이라고 봐야 한다. 곧 금융자본 회전의 특수성은 그 형태가 아니라 산업자본이나 달리, 1) 예금과 신용창조라는 막대하고 추가적인 신용조달의 원천을 갖고 2) 생산과정이 원료의 소재적인 변형과정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이는 상업자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3) 비소재적인 생산과정 때문에 W‧‧‧P‧‧‧W'과정이 WPW'라는 하나의 과정으로 응축되고 시간적으로 단축된다는 점, 따라서 4) 시공간적으로 제약받지 않고 금융시장의 급격한 확대가 가능하다는 점, 나아가 5) 구매된 상품이 ‘가공자본’이라는 특성 곧 직접적인 사용가치를 갖지 않고 법률적인 청구권이나 소유권에 불과하다는 점, 마지막으로 6) ‘가공자본’의 가격변동이 이자율‧미래에 대한 기대 등과 승수적으로 결합되어 산업자본의 상품가격변동보다 신속하고 폭이 넓어 압도적으로 ‘투기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 등이다. 이렇게 보면 산업자본, 상업자본, 금융자본 각각이 공황과 관련하여 동등하게 관련될 수 있고, 오히려 금융자본의 투기적 성격에 입각하여 맑스시대 공황의 주요형태를 이루는 금융공황 그리고 특히 1973년 이래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로 신자유주의적인 변동환율제 및 외환의 자유화와 더불어 외채, 외환, 환율 등으로 촉발된 공황을 분석할 이론적 기초를 갖게 될 것이다.   

 

물론 맑스도 ‘예금 및 신용창조’(II.4.2/526; 25/488), ‘사용가치를 갖지 않는 가공자본의 가공성’, ‘가공자본의 투기성’(II.4.2/523; 25/485) 등에 대해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보았듯이 ‘산업자본’만을 자본의 대표자로 간주하고 금융자본은 산업자본으로부터 도출된 부수적이고 의존적인 형태로 간주하면서(II.5/118; 23/179), 금융자본의 회전형태를 G-G'로 축소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맑스는 이러한 문제들을 제기하지 않았고 따라서 답하지 않았다. 그는 신용과 가공자본의 투기성이 공황의 필수조건이라는 점을 누차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황의 궁극원인을 신용 및 가공자본과 독립된 산업자본의 이윤율 저하나 과잉축적, 또는 잉여가치의 증가와 임금의 감소에 따른 소비부족 등에서 찾는 근원적으로 모순적인 복수의 이론틀들을 갖고 있었지만 스스로 이 모순을 명료히 깨닫지 못했다. 우선 산업자본만이 자본의 회전형태를 완결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은 산업자본만이 자본의 대표자라고 보는 맑스의 근거는, 위에서 제시된 이글의 테제에 입각해 볼 때 부당하다. 나아가 따라서 산업자본의 생산‧회전‧재생산‧이윤과 평균이윤율 등등을 우선적으로 다루는 <자본>의 체계도 내적인 모순뿐만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이론적 체계로서 커다란 제약을 야기한다. 내적인 모순으로는 산업자본의 평균이윤율을 확정한 다음 상업자본의 분석이후 상업자본까지 포괄하는 수정된 평균이윤율을 다시 계산해야 하는 이중적 과정을 거치면서 맑스와 엥엘스 모두 계산실수를 할 뿐만 아니라 상업자본에 고용된 노동자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지 아닌지를 확정하지 못함으로써 수정된 평균이윤율 계산이 미궁에 빠지게 된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자세한 논의는 김수행 1988, 205 이하 참조).

 

맑스가 산업자본을 자본의 대표자로 보는 근원적인 이유는 오히려 물질적‧소재적 생산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중심축을 이룬다는 그의 19세기적 물질론의 철학적 이론틀이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26) 물론 그렇다고 비물질노동으로 노동의 중심축이 변화하였으며 제조업노동자는 기계화‧컴퓨터화된 생산과정에 완전히 통합되고 통제되어 변혁의 가능성을 상실했다고 보는 후기 네그리의 입장은 또 다른 극단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Negri 1986 그리고 Negri/Lazzarato 1991 참조).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의 축적체제를 금융자본과 대주주의 지배체제로 파악하는 후기 조절이론(Aglietta 2000), 금융자본이 지배권을 행사하여 의도적으로 고이자율을 관철시키며 금융자본의 이윤율과 산업자본의 이윤율 격차의 구조화와 이에 따른 축적의 위기를 주장하는 알트파터(1992a, 1992b) 등의 금융화론도 맑스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식이 아니라 반대의 한계로 치닫는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 자본주의적 투기의 개념


맑스가 가공자본의 시장가치(가격이라는 의미로 쓰였음 - 인용자)가 사전에 계산된 기대에 의존하기 때문에 투기적이라고 했을 때(II.4.2/523: 25/485), 이는 금융공황의 계기로서 자본주의적 투기Spekulation를 이론화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상어에서 투기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조장하고 자연인이 아니라 자본이 투기의 주체가 되는 자본주의적 투기를 투자와 구분하고 금융공황과 관련해서 분석하는 것이 주제이다.

 

맑스는 <자본> 3권 초고에서 투자와 투기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가치부가를 제시하는 코버트에 동의하면서 그를 인용하고 있다.


