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안씨 충주파는 순흥안씨(3파) 문정공파 계열로 충청북도 괴산에 집성촌이 있는데, 입향조는 안우하(安友夏,1458~1544)의 넷째아들 안훈(安燻,1487~1535)을 중시조로 하는데 그들 집성촌에 관련된 신문기사입니다.
안명세(安名世)와는 숙질(叔姪)간이 되겠다. 안명세의 아버지 안담(安燂)은 안우하(安友夏)의 셋째아들이다.
신문기사를 보면 조선 중기의 문신 안명세(安名世,1518∼1548)와 관련된 것 처럼 되어 있는데, 그 안명세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안축(安軸) - 안종원(安宗源) - 안경공(安景恭) - 안순(安純) - 안숭선(安崇善) - 안의(安誼) - 안우하(安友夏) - 안담(安燂) - 안명세(安名世,1518∼1548)로 이어지는 계통으로 순흥안씨(3파) 14세이다.
안명세(安名世,1518∼1548)
안담(安燂)의 외아들이다. 1544년(중종 39)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선발되어 들어갔다가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 옮겼고,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승진하였다가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로 옮겨 임명되었는데, 1545년(명종 즉위년)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사관(史官)이었던 안명세(安名世)가,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정순붕(鄭順朋) 등이 일으킨 을사사화를 비판하는 시정기(時政記, 각 관청의 공문서를 정리하여 편집한 역사 편찬자료)를 써놓은 것이 누설되어, 1548년(명종 3년)에 31살의 나이로 처형되었는데, 처형되면서 집안사람들에게 "부디 자식들은 글을 가르치지 말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1567년(선조 즉위년)에 신원(伸寃)되었다.
1588년(선조 21)에 김효원(金孝元)이 지은 <묘갈명>을 보면, 장남 안천지(安千之)와 차남 안백지(安百之)가 묘갈명을 청해서 짓는다고 했고, 자손록을 보면 “슬하에 2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후사가 없고, 차남은 1녀가 있다.”고 하고 있다. 그래도 묘갈명을 지을 당시 장남는 현감, 차남은 찰방의 관직에 있었던 듯하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안명세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명종 7권, 3년(1548 무신 / 명 가정(嘉靖) 27년) 2월 14일(신유) 3번째기사
안명세를 당현에서 참하고 처자를 종으로 만들고 가산을 적몰하다
안명세를 당현(唐峴)에서 참(斬)하고, 그의 처자(妻子)는 종으로 만들고, 재산은 관(官)에서 몰수하였다.[사신은 논한다. 명세는 단정한 사람이다. 사재(史才)가 있어 한림(翰林)이 되었다. 을사년 정난(定難)의 옥(獄)을 당하여 사실에 의거해서 바르게 기록하고 자신의 의견을 첨가하여 《춘추(春秋)》의 뜻을 붙였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찬집청(撰集廳) 군간(群奸)들에게 지적을 받아 대죄(大罪)에 걸리고 말았는데, 국문을 받을 때에는 언사(言辭)가 자약하였고 죽음에 임해서도 신색(神色)이 조금도 변함 없었다. 동호(蕫狐) 같은 직필(直筆)이 몸을 죽이는 매개가 되었으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사신은 논한다. 안명세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이기 등이 그를 역당(逆黨)이라 하여 대역(大逆)으로 논해서 극죄(極罪)로 다스렸으니, 사화(史禍)가 여기에 이르러 극도에 달한 것이다. 이때 권요직(權要職)에 있는 자들은 모두 간흉(奸凶)의 무리로서, 찬집(撰集)한다는 설(說)은 맨 처음 윤인서(尹仁恕)의 입에서 나왔고, 그것을 참고(參考)한다는 의논은 마침내 이기 등의 계책에서 이루어져, 사신(史臣)으로 하여금 이같은 극화(極禍)를 받게 하였으니, 국가가 망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사신은 논한다. 안명세의 사화가 일어났을 때에 그의 장인 이은우(李殷雨)가 일찍부터 이기·정순붕(鄭順朋)과 약간 서로 알고 지냈던 터라, 이기의 집으로 달려가 눈물을 흘리면서 안명세를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이기가 말하기를 ‘이 죄로 어찌 죽기까지야 하겠는가. 