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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석의 통일 포기론은 내용·시기가 모두 부적절
동서독과 남북한의 특수관계론은 성격, 내용 달라
2국가론, 2민족론-통일포기론-국토완정론과 무관
적대적 2국가론의 출구, 햇볕정책 3원칙서 찾아야
"통일, 하지 맙시다." "객관적 현실을 받아들이고 두 개의 국가를 수용합시다." 9.19평양공동선언 6주년을 맞이하여 광주와 목포에서 열린 기념행사와 학술회의 첫날 행사에서 기념사를 맡은 임종석 2018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전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이 한 발언이다.
임종석의 발언 내용은 논쟁적이지만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다만 '평화, 가야 할 그날'이라는 행사 취지가 그의 발언으로 묻혀버린 점, 문재인 전 대통령을 비롯해 전직 청와대 참모진, 고위 각료들이 참석한 자리여서 그의 발언이 문 정부 입장으로 오해를 산 점, 무엇보다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관계 주장 뒤에 나온 것이어서 부적절하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2개 국가론은 남북관계의 세 번째 변곡점
사실상 남북관계는 몇 단계를 거쳐 2국가관계로 변하고 있었다. 첫 번째 변곡점은 1972년 남북고위급 접촉에서 발표된 '7.4공동성명'이다. 이 성명을 토대로 박정희 대통령이 발표한 「6.23선언」(1973)은 '1민족 1국가'를 전제로 남북한 정부의 실체를 상호인정한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30일 평양의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 청사에서 당중앙위 제8기 제9차 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2023.12.31.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두 번째 변곡점은 1991년 9월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 뒤 3개월 만에 남북고위급 회담에서 합의된 「남북기본합의서」(1991.12)이다. 이 합의서는 남북관계를 '2국가관계가 아닌 1국가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관계'로 규정하고, 이를 전제로 남북한의 교류협력을 본격화했다.
이제 남북관계는 세 번째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다. 2023년 12월 김정은 위원장이 '적대적 두 국가관계론, 교전국가론'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북남관계는 더 이상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고 밝혔다. 정전체제 하에서 두 교전국가관계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두 국가관계론은 기존 남북합의를 뒤집는 것이다.
오는 10월 7일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개최를 예고한 상태이기 때문에, 지난 1월 15일 개최됐던 최고인민회의 때 김정은이 지시했던 헌법 개정안에 적대적 2국가관계와 교전국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서술될지 주목된다. 이미 북한에서는 '북반부' '삼천리 금수강산'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 등과 같은 표현들이 삭제되었다.
이제 공은 우리에게 넘어왔다. 2국가관계론은 아직 북한의 일방적 주장일 뿐 우리와 합의한 게 아니다. 따라서 이에 어떻게 대응할지 우리의 입장과 태도가 중요하다.
특수관계론, 동서독기본조약 vs. 남북기본합의서
북한이 내놓은 적대적 2국가관계론을 이해할 키워드는 「동서독 기본조약」(1972.12.21.)에 등장했던 특수관계론이다. 기본조약은 '전체로서의 독일'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두 독일국가'를 인정하는 특수관계론을 제시했다. 기본조약에는 '통일'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민족문제를 포함한 근본문제들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고만 밝혔다.
3일 광주 서구 김대중컨벤션센터 내 김대중홀에서 한 시민이 고(故) 김대중(DJ) 대통령의 생애와 흔적이 담긴 전시물을 살펴보고 있다. 2024.1.3 연합뉴스
'2국가관계' 수용은 서독만이 '전체 독일'을 대표한다는 '할슈타인 원칙'의 파기를 의미한다. 이는 서독이 독일 전체가 아니라 독일의 서쪽 지역만 대표하고 동쪽 지역은 동독이 대표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동독은 '전체 독일'의 일부이지 '외국'이 아니지만, 국제법상 행위주체(주권국가)라는 점이 인정되는 이중성을 띤다는 점에서 특수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남북기본합의서」(1991.12.13.)는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 2국가관계가 아닌 1국가를 지향하는 관계로 규정하였다. 한국의 입장에서 북한은 주권국가로 인정되지 않고 반헌법단체(반국가단체)이자 평화통일의 동반자라는 이중적 지위를 갖는 특수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서독은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이후 '전체 독일'의 관점에서 서독과 동독이 서로 주권국가임을 인정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남북기본합의서」의 특수관계론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헌법에서 남한만이 '전체 한반도'를 대표하고 북한은 여전히 반국가단체로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동서독과 남북한의 경우가 결정적으로 다르다.