““상업의 이윤은 가격과는 별도로 자본에 부가된 가치이다. 두 번째 것(투기)은 자본가치나 가격자체의 변동에 기초한다.””(Th. Cobert, 127, II.4.2/379 주에서 재인용; 25/319)


이처럼 가치를 부가하는가와 더불어(II.4.2/537; 25/498), 맑스는 <자본> 2권 초고에서 투자와 투기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사회적으로 필요한가’ 여부를 첨가한다(24/258). 곧 맑스에게서 자본주의적 투기는 우선 1) 사회적 필요와 무관하게 2) 가치를 부가하지 않으면서 3) 구매된 상품의 예상된 가격상승으로부터 이윤을 얻기 위한 거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투기의 주체는 누구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왜냐하면 위와 같은 개념은 굳이 자본주의적이지 아닌 거래에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술작품에 대한 부유한 자연인의 투기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가공자본’의 시장가치(가격)가 기대에 의존하기 때문에 투기적이라는 맑스의 언급은 자본주의적 투기의 주체를 개념화할 수 있는 기초를 준다. 맑스에게서 ‘가공자본’에 대한 투기자는 압도적으로 금융자본(은행자본)이다. 그는 은행자본의 최대부분은 순수히 가공적이라고 말한다(II.4.2/525; 25/487). 더구나 은행자본의 투기자금은 사회전체성원의 예금 등 신용차입에 의해 조달된 것이라고 명시한다(II.4.2/525 및 543; 23/487 및 507). 곧 투기의 주체가 압도적으로 자본이며, 특히 금융자본이라는 점이 자본주의적 투기의 4번째 특징을 이룬다. 나아가 투기자금은 압도적으로 타인자본이라는 점이 5번째 특징을 이룬다. 물론 가공자본이 단순한 청구권이나 소유권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현실의 자본을 대표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따라서 이러한 가공자본에 대한 투기는 사기와 체계적으로 결합된다는 점도 맑스는 지적하고 있다(II.4.2/505, 523 및 543; 25/457, 484, 및 507).

 

이러한 자본주의적 투기의 특징을 확장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 자본주의적 신용의 특징에 기인하는 것으로, 투기이윤은 투기주체 곧 개별자본 특히 금융자본으로서의 개별자본과 그 개별자본의 대주주에게 귀속된다는 점이다. 물론 이점은 투자이윤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투기의 실패와 파산으로 인한 부담은 사회전체성원에게 직간접적으로 분담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투기의 실패로 인한 은행의 파산은 해당 은행노동자들의 실직을 가져오고, 나아가 파산정리를 공적자금으로 처리하면 결국 사회전체성원의 세금으로 충당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투기의 주체가 산업자본인 경우도 한 단계 더 거를 뿐, 마찬가지다. 산업자본의 사기적 투기실패(예를 들어 90년대 중반의 한보철강이나 97년의 기산의 파산, 2000년대의 대우)는 재벌개인이 사회전체성원의 자금을 착복하는 방식이다. 이는 결국 은행자본의 대규모 부실화를 가져오고 이는 공적자금을 통해 보전되고 종국에는 사회전체성원에게 고통분담되는 것이다.    

 

이제 ‘투기’를 공황의 발발과 체계적으로 관련지으려 했던 우노학파의 이토와 맑스적 투기이론을 비교해 볼 수 있다. 1975년에 이토는 투기의 주체를 상업자본으로, 투기의 대상을 산업자본의 상품으로 정식화시킨 바 있다. 얼핏 보면 절대적 과잉축적에 따른 고이자율의 결합으로 공황의 발발을 설명하는 우노학파의 논지에서 벗어난 듯이 보이는 초기 우노의 이론은, 그러나 우노학파의 과잉축적론을 보완하는 성격을 갖는다. 그는 임금의 상승을 수반하는 절대적 과잉축적27)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차이에 따라 차별적으로 상품의 가격을 등귀시킨다고 한다. 그리고 가격이 오르는 추세에 있는 상품은 투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산업자본은 해당 상품을 투기적으로 생산하고 이는 상업자본에 의해서 재고투기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 이에 따라 대부자본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여 결국 이자율이 상승하며 투기적인 산업자본가와 상업자본가가 채무부담을 상환하지 못하는 상황이 도래하여 신용제도의 붕괴와 일반적 공황이 급작스럽게 발발하게 된다는 것이다(Itoh 1975 참조).

 

 1999년도에 이토의 테제는 다시 보완된다. 우선 투기의 대상을 자본시장 내지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 그리고 금융파생상품으로까지 확대한다. 더불어 투기의 주체도 은행과 금융기관으로까지 확대한다(Itoh/Lapavitsas 1999, 122 및 197f). 그런데 가격이 상승하는 주식에 대한 투기가 결국 상품가격이 상승하는 산업의 주식으로 환원되면서 1970년대의 자신의 투기이론이 가졌던 지반을 벗어나지 못한다(앞의 책 131ff.). 그는 특정 주식가격의 상승이 실물 상품가격의 상승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는 본다. 해당 상품의 가격이 하락하는 경우에도 신기술과 최신설비의 도입으로 상품1개당 비용이 줄어들고 수요가 폭주하는 경우에는 이윤이 증가로 인해 주식가격이 오를 수 있다는 점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가 바로 맑스가 개별자본의 특별잉여가치와 특별이윤을 통해 설명하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맑스가 설명하진 않았지만 비슷한 경우가 개별기업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상당기간 특정 산업분야 전체에도 생겨날 수 있다. 반도체산업전체가 한 때 기술혁신에 따른 가격하락에도 불구하고 수요가 폭증하여 상당기간 높은 이윤으로 인해 주식가격이 올라가는 상황이 그 경우다. 거꾸로 상품가격이 올라가는데도 해당 주식의 가격이 하락하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원유가와 원료가의 상승으로 비용이 상승한 화학섬유회사들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제품가격상승에도 불구하고 수요가 감퇴하여 이윤이 감소하고 주가가 하락하는 경우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제품가격과 주가를 단순하게 정비례관계로 보는 이토의 테제에는 무리가 따른다. 결국 투기의 주체는 금융자본으로까지 확대했지만, 투자의 대상을 계속해서 가격이 오르는 상품이나 해당 주식으로 제한하는 한계가 이론적 제약을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21세기와 자본주의적 투기대상의 확장


금융자본이 투기의 주요 주체가 된 것은, 증권시장이 발전한 이후라 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 이후 1973년까지 아직 양적으로는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급속히 팽창하면서 지배적인 형태로 발전한 주식회사와 주식시장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상품과 투기의 대상을 시장에 내놓았다. 바로 자본자체 또는 자본의 소유권으로서의 주식이 투기대상으로서의 상품이 된 것이다.28) 이는 자본주의 상품시장을 비약적으로 변화시키는 발전이라 할 수 있다. 이때의 금융공황은 주로 주식시장의 붕괴로 인해 금융자본의 주식투기가 실패하는 것과 관련되어 발생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1873년도의 증권시장의 붕괴로부터 시작한 공황과 1929년 블랙 먼데이에서부터 시작한 대공황이라 할 수 있다.

