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밀려드는 겨울의 첫머리다. 이 추위의 앞도랑에서 만나는 임의진의 <사랑>은 아랫목을 데우는 다스한 아궁이 군불만 같다. 남도의 젓갈맛 나는 날것 그대로의 독특한 문장으로 '참수필'이라는 명예를 얻으며 지윽한 사랑을 받은 바 있었던 <참꽃 피는 마을, 이레>, <종소리, 이레>에 이어 근 3년 만에 내는 세 번째 글집이다. 말못할 사정으로 불운했던 '종소리'에 목이 잠겨 한동안 절필로 지냈던 시인이 <사랑>을 가슴에 안고 돌아왔다. 남쪽바닷가의 펄펄 뛰는 기운이 여전한 근작 수필과 그만의 다정다감한 온기가 묻어있는 시들을 모아 엮은 <사랑>은, 몇차례 전시회도 가진 바 있는 저자의 '기기묘묘' 그림까지 곁들이고 있다. 마치 헤르만 헤세, 장 꼭도, 칼릴 지브란처럼 자기 책에 보탠 그림과 사진, 시와 수필이 비빔빕처럼 잘 버무러져 꽉- 차고 걸지며 웅숭깊고도 맛깔스럽다. 이것이 바로 남도의 그 절묘하다는 한정식인가!
임의진은 앞서 예로 든 헤르만 헤세의 한국판마냥, 시와 수필과 노래, 그림, 종교적 영성(헤세도 신학교 출신이다, 중도에 포기했으나... 임의진시인처럼 아버지 또한 목사였고...)를, 목가적 밭일, 세계여행 등 어느 곳에서나 무슨 일에서나 헤세처럼 흥겹게 춤춘다. 또는 안소니 퀸의 춤사위가 언뜻 떠오르는 희랍인 조르바를 현실 속에서 보는 듯하다. 그래서 일까, 임의진은 아호가 둘 있는데 머물 때는 '어깨춤'이고 떠돌 때는 '떠돌이별'이란다.
이런 흥과 다재다능에 대고 그는 스스로 말한다. "나 자신을 온전하게 살다가고 싶다. 그래서 이것저것 내 영혼을 달뜨게 하는 모든 관심사로부터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그러니까 계속 물어볼 질문에 대답은 허술하다. 나도 몰라, 모른다니까." (나도 몰라)
더구나 의형제 사이이자 신비에 쌓인 언더그라운드 포크록 가수 김두수의 음악감독으로 취입한 독집음반 <하얀새>를 지난 여름에 낸 바 있다. 그러니까 임의진은 포크 가수이기까지 하다. 목소리가 부끄럽다하여 비매품으로 지인들과 나누던 그 음반을, 이번 <사랑>을 출간과 함께 '소량' 선물로 삼기로 했다. <사랑>을 서둘러 품에 안은 이들에게는 귀한 선물이 될 것이다. 임의진이 직접 번안하여 부른 존 바에즈의 반전노래와 하지다키스의 저 유명한 노래 '우편배달부', 크리스마스 캐럴, 임의진식 김민기 레파토리가 흥미롭게 담겨있다. 노래 또한 글집 <사랑>의 또다른 버전이다. 영역의 관문이란 도대체 없는, 예술혼의 종횡무진에 즐거울 것이다.
시인이 사는 전남 땅끝마을 강진의 흙집은 너무 낮아서 머리를 찧기 일쑤다. 세상이 어떤 세상이라고 아직도 산에 올라가서 장작개비를 해와 아궁이를 살피고, 보통 근엄한 목사라는 직무와 관계없아 티를 내는 일 없이 묻히고 섞이는 그다. 히피처럼 긴 머리와 수염, 털스웨터와 환한 미소, 기존의 목사님 인상과는 아주 다른 파격의 만남이다.
그가 세운 <남녘교회>는 극히 보수적인 한국교회 지형에서 그나마 인간미가 나는 교회로 정평이 났다. 옛스런 시골교회의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종을 치는 종루가 아직 있으며, 장의자도 없는 나무마루에 방석을 깔고 앉는다. 성물인 십자가도 벼락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구부러진 십자가를 모셨고 촛불을 켜서 예배를 바친다. 예배때는 풍금 반주를 하고 찬송가보다 김민기 노래를 더 많이 부른다. 척 보아도 시인 목사의 교회당임을 알 수 있다. (한겨레 보도문 참조/ 2003.11.13)
그는 촌티 줄줄 나는 '촌놈'만이 아니다. 농사일을 할 때 말고 나들이를 하는 날이면 뉴요커에 준하는 세련된 패션하며, 기성 화가들도 혀를 내두르는 그림 솜씨가 능란하고, 통기타를 안겨주면 가수 뺨치도록 노래도 구성지다. 그런 끼 많은 그가 은둔을 고집하며 낙향거사로 오래 지냈다, 무려 십년 세월을 그러했다.
