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미라지나이트 입니다.
완연한 가을 입니다. 아직 낮에는 덥긴 하지만 그늘에 서면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네요.
앞서 이야기했듯 이번달에 아카데미에서 둘리툴 폭격의 주역기체인 B-25B 미첼 폭격기가 출시됩니다.
이에 둘리틀 폭격에 대해 정리해봤습니다.
Doolittle Raid.
1942년 4월 18일에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 때 미 육군 항공대의 제임스 둘리틀(James Harold Doolittle) 중령이 이끌었던 특공대. 진주만 공습 이후 이에 대한 보복 작전을 실행, 일본의 도쿄, 오사카 등 주요 도시에 폭격을 가했다.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군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고,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러한 국면을 반전시키기 위한 보복 공격을 빨리 시행하라고 군 수뇌부를 날마다 질책하고 있었다.
[1941년 12월7일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군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고,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러한 국면을 반전시키기 위한 보복 공격을 빨리 시행하라고 군 수뇌부를 날마다 질책하고 있었다. 사진은 진주만 공습 당시 일본군 항공기에서 찍은 사진]
그러나 한눈팔고 있다가 뼈아픈 한방을 맞고서 시종 일본군에게 밀리고 있던 미군으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는 판이었다. 태평양 함대에 전함이 한척도 없는 상황에서 몇 안되는 항공모함을 순양함 이하 급의 호위함과 같이 일본 근처까지 접근시키기에는 당시 일본의 해군력이 너무 막강했으며, 그나마 개전 초반 괌과 웨이크를 빼앗기는 바람에 작전을 엄호해줄 비행장이나 거점이 하나도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접근도 못하며, 무작정 갖다 박으면 성공을 따지기 이전에 제대로 접근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추가적인 대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암울한 상황이었다.
[진주만 공습은 사실 피해자체는 그다지 큰편이 아니였다. 물론 아리조나호 등 전함 몇척이 격침되긴 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항공모함들은 대부분 훈련으로 나온지라 한척도 피해가 없었고 이는 훗날 미국의 반격에 중요한 역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미국의 자존심에 입은 피해는 생각보다 컸다]
그러다가 일각에서 항모에 육상기지용 폭격기를 싣고 가서 일본 본토에 폭탄을 떨구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나왔다. 기존의 함재기는 항속거리가 짧기 때문에 일본에 항공모함을 엄청나게 접근시켜야 하므로 기습전에 들켜서 관광당할 확률이 많지만, 육상기지용 폭격기는 항속거리가 길기 때문에 멀리서 발진시켜도 되므로 최악의 경우 작전이 실패하더라도 항공모함을 비롯한 함대는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본격 미국판 치즈러시
[이에 미국내에서 이대로 당하고 있어서는 안되다는 여론과 더불어 당시 정권을 쥐고 있었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도 큰 숙제중 하나였다. 그러다가 일각에서 항모에 육상기지용 폭격기를 싣고 가서 일본 본토에 폭탄을 떨구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나왔다. 기존의 함재기는 항속거리가 짧기 때문에 일본에 항공모함을 엄청나게 접근시켜야 하므로 기습전에 들켜서 관광당할 확률이 많지만, 육상기지용 폭격기는 항속거리가 길기 때문에 멀리서 발진시켜도 되므로 최악의 경우 작전이 실패하더라도 항공모함을 비롯한 함대는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당 제안의 경우 사실상 목표에 육탄돌입만 안했지 카미카제나 다름이 없는 제안이었다. 