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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 유튜브를 통해서 은퇴한 어르신의 수기를 가끔씩 듣습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한 어르신 부부는 시집 간 딸이 손주를 돌보아달라는 부탁으로 딸집에서 살았습니다. 손주를 돌보면서 살림을 살아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손주들이 학교에 들어가자 사위와 딸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가족모임이 있을 때에 오빠들이 있는데 내가 왜 부모를 모셔야 하느냐는 소리를 했습니다. 어르신은 결국 아들집에 왔습니다. 아들 내외는 젊을 때는 딸네집에서 살다가 늙어서는 아들집에 왔다고 볼 메이는 소리를 하곤 했습니다. 그 어르신들은 결국은 요양원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부모님은 한 가정에서 참 중심이요 소중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나이 들고 몸이 불편하면 짐처럼 여겨 이 아들 저 아들 집으로 옮겨 다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삶의 중심이요, 신앙의 핵심인 언약궤가 옮겨 다니는 것을 보면서 늙으신 부모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블레셋이 쳐들어 왔을 때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국가의 액을 막아주는 부적처럼 생각하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로 무장한 것이 아니라 ‘언약궤’라는 보이는 ‘상자’ 하나만 들고 가면 승리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전쟁은 3만명의 군사가 죽고 그렇게 애지중지했던 언약궤 마저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언약궤는 블레셋 진영에서 전리품이 되어 이리저리 옮겨 다니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마치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린 것 같은 영적 침체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로 인하여 독종이 일어나자 도무지 언약궤를 그냥 둘 수 없어서 두 마리의 젖 먹이는 암소가 끄는 수레에 실어서 벧스메스로 보내었습니다. 벧스메스 사람들은 7개월 만에 언약궤가 돌아옴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언약궤를 들어 다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70명이 죽자 그들은 다시 언약궤를 기럇여아림으로 옮겨가게 했습니다.
마치 짐스런 부모님을 이리저리 옮겨가게 하듯이 그렇게 했습니다.
본문에는 기럇여아림에 옮겨온 언약궤가 아비나답의 집에서 20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2절을 말씀을 보십시오.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2)
아비나답을 제사장으로 세우고 언약궤를 거룩하게 관리하고 지키게 하는 가운데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런 가운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를 사모하였다’고 합니다.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를 사모했다’는 문장을 원문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여호와를 향하여 사모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사모하다’는 단어는 ‘크게 울다’ ‘부르짖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원문을 가지고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하였다’는 것은 ‘이제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면서 슬퍼하고 애통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이 구절을 번역하기를 “여호와께로 마음을 돌렸다”고 번역합니다. 현대어 성경은 “야훼를 찾았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와 함께 20년의 세월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의 삶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기갈과 목마름 때문에 부르짖고 애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문맥의 흐름으로 이스라엘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3절 끝에 보십시오.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은 블레셋 사람의 손아귀에 잡혀서 블레셋의 약탈과 핍박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해를 보내고 두 해를 보내면서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올해는 이렇게 어려워도 내년이면 나아지겠지.’ 기대했습니다. 그러기를 20년이라는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갔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 하소연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살 때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삼아 부역을 시키며 고통을 주었을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때에 모세를 준비시켜서 지도자로 보내었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키십니다. 3절을 보십시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3)
“그래서 사무엘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였다.”(3 현대인의 성경)
사무엘이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백성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보십시다.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3)
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려거든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여기서 ‘돌아오다’라는 단어는 주로 ‘전향하다’ ‘회개하다’ ‘회복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주로 죄에서 돌이켜 회개함을 가리킬 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 문장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고 애통하고 있지만 하나님 께 돌아오지 않은(온전히 전향하고 회개하지)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는,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라!” 고 했습니다. ‘전심’이란 ‘온 마음들(all your hearts, 숨이 차서 숨통이 끊어질 것 같은, 마음 다할 때까지, 송두리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마음은 온 인격을 말합니다. 생각, 지성, 의지, 결단 등이 포함된 삶 전체가 여호와께로 돌아오도록 해라! 고 말합니다. 마음 따로, 생각 따로, 몸 따로가 아닙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한번도 하나님을 떠나서 완전히 살았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찾고 구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양다리 인생, 양다리 역사가 이스라엘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전심으로 돌아오고자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직설적으로 선포했습니다.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3)
우상을 제거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들의 가치관과 삶을 보면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것은 이방신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이방신 가운데 아스다롯이 있습니다. 우주의 여신입니다. 이 여신은 혼자서 존재하는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짝이 있습니다. 남편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바알입니다.
바알신은 남성 신으로서 능력과, 전쟁에서 승리와, 풍요를 가져다 주는 신입니다. 그래서 바알 신을 숭배하면 자연히 아내 신인 아스다롯을 같이 섬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실제적인 삶에서는 바알과 아스다롯의 길을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적으로는 이방신들을 숭배하는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와 다릅니까? 차이점이 있습니까?
우리를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은 안 섬깁니까? 하나님을 안 믿습니까? 보십시오. 우리는 믿어요, 아주 열심히 믿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주일마다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십일조 드리고, 또 봉사하고 ….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실질적인 현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삶의 현장에서,가정에서, 직장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고 있습니까?