서독은 '전체 독일'의 틀 안에서 2개 국가를 인정하면서도 동독을 '외국'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장래 통일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이러한 논리적 기초 위에서 1973년 유엔에 동시 가입하였다. 이에 비해 남북한은 1991년 9월에 먼저 유엔에 동시가입한 뒤에 통일의 여지를 남겨두기 위해 같은 해 12월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해 '2국가관계가 아닌 1국가로 가는 특수관계'로 규정한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를 하고 있다. 2000.6.13. 연합뉴스
동서독과 남북한이 공히 특수관계라고 말하면서도 큰 차이를 드러내는 까닭은 분단의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분단 이전의 독일은 연합국(미·영·프·소)과의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동서독끼리는 서로 전쟁하지 않았다. 분단 이전의 코리아는 연합국의 대일전 승리로 해방을 맞이했지만 남북한은 연합국의 일원인 미국과 중국의 도움을 각각 받아 서로 전쟁을 치렀다. 이 때문에 특수관계의 내용이 서로 달라진 것이다.
양독관계와 남북관계의 차이 읽어야
동서독의 분단과 통일 경험은 남북한의 분단을 해석하고 통일의 대안을 마련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하지만 동서독 관계와 남북한 관계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바람에 오히려 북한이 말하는 적대적 2국가관계, 교전국 관계 주장을 잘못 읽는 오류들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 적대적 2국가론을 2민족론으로 보는 오류다. 이러한 오류는 북한의 ‘적대적 2개 국가관계론’을 ‘민족’ 단절의 의미를 내포한 동독식 '2민족 2국가론'과 같은 것으로 본 데서 나온 것이다. 동독은 동서독이 2국가관계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서독민족, 사회주의 동독민족이 다르다는 '2국가 2민족' 주장을 펼쳤다.
이에 비해 북한은 '동족관계, 동족개념에 기반한 남북관계'를 부정했을 뿐, 아직은 2민족으로 간 것은 아니다. 1994년 조선민족제일주의를 표방하며 김일성민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이 2민족론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북한은 김일성민족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어 속단은 금물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07.10.3. 연합뉴스
둘째, 적대적 2국가론을 통일의 포기로 보는 오류다. 북한은 2021년 1월 제8차 당대회에서 당규약 수정을 통해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문구와 노동당원의 '통일 촉진' 임무를 삭제했다. 2023년 12월 당 전원회의에서는 "(북한의) 조국통일사상과 로선, 방침들은...그 어느 하나도 온전한 결실을 맺지 못했다"고 평가한 뒤, "동족이라는 수사적 표현 때문에…통일문제를 론한다는 것은 우리 국격과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는 통일의 포기가 아니라 '1민족 1국가 2제도 2정부 방식'의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의 포기이자 '동족관계, 동족개념'에 기반한 통일의 포기인 것이다. 이것은 민족/민족주의적 통일을 포기하고 2개 국가에 기초해 남북관계를 재정립하겠다는 뜻으로, 박정희 정부의 '선건설'(60년대) '선평화'(70년대)과 유사한 '선 건설, 후 통일' 노선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셋째, 적대적 2국가론을 무력통일론으로 보는 오류다. 북한이 연방제 통일방안, 동족관계 기반의 통일을 포기하고 남북관계를 교전국 관계로 규정하자, 북한이 전쟁을 통한 무력통일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특히 "유사시…핵 무력 포함해 남조선영토 평정 위한 대사변을 준비하라"는 김정은의 발언이 이러한 해석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유사시 영토평정' 발언은 무력통일의 추진을 의미하는 국토완정(國土完整, territorial integrity)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김정은의 적대적 교전국가, 유사시 남조선영토 평정 발언은 현 남북관계가 '법적인 전쟁상태'인 정전체제 상태에 있다는 점을 거칠게 표현한 것일 뿐이다.