작가며 목사인 이현주 님은 임의진 시인을 가리켜 "슬픈 개구쟁이"라 불렀다. 슬픔과 기쁨을 넘나드는 시인의 가녀린 마음과 우직한 행보를 제대로 포착한 눈썰미일 것이다. 번역가며 시인인 류시화는 "내가 조금 그를 아는 사람이다. 어떤 날은 하루종일 강가에 나가 강물을 바라보기도 하고, 어떤 날은 하루종일 툇마루에 누워 있다가, 어떤 날은 동네 사람들과 밤이 이윽토록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고 술회한다. 물끄러미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일상을 그렇게 들려준다.
음악인 노영심은 "목사님은 맑은 포도주 같은 사람이다. 값비싼 포도주가 아니라 보졸레처럼 정답고 맛스러운 분이다."고 말한다. 누구나 마실 수 있지만, 포도주의 맛을 잃지 않는 그런, 세간살이에 이웃으로 함께 하는 올곧으면서도 넉넉한 수행자라는 뜻이리라.
'강아지똥'. '몽실언니'의 동화작가 권정생은 "항상 가난한 이웃과 벗하면서도 멀리 내다보는 그가 대견하다. 그는 친구가 많은 사람이다."고 말한다. 사회적 실천까지 겸비한 연민의 행진을 하는 시인에 대한 격려의 소리이다.
임의진은 오지에 파묻혀 있는 듯 하다가도 종종 <월간 샘터>, <작은 것이 아름답다> 등에 탁월한 연금술사의 맛깔스런 글들을 발표했고, 가슴에 닿는 연정의 시어들을 샘물처럼 퍼다주고는 했다.
그의 다재다능은 경계가 없다. 음악광이기도 한 그는 선곡음반 <여행자의 노래>, <보헤미안>으로 오랫동안 교보문고, 예스 24, 알라딘 등에서 음반매장 월드뮤직 부문 1위의 기염을 뿜어냈다. 친구 일철스님의 병구완을 위해 준비한 음반 <산>도 매니아층을 이루고 있다. 음악의 신은 그를 여행자로 이끌었다. 한국 교회에 이런 희귀한 자유인 목사도 없을 것이다. 일주일에 한번 예배가 전부고, 가끔은 먼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기타 하나 달랑멘 채 비행기에 오르면 곧바로 집시가수의 <80일간의 세계일주>였다. 최근에는 여행 중에 만난 음반들을 초이스라 하여 통째로 발매하고 있다. 임의진의 심미안으로 발매되는 초이스 음반 <사비나 야나투- 그리스 여행기>와 <나오미 & 고로- 일본 북해도 여행기>는 지난 몇주 동안 월드뮤직부문 정상을 달리며 운명 아니면 만날 수 없는 노래들을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감성이 증폭된, 아우라지가 바로 이 새로운 글집 <사랑>이다. 시인은 작가의 말에서 '처음 정신'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자기 자신의 속내와 번민, 격정과 환희심을 담아낸 처음정신이 오늘 이 <사랑>이라면 가히 반갑고, 설레는 만남이 아닐 수 없으리라.
* 길잡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리
임의진에게서 여행은 단순히 여행이 아니라, 생애에 대한 탐구요 갈망이다. 덧없음에 대한 확인이요 희망에 이르는 발권이다.
"우리는 그 기차칸에서 손을 잡을지도 모른다/ 처음 만났지만 아주 오래 만난 사이처럼/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지도 모른다/ 종착역은 어김없이 다가오고/ 내가 먼저/ 혹은 그대가 먼저 기차에서 내린다면/ 부디 안녕! 이라고 손을 흔들어 주기를" (기차여행)
만남과 작별이 고스란히 담긴 시 '기차여행'은 인간의 일생과의 연결구사가 절묘하다. 삶이 기차여행이고 죽음이 어떤 정거장에서의 하차라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쓸쓸하고, 한편 다정하다.
"죽음조차 나를 붙잡아두지 못하리/ 길에서 밥을 해 먹고 빨래를 말리고/ 짬짬이 졸다가 낙타 똥으로 불을 지피고/ 벌거벗어도 살을 쪼을/ 까마귀가 없는 들에서 초연히 죽어가고/ 싶다 아무런 세간살림도 없고/ 간호도 없는 빈 천막에서/ 집을 영영 비우게 될 그 날" (집을 비운 날이 많았다) 욕심이 없는 빈마음의 유랑민이 아니라면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누가 운전하는 비행기에 올라타서/ 이승의 건너편까지 밤새 날아가는 중일까/
내 생애는 누가 조종하고 있는 걸까/ 궁금하대서 조종석을 열어달라기도 뭐하고/ 야간비행사를 한번쯤은 만나보고 싶은데" (야간 비행사)
시인은 이 야간비행사를 알고 싶어서 철학(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고 했다. 네델란드의 위대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도 한때 목사였다. 위대한 저술가들은 철학을 바탕으로 인간영혼의 깊은 밑바닥을 주목하고는 했다. 문학적 기교가 판치는 세상에서 근원적 학문을 바탕으로(일개 종교의 선교가 목적이 아닌)한 이러한 인간에 대한 숭엄한 이해가 요구되는 시절이 아닌가.