 

1973년 이후는 자본주의는 또 다른 상품과 투기의 대상을 금융시장에 내놓았다. 바로 외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의 공황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다. 이는 ‘금융적 자본’의 영역을 신용으로 제한하는 크로티를 비판하면서, ‘금융적 자본’의 축적자체를 금융공황과 결합시키려는 조복현(1997)도 체계적으로 간과하는 영역이다. 1971년에 금태환제도가 종언을 고하고 1973년에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변동환율제가 시작되면서 외환의 가격(환율)이 자유화되고 급변하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전에는 없었던 형태의 공황이 발발할 가능성이 생겨난다. 바로 환율공황‧외환공황 같은 금융공황의 특수한 형태들이다. 1973년 이후 변동환율제의 도입과 더불어 외환시장과 자본시장을 자유화한 나라는 거의 예외 없이 외채위기, 환율위기, 외환위기 등의 금융공황을 경험하였다.

환율과 외환‧자본시장 자유화의 결합은 투기주체로서 금융자본의 리스크와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을 크게 증가시키면서 자본주의의 공황취약성을 증폭시키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이는 해외주식시장에 대한 투기의 ‘승수효과’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환율과 외환시장‧자본시장이 자유화되는 데 따른 불안정성은 자본주의의 세계체제의 공황취약성을 증폭시킨다. 달러지배체제의 패권국인 미국의 경우도 환율위기 등 금융공황이 대대적으로 도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미국의 2001년부터 2006년 5월까지의 누적적자만 2조 6천억 달러로 미국 GDP의 약 20% 수준에 달한다. 만약 다른 나라가 이정도 무역 적자를 기록했다면 일찌감치 파산에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유럽을 제외한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이 무역과 외환보유통화를 달러화로 하면서 미국 바깥에서 달러화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무역적자는 이자를 지불할 필요도 없이 단순히 달러화를 찍어내기만 해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는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패권에 기인하는 현상이다. 하지만 미국의 경제적 패권이 위협받는다면 그 동안 누적된 무역적자는 당장 부채로 돌아설 것이다. 더구나 각국이 기준외화를 달러화가 아닌 통화로 대체한다면 달러화의 환율은 구소련과 러시아의 루블화 못지않게 폭락할 가능성이 있다. 달러화 보유국 1위국인 일본과 4위국인 한국까지만 보유달러를 다른 통화로 바꾼다면 2004년 기준으로 당장 1조 9천억 달러가 과잉된다(WestLB, FAZ 23.02.2005 참조).

 

 매일 약 240억 달러화가 세계 금융시장에서 무역 등을 위해 실거래됨을 감안할 때, 세계시장에서 매일 달러 공급을 2배로 하면서 약 4개월(83영업일) 유지할 수 있는 금액이다. 매일 달러화의 가치가 10% 떨어진다고 하면 4개월후 달러화의 가치는 7영업일만 지나도 48%로 떨어질 것이다. 14영업일이 지나면 24%, 21영업일이 지나면 12%, 28영업일이 지나면 6%, 35영업일이 지나면 3%, 42영업일이 지나면 1.5%, 마침내 83영업일이 지나면 약 0.02% 곧 2/10000로 떨어져 1달러는 0.2원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다. 더구나 보유달러만이 아니라 무역 결제통화마저 바꾼다면 달러화는 수요가 급감하여 더더욱 떨어질 것이다. 이는 거꾸로 얘기하면 아시아 등 세계가 미국에 공짜로 준 부를 미국이 일거에 갚아야 하는 부담이다. 현재 세계외환시장에서 미국 달러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60%에 달하고 유로화는 20%에 달한다. 유로화의 비중이 커지든, 20년이 지나 중국경제규모가 미국을 능가하여 중국 위안화의 비중이 커지든, 아니면 아시아 4개국만이라도 통화통합을 이루어 제3의 통화를 기축통화로 하든, 미국의 달러화가 세계외환시장에서 절대적으로 축소하게 되는 경우에는 미국경제가 대공황에 빠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럴 경우 달러체제에 속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은 공황과 더불어 심각한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 물론 그 전에 미국과 유럽 및 일본, 중국, 한국 등이 타협하여 누적된 미달러화의 문제를 덮어두고 새로운 제3의 통화로 통화통합을 이룰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의 신자유주의적인 변동환율제도는 21세기에 대공황을 몰고 올 위험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현재 선물환 등 파생금융시장의 확장은 금융시장의 공황취약성을 더욱더 증폭시키는 요소이다. 외환 등 금융상품의 가격 등에 대한 ‘기대’ 자체가 상품으로 투기의 대상으로 금융시장에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외환시장에서 거래되는 금액은 달러로 환산하여 매일 약 2조억달러에 달한다. 이중 약 2%만이 무역 등에 실제 필요한 금액이다(Altvater 2006, 132 참조). 이는 외환거래의 98%가 선물환 등 투기적 거래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러한 파생금융상품시장은 자본주의의 축적이 진행됨에 따라 더욱 확장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메카니즘은 상품의 종류와 양을 끊임없이 증대시키고 이와 더불어 투기대상이 되는 상품의 종류를 새로이 창출하는 투기시장확장의 메카니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금융시장은 소재적 이동과 생산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기술적으로도 손쉽게 확장 가능한 영역이다. 더구나 선물환 등 파생금융상품은 적은 계약금으로 거대한 투기이윤과 투기손실을 거둘 수 있는 금융상품이기 때문에 더욱 투기적이고 급속히 성장할 것이다.

