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목마을을 찾아서/靑石 전성훈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지는 태양이 같은 곳에서 뜨고 지는 별천지가 있다. 충남 당진 작은 포구, 왜목마을이 그렇다. 지는 해의 처연한 아름다운 모습과 황홀하게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볼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어스름 밤이 되면 떠오르는 달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일출과 일몰 그리고 월출을 다 볼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그야말로 기가 막힌 곳이다.
왜목마을에 가보고 싶어서 친구들과 날짜를 정하고 나선 게 5월 연휴가 끝난 다음 날이다. 한 달 전에 모처럼 결정한 날인데 연휴 때처럼 온종일 비가 내린다. 비 내리는 아침, 월드컵 경기장을 거쳐서 서부간선도로를 지나가는 길은 거의 주차장 수준이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승용차 안에서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실컷 웃다가 화성휴게소에 들려 차 한잔 나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서해안 고속도로를 지나가는 게 20년 가까이 되는 것 같다. 빗길을 달려 충남 당진 개심사(開心寺)에 도착하니 12시 반 경이다. 봄철 왕벚꽃이 유명한 개심사로 들어가는 마을 어귀에는 벚나무가 지천으로 널려있다. 사진작가 친구에 의하면, 벚꽃이 지고 일주일 정도 지나서 글래머스타 몸매처럼 풍성하고 탐스러운 왕벚꽃이 피면 그야말로 장관이라고 한다. 그때에는 활짝 핀 왕벚꽃을 보러온 사람들로 절은 발 디딜 틈조차 없다고 한다. 비가 뿌리는 가운데 절집 구경을 하며 ‘청벚꽃’이라는 표찰을 차고 있는 커다란 벚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벚나무 옆에는 거의 2백 년 정도 된 배롱나무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말없이 서 있다. 배롱나무의 고혹적인 모습을 보며 아하하고 입을 다물지 못한다. 절에 가면 으레 둘러보는 해우소를 찾아갔더니, ‘구멍을 향해 정조준하여 볼일을 보라’는 안내문이 있기에,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며 여성용 해우소에는 뭐라고 써 놓았는지 궁금하다. 개심사를 떠나서 한 상 가득히 각종 나물이 담긴 고향의 정을 듬뿍 풍기는 밥집에서, 우렁된장쌈밥과 제육볶음을 안주 삼아서 향토 막걸리인 ‘면천 생막걸리’를 한 모금 마시니까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 비가 내려서 날씨가 조금 쌀쌀하지만, 여미리(餘美里) ‘유기방’ 고택(古宅)을 둘러본다. 집 주변이 온통 수선화 동산을 이루어 꽃이 필 때는 많은 사람이 몰려든다고 한다. 여미리를 떠나 숙소가 있는 바다 낚시꾼이 사랑하는 장고항으로 향한다. 석문방조제와 왜목마을의 중간쯤에 있는 장고(長鼓)항은 마을 모양이 장고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장고항의 4월은 실치회 축제로 유명하다. 빗물을 머금어 미끄러운 경사면을 거의 기다시피 하여 제방에 올라서니 비바람이 많이 불어서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힘들다. 장소를 이동하여 어선 선착장으로 가서 짭짤한 바닷물 냄새를 맡고서 이른 저녁을 먹으려고 횟집을 찾아 나선다. 소맥 한잔 마시며 실치회 대신 두툼하게 썬 신선한 도다리를 청양고추를 썰어 넣은 강된장에 찍어서 먹는다. 꿈에 그리던 저녁노을도 달이 뜨는 광경도 비바람에 날려버린 채 서운한 마음을 다독이며 비 내리는 캄캄한 밤을 맞이한다. 살다 보면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들어맞을 때도 있고, ‘꿈도 야무지다’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을 때도 있는데, 이번 여행길이 그렇다. 숙소에 들어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니 몸과 기분이 개운하다. 안동소주를 가져온 의리의 사나이 친구 덕분에 도다리회를 안주로 술자리를 펼친다. 지나간 젊은 날의 이야기와 늙어가는 신세를 한탄하며 서러움을 훨훨 날려 보낸다. 따듯한 거실 바닥에 요를 깔고 이불은 덮지도 않은 채, 취기가 오른 탓에 코를 골면서 꿈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다음날 평소처럼 5시 반 정도에 눈을 뜨니 방에서 친구들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새벽에 비가 그치면서 진즉에 해가 떠올라서 일출 장면도 보지 못하여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 썰물이 된 벌거벗은 갯벌을 보려고 용무치포구로 나가서 방파제를 걸으니 갈매기들이 떼 지어 몰려다닌다. 조금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바닷물이 빠지는 갯벌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침을 먹고 찬란히 비치는 햇볕을 쬐면서 ‘왜목마을’을 향하여 간다. 지형이 왜가리 목처럼 생겼다고 해서 왜가리 형상을 만들어 놓은 왜목마을 백사장 포토존에서 멋진 자세로 사진을 찍는다. 드라이브도 할 겸 당진화력발전소 주변 길을 따라서 뻥 뚫린 대호방조제 도로를 신나게 달려 예산 수덕사로 간다. 덕숭총림 수덕사(修德寺)는 조계총림 순천송광사, 영축총림 양산통도사, 가야총림 합천해인사, 고불총림 장성백양사, 금정총림 동래범어사, 팔공총림 대구동화사, 쌍계총림 하동쌍계사와 함께 우리나라 8대 총림의 하나이다. 총림(叢林)은 여러 승려가 화합하여 함께 배우며 안거(安居)하는 곳으로, 선원, 강원, 율원 등을 모두 갖춘 사찰을 말한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둔 행사준비로 사찰은 약간 분주한 모습이다. 번잡한 절 앞의 음식점 거리는 여기가 중생이 사는 저잣거리임을 알려준다. 개인적으로 수덕사는 조금 인연이 있다. 50년도 훨씬 넘는 대학생 시절 무전여행을 하면서 저녁 무렵 수덕사 뒷산을 걸어 내려와 거동이 수상한 사람으로 몰려 파출소에 끌려간 적이 있다. 학생증을 보여준 끝에 풀려나와 수덕사에서 머슴 노릇을 하는 분의 도움으로 찬밥을 물에 말아 먹고 수덕사에서 하룻밤을 지낸 적이 있다. 수덕사를 뒤로하고 해미읍성으로 가서 열무국수와 콩국수를 파는 집에서 맛있게 점심을 먹고 집으로 향한다. 1년에 몇 번이나 볼까 말까 하는 비 온 뒤의 맑고 깨끗한 하늘, 비를 흠뻑 먹어 푸르디푸른 산과 바닷냄새를 풍기는 왜목마을과 포구의 정취를 가슴에 새기고, 늙어가는 친구들과 추억 쌓기를 한다. 앞으로 몇 번이나 이런 꿈 같은 여정을 이어갈지 모르지만, 가을에는 아내들과 함께하는 단풍 나들이를 하기로 약속하며 웃는다. (2024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