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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최근 현상으로 보이지만 왜곡된 정보라는 의미에서 '가짜뉴스'는 과거에도 존재했다. 전쟁에서 잘못된 정보를 흘려 상대를 교란시키거나, 틀린 정보를 흘려 경제적 이득을 취하거나, 근거 없는 낭설을 퍼뜨려 누군가를 곤혹스럽게 하는 건 흔한 이야기다. 자연 재해나 사회적 갈등이 고조되었을 경우 가짜뉴스는 더더욱 기승한다. 잘 알려진 예가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벌어진 대규모 조선인 학살로, 조선인들이 방화나 테러를 꾀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비극의 배경이었다.
항상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전 세계가 '가짜뉴스'에 주목하는 이유는 인터넷 시대의 정보 확산 속도와 전 지구적 범위일 것이다. 속도와 범위가 결합했을 때, 정보 생산자는 권위를 갖게 되고 인터넷을 통해 광범위한 의사 교환 및 조직적 활동이 가능해진다. 이는 순기능을 할 수도 있지만, 가짜뉴스에 기반을 두었을 경우 인간의 가치 판단 능력을 흐리게 하고 왜곡된 사회적 영향력을 형성, 비생산적인 갈등과 사회적 불신을 증폭시킨다.
21세기 가짜뉴스에 상응하는 20세기 형태로는 프로파간다가 있다. 21세기 가짜뉴스 확산에 인터넷이 있다면, 20세기 프로파간다에는 19세기 말 20세기 전반기에 진행된 전신 전보, 라디오 등 통신 기술의 발달에 따른 정보 혁명이 있었다. 21세기가 디지털 기술에 환호했듯이, 당시 세계도 새로운 기술이 가지고 올 해방적 측면에 열광했다. 기대에 맞게 신문과 라디오는 소수 엘리트층의 정보 독점을 상당 부분 깼고 어느 때보다 대중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통신 발달이 초래할 정치사회적 효과와 사용 방법상의 윤리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전쟁 승리라는 지상 최고의 목표 하에 각 국가는 정보전 혹은 심리전의 이름으로 정보를 과장 및 왜곡하는 프로파간다를 경쟁적으로 추진했다. 저널리즘 윤리를 고민할 기회가 없던 언론사도 프로파간다 기획에 적극 참가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언론의 급속한 성장
19세기 전반기가 철도의 시대였다면, 19세기 후반기와 20세기 초는 전신 전보의 시대였다. 1856년 대서양 전신회사(Atlantic Telegraph Company)를 설립한 미국인 사이러스 필드(Cyrus Field), 영국의 존 브렛(John Brett)과 찰스 브라이트(Charles Bright)가 최초로 대서양 밑으로 케이블을 깔아 유럽과 북미를 연결시킨 후, 통신에서의 공간적 제약은 상당히 극복되었다.
영국과 미국은 통신 산업의 주도권을 가지고 자국에 호의적인 뉴스를 아시아, 아프리카 및 남미에 송신, 국제 무역 및 여론을 주도했다. 전신 전보가 갖는 정치 경제 군사적 유용성에 뒤늦게 눈을 뜬 독일은 19세기 말 등장한 무선 전신(Wireless telegraph)과 라디오 산업에 신경을 바짝 세웠다. 철도, 신문, 유선 전보 등 통신 교통 모든 면에서 앞선 영국을 따라잡을 수 있는 수단으로 무선 통신에 주목, 국가 주도의 통신 산업 육성 계획을 세웠다. 이어 1913년 트랜스오션(Transocean) 회사를 세워 독일 정부 입장을 반영한 뉴스를 해외로 송신했다.
▲ 1915년 5월 20일 자 <데일리 메일> ⓒ https://spartacus-educati
국가 간 통신 산업 경쟁이 치열해지는 19세기 후반, 유럽은 의무 교육 도입으로 문맹률이 현저히 낮아지고 있었다. 이것만큼은 독일이 앞섰다. 1870-1890년대 "외교 체스 대회의 이견 없는 챔피언"으로 평가받는 비스마르크는 1872년 의무 교육과 각종 사회 보장 제도를 실시했다. 영국은 독일보다 8년 늦은 1880년, 5-10세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의무 교육을 확정했다. 대중화된 교육은 대중이 정보의 소비자로서 기능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을 조성했다.