 

21세기에 특히 확장될 가능성이 있는 상품시장은 ‘기대’를 넘어서 금융상품가격의 ‘예측에 대한 예측’으로서의 투기적 상품일 것이다. 그 중의 한 형태는 옵션이라고 할 수 있다. 옵션이란 장래 특정일 또는 일정기간 내에 미리 정해진 가격으로 특정자산을 매매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계약으로서의 거래를 의미한다. 옵션매입자의 손실위험은 프리미엄 범위내로 한정된다. 하지만 옵션매입자는 수익이 발생할 경우 전체 수익을 획득할 수 권리를 갖는다. 전세계 금리옵션시장만 2002년도에 10조 9,333억 달러로 1988년 대비 33배이상 확대되었다(BIS, Derivative Statistics). 금리옵션 외에도 통화옵션 등 다양한 옵션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는 종류를 확대하면서 커질 금융시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21세기 초반기까지 파괴력의 측면에서 외환 내지 환율과 관련된 금융투기시장의 붕괴가 공황의 가장 강력한 요인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5) ‘가공자본’의 가격


맑스는 ‘가공자본’의 가격을 수익에 정비례하고 이자율에 반비례하는 것으로 고찰한다.


“매년 평균이자율이 5%라고 가정하자. 500l의 자본은 대부되거나 이자낳는 자본으로 전환된다면 매년 25l을 수익금을 올릴 것이다. 따라서 매년 25l의 수익금은 500l의 이자로 간주된다.

(...)

가공자본의 형성은 자본화라고 불린다.”(II.4.2/520f.; 25/482ff.)


이에 따르면 ‘가공자본’의 가격은 다음의 공식으로 정식화할 수 있다.


가공자본의 가격 = 연간수익금 / 연이자율   ---    (1)


이 공식은 정기적인 고정수익금을 가져오는 국채나 공채와 같은 가공자본에 대해서 타당하다. 특히 개별가공자본의 가격만이 아니라 총가공자본의 총가격에도 마찬가지로 적용가능하다. 연간수익금이 정해져 있다면, 가공자본의 가격은 연이자율에 따라 반비례하여 변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현대 자본주의에서 주식과 증권의 가격은 이와 같은 공식으로 단순화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라와 제도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1주당 수익금이나 배당금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맑스는 이미 위의 공식의 한계를 포착하고 이를 보완하고 있다. 맑스 시절 주식회사는 주로 철도회사와 같이 거대한 불변자본을 필요로 하는 회사들이었고, ‘주식’도 아직 미발전하여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대체로 국채와 유사하게 이자율에 근접한 고정된 배당률을 받았다.29)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는 연간수익금이 가변적이고 이는 가공자본의 가격을 결정하는 변수라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가공자본의 가격을 결정하는 이 연간수익금은 현실적인 수익금이 아니라 기대된 수익금이고 투기적이라고 지적한다. 이제 연간기대수익금이 이자율과 더불어 가공자본의 가격을 결정하는 변수로 파악되는 것이다.  


“국채건 주식이건 이런 소유권들가치자립적인 운동은, 그런 소유권들이 자신이 대표하는 청구권이나 자본과 나란히 현실적인 자본을 형성한다는 가상을 보장한다. 그런 소유권들은 곧 상품이 되었다. (...) 가치증식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자본의 가치가 변동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에도 그 소유권들의 시장가치명목가치와는 다른 다양한 결정요인을 갖는다. 한편 그 소유권들의 시장가치는 수익금의 크기와 확실성에 따라 변동한다. (...) 그 시장가치는 부분적으로 투기적이다. 왜냐하면 그 시장가치는 현실적인 수익금이 아니라 기대된 (미리 계산된) 것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 연간수익금이 법적으로 고정된 경우에 이런 증권들가격이자율비례하여 증감한다.”(II.4.2/523; 25/485, 밑줄은 인용자)


이런 맑스의 언급에 기초해서 가공자본의 가격을 다음과 같이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가공자본의 가격 = 기대수익금 / 이자율  --- (2)


여기서도 가공자본의 가격은 개별가공자본만이 아니라 공황론의 논의가 기반하고 있는 사회적 총자본의 총가공자본 가격에 대해서도 타당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공식에 이미 기대수익금과 이자율의 복합적인 ‘승수효과’를 분석할 수 있는 근거가 주어진다. 우선 독립적으로 보자. 기대수익금은 그대로고 이자율은 1/2로 떨어진 경우 가공가본의 가격은 2배가 된다. 왜냐하면 가공자본의 가격은 E/Z에서 E/(Z/2) = 2E/Z로 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자율은 또한 기대수익금을 변화시키는 변수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자율의 하락은 부채신용의 이자부담을 줄이고 수요를 확대하여 주식회사의 기업이윤율을 높이고 따라서 주식의 연간기대수익금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연이자율이 1/2로 준 효과로 기대수익금이 2배가 되었다고 가정하면 가공자본의 가격은 2E/(Z/2)=4E/Z가 되어 4배로 상승한다. 물론 기대수익금을 결정하는 변수는 이자율 말고도 기대원료가격, 기대수요, 경쟁상황 등 무수히 많다. 그러나 벌써 가공자본의 가격은 그런 변수들의 영향뿐만 아니라 거시경제변수인 이자율변동에 따라 ‘승수효과’를 갖고 변동함을 알 수 있다. 이자율이 상승하고 이에 따라 기대수익금이 감소하는 경우에는 또한 가공자본의 가격이 ‘승수효과’를 갖고 하락할 것이다. 물론 현대자본주의에서 기대수익금은 기대배당금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순이익은 일부만 배당되고 나머지는 축적되며 기대매매차익이 주가를 결정하는데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식(2)에서 기대수익금은 기대 이자율에 따라 할인된 가격으로서 기대배당금뿐만이 아니라 기대매매차익을 포괄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이를 감안하여 공식(2)를 다음과 같이 변형할 수 있을 것이다. 