일단 육상기지용 폭격기는 활주거리가 길기 때문에 항공모함에서 이함시키는 것이 극히 곤란했고, 덤으로 착륙거리는 더 길기 때문에 사실상 착함은 불가능했다. 즉 한번 이함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일단 작전을 시작한 후에는 항공모함과 호위함대는 즉시 반전해서 위험지역을 탈출하고, 폭격기만 혼자 목적지까지 가서 폭격을 한 후에 최대한 멀리 도망쳐서 비행기를 버리고 낙하산을 메고 탈출하는 막장 상황을 겪어야 할 운명이었다. 덤으로 해당 지역이 아군 따위는 하나도 없는 적지 한복판인 데다 먼 바다 위에서 파도에 흔들거리는 좁은 항공모함 갑판에서 거대한 폭격기를 이륙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진짜 엘리트급 조종사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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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제안의 경우 사실상 목표에 육탄돌입만 안했지 카미카제나 다름이 없는 제안이었다. 일단 육상기지용 폭격기는 활주거리가 길기 때문에 항공모함에서 이함시키는 것이 극히 곤란했고, 덤으로 착륙거리는 더 길기 때문에 사실상 착함은 불가능했다. 즉 한번 이함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이를 자원한 조종사들이 실제로 있었다. 앞줄 왼쪽부터 제임스 H 둘리틀 소령(조종수), 리차드 E 콜 중위(부조종수), 뒷줄 왼쪽부터 헨리 A포터중위 (항법사) 프레드 A 브레머 중사 (폭격수), 파울 J 레오나르드 중사 (기술자, 포수) |
마침내 이 작전을 지휘할 사람으로 슈나이더컵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경력이 있는 제임스 둘리틀 중령이 선발되었다. 참고로 슈나이더컵 대회는 항공기의 최고 속도를 겨루는 대회로 엄청난 항공기술의 혁신으로 스핏파이어 전투기나 제로센 등을 탄생시킨 배경이 되었다. 당시는 수상기가 조금 더 빨랐기 때문에 수상기 경주 대회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열렸으며,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정도면 비행기 조종에 대해서는 최고급 전문가로 통하던 시절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슈나이더컵을 모델로 한 작품인 붉은 돼지의 미국인 조종사 커티스가 바로 슈나이더컵에 출전하던 시절의 둘리틀 중령을 모델로 하고 있다.
[James Harold "Jimmy" Doolittle (December 14, 1896 – September 27, 1993) 제임스 해롤드 지미 둘리틀 중령은 이 작전을 기획하고 스스로 자원한 공군조종사중 하나였다. 그는 작전을 지휘하는 지휘 감독자의 입장이였으나 그보다는 스스로 나서서 비행하는것을 즐겼으며 실제로 이 작전을 입안하고 스스로 자원해 임무를 수행하여 상처받은 미국인의 자존심을 지켜준 영웅이였다. 이 임무이후 그는 대령을 (중령단지도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뛰어넘어 준장으로 승진했으며 2차대전 내내 일본군을 상대로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종전후 새롭게 편성된 미공군의 참모총장을 역임하기도 하다 1993년 90세를 일기로 영면]
대단히 위험한 작전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엄밀히 말하자면 계획 자체는 카미카제와는 거리가 있다. 둘리틀이 처음 제안한 작전은 폭격 후 기수를 북쪽으로 돌려 블라디보스토크에 착륙하는 것이었다. 공격에 사용할 폭격기를 랜드리스로 넘기는 것을 미끼로 소련과 협상하였으나 당시 나치 독일에게 정신없이 털리고 있던 소련은 일제를 자극할 것을 우려하여 거절하였고, 결국 중국 저장성(장강 하류지역)을 향하는 것으로 계획은 수정된다. 본래 계획은 저장성에서 재보급 후 일본과 싸우고 있던 국민당의 본거지 충칭(중경)까지 날아가서 귀환하는 것이었으나, 후술할 조기발각 문제 때문에 연료부족으로 목적지까지 도달하지 못해 논밭 등에 불시착하게 된다.
호넷의 모습이 뭔가 이상했습니다. 갑판 위에 크고 이상한 비행기가 있었거든요. 색깔도 뭔가 다르고 해군 항공기가 아니었어요. 그러다가 색이 육군기의 위장색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육군의 B-25였던 거죠. - 제임스 피치[1] |
둘리틀 중령은 특별히 개조한 B-25 미첼 폭격기와 최고 조종사들을 불러모아 연일 맹훈련을 했다.
