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지금 나는 아프리카 축구연맹(CAF) 총회를 참관하고 우리 대표팀이 전지훈련하는 것을 격려하기 위해 이집트를 거쳐 중동의 두바이에 출장 중이다. 멀리서나마 축구팬 여러분들에게 새해 인사를 드린다.
우리 선수들은 사우디에서 열리는 4개국 친선대회에 참가하는 등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우리 선수들의 경기는 실시간으로 한국에 중계되고 있다. 마침 설 연휴로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일텐데, 우리 선수들과 함께 독일 월드컵을 준비한다는 마음으로 축구를 즐기면서 성원해주시기를 바란다.
새해가 되어서 지난 일들을 되돌아보았다. 1993년 1월에 대한축구협회장을 맡았으니 축구협회장으로 일한 지 이제 13년째 접어든다. 42세에 취임하여 50대 중반이 되었으니 내 삶의 중요한 시기를 한국 축구와 함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일들이 주마등 같이 스쳐지나가는 것은 내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인가?
협회장으로서 봉사할 수 있는 기간이 3년 남았다. 열심히 일했으니 협회를 떠나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상념이 있는 되는 것은 아무래도 축구와 정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역임하신 분들이 누구인가 살펴보면, 여운형 선생, 신익회 선생, 일찍이 1930년대에 하버드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서울신문 사장 등 언론인으로 활동하신 하경덕 박사 그리고 장택상 총리, 장기영 부총리, 윤보선 대통령 등 우리나라 건국 이후 역사의 격동기에게 좌우를 망라하여 정치, 사회, 문화계의 존경을 받는 분들이다.
한국은 미국 식민지라고 주장하는 백기완 선생도 축구 선수가 꿈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축구를 좋아한다. 백 선생의 ‘아! 어머니’라는 글을 보면, 황해도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해방 직후 아버지를 따라 월남했을 때 중학교에 들어가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 꿈을 접었다고 했다. 백 선생은 2002월드컵을 앞두고 대표선수들에게 특강을 할 정도로 ‘축구 철학’이 있는 분이다.
회장 재임 당시 프로리그를 출범시켰고 ‘청소년 축구 멕시코 4강’의 기록을 남기는 등 축구 발전에 많은 일을 한 최순영 회장은 88서울 올림픽을 1년 앞두고 물러나야 했다. 88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몇몇 축구인들이 축구장에서 “최순영 회장은 사퇴하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최 회장에게 수모를 주어서 그를 물러나도록 했다. 그 이후 김우중 회장이 취임했다.
자기 의사에 반하여 임기 도중에 회장에서 물러날 때 최 회장은 “축구협회에 정이 떨어졌다”고 했다. 최 회장과 김 회장은 같은 고교 동문임에도 불구하고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다. 이런 사유로 인해서 내가 회장을 맡고나서 역대의 전임 회장들을 초청하여 식사를 하며 좋은 의견을 듣고 싶어도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최 회장은 재임 중 성남시에 있는 육군 상무대에 대표팀이 이용할 수 있는 선수 숙소를 지었다. 숙소 준공 1주일을 앞두고 회장에서 물러나자 퇴임한 지 5년 후인, 내가 회장에 취임한 직후 숙소 공사비 5억여 원을 소송을 통해 받아갔다. 7년 동안 재임했던 축구협회를 상대로 퇴임한 지 5년 후에 소송을 해서 돈을 받아간 것은 최순영 회장 말대로 축구협회에 정이 떨어져서 그랬을 것이다.
내가 회장에 취임한 후 사전에 약속을 하고 인사차 찾아갔을 때였다. 최 회장의 사무실이 있는 63빌딩 건물에 도착하여 엘리베이터를 막 타려고 하는데 비서실로부터 “최 회장이 출타했으니 올 필요없다”는 전화를 받고 되돌아 선 적이 있다. 나로서는 유쾌한 기억이 아니었지만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때부터 현재까지 아시아축구연맹(AFC) 사무총장인 피터 벨라판은 한국에 왔을 때 당시 축구협회장인 김우중 회장을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북한의 초청을 받아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러 접견실로 가다가 마침 김 주석을 만나고 나오는 김 회장을 복도에서 보았다며 “서울에서 못본 사람을 평양에서 만났다”면서 껄껄 웃었다.