가령 아이들을 양육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합니까? 세상의 잘 나가는 자녀로 양육하려고 합니까?
또 결혼의 문제 앞에서, 직장을 선택해야 하는 문제 앞에서 내가 무엇에 중점을 두고서 결단하는지를 돌아보십시오.
'좀 더 매력적이고, 좀 더 생산적이고, 좀 더 확실해 보이는 그런 세상적인 가치들에 빠져버립니다. 삶의 결정을 크고 화려하고 폼 나는 것에 끌려 나아갑니다.
그러니 철저하게 현대판 바알과 아스다롯의 가치를 따르고 결정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 따로, 현실 따로.. 철저하게 이중적 구조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적으로 곤고하고 목말라 고통하여 허덕이고, 삶의 허허로움에 빠져 신음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찾아 신세를 한탄하면서 울부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돌아오려거든 우상을 버리라 했습니다.
하나님만 섬기라
나아가, 사무엘 선지자는 한 가지를 더 언급했습니다.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3)
Only God -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좋다는 것은 다 섬겼습니다. 따라 했습니다. 그게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줏대없는 모습은 이스라엘의 DNA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 세대들을 보십시오. 애굽의 종살이를 끝내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착하게 되었을 때에 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가나안 족속들의 문화와 종교에 매료되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세상 재미를 다 보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굳이 여호와 신앙을 고집할 것이 무언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만을 섬기는 신앙생활이 고리타분하고, 새로운 문화를 받아드리지 못하는 수구골통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슬금슬금 가나안 사람처럼 행동하고 그들의 우상을 받아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여호수아는 젊은 세대들을 바라보면서 백성들을 모아서 유언 같은 말을 선포했습니다.
'내가 너희 앞에 복과 저주를 두겠다. 너희는 오늘날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를 택하겠노라!'
오늘날, 우리 말로 하자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 전심으로 돌아오려면 예수님에게로 나아오는데 방해가 되는 우상의 요소를 제거해라.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을 나의 왕, 나의 주인으로, 최고 우선순위를 두고 예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슬그머니 끼여 놓은 것이 무엇이 잇습니까? 그게 우상입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동시에 섬기고 있는 우상은 무엇일까요?
현대인에게는 우상이란 고대에 깎아 만든 흉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 오로지 나아가는데 방해하는 가로 막는 요소가 우상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이 쓰신 '내가 만든 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프로디테 동상 앞에 무릎 꿇지는 않을지 몰라도 오늘날 많은 여성이 외모와 몸매에 과도히 집착한 나머지 우울증과 각종 섭식장애에 시달린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아르테미스에게 향을 피우지 않아도 돈과 성공을 세상 최고의 가치로 떠받들면 우리도 자녀를 일종의 인신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현대인들이 돈, 섹스 그리고 권력이란 우상을 섬기고 있다고 했습니다.
'거짓 신들과의 전쟁'이란 책을 쓴 카일 아이들먼 목사님의 책에서 말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신은 많다고 했습니다. '음식'의 신, '섹스'의 신, '오락'의 신, '성공'의 신, '돈'의 신, '성취'의 신, '로맨스'의 신, '가족'의 신, 그리고 '나'라는 신을 섬기고 있다.”
여러분, 솔직히 우리를 들여다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동시에 여러 우상적 존재를 마음에 두고 거기에 매여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황폐하여 허허롭고, 기쁨이 사라져 우울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를 가로 막는 어떤 것(우상)를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기 위해서 부모 형제 자식을 버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가족들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족을 버려야 합니까?
우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가족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가족을 가족의 자리에 두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자녀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고 온 마음을 다해 자녀만에게 쏟는 것이 바로 우상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가족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소중한 혈육들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주신 줄 알고 가족을 가족으로서, 자녀를 자녀로서 대하며 살면 됩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보다 모든 면에서 가족과 자녀만을 위하여 산다면 나는 지금 가족이란 우상과 자녀란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이 됩니다. 가족과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일 뿐입니다.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일과 사업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며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일중독에 빠집니다. 하나님보다 일이 우선이 될 때에 일은 나의 우상입니다.
그래서 일이 우선이 되어 '성취의 신', '성공의 신'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돈의 신 맘몬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동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성도에게는 하나님보다 일이 더 우선일 수는 없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백성들 블레셋의 억압 가운데 하나님을 찾아 울부짖었습니다.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사실은 이방신에 빠져 살고 있었습니다. 양다리 인생, 신앙 따로, 삶 따로 였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울부짖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심으로로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권면했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1) 이방신상을제거하고
(2)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의 선포에 응답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4) 아멘.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만 섬겼습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 다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할 수 있고, 실수할 수 있고,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백성다움은 ‘돌아섬’에 있습니다.
잘못됨을 깨닫을 때에 돌아서는 것입니다. 실수에 대하여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음에 대해 회개하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 다움입니다. 성도 다움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서는 길은 분명합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하므로 하나님의 자녀 다움, 성도 다움으로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찬송 / 돌아와 돌아와 525, 3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