가공자본의 가격 = (할인된 기대배당금 + 할인된 매매차익) / 이자율


이런 점에서, 할인된 기대매매차익을 주가의 변수로서 고려하는 이토의 정식화는 검토할 가치가 있다. 단 주식가격을 연간기대배당금/연간시장이자율로 봐도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이토의 주장은 절충적이다. 그는, 주가차익을 독립적으로 고려하는 이유가 단지 기대의 효과를 분석하기 위해서일 뿐이라는 주장하는데(Itoh/Lapavitsas 1999, 113 및 269f. 미주 11 참조), 이는 현재 주식의 총수익금을 할인된 미래배당금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토의 정식화는 자본주의적 주식회사의 축적을 결국 기업가이윤이 모두 배당되는 단순재생산으로 환산하여 분석함으로써 기업가 이윤이 항상적‧구조적으로 배당과 축적기금으로 분할되는 자본주의적 축적경향과 가공자본의 투기적 성격의 관련을 일면적으로 제한하는 문제점을 갖는다. “가치증식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자본의 가치가 변동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기업이윤이 모두 배당되는 경우-인용자), 이 경우에도 그 소유권들의 시장가치명목가치와는 다른 다양한 결정요인을 갖는다”라는 앞의 인용문에서 나타나듯이, 가공가본의 가격이 명목가치뿐만 아니라 배당과도 독립적인 결정요인들을 갖는다는 점이, ‘주식가격=기대배당금/이자율’로 환원되는 이토의 정식에서는 모호해지는 것이다. 공식(2)와 공식(3)은 가공자본과 더불어 자본주의 금융시장이 불확실하고 가변적인 ‘기대’와 이자율에 따라 금융시장이 ‘승수효과’를 가지면서 투기적으로 큰 변동폭을 갖고 불안정하게 움직이며 따라서 급격한 붕괴와 ‘금융공황’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함축한다. 

 

하지만 공식(2)와 공식(3)은 태환제도의 폐지(1971년), 변동환율제의 도입과 외환‧자본시장 자유화가 진행되는 1973년 이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시대에 금융시장의 확장과 금융공황취약성을 검토하는 데는 불충한 점이 있다. 맑스는 자본주의의 이자율이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경쟁과 경기상황에 의해 금융시장에서 내생적으로 결정된다고 하면서 제한된 개념을 갖고 있었다(II.4.2/433; 25/372 참조). 따라서 이자율은 경기순환의 종속변수로 파악되고, 급격한 이자율상승은 공황의 요인이 아니라 증후로만 파악된다. 이는 중앙은행을 정점으로 하는 신용제도가 아직 태환제도로 인해 화폐량과 이자율을 결정하는데 제한된 영향력만 갖고 있었던 역사적 경험을 맑스가 자본주의에 필연적인 현실로 절대화하는 데에 기인한다. 물론 은행학파의 전통에 따라 화폐수량설을 비판하면서 화폐와 신용의 내생성을 정식화하여, 화폐와 실물경제의 외적 요소로 간주하는 고전파와 신고전파 그리고 현대의 통화주의를 비판하는 이론적 기초를 마련해준 것은 맑스의 공적이다. 하지만 현대자본주의에서 태환의무에 제한받지 않고 재할인율 조정을 통한 중앙은행의 이자율결정은 내생적일 뿐만 아니라 외생적인 요소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곧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신용관계와 금융시장에서의 이자율 결정 외에도 1971년 태환제도의 폐지와 더불어 중앙은행이 이자율을 인위적으로 올리거나 하락시킬 조건이 주어진 것이다. 물론 중앙은행의 이자율 결정영역은 일정한 제약 속에 있다. 경기의 부침과 인플레이션과 환율 등이 제약조건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에 따라 내생성을 고수하면서 급격한 이자율상승을 공황의 종속변수로 환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공식(2)와 공식(3)은 변동환율제, 외환‧자본시장 자유화에 입각한 자본주의신자유주의국면에서 금융공황취약성을 보여주기에는 이론적으로 제한된 부분이 있다. 금융공황취약성의 발전을 이론적으로 근거지우기 위해서는 변동환율제, 외환‧자본시장 자유화가 관련된 부분이 이론적으로 정식화될 필요가 있다.

 

이제 제3세계주식시장에 투기된 미국금융자본의 투기이윤율과 제3세계금융공황취약성의 관련을 보자. 대체로 제3세계주식시장은 절대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도 규모가 작아 미국금융자본의 유출입에 크게 영향 받는다. 이 경우 미국금융자본의 투기이윤율은 승수효과를 갖는다. 우선 이 경우 미국금융자본의 장에서 보면 ‘해외투기이윤율=(주가차익 및 배당금*환차비율)/투기자금’으로 정식화할 수 있다. 곧 주가차익과 배당금과 더불어 환차비율이 곱해짐으로써 변동폭이 매우 크게 나타나는 것이다. 변동환율제와 외환‧자본자유화가 지배적인 현대자본주의에서 미국금융자본만이 아니라 세계의 금융자본들이 제3세계뿐만 아니라 해외의 주식시장에 투기할 유인은 충분하다. 그런데 특히 미국금융자본 등 선진국금융자본이 제3세계주식시장에 투기할 유인은 한 가지가 더 있다. 그것은 첫째 미국금융자본의 투기자금규모는 제3세계주식시장의 종속변수가 아니라 독립변수로 작동할 규모에 달한다는 것이다. 곧 미국금융자본의 투기자금규모로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제3세계 주식시장과 주가를 조종할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미국금융자본의 입장에서 이러한 영향력이 항상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제3세계 주식시장에서 미국금융자본이 하나의 통일체가 아니라서 뒤늦게 투기적으로 뛰어들거나 뒤늦게 철수하면 오히려 손해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런 변동환율제가 도입되고 외환‧자본시장 등 금융시장이 자유화되고 개방된 제3세계의 입장에서는 금융공황취약성이 급격히 증대한다. 이를 감안할 때, 앞의 공식(3)으로 정식화된 가공자본의 가격은 다음과 같이 보완될 수 있다.