김우중 회장은 재임중에 한국, 중국, 일본, 북한이 참가하는 다이너스티컵 대회를 창설했고,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남북 축구대회를 여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지금은 와병 중인데 속히 쾌유되어 우리 나라 경제 발전에 다시 기여하시기를 바란다.
내가 회장이 되었을 때 협회 사무실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종로 조계사 옆 골목에 위치한 견지동의 협회 사무실을 처음 찾아갔을 때 사무실은 어두컴컴했고, 회장실은 따로 없이 사무실과 부회장실만 있었다. 부회장실에 들어갔더니 낡은 책상 두 개와 5인용 응접 세트가 있었다. 책상 하나는 부회장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전무용이었다. 응접 세트의 소파는 다리 한쪽이 부러져 거기 기우뚱하게 앉아 업무 보고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박종환 대구 FC 감독과 지난해 11월 오찬을 함께 한 적이 있다. 박 감독에게 나는 “우리나라에서 존경받는 감독은 월드컵 4강을 이룬 히딩크와 멕시코에서 청소년 4강 신화를 이룬 박종환 감독이다. 후배 축구인들에게 존경받고 있으므로 자부심을 갖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박 감독에게 초대 여성 축구위원장을 맡기는 등 축구 발전에 앞장서도록 부탁했다.
박 감독은 오찬 자리에서, 1996년 아랍에미리트에서 열린 아시안컵 8강전에서 이란에 6:2로 져서 대표팀 감독을 사퇴했을 때 그 이후 1년동안 강원도의 여관방을 돌며 사람도 만나지 않았고, 심지어 자살을 생각했다는 말을 했다.
외국 언론은 한국이 월드컵 4강의 위업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대표팀 감독의 자리를 두고 ‘독배(毒杯)’니 ‘무덤’이니 하는 표현을 쓰는데 박 감독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 말이 실감났다.
얼마 전 신문에 나온 앙케트를 보면, 중소기업체 CEO들 가운데 63.3%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으며 그중 29%는 스트레스로 인해 자살 충동을 느낀다고 했다.
이 세상에 쉬운 직업은 없는 것처럼 국가대표팀 감독은 어려운 자리이고 축구협회장도 그에 못지않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아시아 컵, 아시안게임 등 중요한 경기에서 성적이 부진하거나 탈락하면 회장에게 물러나라고 한다. 심지어 아마추어 팀에서 사고가 나거나 팀이 해체되어도 사퇴하라고 한다.
1964년 동경올림픽 때 한국은 아랍공화국에 10:0, 체코에 6:1, 브라질에 6:0으로 패하는 수모를 당하자 축구협회 회장을 비롯하여 협회 임원진은 즉각 해산됐다.
1993년 10월, 미국 월드컵 최종 예선전이 카타르 도하에서 열렸을 때 우리팀이 일본에게 1:0으로 지자 어떤 언론은 이날을 ‘국치일’이라고 했다. 인터넷에서는 협회를 “폭파하러 가자”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고, 실제 협회 건물 벽에 빨간색 스프레이로 ‘자폭하라’는 글자를 써놓았다.
결국 마지막 경기에서 우리가 북한을 3:0으로 이기고, 일본이 인저리 타임에 1골을 허용하여 이라크와 2:2로 비기는 바람에 우리가 미국 월드컵 본선에 나가고 일본은 탈락하게 되었다. 생중계하던 일본 NHK의 아나운서는 망연자실하여 몇 분간 말을 하지 못했다.
일본의 한 신문은 ‘일본 본선 진출, 한국 탈락’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같은 맥락에서 국내의 한 주요 일간지는 취임한 지 6개월밖에 안된 나에게 미국 월드컵 본선 지출에 실패했으니 “축구협회장은 사퇴하라”고 했다.
1993년 회장이 된 후 아시안컵 대회 개최지를 결정하기 위해 AFC 회의에 처음 참석했을 때였다. 싱가폴의 회의장에 가보니 이미 개최 장소가 내정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AFC 조사팀이 한국에 왔을 때 대회를 유치하려고 열심히 안내하고 접대했었다.