"무감한 일상의 주술에서 풀려나/ 깨달음이 가마우지떼 만큼 하강하리라/ 운전면허증도 필요 없고/ 평면 사각 와이드비전도 쓸데없다/ 수시로 모델이 바뀌는 손전화도 무용지물/ 남포등 하나면 전신주를 세울 이유가 없다/ 모래 위에 세워 바야 전갈이 깨물어 버릴 것이다/
더더구나 돈은 불쏘시개로나/ 적당하지" (사막에서 쓴 시)
자본에 탐닉하고 있는 현대인들은 깨달아야 한다고 노래한다. 과학자만큼 시인이 필요하고 고층빌딩만큼 흙집이 필요하다고 시인은 말한다. 여행길잡이의 소리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 인생은 그런 것
"이불은 누구일까/ 내가 태어나 처음 누웠던/ 이불은 누구였을까/ 내가 하염없이 슬퍼서/
얼굴을 파묻었던/ 이불은 누구였을까/ 내가 죽으면/ 나를 껴안아 덮어 줄/ 그 이불은 누구일까" (이불은 누구일까)
아마도 그 남향집 짧은 빨랫줄에 이불을 널며 이러한 시를 적었을 것이다. 이불로 함께한 인생에 대한 노래다. 그러한 이불이, 이불 같은 사람이 있는가 묻는 것이다.
"정말 나비는 공중을 나는 빛의/ 준말일까 찰나의 빛이 꺼져가고 있다/ 서서히 전등의 여운도 가시고/ 설운 사별 막바지 암흑/ 나비가 꺼져 가고 있다/ 날으던 빛이/ 사그러들고 있다" (밤마다 왜 어두워지는 걸까) 시인은 죽음을 어두움으로 이해한다. 나비(날으던 빛)가 죽었다는 것으로 어둠이 찾아온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나비가 나는 아침은, 기대해도 될 새아침이겠지.
"내게 있는 바칠 만한 것을 찾아본다/ 없어도 관계없지/ 이내목숨 한보따리는 바치게 될 테니까/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으로" (유언장) 유언장을 써서 벽에 붙여놓고 사는 시인은, 짧은 인생 긴 인생을 막론하고, 오늘 하루를 다만 살고 있다. 그러기에 욕심도 미련도 없는 것이다.
"시계는 새벽 두시에 멈췄고/ 나는 아직도 살아있다/ 어떻게 시계가 멈췄는데/ 내가 살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괘종시계)... "가을 되면 순식간이라/ 허물어지는 것/ 새어나가는 것/ 나마저 버리고 갈, 이승의 한때" (인생) "고구마도 맛보기로 한 개 먹어보고/ 간이 들어야 캔다/ 날마다 사라지는 사람/ 사람들." (고구마밭) 도처에 등장하는 생에 대한 이해, 죽음에 대한 이해는 시인의 인생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죽음마저 삶으로 이해하고, 이승을 지나치는 한 때로 규정한다. 어떤 불온한 시인은 그저 '한 철'이라고 허망히 노래했던 것처럼...
* 화 화 꽃피는 소리, 생명의 움틈을 보라
아찔한 세상의 길가에서 시인은, 생명세계에 대한 뜨거운 눈길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자연과 항시 연애중이다. "태양은 눈부셔라 바라보는 눈동자/ 바다는 그의 짭쪼름한 눈물/ 저 숲을 보라 이슬이 내려앉은 눈꺼풀/ 사막은 세월의 더께가 쌓여진 눈주름/ 작은 호수를 품고 있는 온순한 눈자위/ 나는 그의 눈동자 안에 어리는/ 하염없는 열망 "(오! 눈빛) 열망어린 눈길은 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이끈다.
"화 화 꽃피는 소리 사립문 넘고/ 땅의 모빌인가 봄바람 따라 살랑거린다/ 봄비 끈에 매달린 나비가 스치는 인연" (수선화) 아침의 경탄은 밤으로 이어지고 시인의 밤은 예사롭지 않다.
"앞으로도 나는 이처럼 많은 별을 볼 수/ 없으리라고 여기고 밤새 서 있었다/ 오래 버티고 서 있는 놈을 누가 당해낼 것인가/ 그러니까 나는 그날 밤 내 생애 가장 많은/ 별을 볼 수 있었다" (내 생애 가장 많은 별을 보았던 날 밤) 시간이란 무조건 시인의 것이다. 느리게 사는 사람만이 진정 모든 것을 본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진리다.
"영화배우처럼 겉멋 있지 않아도/ 지극한 공경 받을 적마다/ 찬사가 절로 나네/ 얼굴 반반한 것들 봐주라며/ 꾀음질 암만 해도/ 절대 넘어가는 일 없으리라." (무화과나무) 작은 무화과 하나 맛보면서 적었을 이 시에는 생명의 다양성, 처처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 한다. 편협하고 단조로운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 아니다.