19세기 후반의 통신 산업과 대중 교육은 신문의 급속한 성장으로 이어졌다. 신문사는 유-무선 전신을 통한 국내외 정보 수집, 인쇄 기술을 이용한 신문의 대량 생산, 철도를 통한 당일 전국 배포까지 정보 산업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대중 언론에 대한 환호와 뉴스에 대한 뜨거운 관심으로 각종 신문사와 잡지가 우후죽순 생겨났고 독자의 관심을 사로잡기 위한 업계의 경쟁도 치열해졌다.
[1차 세계대전] 두 손이 잘린 소녀... 영국의 프로파간다
1차 세계대전 발발은 신문과 라디오 등 대중 매체를 새로운 국면으로 끌고 들어갔다. 대중은 전쟁 관련 정보에 갈증을 느꼈다. 군사력뿐만 아니라 경제와 사상의 영역까지 동원하는 근대 전쟁의 추이 속에 각국, 특히 영국 정부는 인쇄된 문자로 대중의 생각을 일정 정도 통제하고자 했다. 여기에 준비된 언론사들이 있었다. 가열되는 출판 시장 경쟁에서 이미 황색 언론(yellow journalism)까지 비즈니스 모델로 실험해 본 영국 언론사들은 대중이 어떤 정보에 반응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영국은 언론을 통한 대중 동원을 기획, 이를 추진할 관료 조직을 꾸렸다. 1914년 8월 영국 의회는 전쟁 위원회 산하에 언론국을 설치하고, 세계 뉴스(News of the World)를 맡고 있던 조지 리델을 언론국장으로 임명, 언론과 정부의 연결 고리를 만들었다. 1916년엔 정보부 (Department of Information)를 신설, 노스클리프 경(Lord Northcliffe, 1865-1922)에게 적대국에 대한 프로파간다 기획을 총괄하도록 했다.
1910년대 영국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 중의 하나였던 노스클리프는 영국 최대 언론 기업을 이끄는 기업인이었다. 1888년 <앤서스>(Answers)를 창간한 후, 1894년 <런던 이브닝 뉴스>(London Evening News)를 인수하고 1896년에는 <데일리 메일>(Daily Mail)을, 1903년에는 <데일리 미러>(Daily Mirror)를 창간했다.
대중의 순간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뉴스로 사회적 가십을 다루는 타블로이드 형태를 최초로 도입하는가 하면, 신문상에서 소외되어 있던 여성을 위한 칼럼을 만드는 등 새로운 시도로 대중을 파고 들었다. 이 성공을 발판으로 1908년에는 마침내 <타임스>(The Times)를 인수, 세계 최대 부수를 발행하는 언론 그룹으로 성장했다.
▲ 노스클리프 경(Lord Northcliffe, 1865-1922)의 초상화 ⓒ 위키피디아 퍼블릭도메인
국내 최대 언론사주가 공식적으로 정부 프로파간다를 맡는 게 문제화되지 않았다는 건 당시 언론과 국가 권력과의 관계가 미처 정립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프로파간다에 적극 참여한 노스클리프에 비해 <맨체스터 가디언>(현 가디언)의 편집장 찰스 스콧(CP Scott)은 약간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강하게 가지고 있지만, 일단 전쟁이 발생하면, 전 사회의 미래가 국가에 달려 있기 때문에 승리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며 결국 협조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로써 언론사주, 편집장, 정치인이 모두 반독일 프로파간다 기획 하에 모였다.
모든 전쟁 정보는 정부와 언론의 담합 하에 영국에 유리한 식으로 편집되었다. 영국 정부는 언론국에 불복종하는 신문은 국방법(Defence of the Realm Act) 위반으로 간주하는 뉴스 보도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군 관련 소식은 금지되고 국민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한 유의미한 사망만 언급하고 나머지 사망자, 부상자, 실종자 언급도 금지시켰다.
▲ 솜 전투 첫째 날 통신 참호에 있는 영국 얼스터 소총병. 1916년 서부 전선에서 벌어진 솜 전투(Bataille de la Somme)는 전투 첫날 5만 8000여 명에 달하는 영국군 사상자로 인해 잘 알려진 전투다. ⓒ 위키피디아 퍼블릭도메인
뿐만 아니라, 반독일 정서를 자극할 만한 이야기들이 사실 확인 없이 주요 신문에 등장했다. 1915년 5월 <선데이 크로니클>은 두 손이 잘린 소녀 이야기를 실었다. 이야기는 자선 사업가 여성이 벨기에 피난민이 몇 달째 머물고 있는 곳을 방문하면서 시작한다. 10살 정도의 소녀가 엄마에게 코를 풀어 달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다 큰 소녀가 왜 코를 혼자 못 푸냐고 했더니, 소녀의 엄마가 말하기를 아이가 손이 없다고 했다. "독일인이…?"이라고 물었더니 엄마가 울음을 터뜨렸다는 줄거리다.