[둘리틀 중령은 특별히 개조한 B-25 미첼 폭격기와 최고의 조종사들을 불러모아 연일 맹훈련을 했다. 원래 육상기지에서 운용되었던 기체라 좁은 함상에서 이륙하기 위해 불필요한 장비는 모두 제거되었고 좁고 흔들리는 함상에서 이륙을 위한 특별 훈련을 감행했다. 그리고 1942년 4월1일 당시 최신의 항공모함인 USS Hornet (CV-8) 에 16대의 B-25B 폭격기들이 갑판에 실려졌다.]
B-25는 본래 육상에서 운용하기 위해 개발된 미 육군 항공대의 폭격기였으므로 평상시처럼 항공모함에서 떠오르기에는 활주거리가 너무 짧았다. 그나마 항속거리가 길면서도 간신히 항공모함에서 이륙가능할 것으로 판단되었기에 해당 폭격기가 선정된 것이다. 기체무게를 최대한 줄여야 했기 때문에 무전기도 빼버리고 기관총도 기체 상부의 것과 기체 전면의 것만 남기고는 전부 빼버렸다. 대신 적기가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나무 같은 것으로 기총좌 자리에 가짜 기총을 달아 놨다. 또한 어차피 작전상 목적을 달성한 후에도 비행기를 버려야 하므로 기체가 격추당하거나 포획당할 경우 당시로서는 고급 기술인 노던 폭격용 조준기가 일본에 노획당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아주 단순한 간이형 폭격조준기가 달렸다.
[출격전 둘리틀 중령은 처음에는 갑판 모형을 그려둔 육상기지에서 이후에는 실제 항공모함 갑판에서 이륙하는 훈련을 수없이 반복했다. 이들은 육상기지에서 이륙하던 육군항공대 소속 비행사들이였으나 워낙에 실력이 좋은 조종사들을 뽑은데다가 특별한 사명감 그리고 직접 둘리틀 중령이 나서서 하는 리더쉽 때문에 빠르게 훈련에 적응해 갈수 있었다]
한편 이 공습에 참여한 폭격기 중 2대는 카메라를 탑재하여 폭격상황을 촬영하도록 했다. 어차피 이 폭격의 의미는 실질적인 타격이 아니라 선전효과였으므로, 이 카메라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던 셈.
[출격중인 USS Hornet (CV-8) 에 16대의 B-25B 폭격기들 1942년 4월1일 당시 최신의 항공모함인 USS Hornet (CV-8) 에 16대의 B-25B 폭격기들이 갑판에 실려졌다. 거대한 크기 때문에 항공기는 갑판에 가지런히 실려졌으며 파도의 흔들림에 바다로 떨어지는것을 막기위해 단단히 묶여 있었다.]
모든 준비를 끝낸 특공대는 미 해군 항공모함 USS 호넷에 도착했고, B-25 때문에 호넷의 엄호를 위해 모여든 함대에 마지막으로 USS 엔터프라이즈가 합류했다. 기동부대 지휘관은 윌리엄 홀시.