"순한 사슴은 밤새 머금은 이슬을 떨구며 글썽거린다/ 친구야 될 수 있으면 나무둥치를 자르지 말자/ 이 가련한 대지의 뿔을 자르지 말자." (벌목) 자연을 지키는 선봉에 선 시인은 무등산 지킴이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갑자기 병환으로 입적한 일철 스님과 둘이 친구가 되어 증심사 환경음악회 <무등산 풍경소리>를 열어 많은 호응을 받기도 했다. 벌목과 개발에 반대하는 시심의 발로는 언제나 시보다 먼저 발로 뛰게 했다.
"살구나무가 있었나요? 삼 년을 넘게 살면서도/ 무슨 나무가 어디 있는지 모르고 살아요/ 약속장소를 나무 아래로 / 정해 보았다" (약속장소) 자연의 친구인 시인과 약속장소를 정하는 일은 실로 재미난 일일 것 같다. 밀실은 상큼한 연인들의 약속장소로는 부적격한 면이 많다.
"해살거리고 놀다 눈칫밥 얻어먹기는 정말 싫었네/ 돈 몇 푼 받아먹고 그것으로 보답하는 목사노릇은/ 멀쩡한 사지육신 놀리며 비굴하게 사는 삶이지/ 사례비를 마다했네/ 육체 노동 앞에 떳떳하고 싶었네/ 목사관 기름값 없으면 아궁이 불을 지피면 돼/ 앙당 물고 고집하며 살기를 몇 해였던가/ ---중략---/겨울이라도 갚자며 겨울이라도 참자며/ 장작개비 끌고 돌아오는 고갯마루/ 착한 노루가 황급히 길을 터주고/ 동네서 나무를 때는 유일한 오두막이/ 눈 속에 떨고 있었네 어서 불을 지펴달라고/ 알량한 편리를 마다하고 불편을 청하여/ 다비를 하는 집/ 나 마지막 남은 순환의 집에서/ 허물을 찍어 허물을 태우네" (나무꾼) 지난 가을추위부터 시인의 흙집에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다. 시를 몸으로 사는 시인이 있기에, 덕분으로 겨울이 이만큼 따듯한 것이아닐까. 그런데 시인의 마음을 괴롭히는 개발은 매발톱처럼 날카롭다. "미선나무가 있는 줄도 몰랐을 미선이도/ 집을 팔았나보다 섬뜩한 철골이 올라가고/ 나무는 넘어졌다 일꾼들의 언 손을/ 녹여주었으리라" (뒷덜미) 뒷덜미 잡힐 날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라고 시인은 울부짖는다.
*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사랑은 인류가 존재한 이래, 아니 이 지구별에 모든 생명이 존재한 이래 처음과 끝을 가름하는 모든 언어와 행동의 궁극지일 것이다. 신 또한 자기를 가리켜 사랑이라고 말한다(신약성서). 시인도 신의 진술에 응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조물주는 사람의 가슴을 꽃밭이라고 부른다/ 일년 열두 달 꽃들이 번갈아 피어날 것이다/ 짓밟히지 않는다면 실로 많은 꽃들이 피어날 것이다/ 단 한 사람의 만족을 위해 화분에 갇히지 않는다면/ 연정은 무수히 피어나서 이 골짜기 저 들판으로/ 분방한 사랑여행을 즐길 수도 있으리" (첫꽃) 그렇듯 이 꽃밭에서의 생애동안 사랑은 저 바다의 파도만큼 숱하게 넘실거려야 한다.
"누이는 공장을 빠져나와 버스를 기다리는데/ 여대생과 사랑에 빠진 사내는/ 이별의 선언을 가지고 약속장소에 앉아 있네/ 누이여, 포도밭에서 취하고 가라/ 여행을 할 줄 아는 사람은 포도밭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포도밭에는 포도주가 있고/ 포도주는/ 인생을 다 알고 있다네" (포도주) 때로 사랑은 마치 쓴약처럼 쓰고도 쓰다. 그 아픈 상처의 댓가에 대해서도 시인은 관찰력을 집중한다. '포도주는 인생을 다 알고 있다네' 라는 구절은 사랑에 충분히 취해야 함을 역설적으로 일갈한다!
"펄펄 눈 오시고 쪽창가에 팔을 괸 채/ 귀환을 반겼습니다 살면 얼마나 산다고/ 좋다가 이별입니까 나는 버리지 말아주세요" (걸음 걸음, 달맞이꽃) 사랑에 대한 하염없는 갈구만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과학 너머의 신비적 실천까지 주저하지 않는다. 사랑을 위해 무릎을 모은 기도를 마다하지 않는 거다.
"당신은 교회당 종을 울리러 일어나고/ 잠든 내 방에 상량을 마친 아침하늘 같이/ 일어날까요 같이 기도하러 가요/ 늘어진 손을 잡아 일으키시겠지요/ 당신 곁에서 나 기도하고 싶어요" (사랑) 때로는 사랑이 영혼의 이웃인 육체에까지 스며든다.