내 생각은 이러하나 다만 정(鄭)을 만나보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은우가 그 말을 듣고 즉시 정순붕의 집으로 가서 애원하니, 순붕이 말하기를 ‘국가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 하므로 은우는 말 한 마디 없이 물러나왔고, 안명세는 끝내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 아, 슬프다! 대저 간흉들이 모여서 사류(士類)를 살륙할 때에 평소에 사이가 조금만 서로 좋지 않았던 자들도 역류(逆類)라고 무함하여 모두 유배하거나 죽이거나 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안명세의 직필(直筆)은 간흉을 주벌하는 법에 엄격하여 곧바로 그 흉특의 칼날을 범하였으니, 그가 온전할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그가 끝내 죽게 된데는 정순붕의 힘이 가장 컸다. 아, 참혹하다! 안명세는 또 《이십사공신전(二十四功臣傳)》을 일찍이 저술하여 을사년의 일을 직척(直斥)했다고 한다. 그의 사람됨은 단중(端重)하고 과묵하였는데, 처형(處刑)에 임해서도 안색(顔色)이 조금도 변치 않고 평소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장하게 여겼다. 한지원(韓智源)은 안명세와 동시의 사관(史官)이었는데, 명세가 직필을 했을 경우에는 그때마다 지원이 반드시 겉으로 칭탄(稱嘆)하는 표정을 내보이곤 하였으므로, 명세는 그를 믿을 만하다고 여겨 조금도 꺼리낌없이 직서(直書)하였다. 이때에 지원은 이 사실을 모두 이기에게 통하였는데도 명세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래서 화가 일어날 때를 당하여 명세가 지원의 집에 가서 자신을 영구(營救)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그러자 지원이 남에게 이르기를 ‘명세는 참으로 모자란 사람이라 하겠다. 그의 사록(史錄)에 관한 일을 내가 바로 퍼뜨렸는데, 도리어 나더러 시재(時宰)의 집에 가서 자신을 영구해달라고 하는 것은 또한 잘못된 일이 아닌가.’ 하였다.]
선조 1권, 즉위년(1567 정묘 / 명 융경(隆慶) 1년) 10월 15일(병신) 1번째기사
을사년 이후에 죄를 받고 적몰당한 사람들을 신원하라는 전교
전교하였다.
“을사년 이후에 죄를 받은 사람들은 뜻밖에 허물이 없는데도 죄에 걸려 대악의 이름에 빠진 자들이 매우 많다. 당시 조정의 선비들 중에 어찌 거개가 반역의 무리들이었겠는가. 모두들 그 당시의 공신인 이기(李芑)와 윤원형(尹元衡)의 무리들이 오랫동안 분심(憤心)을 품고 있다가 선왕(先王)께서 어리신 것을 틈타 아주 작은 원망이나 터럭만한 혐의만 있어도 반드시 그 기회에 터뜨린 데 연유했던 것이다. 이에 당대의 단정한 선비로서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역자란 이름을 가하여 없는 죄를 얽어 잡아 가두어 사람들의 사기가 저상되어 머리를 떨구고 감히 입을 열지 못하게 하므로써 사기가 꺾이고 국세가 시들게 하였으니 이 일을 말하려고 하면 슬퍼서 기가 막힌다. 인심과 천리(天理)의 공정함은 오래 될수록 민멸되지 아니하여 지금까지 사대부들 간에는 울분이 끊일 사이가 없으니, 공론이 격분한 것도 실은 원인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원통함을 씻고 막힌 것을 펴는 일은 바로 신정의 처음에 하여야 한다는 전교를 내리자마자 하늘의 뜻이나 사람들의 마음이 단번에 일신하니 실로 신정에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이다. 그 당시에 비록 명목상 사실을 조사하여 승복받았다고 하는 자도 실로 원통함이 많이 쌓였을 것인데, 하물며 이 사람들은 한 가지 사실도 서로 연관된 단서가 없는데, 거짓으로 꾸며 죄명을 만들기를 자기들의 이목(耳目)이나 응견(鷹犬) 같은 무리들을 사주하기도 하고, 혹은 익명서로 모함하여 죄를 날조한 데이겠는가. 무고하게 억울함을 당한 것임을 이에 의거해서도 알 수가 있다. 그중에서 반역죄에 관련되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적몰(籍沒)당하는 죄를 입었으니, 너무나도 어이없이 억울하게 당한 것이다. 이렇게 정죄(定罪)한 일에 대하여 선왕께서 어리셨을 때에는 자세히 모르셨지만 장성하신 뒤에는 전교하시기를 ‘윤임(尹任) 등의 모반이야 논할 것이 없지만 추후로 죄를 받은 사람은 애매함이 없지 않다. 모반(謀反)은 부자 사이에도 숨기는 일인데 어찌 관련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가?’라고 하셨다. 선왕께서 이러한 뜻이 계셨기 때문에 내가 지금 유지(遺志)를 봉행(奉行)하여 이 사람들에게 은전을 베푼다.
