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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6월 1일 월요일
[(홍)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유스티노 성인은 2세기 초 사마리아 지방 플라비아 네아폴리스(오늘날 팔레스타인의 나블루스)의 그리스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구도자의 자세로 그리스 철학에 몰두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교에서 참된 진리를 발견하고 입문하여 신앙의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성인은 에페소에서 유다인 트리폰과 벌인 종교 토론을 바탕으로 「트리폰과 나눈 대화」를 저술하였으며, 로마 황제와 원로들에게 그리스도교를 변호하는 책도 펴내고, 로마에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웠다. 성인은 165년 무렵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 다른 여섯 명의 동료와 함께 순교하였다.
말씀의 초대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약속 덕분에 우리는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에게, 포도밭 주인의 아들마저 붙잡아 죽인 소작인들에 관한 비유를 드신다(복음).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귀중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 베드로 2서의 말씀입니다. 1,2-7
사랑하는 여러분, 2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앎으로써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풍성히 내리기를 빕니다.
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부르신 분을 알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습니다.
4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5 그러니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6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7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에게
1 비유를 들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2 포도 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 종 하나를 보내어,
소작인들에게서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라고 하였다.
3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를 붙잡아 매질하고서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4 주인이 그들에게 다시 다른 종을 보냈지만,
그들은 그 종의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고 모욕하였다.
5 그리고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보냈더니 그 종을 죽여 버렸다.
그 뒤에 또 많은 종을 보냈지만 더러는 매질하고 더러는 죽여 버렸다.
6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7 그러나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8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9 그러니 포도밭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10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11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12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두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워 그분을 그대로 두고 떠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1코린 1,18-25)와 복음(마태 5,13-19)을 봉독할 수 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그 대상은 군중이 아니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입니다. 한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두르고 즙 짜는 틀과 망대까지 마련합니다. 이 포도밭은 이사야 예언자가 노래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이사 5,2 참조).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포도밭을 소작인들에게 맡기시고 떠나신다는 설정은,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의 시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은 인간이 자유롭게 충실하거나 자유롭게 배반할 수 있는 시간을 열어 놓습니다.
때가 되자 주인은 종을 보내 열매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종을 때리고 모욕하며,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예언자들이 겪었던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 줍니다. 마침내 주인은 “사랑하는 아들”(마르 12,6)을 보냅니다. 이 아들은 단순한 사자가 아니라 주인의 마음이며,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들이 걸었던 고통의 길 한가운데에서 함께하십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를 상속자로 여겨 말합니다.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12,7). 그들의 말은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을 죽이려 하였던 요셉의 형제들이 한 말과 비슷합니다(37,20 참조). 질투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합니다. 소작인들은 결국 ‘사랑하는 아들’마저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립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 밖에서 십자가에 달리실 사건을 미리 보여 줍니다. 결국 주인은 그들을 심판하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포도밭은 파괴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라지지 않고, 그곳을 맡은 이들이 바뀔 뿐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마르 12,10). 인간의 교만과 욕심으로 내치고 버린 존재가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중심이 됩니다. 십자가는 버림받음이지만, 그 버림받은 자리에서 부활이 이루어집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12,11). 그 놀라움은 눈부신 승리라기보다, 상처 난 자리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생명처럼 우리 안에 흔적으로 남습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평생 도시에서만 살다가 시골에 와서 산 지 벌써 7년 째입니다. “그 외진 곳에서 심심해서 어떻게 사냐?”고 걱정해주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실상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도시 살 때 보다 훨씬 더 바빠졌습니다.
피정 센터가 널리 알려지면서, 주말만 되면 고마운 분들이 우르르 찾아주시니 한가할 틈이 없습니다. 주중에는? 주중에도 소규모로 가족 단위로 찾아주시니 참 감사한 일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피정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난 저녁이면, 또 다른 하루 중요한 일과가 시작됩니다. 해루질도 나가야지, 우럭도 잡으로 가야지, 참으로 역동적인 나날입니다.