가공자본의 가격 = (할인기대배당금+할인기대매매차익+외국자본의 할인기대환차익) / 이자율 --- (4)


해외금융투기자금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이자율을 그대로 둔 것은 외국금융자본도 가공자본에 대한 투기 대신 신용을 통해 투기대상국의 이자율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공식(4)는 제3세계만이 아니라 미국 등 선진국 가공자본의 가격에도 전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금융세계화가 진전되는 경향을 감안할 때, 이는 갈수록 적용범위가 커질 것이다. 공식(4)는 외국금융투기자본의 유출입은 상품교역과 달리 시간적 제약을 받지 않고 가변적인 기대에 의존하는 특성 때문에 급격히 일어날 수 있어서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의 급격한 붕괴 가능성이 변동환율제와 외환‧자본시장자유화에 따라 확대되는 측면을 감안한 것이다. 그러나 특히 제3세계에서 가공자본의 가격은 해외금융자본의 유입과 철수에 따라 할인기대주가차익과 외국금융자본이 얻게 되는 할인기대환차익의 변동이 심하다. 그리고 그러한 변동이 규모가 작은 제3세계 외환‧금융시장에 쉽게 교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무역수지나 경상수지의 적자가 구조화되어 있는 제3세계의 경우 외국자본의 유출입에 따른 환율변동을 방어할 장치가 결여되어 있어 가공자본 가격의 급등락과 환율공황과 외환공황, 외채공황의 개연성이 클 수밖에 없다. 물론 선진국 중 미국의 경우도 구조화되어있는 무역적자와 경상수지적자로 인해, 일본이 미국금융시장에서 철수하는 정책으로 선회할 경우 또는 중국 등이 달러가 아니 다른 통화를 기준외화로 전환할 경우 달러화의 급락과 주식시장의 붕괴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금융공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6) 금융투기시장의 확장과 21세기 자본주의의 축적


자본주의적 투기의 대상은 금융시장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에너지, 원자재 등도 오래전부터 이미 선물시장이 형성되어 투기의 대상이 되는 상품들이다. 21세기에는 이산화탄소 배출권 같은 오염권이 새로운 상품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는 매매될 수 있는 상품으로 전환되어 투기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자본주의적 투기의 주체도 금융자본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산업자본, 상업자본도 이미 투기의 주체들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투기의 메카니즘, 곧 사회적 부를 특정자본이 투기자금으로 전용하는 메카니즘은 신용제도의 발전을 수반하는 자본주의적 축적에 따라 점점 대규모화하고 특정자본에게 투기자금이 집중되는 경향을 띤다. 이는 투기시장의 실패가 미치는 파괴력이 증대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단, 이자율이 높게 유지되면서 투자와 축적으로 흐르던 자금이 투기자금으로 가면서 실물경제의 축적이 둔화되었다는 알트파터 등 ‘실물경제로부터 금융시장의 탈구테제’Entkopplungsthese 내지 카지노자본주의론에는 문제가 있다(Altvater 1992b, 146f., 157 참조). 이러한 주장은 투자와 투기가 제로섬게임이라고 볼 때 가능한 것이다. 유사한 주장이 해리스에게서도 나타난다(Harris, 1995, 260 및 1995b, 206ff. 참조). “수익을 추구하는 활동이 잠재적인 부의 창조활동를 구축하는 한, (금융시장이) 자립화경향이 실물경제의 성장과 축적역동성에 대한 침해 내포한다”(Hübner 1996, 30)고 주장하는 휘브너도 동일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화폐나 신용공급은 맑스도 명시하듯이 신용창조를 통해도 신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II.4.2/528; 25/490). 따라서 정해진 자금이 투자나 투기로 분할된다는 그들의 주장에는 설득력이 없다. 어쨌든 신용제도의 발전은 자금의 집중과 신용창조 등을 통해 투자뿐만 아니라 자본의 투기를 촉진하게 된다.


7) 신용제도와 과잉축적, 과잉투기, 이자율의 관계


신용과 공황의 관계에 대한 맑스의 견해는 일관되지 않지만 대체로 자본주의에서 신용제도가 발전하면서 신용팽창의 경향이 초래되고 축적과 투기를 극한으로까지 밀고 간다고 본다(II.4.2/501, 505, 544f., 586; 25/452, 457, 509, 524)30). 그리고 이러한 과잉축적의 결과로 이윤율이 급격히 하락하고 이자율이 급격한 상승하여 가공자본가격의 붕괴하며 사회적 총자본의 파산이 급증하여 전반적 공황을 초래한다고 본다. 이는 신용제도의 발전이 과잉축적과 과잉투기의 지렛대라고 보는 입장이다.

크로티, 하인, 하인리히 등은 자본주의 신용제도가 항상 신용팽창으로 인해 과잉축적을 초래한다는 맑스의 견해에 대해 비판한다. 하인리히는 신용제도가 실물자본의 축적에 제약적으로도 확장적으로도 작동할 수 있다고 한다(Heinrich 2006, 301). 따라서 “축적하라, 축적하라! 그것이 모세이며 예언자이다”(II.5/479; 23/621)라는 맑스의 무제한적인 축적동기에 대한 언급은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축적법칙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한다(Heinrich 2006 앞의 곳, Crotty 1993, 9도 참조) .

 

하인은 구조적인 과잉축적의 공황을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축적법칙은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고 한다. 확립된 자본주의의 신용제도를 전제할 때, 이자율의 상승과 하락은 기대이윤율을 반비례하며 정책적으로 이자율의 인상할 수도 있고 이 경우 축적을 제약한다는 것이다(Hein 1998, 157). 이는 정당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포스트 케인지안과 마찬가지로 맑스의 이자율이론을 외생적이라고 해석하면서(Hein 2006, 126) 21세기의 ‘축적공황’를 과잉축적의 문제로 보지 않고 스태그플레이션의 문제로 본다. 곧 ‘과소축적론’으로서의 ‘공황론’을 전개하는 것이다(Hein 2003, 125). 그리고 신용과 축적의 문제를 이자율정책과 실물자본의 축적문제로 보면서, 공황의 문제가 ‘신용’문제로 축소되어 금융자본의 투기문제는 체계적으로 간과된다.   