“경기 장소를 미리 내정해놓고 회의하는 게 말이 되느냐,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투표로 결정하자”며 내가 주장해서 투표를 관철시켰으나 표 대결에서 지는 바람에 장소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때까지 아시아축구연맹(AFC)의 몇몇 사람이 모여 모든 것을 결정하던 기존의 관행에 대해 내가 “모든 것은 규칙대로 해야 하고 투명해야 한다”며 제동을 걸자 그들은 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AFC의 한 고위 인사는 “한국 대표팀의 성적이 나쁘면 정몽준 회장이 축구협회장에서 바로 쫓겨날 것이므로 신경쓸 것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외국 사람이야 자기들의 이익을 따라서 그런다고 하지만, 이런 고약한 말을 듣고 국내에서 그대로 떠들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창피하다는 생각이 든다.
2002년 월드컵 대회의 유치를 1994년에 시작할 때 그 배경이나 동기에 대해서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992년 대선에서 아버님이 출마했다가 실패하자 일부 언론사는 내가 곤경에서 탈피하려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되지도 않을 일을 하러 다닌다고 비난했다. 언론에서는, 유치에 실패하면 “이홍구 위원장과 정 회장은 이민을 가야할 것”이라고 했고, 나와 이 위원장이 삭발한 모습을 만평(漫評)으로 그리기도 했다.
1996년 6월 월드컵 유치 직후 국내의 주요 일간지는 영국인으로서 2002월드컵 조직위 홍보대행사 사장이었던 빌 라이언스의 말을 인용하여 “월드컵 유치에 반대한 국내 체육계 인사가 있었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월간 신동아 인터뷰에서 2002월드컵 유치는 구평회 위원장과 김운용 회장이 욕을 먹으며 고생해서 이룬 일이라고 말하며 “정 회장은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2004년 3월 상암에서 열린 2004 아테네올림픽 최종예선 중국전에서 올림픽대표팀 선수들이 중국의 프리킥 공격을 막아내고 있다.
2004 아테네 올림픽 최종예선전 첫 경기가 2004년 3월 중국을 상대로 상암경기장에서 열렸을 때 우리 팀은 고전했다. 최성국 선수가 맹활약을 하여 1:0으로 이기지 못했다면 아테네 올림픽 본선 진출을 보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첫 경기를, 그것도 홈경기를 고전한다면 다음 경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아마 2004 아테네 올림픽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틀림없이 “축구협회장은 사퇴하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올림픽에는 23세 이하 선수만 참가할 수 있고 24세 이상은 와일드 카드라 하여 3명을 출전시킬 수 있다. 2004 아테네 올림픽 당시 한국은 와일드 카드로 이영표 선수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8월의 올림픽 본선 때는 히딩크 감독이 이영표와 박지성 두 선수를 보내 줄 수 없다고 했다.
FIFA 규정에 의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두 선수를 불러올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무리를 해서 데려올 경우, 해외에 진출한 두 선수가 소속 팀에서 불이익을 당할지 몰라 지레 걱정이 되어 두 선수의 차출을 심하게 독촉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은 8강전에서 만난 파라과이와 한번 겨뤄볼만 했으나 박지성과 이영표 선수가 빠진 가운데 결국 2:3으로 지고 말았다. 이 고비만 넘기면 4강에서 비교적 쉬운 상대인 우즈베키스탄과 만나게 되어있어 올림픽 축구 결승 진출도 바라볼 수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쉽다.
2004년 1월 2006년 독일월드컵을 위해 1차 예선전을 가졌을 때 우리 대표팀은 비교적 약체로 평가되는 베트남과 몰디브에게 고전했다. 이들 팀을 얏본데다가 프로팀의 협조도 원활하지 않아서 동계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코엘류 감독은 자기가 대표팀 훈련을 한 것은 72시간뿐이라고 푸념했다. 반면 일본은 2004년 1월에 착실한 동계훈련을 한 덕분에 순조롭게 예선전을 치렀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최종 예선전이 열렸을 때다. 한국, 일본, UAE,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이 홈 앤드 에웨이로 경기를 가질 때 우리에게 불리한 경기 일정을 유리하게 수정할 수 있었다.