30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판문점 남측 자유의 집에서 나오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2019 06. 30. 연합뉴스
햇볕정책 3원칙, 북·미 북·일 관계정상화가 출구
그렇다면, 북한의 적대적 2국가관계론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임종석의 말대로 통일을 포기하고 한반도 미래는 후대 세대에게 맡기면 그만일까? 그의 발언은 2개 국가관계를 받아들이면서 통일을 언급하지 않는 「동서독 기본조약」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위헌 논란에도 불구하고 서독 헌법재판소가 기본조약에 대해 합법 판결을 내린 것은 통일의 관점과 노력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독 헌법재판소는 「동서독 기본조약」의 위헌성 논란에 대해 ①장래 재통일 요청과 현재 법적 통일성의 유지, ②동독주민의 보호 의무를 훼손하지 않기 때문에 위헌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즉, 서독정부가 동서독 통일과 법적 통일성 및 동독주민의 보호를 위해 노력한다고 밝혔기에 동독의 국가 지위(statehood)를 인정하는 것은 합헌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서독은 2국가론을 받아들이면서 모든 통일 논의와 선전을 유보했을 뿐만 아니라 통일을 전제로 하거나 지향하는 방식의 화해·평화 구상을 완전히 뒤로 물리는 등 통일을 정책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다. 하지만 명목적으로는 교류·협력의 궁극목표가 통일에 있음을 공식적으로 포기하지도 않았으며, 동독주민의 보호 의무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늘날 북한은 '동족관계, 동족개념에 기반한 남북관계 및 통일'을 거부하고 있다. 이는 민족적 가치를 앞세운 한반도문제의 해결이 더 이상 힘을 쓰기 어렵게 됐음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그 대안이 2국가론의 수용이나 통일의 포기여서는 안 된다. 새로운 대안은 통일 패러다임에서 '통일을 포기한' 평화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아니라, '통일을 품은 평화'라는 새로운 통일·평화 패러다임이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함께 입장하고 있다. 2019.1.8. 연합뉴스
미·중 전략경쟁이 신냉전 초기단계로 진입하고 북한이 사실상 핵무장한 국제정세 속에서 이제 한반도문제의 해결은 기존의 남북 화해·협력만으로는 어렵고, 동아시아 평화·번영과 통합을 함께 추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은 민족적 가치(민족동질성)보다 보편적 가치(동아시아 평화·번영과 통합)의 실현을 통해 한반도문제의 해결을 추진하는 것이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일찍이 평화공존-평화교류-평화통일의 3단계 평화론을 제창하면서 4개국 안전보장론과 4대국 교차승인론을 주창했다. 이는 한반도문제의 해결이 남북한 간의 화해·협력만으론 어렵고 주변 4대국과의 관계정상화가 절실하다는 인식에 기초한다. 실제로 한국은 옛소련(1990), 중국(1992)과 국교를 정상화해 동아시아 지역의 화해·협력을 진전시켰다. 하지만 북한은 미·일 관계정상화에 실패해 국제적 고립이 심화되면서 결국 독자 핵개발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에 대한 출구전략은 자유통일론이나 통일포기론이 아니라 햇볕정책 3원칙(일체의 무력도발 불용, 흡수통일 배제, 화해·협력의 적극 추진)을 복원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북한의 군사도발을 억제하되, 당분간 정책으로서 통일을 추진하지 않음으로써 북한의 피해의식을 줄여주어야 한다.
기본적인 출구전략은 우리가 북한이 미국·일본과 관계정상화할 수 있도록 적극 돕는 것이다. 한국도 중국·러시아와의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 이를 통해 동아시아 지역의 화해·협력을 진전시켜 나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북한이 체제안정을 이루어 적대적 2국가론을 포기하고 북핵을 비롯한 한반도 문제의 해결에 스스로 나올 수 있도록 해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