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자아실현설
200021972 철학과 3학년 송호일
자아실현에 대한 정의: 개인에 있어서의 최고선 혹은 도덕적인 이상은 그의 여러 가지 타고난 잠재력과 특수한 재능, 그리고 능력과 함께 그의 본질의 실현을 통하여 달성되는 것이다.
1.플라톤
선의 이데아는 가장 숭고한 지식이다. 선은 우주의 궁극적인 본질인 동시에 목적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선이며 행복이다. 진정한 행복은 도덕적인 기초 위에서만 달성된다. 또한 지혜가 인간생활의 기본요소로서 쾌락보다 훨씬 더 값지고 우수한 것이다. 자아완성은 신에 대한 사색이며, 자아의 실현이며, 선한 생활의 달성인 것이다. 진정한 선은 이상적인 것이다. 선은 그 본성에 있어서 부단히 추구되는 것이나 달성될 수는 없는 것이다......모든 존재 가운데 선은 다른 모든 이데아를 넘어선 궁극적인 이데아이다. 존재의 원리를 규정한다. 선은 지식이나 진리보다 더 소중한 것이며, “선의 이데아는 다른 이데아보다 더 숭고한 것이다.” 이상적인 실재와 이상적인 선의 실현상태인 가장 고상하고 진실한 생활은 인간의 이성적인 지혜를 통해서만 달성된다. 참된 실재에 접근하는 인간의 지혜는 가장 순수한 자아인 것이다. 인간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자질은 지식을 갈망하는 지적 능력, 즉 진리와 선에 대한 철학적인 탐구력이다.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을 배우는 것은 단지 무의식적인 영혼 속에 숨어 있는 것을 재생시키고 회상시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영혼은 감각적인 세계에 서 벗어날 때, 즉 지식과 덕을 통하여 그 자신을 감각적인 세계의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킬 때, 비로소 행복을 발견하게 된다. 가능한 한 최대의 선을 실현함으로써 선의 모방을 통한 도덕적인 자기 수양을 할 수가 있다. 선한 생활이란 이성에 의하여 지도되는 질서 있는 생활을 말한다. 선한 생활이란 조화로운 생활, 즉 여러 가지의 덕이 각각의 능력에 따라 질서 있게 작용하는 생활을 말한다.
플라톤은 덕을 탁월성으로 정의한다. 인간은 누구나 영혼의 세 가지 기능 중 어는 하나의 기능에 탁월한 성향을 지니고 있으며 그 기능에 대응하는 덕을 지니게 된다. 지적인 능력과 함께 이성에 탁월한 사람은 ‘지혜’의 덕을 지니고, 의지의 활동에 탁월한 사람은 ‘용기’의 덕을 지니며, 감각적인 욕망의 활동에 탁월한 사람은 ‘절제’의 덕을 지니게 된다. 이상의 세 가지 덕, 이 조화롭게 기능하고, 이성에 의하여 질서지워지고 규제될 때 총괄적인 덕인 ‘정의’가 구현된다. 완전하게 된다는 것은 지혜롭고, 용감하고, 절제할 줄 알고, 정의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 따라서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는 그 사회의 각 구성원이 적재적소에서 타고난 자질에 부합되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절대적으로 정의롭고 정직한 사람을 상상할 수 있다면, 그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불행과 재난을 겪으면서 즐거움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어도 여전히 절대적인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행복이란 플라톤에 있어서는 최고선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최고선이 행복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우리들에게 아무런 설명을 제시해 주지 않았다. 플라톤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으며 가공할 만한 악의 실체를 인식하지 못했다.