1997년 7월 스위스 취리히에서 조 추첨을 한 결과 우즈베키스탄과 서울에서 홈 경기를 한 이후 곧바로 카자흐스탄과 어웨이 경기를 하게 되어있었으나 카자흐스탄과의 대결을 홈 경기로 수정함으로써 연속해서 홈경기를 치르고, 나중에 어웨이 경기도 연속으로 치르게 하여 우리 대표팀에게 여행 부담을 크게 덜어주어서 도움이 되었다.
이익을 도모한다기보다 불이익을 방지하지 않기 위해 FIFA와의 긴밀한 관계 유지가 중요하다. 협회에는 유능한 직원이 많이 있다. 이들이 FIFA나 AFC 등 각 대륙연맹 그리고 국제적인 축구인들과 많은 교류를 갖고, 중요한 대회를 유치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할 것이다.
아벨랑제 전 FIFA 회장은 1998년에 물러날 때까지 24년간 회장에 재임했으며 현 블래터 FIFA 회장은 1981년부터 1998년까지 사무총장을 19년간 하다가 1998년부터 지금까지는 회장을 맡아오고 있고, 현재는 세 번째의 임기를 맡기 위해 2007년의 FIFA 회장 선거에 출마할 것으로 보인다.
1993년 정몽준 회장이 KFA 회장이 된 후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FIFA하우스를 방문, 당시 아벨랑제 회장과 블래터 사무총장(현 FIFA회장)과 찍은 기념사진.
아르헨티나의 그론도나 회장은 1987년부터 지금까지 18년간, 브라질의 텍세이라 회장은 1989년부터 16년간, 말레이시아의 전 국왕인 쉐이크 아마드 샤 회장은 1986년부터 19년간 협회장을 맡고있다. 감독으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퍼거슨 감독이 19년째 같은 팀을 맡고 있다.
축구와는 다른 분야의 이야기지만,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전 수상은 1981년부터 2003년까지 23년간 집권을 했다. 수상 재임시, 우리와 똑같이 1998년에 외환위기를 당했을 때 IMF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고정환율을 유지하는 등의 방법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하여 국부 유출을 막았다. 당시에는 무모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사후적으로는 우리보다 훨씬 더 잘 대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 사람이 국가나 단체를 오래 맡는 것은 정서상 좋지않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득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이다.
축구라는 종목이 국제화되었기 때문에 축구협회장은 외교의 중요성과 전문성으로 인해 대부분 장기 재임이 많다. 나는 임기를 지키겠지만 누구라도 능력만 있다면 축구협회장은 오래 맡아도 좋을 것이다. 어느 자리든 임기가 되었다고 경직된 자세로 단기간에 교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 사회를 보면 인간관계가 점점 더 척박해지고 있다. 사오정이니, 오륙도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할 수는 없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나라에 애국자는 있어도 축구팬은 없다”는 말도 있다. 축구는 축구로서 보고, 즐기는 문화도 정착되었으면 하는 것도 새해에 갖는 바람이다.
정주영 아들이지 않나? 정주영이 정치에 참 관심이 많았죠.. 기업인들은 정치인에게 휘둘릴수 밖에 없는 현실이기에 정주영은 아예 아들을 정치인으로 키우기 위해 정몽준을 이렇게 키운겁니다. 정몽준이 그래서 현대가의 굵직굵직한 기업을 운영하는것이 아니라 이처럼 정치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거죠.
첫댓글 물러날때를 알고 물러났었으면... 영웅취급받는데
근데 솔직히 말해 아직 물러날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FIFA에서 저만한 영향력을 가진 울나라 사람이 어딨죠?? 정회장 퇴진을 요구했던 분들도 나름대로 훌륭하시지만 국제 외교력인 부분에서는 난감하죠.
정주영 아들이지 않나? 정주영이 정치에 참 관심이 많았죠.. 기업인들은 정치인에게 휘둘릴수 밖에 없는 현실이기에 정주영은 아예 아들을 정치인으로 키우기 위해 정몽준을 이렇게 키운겁니다. 정몽준이 그래서 현대가의 굵직굵직한 기업을 운영하는것이 아니라 이처럼 정치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거죠.
물론 이건 제가 교수님에게 들었던 얘기입니다. 사석에서.. 강의 시간에 이런거 말하면 말 많아진다고 사석에서 말씀해 주셧죠. 제생각이 아니니 태클은 사절.. 그냥 정보공유로 생각해주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