 

크로티는 기업의 전략은 무한한 축적동기가 아니라 ‘성장과 안정의 트레이드오프’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한편 그는 중단될 수 없는 장기투자가 상존함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경쟁의 압력이 커지고 안정성이 위협받게 되어도 단순히 투자나 사업분야에서 철수할 수 없다고 한다. 크로티 스스로 밝히듯이, 이는 케인즈주의의 모델과 차별되는 부분이다(Crotty 1993, 16) 어쨌든 경쟁이 “강요된” 형태로 강화될수록 기업은 이윤보다는 생존(곧 성장보다는 안정) 전략을 취하게 되어 임금삭감과 비용절감적 투자가 지배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렇게 그는 경쟁과 기업전략을 이론화시킴으로써 신고전파나 케인즈주의로의 한계를 넘어섰음을 강조한다(앞의 곳, 17). 그는 이토나 클라크와 스스로를 구별하면서 그들과 달리 위험성은 상존하고 단지 그 강도나 영역이 바뀔 뿐이라고 하면서, 위험한 자본주의에서 위험성이 적은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주장하는 이론틀을 벗어난다(앞의 곳, 19). 그리고 이처럼 “강요된” 경쟁압력의 상황이 금융과 신용의 불안정성을 강화시킨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경쟁과 기대, 기업전략 등을 맑스주의 금융공황론과 통합하면서, 여전히 금융공황을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신용관계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나아가 개별기업들의 전략변화로 사회적 총자본의 변화를 곧바로 도출하는 경향이 있다.

 

크로티를 체계적으로 비판하면서 ‘금융적 자본’의 축적과 실물부문의 과잉축적 내지 이윤율저하를 결합시키고자 하는 조복현의 시도는 이런 점에서 고찰할 가치가 있다. 그는 금융적 자본은 실물부문보다 더 가속화되어 팽창한다고 본다. 그리고 금융기관의 신용창조를 통해 팽창된 금융적 자본은 증권시장에서 투기적 수요를 증대시킨다고 한다. 여기서 그는 금융적 자본이 실물부문보다 빠르게 팽창하는 근거는 밝히지 않지만, “실물부문에서의 이윤전망 약화는 실물부문 투자를 금융자산에 대한 투자로 대체하게 한다”는 언급에서 어느 정도는 실물부문 투자로부터 ‘금융적 자본’ 내지 증권시장으로의 누출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조복현 1997, 236 이하). 이리하여 증권시장이 과열되고 금융적 자본의 가공적 특성이 강화되어 이 자본의 축적이 취약하게 된다는 것이다(앞의 책, 238). 그리고 이러한 금융적 자본의 취약성이 실물자본의 이윤율 저하와 결합하면 금융공황은 산업공황의 시발점을 형성하게 된다고 한다. 여기에는 산업자본의 장기적 특성으로 경쟁의 우위확보를 위한 생산력의 불균등 발전으로 인해 생산량이 확대되고 경쟁은 더욱 강화되어 과잉축적과 이윤율 저하 경향이 나타나며 특정한 투자, 비용, 생산성, 판매, 금융문제와 결합된 자본죽적의 주기적 특성이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이 주기적 특성에 기반하는 주기적 팽창이 장기적 특성을 강화시켜 이윤전망은 불투명하고 임금수준과 원재료 가격, 그리고 이자율이 높은 수준으로 상승하여 기업가이윤율이 큰 폭으로 저하되는 조건이 결부되어 있다고 한다(앞의 책, 234 이하). 이처럼 금융적 자본축적의 취약성과 산업자본의 과잉축적을 결합함으로써 금융공황, 그리고 금융공황의 산업공황으로의 발전을 분석하는 것은 금융공황의 계기를 ‘신용’으로 축소하지 않고 금융자본과 증권시장의 불안정성으로 확장하는 의의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는 이론적이고 분석적이기 보다는 서술적이다. 더구나 몇 가지 이론적 난점을 내포한다. 우선 그가 산업자본의 과잉축적과 이윤율 저하경향을 절충적이지만 당연한 것으로 나아가 장기적 특성으로 본다는 점이다(앞의 책, 234 이하 주 133). 과잉축적테제에 대해서는 하인리히와 하인의 맑스 비판이 적용될 수 있다. 그리고 이윤율이 저하하면 실물자본의 투자자금이 금융부문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테제는 지지하기 힘들다. 물론 상대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산업부문의 이윤율이 저하하면 대체로 금융적 자본의 이윤율과 축적률도 줄어든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금융시장신용창조를 통해 신용이 항상 팽창하는 경향을 가질 것이라는 테제도 일방적이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현실적으로는 1973년 이후의 국면에 대해서 대체로 맞는 지적이지만 이는 또 이윤율의 경향적 상승국면을 배제한다는 측면에서 일방적이고 서술적인 지적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차후의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점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금융공황취약성의 중요한 조건이 외환과 환율문제가 체계적으로 간과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윤율의 저하와 결합하지 않고도 금융공황 자체가 외환, 환율, 이자율 등등에 교란을 가져와 이윤율을 급격히 저하시키는 공황의 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 간과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이 상품시장의 확대와 더불어 투기대상을 확장하고 신용제도의 발전을 수반하면서 투기주체에게 투기자금을 몰아주는 메카니즘을 강화시키는 한, 공황에 대한 억제책이 발전해 있더라도 그러한 억제장치는 파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정기적으로 공황을 양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 투기의 대상과 주체를 끊임없이 강화시킴으로써 투기를 확장하고 그 실패의 가능성을 확대재생산한다는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축적자체가 공황취약성을 필연적으로 재생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신용제도의 발전에 의해 촉진된 금융투기시장의 급작스러운 붕괴는 기대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어느 때 발발할 지 알 수 없다. 곧, 이자율의 급격한 인상, 원료가와 에너지가격의 급격한 폭등, 환율과 외환신용조건의 급변 등은 21세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조건에서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요인들이고, 이러한 요인들은 이윤율의 하락이라는 조건이 없이도 발발할 수 있다. 이윤율은 점진적으로 하락하는 한 경기후퇴나 불황의 조건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공황의 조건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윤율의 급격한 하락 내지 사회적 총자본의 차원에서 마이너스 이윤율은 금융공황 내지 공황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금융공황의 결과들이다.

