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당일치기 소풍”
60년 전 아직도 어렸을 적 학교 소풍이 기억난다. 초등학생 1학년 때 코 흘리던 시절에. 들뜬 기분에 불면의 밤을 보냈지. 그때 소풍 대신에 종종 원족(遠足)이라고 했는데, 말 그대로는 “멀리 걸어서”라는 뜻이지만 휴식을 취하기 위해 야외에 나갔다는 오는 일을 “원족 간다”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어 투란다. 요즘은 소풍(消風)이란 단어도 고어가 되는 것 같다. 바람 쐬러 야외로 나간다는 뜻일 텐데, 에이아이(AI) 기계를 품고 사는 아이들, 자연을 잊고 사는 어린애들에게 학교에선 자연을 관찰하거나 역사기념관을 찾는 일을 현장학습이라 하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모처럼 당일치기 소풍 길에 나섰다.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가랑비가 촉촉하게 내린다. 행선지는 전북 군산이다. 직장 월차를 내고 합류한 제자가 운전대를 잡고 나와 또 다른 두 명은 편하게 의자에 기대어 차 창밖을 내다본다. 왠지 모르게 설렌다. 우산도 준비하지 않은 채로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서해대교를 지나 충남 당진, 홍성, 보령으로 내질러 서천에 이른다. 금강을 넘자 전라북도 군산으로 진입한다. 첫 방문지는 유서깊은 군산 구암교회(합동)다. 1890년대 미국인 선교사 전위렴(William M. Junkin)가 동료 위대모(Adamer D. Drew) 선교사와 함께 자기 집에서 주일 예배를 드림으로 설립되었다고 한다. 전위렴 선교사의 순교비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슬픔과 고마움이 밀려왔다. 영어 발음은 “윌리엄 매클리리 전킨”인데 전킨(Junkin)의 앞 글자를 따서 성으로, 윌리엄(William)을 줄여서 위렴으로 이름으로 삼았다.
전위렴! 그의 비석을 자세히 보면서 착잡한 마음이 밀려왔다. 그에겐 어린 세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일찍 죽었다는 슬픔 때문이었다. 첫아들 조지는 1년 6개월 만에, 둘째 아들 시드니는 겨우 두 달 열흘 만에, 셋째 자녀 프랜시스는 20일 만에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전위림 선교사가 20대 말에서 30대 중반에 일어난 가정적 비극이었다. 선교사 자신도 43살이란 이른 나이에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 어찌 슬프지 않으랴. 그러나 그의 사역으로 호남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니 숭고한 삶을 살다가 떠나신 신앙의 영웅이었다. 그의 비석 앞에 서 있는 동안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며 참회와 소명에로의 깨우침을 얻는 은총의 시간이 되었다.
군산시 서쪽 끝자락은 서해다. 그쪽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크고 자그마한 섬들이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다. 이른바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다. 그쪽으로 향하는 바닷길을 막아 방조제를 만들어 다시 전북 부안쪽 변산반도국립공원까지 연결한 33킬로 세계 최장 방조제를 만들었다, 새만금방조제다. 더는 외딴 섬들이 아니다. 육지와 이어졌다. 내가 한때 살았던 네덜란드에도 유명한 방조제가 있는데 네덜란드 국토 안으로 쑥 밀고 들어온 북해를 가로막는 대공사로 1927년부터 1932년에 걸친 방조제 대공사였다. 아프슈라우트다이크(Afsluitdiik)인데 총 32킬로미터에 이른다.
새만금방조제 중간 즈음에 도로가 군도(群島)와 연결된다. 신시도, 무녀도, 선유도와 여미도와 장자도까지 차로 멋진 드라이브를 했다. 장자도의 카페 라파르(Cafe Laphare)의 삼층 좁디좁은 공간에 옹기종기 앉아 창밖으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면 두런두런 사랑방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창밖 풍경은 일품이었다. 중앙아프리카 르완다에서 의료선교를 하는 제자의 이야기며, 데시벨 측정 기구 생산 업체를 운영 하며 동시에 복음 사역을 하는 일터 사역자 제자의 이야기며, 신학교에서 장래 목회자를 훈련하는 제자 교수의 이야기며,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우산을 쓰고 산책했다.
저녁 즈음 비는 폭우로 변했고 인근 횟집에서 조촐한(?) 저녁을 같이한 우리는 서울을 향해 차를 몰았다. 폭우로 윈도브러시는 쉴 틈 없이 초고속으로 움직인다. 창밖은 세찬 비가 내려쳐도 차 안은 오붓하고 고즈넉하기까지 했다. 그곳이 안식처, 대피소, 성소였다. 차 안에서 우리는 가요 “비는 내리고”를 흥얼거리다가 분위기를 바꿔 B.J. Thomas의 팝송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를 들으니 빗방울이 옆 창에 기대면서 춤을 추는 듯 상쾌하게 튀고 있었다. 당진 너머 행담도 즈음 오니 비는 그치고 서쪽 하늘엔 저녁노을과 석양이 중후한 빛을 토하고 있었다. 그 순간 오른쪽 창문 쪽으로 푸릇한 초록의 목장 대지 위로 대형 원형 무지개가 장엄한 자태를 드러냈다. 모두가 입을 다물 수 없어 탄성을 내질렀다. 와우, 와우, 세상에~~ 마치 묵시론적 은총의 시전(示轉)이었다.
이른 아침 가랑비로 시작해 오후엔 폭우로 돌변했지만 아주 늦은 황혼 녘엔 무지개로 대미를 장식한 꿈같은 하루치기 여행이었다. 맞아,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지!
첫댓글 하루 당일치기 소풍~♡
몸은 피곤할지몰라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라면~♡
군산가면 꼭 들러봐야겠어요^^
참 좋은 소풍이었네요.
근데 어제 날씨도 비슷했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