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요한일서 1 : 1 - 4
제목: 그리스도인의 사귐
일시: 2020. 10. 11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2020은 쥐의 해이다. 올 한해 뒤를 돌아보면 코로나로 인해 정말 쥐의 해답게 살아온 것 같다. 요즘 코로나 상황을 보면 남은 몇 개월도 당분간 쥐처럼 살 것 같다. 그렇지 않는가? 첫째 우리 모두는 집에서 숨어서 산다. 둘째 음식을 가지러 갈 때만 밖으로 나온다. 셋째 나중에 먹을 음식을 집에 보관한다. 넷째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도망한다.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지 사실 안타까움을 달래는 유모어이다. 우리는 쥐처럼 살기를 원하지 않고 쥐구멍에도 쨍하고 볕뜰 날이 오기를 사모하고 기다리고 있다. 지극히 절제된 만남이 아닌 시원하게 마스크도 벗고 허그도 하고 수다도 떨어가며 음식을 나누며 풍성한 사귐을 갖기를 원한다. 오늘 우리는 사도요한이 말한 두 가지 사귐을 전하고자 한다.
II. 하나님과 사귀자!
성경인물들 가운데 하나님과 가장 밀접하게 사귐을 가졌던 사람을 꼽으라면 요한일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은 주님께서 참 예뻐해 주신 주의 사랑하는 제자로 주님과 늘 붙어 다녔기 때문이다. 비텐베르크 마리안교회 제단에 있는 루카스 크라나흐의 성만찬그림을 보라. 이 그림에서 요한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의 품 안에 있는 사람이 바로 요한이다. 아이가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듯이 예수님의 품에 안겨서 심장뛰는 소리를 듣고 있다. 또 한 장의 그림을 보라. 주님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베드로는 그러지 못했어도 예수님이 죽으시는 십자가의 현장에 끝까지 있었던 사람은 요한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라고 하시며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라고 지극히 사적인 부탁을 사신다.
이렇게 주님과 딱 붙어 다니고 주님을 가장 가까이서 경험했던 사람이기에 얼마나 해줄 이야기가 많았을까! 사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더 정확하고 더 풍성하고 더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다. 요한은 신약 성경 27권 중, 5권을 써서 13권을 쓴 사도바울 다음으로 성경을 쓴 기자이다. 그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쓴 3편의 서신서를 포함해 예수님을 잘 설명하고 있는 복음서 요한복음과 밧모 섬에서 계시를 받아 쓴 요한계시록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다.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가장 직접적이고 자세히 소개하기에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고 공부하고 싶을 때는 늘 요한복음서를 찾는다. 선교지에서 현지인들 언어로 성경을 다 번역하기 어려울 때는 급하고 아쉬운 대로 가장 먼저 요한복음부터 번역하여 말씀을 나누기도 한다. 우리가 외우고 있는 주옥같은 성경암송구절이 요한복음에 많이 담겨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생명의 말씀”이라고 한다. 그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존재해 왔고 “영원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생명의 말씀은 처음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고 한다.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도 똑 같은 말씀을 전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한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고 한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하는 것은 그 말씀도 영원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 하나님이 우리 가운에 오셨음을 요한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라고 고백할 수 있다. 요한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성육신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는데”(요1:3) 세상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끈 떨어진 연과 같이 되어 버렸다. 세상은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관계가 단절되었다. 이러한 관계를 회복시키고 다시 사귐을 갖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우리는 이제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도록 우리 눈높이로 오신 주님과 구체적인 사귐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과 우리의 사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체화된다. 예수님 없는 하나님과의 사귐은 피상적인 사귐일 뿐이다. 관념적인 사귐일 뿐이다. 우리의 사귐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꼭 개입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어떻게 사귈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귄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1)첫째, 예배이다. 예배를 제대로 드리라.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예배자로 나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예배할 수 있게 하신다. 에수님은 우리 예배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요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신다. 2)둘째, “기도에 힘쓰라.” 무슨 일을 하든지 나 혼자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일을 하라. 우리는 기도할 때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3)셋째, 성경말씀을 읽으라. 성경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구약의 말씀과 율법과 예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미션 성취이다. 오늘부터 어린이 가을 성경학교를 한다. 성경을 보자는 것이다. 요즘 어떤 책을 많이 보는가? 페북만 보지 않는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필기도구는 있는가? 노트북 아닌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사귐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배, 말씀, 그리고 기도이다. 소그룹 모임을 갖는다. 주님과 사귀기 위함이다. 주보 정면에 나오는 작은 글씨를 기억하는가? 성경을 읽으며, 기도를 하며, 예배를 제대로 드리자!