언제부터 종교를 가졌나? 이번 작전에 차출됐을 때부터입니다! 한가지 부탁 좀 하지! 뭐지요? (기도) 내 몫도 해 주게! - 영화 진주만 |
그러나 작전 수행을 위해 항해하던 미 함대는 일본 연안경비정 니토마루를 발견한다. 당시 일본은 민간 어선을 징발하여 경계임무를 맡겼다고 한다. 당연히 적 군함과 마주치면.... 그래서 연안경비정 자체는 USS 내쉬빌이 쉽게 격침시켰지만 격침당하기 전에 연안경비정이 암호로 일본에 긴급무전을 보낸 것이 포착되었으므로 이미 미 함대의 존재는 발각되었고, 결국 원래 예정된 위치보다 더 먼 거리에서 출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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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모함 호넷의 비행갑판을 뒤덮은 폭격기들 |
여기에다 항공모함에서 이함하는 것은 단발기를 모는 해군 조종사들한테도 위험천만한 일인데, 모의훈련 이외에는 항공모함에서 이함한 적이 없는 특공대원들은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이함을 시도해야 했다. 덤으로(?) 둘리툴 중령이 탑승한 1번기는 다른 B-25를 주기하느라 다른 대원들보다 이함 거리가 더욱 짦았다. 따라서 1번기는 거의 추락하기 직전까지 기수가 낮아졌지만... 이함에 성공했다! 그 뒤를 따라서 2번기, 3번기가 연달아 출격했고 결국 모든 특공대원이 무사히 이함하여 일본 본토를 향해 출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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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중 폭격기에서 촬영된 사진 |
한편 일본은 적 함대의 경계부대로부터 적 항공모함의 존재를 확인하고 요격을 위한 준비를 개시한다. 다만 이것을 항속거리가 짧은 일반적인 함재기에 의한 공습일 것이라고 생각한 탓에 공습은 항모가 좀 더 접근한 다음날 아침에나 이뤄질 것이라고 판단. 하지만 그 시점에서 B-25는 이미 발함을 개시했고 미함대는 신속하게 퇴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2]
[ 작전 수행을 위해 항해하던 미 함대는 1942년 4월18일 오전 07:38 경 일본 연안경비정 니토마루를 발견한다. 당시 일본은 민간 어선을 징발하여 경계임무를 맡겼다고 한다. 당연히 적 군함과 마주치면.... 그래서 연안경비정 자체는 USS 내쉬빌이 쉽게 격침시켰지만 격침당하기 전에 연안경비정이 암호로 일본에 긴급무전을 보낸 것이 포착되었으므로 이미 미 함대의 존재는 발각되었고, 결국 원래 예정된 위치보다 더 먼 거리에서 출격하게 되었다.]
[미해군의 호위함선에 격침된 일본군의 니토마루 호 바로 격침하긴 했지만 탈출한 포로를 심문한 결과 격침전 본토에 미해군의 침공 사실을 알렸으로 이로인해 작전은 예정보다 먼 거리에서 출격을 할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해군력은 미해군을 압박할 정도였으며 호넷은 호위받을 변변한 전함도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일본의 판단보다 20시간쯤 빨리 B-25가 일본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다. 일단 그 시점에 일본의 육군비행장에서도 요격을 위한 준비는 갖춰진 상태였고, B-25 역시 공습 이전에 발견되었다. 다만 뭔가 묘하게 폭격기의 고도가 높은데다 암만 봐도 항모의 함재기로는 보이지 않았던 탓에 일본군의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부대는 아군 육군의 쌍발폭격기일 것이라고 판단하여 발견하고도 보고를 하지 않았고, 또 어떤 부대에서는 "국적불명의 쌍발기 발견"이란 보고를 올렸지만, 사령부는 "미 해군은 쌍발기를 운용하지 않는다"며 믿으려하지 않았기에 장장 15분간 전화통화로 허송세월을 보내게 된다.
[일본군의 연안감시함 니토마루에 발각되는 바람에 원래 예정된 지점보다 일찍 B-25들을 출격할수 밖에 없었고 일본의 판단보다 20시간쯤 빨리 B-25가 일본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다. 일단 그 시점에 일본의 육군비행장에서도 요격을 위한 준비는 갖춰진 상태였고, B-25 역시 공습 이전에 발견되었다. 다만 뭔가 묘하게 폭격기의 고도가 높은데다 암만 봐도 항모의 함재기로는 보이지 않았던 탓에 일본군의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부대는 아군 육군의 쌍발폭격기일 것이라고 판단하여 발견하고도 보고를 하지 않았고, 또 어떤 부대에서는 "국적불명의 쌍발기 발견"이란 보고를 올렸지만, 사령부는 "미 해군은 쌍발기를 운용하지 않는다"며 믿으려하지 않았기에 장장 15분간 전화통화로 허송세월을 보내게 된다. 둘리틀 크루들에게는 천우신조였던셈.]