시골에 살다 보니 삶이 참 많이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시골길을 걸어가거나 차를 몰고 달려갈 때 주변에 펼쳐진 풍경에 대해서 그리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논이려니, 아니면 밭이려니 그랬습니다. 때로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조금도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다녔습니다. 그저 때로 푸른 들판이었고, 때로 황금색 들판이었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요즘 농작물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식물 하나하나가 새삼스럽게 소중해보이고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이제는 시골길을 지나다니면서 늘 뭐가 심어져 있는지 하나하나 다 확인하고 지나다닙니다.
“야, 저기 봐! 저 밭 고추 모종 정말 잘 자라고 있네. 모종 한 그루 한 그루에 미니 비닐하우스 친 것 봐. 대단하지 않아?”
“올해 마늘 농사 대풍이네. 마늘 농사가 힘들다는데, 어르신들 또 수확하려면 고생하시겠네.”
“저기 저 배추밭 주인은 도대체 농사를 짓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빨리 솎아 줘야 되는데.”
“저 농작물은 처음 보는 건데, 도대체 뭘까?”
결국 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어느 순간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출발점은 바로 대상에 대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할 때, 관심을 지니기 시작할 때, 결국 사랑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그 순간 전에는 조금도 의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무의식 상태에서 의식 상태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고 찾아다니는 하느님, 여간해서는 당신의 모습을 잘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뵙기 어려운 하느님을 생생하게 뵙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토록 듣기 어려운 하느님의 음성을 명료하게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누구겠습니까?
바로 하느님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마음이 있는 사람입이다. 하느님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를 바로 자신들의 코앞에 두고 서도 보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강한 경고성 메시지가 내포된 예화를 소개하십니다.
소작에 대한 결실을 받아오라고 보낸 주인의 종들을 보내는 족족 처형하다 못해 결국 주인의 외아들(예수님)마저 처형하는 유대인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보고도 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일깨우고 계십니다.
어제 삼위일체대축일은 저희 사제들에게 약간은 고통스러운 날이었습니다. 우리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신자들에게 설명해야 하니 얼마나 곤혹스럽겠습니까? 갖은 예를 들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설명해보지만 흡족하지 못합니다.
결국 하느님은 그 자체로 신비스러운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어쩌면 신비스러운 그 자체로 남겨져 계셔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모든 것이 다 밝혀지고, 그분의 실체에 대한 모든 것이 다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하느님을 찾지 않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좀 더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그분을 좀 더 자세히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더 그분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분이 ‘사랑 그 자체’이신 분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무모한 투자: 맹독을 마신 아들이 부활의 항체가 되기까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구나." (마르 12,10-11)
찬미 예수님! 연중 제9주간 월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웅장하고도 뼈아픈 비유, 바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포도원을 정성껏 가꾸어 소작인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소출을 거둘 때가 되어 종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머리를 깨고, 심지어 죽여버립니다.
보통의 지혜로운 주인이라면 이때 군대를 이끌고 가서 소작인들을 진압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인은 세상의 경제학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가장 무모하고 미친 결정을 내립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아들이 하나 있지.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마르 12,6 참조).
주인은 자기 외아들을 그 살인마들이 득실거리는 죽음의 포도원으로 홀로 밀어 넣습니다. 소작인들은 쾌재를 부르며 그 상속자를 포도원 밖으로 던져 잔인하게 죽여버립니다.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아들이 죽을 것을 정말 모르셨을까요? 아닙니다.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들을 그 참혹한 죽음의 구덩이 속으로 던져 넣으셔야만 했을까요? 이것은 하느님의 실패나 인간의 폭력이 만들어낸 우연한 비극이 아닙니다. 이 죽음은 낡고 병든 세상을 심판하고, 죽음을 이겨내는 새로운 생명의 세대, 즉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을 줄 아는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기 위한 하느님의 가장 치밀하고도 완벽한 생명 공학적 설계도였습니다.
이 기막힌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 현대 의학에서 수많은 생명을 살려내는 한 가지 위대한 과학적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바로 '혈청(Antivenom)', 즉 해독제와 항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입니다.