"당신의 옷을 한올도 남김없이/ 벗길 수 있다니/ 신랑입니까 내가 바로 신랑입니까." (귤은 나의 신부) 귤을 까먹으면서 그는 여자를 벗기고 남자를 벗긴다. 존 레논과 오노 요꼬의 베트남전 반대 침실 시위처럼 그렇게 전쟁이 아닌 평화, 미움이 아닌 사랑을 노래한다.
"좁은 베란다의 빨래는 다 말랐을까/ 고장난 세면대는 누가 고쳐주며/ 시집 위의 먼지는 누가 털어주나" (아랫목) 심각한 작별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시인의 정서 건너편에(아마도 신과 작별하여 종교인이 되었는지도) 자상한 일상의 사랑이 숨겨져 있다.
"우산은 오늘만 기다렸던 모양이다/ 왠지 우산 손잡이가 따듯하게 느껴진다/ 꽉 잡아 주니까 저도 나를 꼬옥 만진다" (비가 오시기를 참 잘했다) 우산 손잡이를 잡으면서도 사람의 손을 생각한다. 사랑은 손잡아 주는 것이라는 말씀인가.
"이 사원에 수도승 되어 돌쩌귀 매만지며/ 어루만지며 돌담도 화단도 기도였다네/ 쓸모 없는 돌도 누군가 손을 내밀면 / 어디 한군데 소용이 되어 쓰여지더군/ 나는 공중에 들렸다가 돌연 버림받은 신세/ 여러 조각으로 깨어진 돌멩이 신세/ 미지근한 달엔 방고래로 반 토막 없고/ 개울 나갈 때 물수제비를 뜨거나/ 그리 수장도 해보았네 잊고 싶었네/ 해 저무는 오후 되면 강가에 나가/ 식어가는 돌 하나라도 만져보는 일/ 네 손을 마지막으로 만졌던 기억/ 깜짝깜짝 놀라기도 그리웁기도" (식어가는 돌멩이 만지다가, 네 손을 마지막으로 쥐었던 때를 생각하고 가슴이 미어지던 일) 그렇게 사랑이 식어간다면 너무 아쉽지 않을까.
* 밭일을 하고 굵은 땀을 흘리며...
"아, 모른버짐 퍼진 얼굴이 벌갰다/ 옥수수대가 이 허껍대기 인생의 무게를/ 버텨주는군/ 그냥 주무시지 마시고 콩노물국이나/ 한그륵 잡숫고 눈 붙이세요/ 비척비척 걸어가는 뒤통수에 드린 당부는/ 들으셨나 말으셨나 나도 사실은/ 점심도 안 먹었어" (소나기 손님) 시인의 시골살이는 밭일이 거개다. 시인의 말대로 손바닥만한 텃밭을 일구며 농군들과 어우러지는 입담은 슬프고도 아름답다.
"칠 팔 년 되었지 아마 그 야물딱진 할미/ 졸음에 못 이겨 숟가락 놓고 누운 뒤부터/ 내가 종지기다 하늘의 승강장/ 오래도록 서서 누구를 애타게 기다렸던고/ 소소리바람 거기다가 실려보낸/ 보고 잡단 소리/ 같이 있고 싶단 소리 자존심도 죽이고/ 앞산 상수리숲까지 술렁거리게/ 귀뿐이 가진 것 없는 산토끼가 듣고/ 제비꽃별이랑 궁금해 내려오고는 했지/ 건넛방 벽지에 붙은 기차도 경적으로 화답하고/ 쌀밥과 된장국도 같이 먹자며 부풀고는 그랬지/ 울려라 종소리" (종소리) 밀레의 만종에 나오는 그 풍경, 바르비종 동네의 예배당처럼 어여쁜 그 교회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밭일 하는 농부들의 굵은 땀을 닦아준다.
"너그러운 살처럼 보듬어주고/ 비단금침으로 덮어주리 나의 이웃들/ 술 취한 은수자隱修者에게/ 손전등 되어 지켜주는 붉은 열매들" (가시) 거기 동네의 일원으로 시인이 머물고 있다. 붉은 열매들 곁에서 그는 맑은 열매다.
"막차에 올라 차창 밖 내다보면/ 입술과 입술이 스쳤을지 몰라/ 오고가는 사람들 속에서 알아보았을지도 ---중략--- 완도 가는 길, 해남 가는 길/ 어중간한 그 언저리 외로운 누각/ 너무도 바닥이 패여 지붕을 높이 올렸다네/ 종탑까지 세웠네 손 흔들며/ 나 여기 살고 있노라고/ 골방에서 뛰쳐나와 소리소리 질렀지" (덕남리) 밭고랑 사이로 보이는 시골교회 낡은 흙벽돌 목사관에서 시인은 호미와 삽을 걸쳐놓고 이러한 시를 쓰고 살았다. 땀의 시, 그리움의 시...