이 이야기는 애국적 인사들에 의해 다시 한 번 자극적으로 각색되어 퍼졌다. 신문 지상에서 독일군은 경멸어린 표현으로 지칭되었고 나체로 참수된 여성, 어린이 총살, 죽어가는 여성의 비명, 신체 일부분의 절단 등 잔혹함의 대명사가 되었다.
▲ 1차 대전 당시 반 독일 선전물. 독일군이 어른부터 아기까지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한다는 내용의 그림이다. ⓒ 위키커먼스
▲ 1차 대전 당시 반 독일 선전물. 독일군이 벨기에 소녀의 손목을 잘랐다는 내용을 담은 그림이다. ⓒ 위키커먼스
당시 영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신문 중의 하나였던 <타임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1차 대전 시기 가장 참담한 가짜 뉴스로 꼽히는 독일 시체 공장 이야기가 검증되지 않은 채 <타임스>에 실렸다. 영국의 해상 봉쇄로 기름 및 지방이 부족했던 독일이 전쟁 사망자 시신을 녹여 기름을 추출한다는 주장이다. 시신 1구당 추출할 수 있는 지방의 양부터 시신에서 얻은 지방으로 글리세린, 초, 유연제, 심지어 구두약까지 제조한다고 보도했다. 이 가짜뉴스의 기원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영국 정보국, 혹은 <타임스>가 인위적으로 꾸며냈다는 주장도 있고, 민간에서 떠돌던 괴담을 정부나 신문이 악용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뒤늦은 반성] 히틀러의 깨달음
가짜뉴스가 전쟁 승리라는 국익을 위해 정당화될 수 있는가. 1차 대전 이후, 영국 내 프로파간다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노스클리프를 비롯하여 일부는 성공적인 프로파간다로 종전을 1년 정도 앞당길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인명과 재산 피해도 줄일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반면, 정보 왜곡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쪽도 있었다. 노동당 의원 아더 폰손비(Arthur Ponsonby)는 1차 대전기 반독일 프로파간다가 도를 넘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첫 번째 희생자는 진실이다."
"거짓으로 인간의 마음에 증오의 독을 넣는 것은 전쟁에서 사상자를 내는 것보다 더 사악하다."
이 같은 자성의 발언 이후, 그는 <전쟁기의 거짓>(Falsehood in War time)이라는 책에서 반독일 정서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용되었던 흉흉한 이야기들, 십자가에 박힌 병사, 강간당한 수녀, 절단 당한 아기, 독일의 시체 공장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가디언> 편집장 찰스 스콧의 경우, 1921년 가디언 100주년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코멘트는 자유지만, 사실은 신성하다. 프로파간다는 혐오스럽다."
아이러니하게도 저널리즘에 대한 고민의 시작이 1차 대전 프로파간다 이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스콧은 프로파간다 과정에서 이뤄지는 사실 왜곡에 혐오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신문이 가진 거대한 권력, 정보 유통 독점이 인간의 의식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도 목격했다. 그는 이 신생 권력 기관이 어디로 향할 것인가, 신문이 가진 특혜와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인간의 마음과 공공 영역에서 신문이 맡아야 할 역할은 무엇일까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신문이 가져야 할 가치, 아마도 최고의 가치는 독립성이다"고 결론 내렸다.
▲ 히틀러. ⓒ 위키피디아 퍼블리도메인
1차 대전의 경험을 거울삼아 <비비시>(BBC)나 <가디언> 등 영국의 주요 언론은 사실 관계 취급에 있어 엄격한 태도를 견지했다. 하지만 이들의 자성은 늦었다. 1차 대전기 영국의 프로파간다 전략을 주시한 이는 다름 아닌 독일의 히틀러였다. 그는 영국 프로파간다에 밀렸던 것이 패전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며 "적으로부터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그리고 대중의 마음을 주조하기 위해 더 강력한, 대중의 원초적 감정에 호소하는 프로파간다 전략을 사회 전 영역에 걸쳐 세웠다.
조지 오웰이 "1936년 이후 역사는 멈췄고 오로지 프로파간다만 남았다"로 설명했던 시대, 극단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첫댓글 지금도 가짜뉴스에 속아 그것이 진짜라고 믿는 사람들이 주변에 참 많습니다.ㅜㅜ
통화하기가 겁나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