                  

      

4. 21세기 금융공황과 대안사회의 경제적 기초


지금까지 현대자본주의를 맑스와 대결시키면서 또 맑스의 저작과 대결하면서 금융공황취약성의 발전을 검토하였다. 이는 현대자본주의에서 다른 공황형태가 소멸되었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분석은 현대자본주의의 공황의 주요형태의 하나로서 금융공황의 계기들이 자본주의의 세계화와 더불어 발전하면서 자본주의의 공황취약성이 확대재생산되는 경향을 이론화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글은 자본주의 공황론의 전체체계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나 공황의 발생을 금융영역으로 제한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공황취약성에 대한 분석을 금융투기시장까지 확장시키려는 시도이다. 그런 점에서 이글은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신용관계에서 산업자본간의 경쟁요소를 신용의 불안정성과 관련시키는 크로티(1993)나 산업자본과는 독자적인 금융시장의 팽창과 더불어 ‘금융적 자본’ 축적의 불안정성과 실물부문의 이윤율 저하의 결합을 통해 금융공황의 발생을 설명하는 조복현(1997)의 논의를 보완하는 성격을 갖는다. ‘이론틀’의 차이점도 내포되어 있긴 하지만, 그들의 분석대상에서 제외된 외환 및 환율 등을 이론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금융시장의 세계화와 관련된 금융공황의 이론적 기초를 확대하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완결된 체계는 아니지만 맑스적 공황론을 확장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시도는 환율 및 외환과 관련된 21세기 금융공황의 가능성을 맑스적 이론의 확장을 통해 분석할 수 있음을 부각시키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맑스 이론틀의 근원적 모순성과 이중성과 비판적인 대결에 입각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럼으로써 공황의 주요 형태로서 금융공황은, 생산의 지나친 확장으로 인한 임금상승과 이에 따른 이윤감소의 상황만이 아니라 불황의 상태에서도 투기의 붕괴로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정식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황이 자본주의의 한계를 이루고 따라서 공황론이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적 비판이라고 한다면, 이는 한편으로 공황에 대한 논의가 자본주의 아닌 대안사회에 대해 시사점을 줄 수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착취의 극대화 곧 이윤의 극대화를 추진동기로 하는 자본주의가 21세기에도 형태를 바꾸면서 계속 공황을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면, 대안사회경제는 이윤과 착취의 종식과 더불어 공황의 조건들을 폐기하여 단절 없는 지속적 확대재생산의 조건으로 대체하는 메커니즘을 전제로 할 것이다.

 

이글에서 소묘한 금융공황론이 대안사회경제에 주는 기초적이고 직간접적인 시사점으로 몇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우선 신용과 이에 입각한 투기는 폐절되고, 전체사회적 축적기금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화폐와 외환에 대한 시사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1971년 미국공화당정부의 ‘금태환제 폐기’ 이후 전세계에서 상품화폐가 완전히 소멸하였다. 최종지불수단으로서 지폐는 자본주의의 신용화폐이거나 ‘예외적이고 일시적인’ 화폐가 아니라 ‘지속적이고 진짜인’ 화폐의 한 형태라는 사실을 1971년 이후  지금까지 지속된 불환지폐제가 보여주고 있다. 변동환율제와 특정 패권국의 화폐가 세계화폐로 기능하면서 초래되는 부정의, 불안정성과 ‘공황취약성’은 ‘잘못된’ 자본주의가 아니라, ‘정상적’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한 형태이고 국면인 것이다. 따라서 현 조건에서 ‘민주적인 협력’을 통해 ‘고정환율제’로의 회귀를 추구하는 화폐케인지안의 주장도(Heine/Herr 1996, 223), 금본위제로의 귀환을 예견하는 일부 맑스주의 화폐이론가들의 견해(Ganßmann 1996, 157)도 모두 무모한 생각이다. 역사적으로 폐기된 ‘상품화폐’를 자본주의에 영구적인 화폐 형태이자 “비생산적 형태” 내지 자본주의에 필수적인 “유통 공비faux frais”로  간주하는 맑스의 입장에서는(24/138), 꼬뮨주의에서 화폐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자연스럽고 필수적이다. 물론 상품화폐론은 다시 철학적으로 19세기 소재적 물질론의 이론틀을 충분히 극복하지 못한 맑스의 한계에서 기인한다.

 

‘공황’뿐만 아니라 ‘착취와 이윤’의 소멸을 위해 굳이 화폐의 폐지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현재의 자본주의적 화폐제도를 극복하는 방법은 변동환율제와 미달러화지배체제의 ‘공황취약성’과 부정의를 제거하는 제3의 ‘세계단일통화제도’일 것이다. 이는 이미 붕괴의 조짐을 보이는 미달러화지배체제가 5년 후든, 20년 후든 ‘거대한 공황’에 직면하게 되면 자본주의에서조차 ‘뒤늦게’ 제기될 수 화폐제도이다. 그러나 ‘꼬뮨주의’를 지향하는 좌파의 입장에서는, 미국과 투기적 금융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대안세계화’의 일부로서 ‘앞서서’ 제기하고 주장할 수 있으며, 정치권력을 획득한다면 우선 국지적으로 실현하면서 다른 자본주의정부에도 제안할 수 있는 제도인 것이다. 세계단일통화제가 대안경제체제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한 부분을 이룰 수 있다. 세계단일통화제도는 증권가격과 환율의 승수효과에 입각하여 세계를 떠도는 투기적 금융자본의 토대를 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상당부분 허물 것이며,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있어 만성적인 ‘외환공황’에 시달리는 자본주의국가들에게 안정적인 경제기반을 마련해 줄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토빈세도입’을 주장하는 케인즈주의자들과 사민주의좌파의 절충적 ‘대안세계화운동’을(Heine/Herr 1996, 224 그리고 Huffschmid 2001)넘어, ‘세계단일통화제도’는 좌파가 주도하면서 ‘대안세계화’의 일부로서 ‘자본주의자들’을 교육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우선 국지적으로 꼬뮨주의가 실현될 경우 세계적으로 꼬뮨주의를 확장하는 데에도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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