추가로 원래 계획상으로는 야간폭격이었으나, 계획보다 일찍 이륙한 탓에 백주대낮에 폭격이 이뤄진 덕분에 심리적인 효과가 더욱 극대화되었다. 마지막으로 그 때가 하필이면 방공훈련이 끝난 직후였다고 하니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다 그지깽깽이들아'가 따로 없었다(...). 하늘에 떠 있는 뭔가 이상한 폭격기도 자기네 나라 비행기인 줄 알았던(손을 흔들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일본인들은 그 폭격기가 폭탄을 떨어트리는 걸 보고서야 미군기라는 걸 알고 크게 당황했고, 일본군이 허겁지겁 반격을 시도했지만 이미 특공대 전원은 중국과 소련으로 진로를 잡은 뒤였다.
[호넷에서 이륙중한 B-25들의 모습 열심히 훈련한 덕에 16대의 B-25는 한대의 낙오없이 모두 무사히 이륙하였으며 목적지인 일본을 향해 비행하게 딘다 이과정에서 B-25들은 폭격기인 주제에 요격을 위해 이륙한 일본군 기체를 3대나 격추하게 된다.]
여담으로 이 과정에서 일본군 요격기를 세대나 격추한다(...).무장 덜었다며 무장을 덜고 폭탄을 더 실었슴다
아니 어떻게 나약해빠진 양키들이 우리 대일본제국의 수도에 폭탄을 떨구고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던 거지!? - 당시 일본 국민들의 반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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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리툴 특공대가 폭격한 현장을 살펴보는 일본군 |
물론 불과 16대의 쌍발 폭격기를 투입한 둘리틀 특공대의 성과는 사망자 50명과 가옥 262채 파괴 , 제철공장 1, 석유저장소 1, 발전소 몇개, 개장중이던 경항모 류호 우현 직격 등으로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들의 목적은 전과가 아니라 보복 그 자체. 국면을 전환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로 일본군 수뇌부는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언론에는 둘리틀 중령의 이름을 빗대어 "Do little"이라 깎아내리면서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대응하고 있었지만 실제 심리적인 효과는 진주만 공습에 못지 않았던 것이다. 일부러 언론이 이렇게 대응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의식하고 있었다는 의미. 일본군이 태평양 반쪽을 집어삼키고 인도양까지 넘보는 상황에서 일본 본토의 수도 한복판에 폭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덴노까지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은 일본군의 장성이라면 진짜로 망신살이 뻗친 일이었다. 결국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미 항모들을 격멸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그 결과로 벌어진 전투가 바로 미드웨이 해전.