2.아리스토텔레스
개인의 행복한 상태인 이성과 절제, 그리고 잠재력의 실현을 통한 건전한 생활에서 결과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활동의 목적은 "덕과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으로 정의되는 선을 추구하는 것이다." 인간의 최고목적인 선은 행복으로 귀착될 뿐 아니라 그 자체로서 행복한 상태이다. 도덕적인 선택은 자발적이며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선택한 행동을 실현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 때문에, 선악의 선택 문제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결정에 달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개인이 가장 숭고한 행복을 얻으려고 기대한다면, 인간 본성이 요청하는 활동이, 가장 높은 수준의 본성인 이성과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행복한 생활"이란 진리를 추구하는 생활이 아니라, 이미 달성된 진리에 관하여 사색하는 생활인 것이다. 덕을 탁월성이라고 정의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습관화된 중용이라고 규정한다. 지적인 덕은 윤리적이 덕보다 우월한 것이다. 왜냐하면 윤리적인 덕은 동물적인 수준의 감각적인 즐거움
에 관계되거나 아니면 인간적인 수준의 사회적인 즐거움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적인 덕은 인생의 과학적인, 혹은 철학적인 영역에 관계되는 것이다. 덕은 우리들에게 상대적이며, 이성에 의하여 결정되는 “도덕적 목적인 중용에 대해서 생각하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지고한 덕으로서의 정의는 모든 덕의 총화이며, 최고의 완전한 덕이다. 옳은 행동이란 따로 분리된 중용의 한 예이며, 옳은 일을 옳은 사람에게, 옳은 목적을 위하여, 옳은 방법으로, 옳은 한도에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드시 덕 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옳은 행동을 할 수 있으며 반대로 덕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쁜 행동을 할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의 도덕성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것이다. 윤리적인 덕의 완성은 사회적인 환경 속에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이론은 당시의 부유층의 행동양식에 적용된 윤리기준을 일반적인 것으로 제안한 데 불과하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 자연적인 본성에 따라 생활해야 한다는 주장은 본성이란 무엇이며, 만약 인간본성이 다양한 성질로 구성되는 것이라면, 어떤 성질을 중요시하고 어떤 성질을 소홀히 취급해야 하는가 등의 여러 가지 질문을 야기시킨다. “감각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선천적인 본성이라는 사실이 모든 감각적인 자극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시대의 편견에 사로잡혀 인류를 자유민과 노예라는 별개의 두 종류로 구분해 놓았다. 어떤 사람은 노예가 되기 위해 태어나며, 또 노예가 되어야만 한다-왜냐하면 그들은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아무튼 인간본성에 대한 그릇된 신념이 독단에 빠질 때는 완전히 폭군이 되고 만다.
3.토마스 힐 그린
그린은 인간영혼의 내적 자질을 완전히 실현하는 것이 선이라고 정의한다. 그가 말하는 실현이란 정신적 활동을 의미한다. 덕과 선은 인간의 자아완성이며, 인간 영혼을 최대한으로 그리고 최선의 것으로 만드는 능력의 실현을 뜻한다. 도덕적 이상인 진정한 선은 항구적인 자기만족을 가져오는데, 그것은 완전한 자아실현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선은 개인적인 것이기보다는 사회적인 것이다. 인간의 능력이 완전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시민생활을 통하여 행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개인적인 생활은 그 실제적인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실제생활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것이다. 그린 철학의 기본 입장은 인간을 개성과 도덕, 사회, 그리고 선과 연결하는 자아의식의 역할에 두고 있다. “개성이란 의식을 통해 자기자신의 대상이 되는 주체의 성질이다. 인간의 의식은 자연과 신적인 의식의 중간에 위치하는 것이다. 진정한 선은 ”도덕적인 행위자의 노력으로 실제로 달성할 수 있는 목표인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의 이상인 자신을 완전히 실현하는 생활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개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살아가는 개인으로 행동해야만 한다. 이상의 실현에는 보다 높은 수준의 선을 위하여 개인을 희생하는 자기희생의 의지가 요청되기도 한다. 인간의 완성이란 궁극적인 서은 ‘바람직한 의식의 상태’이다. 합리적인 사람은 그의 도덕적인 목적을 추구함에 있어서, 스스로의 자아실현과 다른 사람의 자아실현을 동시에 고려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완성을 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린 또한 우리들에게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다. 우리들 모두가 선을 욕구한다고 할 때,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을 욕구하느 것인가라는 질문이 그대로 남는다. 따라서 그린은 공허한 개념만 되풀이했다고 할 수 있다.