사막이나 정글에서 사람이 치명적인 독사에게 물렸을 때, 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혈청을 주사하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 생명의 혈청을 어떻게 만들어낼까요? 놀랍게도 그 시작은 '건강하고 피가 맑은 말(Horse)'을 사지로 몰아넣는 데서 출발합니다.
과학자들은 가장 튼튼하고 훌륭한 말을 한 마리 고릅니다. 그리고 뱀에서 추출한 치명적인 맹독을 그 말의 혈관 속으로 직접 주사합니다. 독이 퍼지기 시작하면 말은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며 생사를 오가는 진통을 겪습니다. 혈관이 타들어가고 근육이 찢어지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듭니다.
하지만 그 튼튼한 말의 몸속에서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끔찍한 죽음의 독과 싸우기 위해, 말의 면역 체계가 자신의 피를 쥐어짜 내어 그 독을 완벽하게 이겨낼 수 있는 강력한 '항체'를 생성해내는 것입니다. 말이 죽음의 고통을 뚫고 마침내 독을 이겨내고 살아나면, 과학자들은 그 말의 피를 뽑아냅니다. 그 피 속에는 어떤 맹독도 박살 낼 수 있는 무적의 항체가 들어 있습니다. 이 피를 정제하여 독사에게 물려 죽어가는 사람의 몸에 투여하면, 죽어가던 사람은 기적처럼 생명을 얻고 다시 살아납니다. (출처: 데이비드 워먼, 『백신의 역사와 인류』)
이 거룩하고 처절한 의학의 법칙이 바로 오늘 복음에 담긴 십자가 구원의 완벽한 실체입니다. 하느님이 만드신 포도원, 즉 이 세상은 왜 어느새 소작인들의 이기심과 탐욕이라는 치명적인 맹독으로 가득 차 버렸을까요? 그 근본적인 원인은 창세기의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인류 최초의 소작인이었던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포도원(에덴동산)에서 모든 것을 다 누렸습니다. 하느님은 오직 동산 한가운데 있는 '선악과' 하나만을 하느님의 몫으로 구별하여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선악과를 바치는 행위는, "이 포도원의 주인은 제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라는 겸손한 자기 죽음의 봉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뱀(자아)의 속삭임에 넘어가, 자아를 선택하고 이기주의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소유권을 훔쳐 자신이 주인이 되려 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바치지 못한 그 타락의 순간부터 인류의 혈관 속에는 '내 것을 움켜쥐어야 산다'는 지독한 이기심의 바이러스가 퍼져나갔습니다.
이 죽음의 바이러스를 박살 내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반대의 법칙이 증명되어야만 했습니다. 바로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버리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뎌내며 죽어갈 때, 비로소 더 거대하고 영원한 하느님의 복이 주어진다"는 위대한 진리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이 진리를 훈련시키셨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백 세에 얻은 생명보다 귀한 외아들 이사악을 모리아산에서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는 자기 목숨을 끊어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자아의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도망치지 않고, 이기심을 꺾으며 기꺼이 아들을 봉헌하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가 기꺼이 자아를 죽이고 순종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하느님은 그 희생의 죽음을 버텨낸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창세 22,17-18 참조)라며 더 큰 우주적인 축복을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죽음을 피하지 않고 버텨냈을 때 더 거대한 부활의 복이 온다는 것을 구약의 설계도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설계도를 완벽하게 성취하기 위해, 하느님 아버지는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맹독이 들끓는 포도원으로 직접 투입하십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밖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온 인류가 뿜어내는 배신과 증오, 살인과 교만이라는 끔찍한 독을 당신의 거룩한 몸으로 고스란히 다 받아내셨습니다. 아드님은 십자가 위에서 뼈가 으스러지는 산고를 겪으며 생사를 오가셨습니다. 소작인들은 아들이 죽었다고 기뻐하며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덤이라는 사흘간의 사투 끝에 그 사망의 맹독을 완전히 박살 내시고 부활이라는 가장 찬란한 '생명의 항체'를 생성해내셨습니다. 내가 죽어야만 나도 살고 온 인류도 산다는 우주의 진리를 당신의 십자가로 완벽하게 입증해 내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혈관에는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의 피가 흐릅니다. 주님은 당신의 찢어진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그 피(항체)를 성체성사라는 주사기에 담아, 오늘 죄의 독에 감염되어 죽어가는 우리들의 영혼 속으로 직접 수혈해 주십니다. 아드님의 육신은 으스러졌지만, 그 으스러짐을 통해 우주 최강의 부활 항체가 완성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에서 예수님은 시편 118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당신 자신을 "모퉁이의 머릿돌"이라고 부르십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하느님 아버지는 세상이 내다 버린 그 핏덩어리 돌을 가져다가, 인류를 구원할 새로운 하느님 나라(교회)를 지탱하는 무적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짓눌림을 기꺼이 감당하셨기에, 그분 덕분에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 성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구약의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훔치려던 탐욕스러운 소작인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의 항체를 수혈받아 하느님의 본성을 지니게 된 새로운 시대의 백성이자, 거룩한 하느님 성전의 일부입니다.