고(故) 급제(及第) 안명세(安名世)는 옛날부터 사관(史官)이 죄를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여론이 지금까지 원통해 하니, 마땅히 너그럽게 용서하여 직첩을 되돌려주고 처자는 방송하며 적몰한 재물은 되돌려 주라. 파주(坡州)에 이배(移配)된 급제 윤강원(尹剛元)과 유신(維新)에 이배된 급제 이염(李爓)은 아울러 방송하여 직첩을 되돌려 주고 서용하라. 전 사포(司圃) 정유침(鄭惟沈)과 봉사(奉事) 윤충원(尹忠元)은 아울러 직첩을 되돌려 주고 서용하라. 고(故) 급제 권벌(權橃)은 덕행이 갖추어졌고 충성 또한 지극했다. 고 급제 이언적(李彦迪)은 학문이 정심하여 당대 이학(理學)의 종장(宗長)으로서 유배 중에 있으면서도 조정을 잊지 못하여 7잠(七箴)을 지어 죽은 뒤에 그 자제로 하여금 올리게까지 했으니 충성이 크다고 하겠다. 고 급제 이천계(李天啓)는 재주와 식견이 있으며, 고 급제 김진종(金振宗)은 학문이 순정(純正)하며 충효의 대절(大節)이 있고, 고 급제 조박(趙璞)은 성행(性行)이 단정하고 학식이 있다. 고 급제 이해(李瀣)는 전에 대사헌으로 있을 때 이기(李芑)를 논박했는데 이 때문에 원한을 사서 이기가 사람을 시켜 무고했고, 고 급제 구수담(具壽聃)은 일찍이 이기를 논박했다가 재상에서 파직되기까지 했다. 고 급제 허자(許磁)는 이조 판서로 있을 때 청탁을 듣지 않았다가 이 때문에 혐의가 생긴 것은 나라 사람들이 다 알며, 고 급제 이치증(李致曾)은 헌납(獻納)으로 있을 때 이기를 논박했다. 고 급제 손흥적(孫弘績)은 신진의 인물로 일의 대체를 몰랐으므로 당시에 선왕께서도 그를 죄주는 것을 미안하게 여겼으나 중론의 압박을 받아 곤장을 맞고 유배까지 가게 되어 여론이 지금껏 원통하고 민망하게 여긴다. 고 급제 심영(沈苓)은 언어 간에 부실한 사실이 있어 곤장을 맞고 죽기까지 했으니 또한 원통하고, 고 급제 윤결(尹潔)은 언어에 관한 일로 죽을 죄에 이르지 않았는데도 곤장을 맞고 죽기까지 했으니 역시 억울하다. 아울러 직첩을 되돌려 주라. 고 급제 성세창(成世昌)·한숙(韓淑)·정황(丁熿)·정자(鄭滋)·권물(權勿)·고 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고 안경우(安景祐)·안세형(安世亨)·성우(成遇)·양윤온(粱允溫)은 모두 직첩을 되돌려 주라는 것으로 이조에 내리라.”
선조 12권, 11년(1578 무인 / 명 만력(萬曆) 6년) 5월 21일(신미) 1번째기사
헌부가 송인수·안명세·구수담의 추증을 청하다
사헌부가 차자를 올리기를,
“송인수(宋麟壽)·안명세(安名世)·구수담(具壽聃)을 추증(追贈)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유지(有旨)가 있었다.”
하였다. 홍문관도 차자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