[ 작전 다음날 미해군은 작전 성공을 알렸고 이내 각종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원래 계획상으로는 야간폭격이었으나, 계획보다 일찍 이륙한 탓에 백주대낮에 폭격이 이뤄진 덕분에 심리적인 효과가 더욱 극대화되었다. 마지막으로 그 때가 하필이면 방공훈련이 끝난 직후였다고 하니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다 그지깽깽이들아'가 따로 없었다(...). 하늘에 떠 있는 뭔가 이상한 폭격기도 자기네 나라 비행기인 줄 알았던(손을 흔들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일본인들은 그 폭격기가 폭탄을 떨어트리는 걸 보고서야 미군기라는 걸 알고 크게 당황했고, 일본군이 허겁지겁 반격을 시도했지만 이미 특공대 전원은 중국과 소련으로 진로를 잡은 뒤였다.불과 16대의 쌍발 폭격기를 투입한 둘리틀 특공대의 성과는 사망자 50명과 가옥 262채 파괴 , 제철공장 1, 석유저장소 1, 발전소 몇개, 개장중이던 경항모 류호 우현 직격 등으로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들의 목적은 전과가 아니라 보복 그 자체. 국면을 전환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로 일본군 수뇌부는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언론에는 둘리틀 중령의 이름을 빗대어 "Do little"이라 깎아내리면서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대응하고 있었지만 실제 심리적인 효과는 진주만 공습에 못지 않았던 것이다. 일부러 언론이 이렇게 대응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의식하고 있었다는 의미. 일본군이 태평양 반쪽을 집어삼키고 인도양까지 넘보는 상황에서 일본 본토의 수도 한복판에 폭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덴노까지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은 일본군의 장성이라면 진짜로 망신살이 뻗친 일이었다. 통쾌한 보복에 당연 미국민들은 상처받은 자존심이 조금은 회복되었으며 먼저 일격당해 사기가 있는대로 떨어진 상태에서 일시에 사기가 반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공습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둘리틀과 그의 대원들이 "샹그릴라에서 날라 올랐다." 라고 표현. 샹그릴라는 히말라야 산맥에 있다는 전설속의 이상향이다. 작전에 사용된 호넷호를 숨김으로서 일본군의 보복을 막고 공습대에 신비감과 낭만적을 주려는 의도로 사용한듯. 그런데 기자들은 비행기가 USS 샹그릴라에서 날아 올랐다라고 오보를 냈는데, 이를 재미있게 생각한 해군이 나중에 정말로 USS 샹그릴라를 취역시킨다!
이 작전에 참가한 B-25 16대는 당연하게도 모두 손실되었지만, 특공대원 80명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왔다(3명은 전사, 8명은 포로). 둘리틀 중령은 중령 계급조차 출격 몇달 전에나 진급했던 것임에도 이 작전의 성과로 인해 대령 계급을 건너뛰고 바로 준장으로 진급했고 명예 훈장까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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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이동중인 14번기 승무원들 |
포로가 된 8명의 조종사들은 당초 민간인을 살해한 전쟁범죄자로서 모두 사형판결을 받았지만, 덴노와 도조 히데키, 아돌프 히틀러 등이 자국포로에 대한 보복행위를 우려하는 뜻을 내비치며 최종적으로는 3명만이 처형되었다. 나머지는 종신형을 받고 북경 포로 수용소에 수감. 그중 1명이 사망해서 결국 최종적으로 송환된 건 4명이었다. 또한 처형당한 3명의 포로의 시신은 화장후 적십자를 거쳐 미국에 인도.
한편 폭격 후 엔진 이상으로 소련으로 날아간 1기는 조종사들은 나중에 미국으로 탈출했지만, 기체는 소련이 압류하여 항공기 개발에 이용했다. 나머지 모든 둘리틀 특공대 기체는 중국에 추락하였고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무리 무모한 작전이라도 적지 한복판에서 비행기를 버리고 낙하산 탈출하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0%에 육박하기 때문에 중국측의 반대를 어르고 달래서 폭격기들이 중국에 착륙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후에 작전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측의 우려대로 일본군은 중국인들을 상대로 분풀이를 열심히 했다. 그 보복으로 중국의 비행장을 공격하고 중국인들을 학살하여 상당히 많은 중국인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때문에 둘리틀 특공대의 폭격기 착륙을 중국측이 대국적인 견지에서 허락하지 않아서 폭격계획이 무산되었다면 미드웨이 해전은 아예 없어졌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중국에서 많이 나오고 있다. 이는 대륙과 대만 모두에게서 나온다.
여담으로 이 폭격에서 미군은 1908년 미군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받은 메달을 폭탄과 함께 돌려주게 된다. 즉, 같이 떨어트렸다. 1940년대 당시 미국의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가 보내왔다고. 영화 진주만에서도 폭격 직전에 폭탄창의 문이 열리면서 신관 앞부분에 묶어놓은 메달이 바람에 흔들리는 장면으로 이 일화를 재현했다.
참고로, 둘리틀 공습에 참가한 대원은 총 80명 이었으며.
일부 내용과 사진은 추가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