과거의 소작인들은 철저히 내 배만 불리려는 이기심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피를 먹고 마시는 여러분은 이제 달라야 합니다.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쳐 부활로 새로운 치료제를 만들어내는 존재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진짜 축복은 편안함이 아닙니다. 이기주의의 바이러스가 퍼진 세상 한복판에서, 내가 먼저 손해 보고 내가 먼저 죽어지는 그 십자가의 고통을 끝까지 버텨낼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살리는 무적의 항체이자 흔들리지 않는 평화의 머릿돌로 완성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6년도 어느덧 절반이 지나갑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가지가 없다면, 나뭇잎이 없다면 바람은 불어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가지가 많고, 그 가지에 나뭇잎이 많다면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풀잎에 부는 바람은 느끼기 어렵지만, 큰 나무에 부는 바람은 큰 소리가 나기 마련입니다. 2026년은 미국이라는 큰 나무가 바람을 거세게 일으키고 있습니다.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체포해서 미국의 법정에 세웠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은 베네수엘라의 석유를 가지고 싶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자신감이 생긴 미국은 이란을 공격했습니다. 이란의 최고 지도자를 비롯한 참모들이 제거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란은 수천 년 문명을 지켜온 민족입니다. 베네수엘라와는 차원이 다른 국가였습니다. 이란은 결사 항전으로 저항하였고,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면서 국제유가의 급등이라는 큰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욕망과 욕심의 바람이 수많은 인명피해를 가져왔고, 국제사회의 질서가 흔들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슷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소작인은 포도원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소작인은 마치 주인처럼 행동하였습니다. 소출을 받아오라는 주인의 종을 때리고, 죽였습니다. 마침내 주인이 보낸 아들마저 죽이고 말았습니다. 주인은 소작인을 모두 쫓아내고 새로운 소작인을 세운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던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화를 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마치 자신들에게 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율법과 계명이라는 포도원을 자신들의 전유물처럼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의 말은 따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따르지 말아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은 잘 지키지 않는 율법과 계명을 사람들에게 강요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율법과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을 죄인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분은 등대 같은 분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위로와 힘이 되어주는 분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분은 꽃과 같은 분입니다. 지나간 자리는 늘 향기가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 옆에 있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어떤 분들은 바위 같습니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이 있으면 삶의 중심을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별에 잠시 있다가 가는 존재입니다. 이 지구는 우리만 사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우리의 후손들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지구가 우리의 소유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환경을 훼손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을 힘들게 합니다. 본당 신부님들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본당 신부님들은 착한 소작인처럼 지내고 떠나갑니다. 하지만 일부 본당 신부님들은 마치 본당이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면서 살다 갑니다. 떠난 자리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신부님이 계시고, 떠난 자리가 냄새가 나는 분들도 계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는 과연 착한 소작인인지, 못된 소작인인지 돌아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포도밭을 잘 가꾸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충실할 수 있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성인
성 유스티노(Justin)
신분 : 교부, 순교자, 호교론자
활동연도 : 100/110?-165년
같은이름 : 유스띠노, 유스띠누스, 유스티누스, 저스틴
성 유스티누스(Justinus, 또는 유스티노)는 100-110년 사이에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사마리아 지방에 세워진 플라비아 네아폴리스(Flavia Neapolis)의 이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성장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자세로 꾸준히 탐구하는 학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스토아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피타고라스 철학 그리고 플라톤 철학에 연이어 몰두하였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카에사레아(Caesarea)의 바닷가를 산책하던 중에 한 노인을 만나 인간의 모든 사상, 플라톤 사상에도 한계와 부족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그가 그리스도교에 심취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태도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성 유스티누스가 에페수스(Ephesus)에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것은 130년경이다. 그는 이후 구도자로서가 아니라 진리의 설파자, 신앙의 설교가로 길을 바꾸어 한평생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그는 평신도였으나 스승이며 복음의 사도가 된 것이다.