4.프란시스 브래들리
덕성은 사회적인 적이며, 윤리학의 기본적인 질문은 개인의 직분과 의무에 관한 것이다. 그의 현실화된 ‘자아’는 사회화된 자아를 뜻한다. “나는 왜 도덕적이어야만 하는가?” 이것이 기본문제이다. 덕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목적이기보다는 수단임을 말해 준다. “도덕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목적인 선, 즉 도덕이 우리들을 그리로 안내하는 선이 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실현해야 하며, 또 전체로서의 당신 자신을 실현해야 한다.” “자아는 전체 속에서 실현된다.” 선의지란 현재의 자신을 넘어서려는 의지를 말하며, 추상적인 의지가 아니라 자아실현이 그 목적인 의지, 즉 도덕적 유기체(사회) 안에서 발견되는 살아 있는 유한한 존재들의 의지를 말한다. “자아실현을 위하여 우리들에게 무엇이 요구되는가?” 직분과 의무라는 개념을 통해 명확한 답변이 나왔다. 각 개인의 특수한 의무들은 그 사회에서의 직분에 따라 결정된다. “나의 직분과 의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그리고 그보다 더 숭고하고 더 진실된 아름다움은 없다.” 도덕은 영원히 실현 불가능한 것을 실현하라고 요구하며, 실현 가능하다 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자기소멸에 이르는 것을 요구한다는 모순이 있다. 자기모순이 없는 곳에는 당위도 필요 없을 것이다. 당위는 하나의 자기모순이다. 도덕은 우리들에게 이상적인 목표를 추구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그 이상의 완전히 달성된다면 더 이상 추구할 도덕적 목표가 없어지게 되며, 결과적으로는 자아실현을 위한 도덕 그 자체의 기반이 무너지게 된다. 그러나 도덕은 우리들에게 이상 추구의 동기를 부여한다. 자기실현의 과정인 덕성에 있어서는 이상적인 목표가 점진적인 진화과정을 통하여 현실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목표이지만, 종교적인 신앙에 있어서는 이미 그렇게 된 사실로서의 목표인 것이다.
그러나 상층지배계급을 위한 부르즈와 윤리라는 관점이다. 심각한 비판점은 윤리학을 종교와 결부시키면서 주장한 그의 관점에 있다. 브래들리의 윤리이론은 그가 믿었던 것처럼 객관성을 지닌 것은 아니다. 사회가 부여한 일정한 직분에서 떠난 사람은 결과적으로 그의 의무에서 벗어나거나 그 의무를 방기하기 때문에 개체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5.브랜드 블랜샤드
우리들의 직접적인 의무는 옳은 것을 찾고 그것을 행하는 데 있다. “선이란 결과적으로 인간본성의 기본적인 요소인 충동과 욕구를 성취하는 어떤 것, 그리고 그것들을 성취함으로써 만족을 가져오는 어떤 것을 말한다. 선이 엄격한 의미에서 과거의 만족에 의하여 제한을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욕망을 통하여 얻어진 만족에 의하여 발견되고 확인되는 것이 분명하다. 충동과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각각의 선은 그 자체로서 자발적인 것 일 뿐 아니라 그 자체의 기준에 의하여 판단되고 지배되는 것이다. 결함이 없는 순순한 선은 성취와 만족을 결합시킨다. 성취는 충동과 욕구의 목표를 달성하는 기능을 갖고 있으며, 만족은 성취의 결과를 느끼는 기능을 갖고 있다. 지혜는 이 욕망들이 보다 정확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인간의 본성을 표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옳은 행위가 최선의 결과를 목표로 한 행위이며, 또 그것이 기대되는 행위라고 말한다. 블랜샤드의 윤리이론은 이타주의적인 이론이다. 의무를 ”인간의 본성 그 자체가 지시한 최고선에 의하여 우리들에게 부과한 명령“이라고 정의한다. 의무란 의무 그 자체를 위한 의무가 아니라 선을 위한 의무이다. 본질적이 악은 다음 세 가지 요소 증 어느 하나이거나 그것들의 결합에서 오는 것이다. 즉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 충동과 욕망, 충동과 욕망의 좌절, 충동과 욕망의 저해요소가 그것이다. 선의 성취와 만족으로 이루어진다면, 좌절은 자연히 그리고 보편적으로 악으로 간주된다. 인간은 누구나 선한 본성을 타고나기 때문에 인간 세계에 순전한 악마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은 ”불가피하게 그리고 보편적으로 고귀한 선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졌으며, 그의 일생은 선을 찾아 헤매는 과정“임을 생각할 때 위의 사실은 명백한 것이다.
그러나 블랜샤드의 자기실현을 위한 만족과 성취의 모델은 개인주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또한 만족과 성취의 모델은 이론을 항목별로 세분화하고, 의미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한 결함이 있다. 만족과 성취를 이룬 사람에게 우연히 일어난 일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이론에 불과한 것이다. 블랜샤드의 윤리이론에 가장 비판점이 될 수 있는 것은, 이웃사람이 이미 우리들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데도 그 사람의 생활을 풍요롭게 해 주기 위하여 우리들 자신의 생활을 희생하라고 명하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