* 고독이라는 슬픔을 이고 가는 변방의 시인
"일몰, 동백 여러 목숨 떨어지고/ 눈밭에 발자국 남기고 돌아오는 길/ 누가 있어 동백 숲에 말 걸어 줄까/ 누가 장갑을 벗어 손이라도 녹여줄까/ 어리고 푸른 별들이 막막한/ 겨울밤을 견뎌내는 일/ 그늘진 사람 알아 연락이 두절된 뒤/ 쉬이 하얘져버린 머리카락 보아/ 바람언덕에 풀어놓은 저 억새카락 보아/ 다음 정거장에서 나 내릴 때/ 아무도 반겨주지 않으면 어찌할까/ 등이 시려 잠도 오지 않을 긴긴밤/ 심야극장도 없는 산골에서/ 나 앞으로 어찌 살아갈까." (정거장에 혼자 내릴 때의 마음 같은 것) 시인의 천형은 고독일 것이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단란한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고독과 고행으로 하늘의 도를 구하며 선방 승려처럼 살아가는 임의진의 빈처는, 그런 슬픈 개구쟁이의 행적은 정거장에 혼자 내릴 때의 장면과 동일하다.
"사랑니가 없다/ 아리다고 사랑니를 때마다 쏙쏙 빼버렸다/ 그래서일까 사랑은 번번이 기회를 잃고/ 나이도 그만큼 먹어갔다 네 번의 사랑이 있었을텐데/ 죽기 살기 외통수가 없었으니 너무 억울하다" (사랑니가 없다) 어서 늙고 싶다는 그, 머리와 수염이 희어질 날을 고대하는 젊은 시인의 넋두리는 쓰라리기조차 하다. 그의 그림 중에 <내 사랑 마라(뭉크의 그림 가운데 마라에 대한 답례이다)>는 입만 있고 눈이 없는 소녀의 모습이다. 사랑니가 없듯 어디 한군데가 없는 유실, 그것은 남쪽 바닷가 외진 시골에서 담담히 살고 있는 시인의 현장 스틸사진을 보는 듯 처연하다.
"잠들면 아무도 욕심을 / 부리지 않아 허망히 주저앉은 그를 똑같이 화상 입은 검은 그을음이/ 끌어안았다 낮의 상사인 밤" (그림자) 쓸쓸한 밤은 낮의 상사라고 노래한다. 상사병을 앓지 않는 존재계가 있을까.
"저 공은 누가 던졌을까/ 아래 마당에 농구 골대를 하나 세웠다/ 아이들이 공을 하늘로 던진다/ 지나가던 노인도 공을 던진다/ 개가 하늘로 붕 뜬 공을 바라본다/ 현관 계단에 앉아 나도 고개가 떨어진다/ 아니 저것 좀 보아! 둥근 공이 하나 더 떠있다/ 대체 저 공은 누가 던졌을까// 낮달" (저 공은 누가 던졌을까) 낮달과 같이 홀로 적막강산인 시인의 자화는 시의 마디마디마다 '그대에게 가닿음'을 추구한다.
"소나무 뿌리가 살살 기어와 내 발을 만졌다/ 어디까지 가느냐고 너는 발이 있어 좋겠다고/ 하늘에 닿게끔 키로 걸어가는 소나무가/ 욕심도 많아서 날보고 부럽다 하는가/ 나는 바쁘게 걷지만 하늘로 걷고 싶었다/ 솔밭 응달에 번지는 발자국은 진즉/ 언덕을 넘었어도 더디고 더뎌라/ 솔가지 우러르면 한참이나 부족해/ 애당초 시작을 말 것을 그랬구나" (앉은뱅이꽃( 자화自畵)...) 물론 닿음은 미치지 못함이라는 현실 앞에 절망을 주기도 한다. 좌절을 안기기도 한다. 그래도 시인은 다시 일어나 글을 쓴다. 글이 그의 지팡이요 생명선 동앗줄이다.
* 다함없는 연민의 일상
시를 쓰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시를 사는 사람은 드물다. 임의진 시인은 자신의 시처럼 사는 드문 시인이다. 그래서 빛나고 아름답다. 글이 먼저냐 삶이 먼저냐에서 그는 언제나 삶이 글보다 앞서 갔다.
"황사비가 지나간 뒤로 밖이 뿌옇게 보였다/ 벽 뒤로 숨었던 밀뱀이 파문 밖으로/ 청명의 의발을 수습하러 나갈 참,/ 앞이 보여야지 젠장 내 눈이 문제인가/ 유리창 바깥이 흙먼지 얼룩으로 지저분하고/ 손으로 쓰삭 문대자 손바닥이 새까맣게 되었다/ 물 한 바가지면 족하지/ 물 한 바가지면 세상은 방금 전 그 세상이 아니다/ 자주 눈물을 끼얹고 싶다/ 슬픈 눈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싶다" (슬픈 뱀) 연민의 눈으로 일상을 보며 살아가는 시인은, 슬픈 그 눈은 글집 <사랑>을 관통하는 일맥상통의 정서다. 그 다정함은 붉은 피를 가진 사람으로 그치지 않는다.