그는 132-135년 사이에 에페수스에서 유대인 트리폰과 종교에 관한 토론을 가졌으며, 이것을 토대로 155년에 “트리폰과의 대화”(Dialogue with Trypho the Jew)를 저술하였다. 그는 순회교사로서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가르치다가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 황제가 있는 로마(Roma)에 도착해서 그곳에 머물며 자기 집에서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schola)를 세웠다. 유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항의하는 2편의 “호교론”(Prima Apologia, Secunda Apologia)을 썼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호교론자이며 또 그리스도교에 대한 장문의 글을 남긴 최초의 평신도이다. 그는 크레센스라는 견유학파 사람과 논쟁을 벌이다가 그의 사주로 인하여 로마(Rome)의 집정관인 유니우스 루스티쿠스(Junius Rusticus)에게 고발되어 다른 6명의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들은 이방 신전에 희생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수많은 고문을 당한 후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2세기 호교론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였다.
성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챠 (Hannibal Mary di Francia)
활동년도 : 1851-1927년
신분 : 신부, 설립자
지역 : 메시나(Messina)
같은 이름 : 프란치아, 한니발
성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챠(Annibale Maria di Francia)는 1851년 7월 5일 이탈리아 시칠리아(Sicilia) 섬의 메시나에서 태어났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마태 9,37-38; 루가 10,2)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가 젊었을 때부터 그의 영성과 사목의 샘이었다. 1878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부터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고아들과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안니발레 신부는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성심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힘없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하느님과 이웃’이라는 이상을 실현시키며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특히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버려진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위해서 일할 일꾼들을 교회에 보내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로가테, Rogate)의 확산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안니발레 신부는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실현하기 위해 ‘거룩한 열정의 여자 수도회’와 ‘로가치오니스티 남자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가 ‘전세계가 성소를 위해서 기도하는 날’(성소주일)을 제정함으로써 그 결실을 맺었다. 복음의 덕을 평생 동안 산 안니발레 신부는 1927년 6월 1일 메시나에서 선종하였다.
1990년 10월 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안니발레 신부는 ‘현대 성소 사목의 선구자’와 ‘고아들과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로서 인정을 받았다. 그는 2004년 5월 1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그라시아노 (Gratian)
활동년도 : +250년
신분 : 군인, 순교자
지역
같은 이름 : 그라띨리아노, 그라띨리아누스, 그라시아누스, 그라씨아노, 그라씨아누스, 그라티아노, 그라티아누스, 그라틸리아노, 그라틸리아누스
황제군의 군인이었던 성 펠리누스(Felinus)와 성 그라티아누스(Gratianus, 또는 그라시아노)는 데키우스 황제 때에 이탈리아 페루자(Perugia)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976년에 밀라노(Milano) 부근 아로나(Arona)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성 그라티아누스는 그라틸리아누스(Gratilianus)로도 불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