III. 사람들과 사귀자!
요한은 요한1서, 2서, 3서 모두 지금 터어키인 에베소교회에 썼다. 그 편지를 쓸 때 전혀 없던 이야기를 꾸며내고 소설을 쓰는 것도 아니라, 요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바”를 전한다고 밝히고 있다. 뭘 보고 뭘 듣고 했다는 것인가? 바로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 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전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베소교인들과 사귀고 싶어서다.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요일1:3). 그런데 그 사귐은 어떤 취미나 관심사나 이해관계로 엮여진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사귐이다. 수직적인 사귐이 이제 수평적인 사귐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요한은 이러한 사귐을 통해서 기쁨이 충만하기를 소망했다.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요한은 또한 사랑을 얼마나 많이 입에 달고 사는지 “사랑의 사도”로 불리운다. 요한이 말한 사귐의 베이스에는 사랑이 깔려 있다.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계속 “사랑”을 반복해서 말한다.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호칭한다. 요한일서에서만 사랑이라고 하는 단어가 총 5장 105절 중에서 50번 정도 나온다. 요한일서 서신은 물반 “고기”반이 아니라, 물반 “사랑”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연결시키고 사귐을 갖도록 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 사귐을 위해서 사랑을 보여주셨는데 십자가의 희생의 사랑이 그 핵심 사귐의 테마이다. 요한은 에베소교인들과의 사귐도 그러한 사랑의 사귐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사귐”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우리의 사귐은 하나님과 우리가 갖는 수직적인 사귐으로부터 시작하여 수평적으로 삶의 현장에서도 전해져야 한다. 우리에게 사귐의 쭘바이슈필을 보여주었던 예수님과 같이 그를 닮은 우리들은 십자가 사랑으로 그러한 사귐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이 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9).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3:16).
1)저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매일 아침 어머니 아버님과 더불어 먹방을 한다. 카톡영상을 틀어 놓고 아침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이다. 독일 곡식빵, 치즈, 과일... 먹방관객은 딱 두명. 연세가 84와 80이신 부모님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사귐을 가지려는 것이다. 대화할 수 있을 때 대화하려고 한다. 후회없이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지금까지 허락하시고 기회를 주셨을 때 사귐을 갖는 것이다.
2)자녀들과 더불어 우워라우프를 간다. 올 초 한국여행이 다 무산되고 어떻게든지 시간을 맞추어 만든 가족단합대회였다. 베를린의 딸을 데리고 가장 가깝고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폴란드 국경 바로 넘어 슈체친으로 갔다. 사귀려고 간 것이다. 사귐을 가지려는 것이다. 추억에 남는 여행이 되었다. 독일주스tv를 보신 분은 알겠지만 공업지대여행이다. 인터넷 사진으로 볼 때는 가격도 저렴하고 강인지 바다인지 분위기 좋아 갔는데 모두들 충격에 빠졌다. 아침 식사를 할 때는 그 강변으로 타이타닉같이 엄청난 큰 녹슨 상선이 다닌다. 유람선도 아니고, 다음 날 아침에는 군함이 지나간다. 그래도 사귐을 위해서였다.
3)아내와의 사귐이 갈수록 귀하다. 코로나로 인해 불안정하고 현실적인 삶으로 누구든지 기본 정서불안과 분노와 짜증이 있을 수 있기에 나라도 기쁨을 충만히 줘야지라는 생각으로 아내가 무슨 말을 하면 “응 내가 할께”라고 한다. 아주 게르네하게. “마지못해 하는 얼굴..” “덧붙이는 수많은 조건들...” “게발놀리듯이 하는 모습...” “부정적인 표현들...” 그래서 나라도 시원하게 말해주자라는 생각이 있어서이다. 그리고 좀 원색적이지만 당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난 여기 있지. Ich bin immer da fuer 너의 행복이라고 한다.
4)동역자들과의 사귐을 좋아한다. 저를 보면서 주변 동역자들은 웬 참견을 그렇게 많이 하냐? 뭐 그리 신경쓰냐는 식으로 본다. 비난의 눈총이 아니라, 참 재미있는 사람이요라는 식이다. 수년 전에 폴란드 4개 도시 후배동역자들을 1박2일씩 방문했다. 그때 수학캠프로 오셨던 김철중목사님 사모님이 저의 이러한 방문에 대해서 아주 아름다운 칭찬을 해 주셨다. 화목케 하고 귀한 사귐을 만드는 은사가 있다고... 제 입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좀 그렇기는 하지만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사실이 그러했다. 동역자들과 믿음과 사역의 사귐을 갖기를 원했던 것이다. 요한은 에베소에 있는 교인들에게 사귀자고 하는 것이다. 그 사귐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믿음의 사귐이었다.
IV. 쥐의 해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 사귑시다!
1)먼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아름다운 사귐이 되어야 한다. 기도와 말씀과 예배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귐을 가지라. 소그룹을 통해서 사귐을 갖자는 것이 일차 그러한 사귐인 것이다.
2)그리고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사귐을 확장하라. 요한은 이 편지를 쓸 때 에베소 교인들에게만 썼겠는가? 그 편지의 수신자는 오늘 이 시간 함께 예배 드리고 있는 라이프찌히교회지체들에게도 쓴 것이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형제, 자매들과 사귐을 가지라. 삶의 현장에서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귀하고 구체적인 사귐이 있기를 바란다. 그러한 사귐으로 우리의 믿음이 체험신앙이 되고 그것을 함께 나눔으로 살아있는 삶의 간증이 되기를 바란다. 이 한 주간도 주님과 깊은 구체적이고 인격적인 교제가 우리 삶의 구석구석 미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