"풀이 나에게 묻곤 한다/ 매일같이 찾아와서 묻곤 한다/ 집집마다 쫓겨난 고 안쓰러운 것/ 우글우글한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수 차례 조아린다 볼따구니 이슬을 훔치며/ 여기 마당에 고아원을 차려줄 수 없겠느냐고/ 이름 없는 것들/ 꽃도 안 피는 가엾은 것들이/ 나를 빤히 치어다본다" (고아원) 마당에 우북하게 돋아오른 풀을 보면서 고아원 원장이 되어주고파 한동안 풀을 뽑지 않았다는 시인이다. 개미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심성으로 번번이 세상에 속고 세상에 운다.
"광산경찰서 맨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조그만 가방에서 기어 나온 책도 무릎을/ 꿇었다 러시아 사람이 쓴 세계철학사와/ 헤르만 헤세의 시집 한 권 그리고/ 친구에게 쓰다만 편지가 주눅 들었다/ 가시철망 밖에서 싸리꽃이 시를 쓰고/ 바람소리가 시 낭송을 하고 있을 때/ 주민번호와 주소를 낭송했다 따귀와 담배연기로/ 시를 잊으라 했다 헤세도 빨갱이 아니냐/ 다그쳐 물었다 철학은 철학관에나 가서 배우라고/ 누군가 키득거렸다 살아서 살아남아서/ 집으로 가는 꿈을 꾸었다" (가방에 시집을 넣고 다니던 아이) 학생운동으로 제적을 당한 일까지 시인은 세상에 대해 많이 울었다. 성장통이 깊었다. 그리하여 80년대 최루탄 콧물눈물 범벅의 세례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불행을 딛고 사랑으로 승화하며, 그의 스승이자 대선배인 문익환 목사처럼 시인이 되었다. 문익환 목사는 임의진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눈이 참 맑으니 시인이 되라!" 고 말했다. 예언인지 아니면 당부인지...임의진은 시인이 되었고 "아이야 너는 시를 쓰거라... 시집을 빼앗기지 않는 세상 내 만들어주마!" 다짐하였다.
* 하늘의 가르침은 무릇 이러해야 하리
"누군가 먼저 슬픔의 마중물이 되어준 사랑이/ 우리들 곁에 있다/ 누군가 먼저 슬픔의 무저갱으로 제 몸을 던져/ 모두를 구원한 사람이 있다/ 그가 먼저 굵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기에/ 그가 먼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꿋꿋이/ 견뎠기에" (마중물) 제복을 입은 종교인과 달리 시인은 일상복으로 마중물이 되자고 한다. 먼저 슬픔의 무저갱으로 몸을 던진 투신, 헌신을 요구한다. 영광보다 고난과 희생을 앞에 두자고 말한다.
"보해소주병에 들꽃을 담아/ 설교단에 올려놓던 할매들의 정성/ 참기름 엿기름 맨 먼저 들고 오셨지/ 보답할 길 없을까 이 동리를/ 채송화 꽃밭으로 만들고 싶어/ 앵두꽃으로 물들이고 싶어/ 대문 밖의 꽃밭도 정성을 기울였다" (낮은 산) 그는 하늘과 이웃의 음덕에 대해 보답하는 삶, 보은의 삶을 찾는데 머뭇거리지 않았다. 종교이기주의를 벗어나 그의 가슴은 앞뒤 꽉막힌 벽이 없다.
“그건 부처님 이야기고 예수님 이야기는 다르당게요.”
“그라요? 그 이약이 다 그 이약이재.”
예수님이 들으시면 이거 누구 스토리다요? 듣다가 기절하실 것
이다.
우리 교인 중에 할매들은 거진 짬뽕 구약 짬뽕 신약의 권위가들
이시다. 교회 다니시기 전에 처녀 때부터 절집에 오래 다니신 분
들이라 성경하고 불경이 도대체 헷갈리시는 거다.
“목사님 아까 설교가 틀렸어라우.”
“뭐가 틀렸다요?”
“소양치를 타신 거시 맞재 뭔노므 나귀를 타셨다고 그라시오.
틀렸소.”
“아따 나귀를 타셨다니깐요.”
“아-녀! 내가 어디서 똑똑이 봤구마. 소든마. 소 타고 피리도 불
고 그라고 예루살렘으로 가셨든마.” (수필/ 님의 향내)
시인이 머물고 있는 동네 풍경이 그렇다. 종교집안끼리 다투는 일이란 없다. 석탄일에는 절집에 축하인사를 하러가고 크리스마스 성탄절엔 스님들이 축하방문을 온다. 시인이 목사로 있는 남녘교회의 풍경은 그 어떤 미담보다 아름답다. 경영학을 전공한듯한 종교인들과 술술 말을 잘하는 연설가가 주임 목사로 있는 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온유함과 신령함이 거기 그 자리 황금보다 눈부시다.
"그렇게 환장을 하면 뱀이 나온다 파면 팔수록 뱀 굴이다/ 밥줄이 아니라고 입이 사나운 겐가/ 여기 가까이 계단도 없고 현관도 없는 공터/ 무설탕껌을 나눠 씹는 교인들/ 진실하게 저녁밥을 먹고 헤어지기가 아쉬운/ 너희가 있다" (새교회) 임의진 시인이 젊은 시절을 바친 시골 교회, 탄광촌 목사직을 누구보다 성실히 수행했던 화가 고흐를 보는 듯하다. 그러면서 결국 교회를 떠난 고흐처럼 임의진도 교회 안이 아닌 바깥으로 희망의 편지를 쓰고자 애쓴다. 그는 기독교 출판사와 서점에 책이나 음반이 꽂히지 않은 거의 유일한 대중작가일 것이다. 그의 행보를 이해하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수그리지 않는 불온한 반역에 대한 응대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아랑곳 않고, 장사치의 성전을 뒤엎는 예수처럼 고루하고 박제화된 종교에 대하여 직격탄을 서슴없이 날린다.
"다리가 두 개뿐인 닭이 담장 위를/ 사뿐히 오르고/ 다리가 네 개인 개는/ 시원하게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다/ 자고로,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닭 쫓던 개) 기득권층을 감싸며 성장위주, 건물건축 위주의 종교 행태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일갈이다.
* 언덕너머로 허허롭게 날아가는 새의 날개짓
시인은 바닥에서 태어나 바닥에서 살았다. 여행과 밭일, 그리고 종교와 미술과 음악, 문학 도처가 그에게는 세상을 업는 바닥이었다. 문화의 바닥, 시의 바닥이 없는 세상은 기둥이 없는 무너진 집일 것이다. 경제가 바닥이 아니라 자연(지구별)이 바닥이고, 소비가 바닥이 아니라 문화가 바닥이다. 과학이 바닥이 아니라 종교가 바닥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바닥이 무엇인지, 누가 우리를 업고 있는지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
"자작나무숲으로 업히러 간다/ 나이테는 나이테를/ 가지는 가지를 업고/ 마디가 굵은 생솔가지는 부엉이를 업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곤충들까지 휘어져라 업고 있다/ 싸락눈이 내리면 외진 길섶부터 차곡차곡 업고/ 언덕만큼 쌓이자 옹달샘과 골짝물이 이젠 내 차례야/ 이리 업혀 줘, 다투어 등을 내밀었다 그렇게/ 서로의 이름표를 업어주지 않았다면/ 서로의 체온과 서로의 슬픔을 업어주지 않는다면/ 바닥이 빛나는 것들을 업어주지 않는다면/ 어머니가 어부바 우리를 업어주지 않았다면/ 지금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으리/ 따듯한 등을 껴안지도 못하였으리/ 나 몸무게를 줄이고 자작나무숲으로 들어간다/ 별밤을 업고 있는 통나무집에/ 내 아이를 업고 잠을 재우는/ 여자에게 간다 여자가 업고 있는 세월이/ 어디 아이 하나 뿐이랴/ 어디 바람 한 점 뿐이랴" (바닥이 빛나는 것들을 업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 이 <사랑>이 어둡고 추운 이 시절에 우리를 업는 따듯한 바닥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어머니의 등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도회를 업는 시골의 정겨운 품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기술과 기교가 판치는 곳에 우직한 정진과 방대한 예술혼이 업어준다면 삶이 보다 고단하지 않으리라 짐작된다. <사랑>을 읽는 내내 업혀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시인은 이 <사랑>을 끝으로 정든 바닷가 강진을 떠나 낯선 산골짝으로 이사를 앞두고 있다. 지난 여름 목회 10주년 행사를 하고 안식년에 들어가 있다. 앞으로 주임 목사 생활도 접고, 목사가 아닌 평범한 '임 씨'로 살아가는 길, 쉽지 않은, 엄두내기 어려운 결심으로 10년의 목회생활을 정리하는 중이다. 그러한 무소유자유의 정신, 사랑의 정신을 노래하는 한 마리 새, 그가 임의진 시인이다. 시인의 이러한 삶의 태도에는 무소유자유의 자유혼이 바탕을 이룬다. "겨울나무를 닮아서일까/ 속옷까지 벗고 누워서야/ 잠을 이룬다 알몸의 겨울잠/ 윗목은 벗어놓은 옷들로 어지럽다/ 하루의 끝에다 부려놓은 가랑잎들/ 시계와 열쇠, 안경, 발을 감싸준/ 검은 양말까지 저 모든 것을/ 매달고 살아왔구나/ 내가 사랑했던 사람까지도/ 모두 버렸다/ 오오 홀가분한 꿈길" (가랑잎)
그의 홀가분한 꿈자리에 시의 꽃동산이 가득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제2의 사랑을 기대하는 것이다. 시인의 무릉도원은 이거의 자리가 아닌 이서(저술)의 자리일 것이기에.
짐이 없어서 가난한 시인, "짐이 가벼웠다 날 것 같았다 새들은 짐이 없어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리라"(이사)
이 글집 <사랑>으로 우리 마음이 더 가난해지고, 미움을 덜어내고 사랑을 퍼담는 아름다운 인연의 시간이 되기를 두손 모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