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28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약속된 구원을 구하라!
슥 10:1~7
<갖고 싶은 것>
사람은 누구나 갖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여러분은 무엇을 갖고 싶습니까?”
갖고싶은 것이 수없이 많았지만, 다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포기, 포기, 포기하다 보니, 이제는 갖고 싶은 것도 없어져 버렸습니까?
“갖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 이르면 “인생을 달관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갖고 싶은 것을 아예 차단하겠다. 아예 아무것도 갖지 않겠다.
이것을 “무소유” “무소유 정신”이라 합니다.
불교 쪽에서 “무소유” “무소유 정신”으로 재미 본 승려들이 더러 있습니다.
“무소유”를 책으로 펴내서 히트 친 승려도 있습니다.
꼭 이러한 무소유가 아니더라도, 살다보면 하나 하나 포기하게 됩니다.
왜 포기하게 됩니까? ~ 아무리 아등바등 얻어내려고 해봤자 되지 않더라, 그러니 포기하자!
거기에 세월이 흐르니 나이가 들어, 건강도 옛날같지 않고, 능력도 점점 줄어듭니다.
이제는 “아등바등” 할 힘조차 없습니다.
그러니 누가 등 떠다밀지 않아도 “무소유 철학자”가 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제가 아까 “지금 당장 여러분은 무엇을 갖고 싶습니까?”라고 질문했었습니다.
그때, 딱 갖고싶은 것이 떠오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명품 하나쯤 갖고 싶다” 이런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시큰둥하여, “뭐 딱히 갖고 싶은 것이 없어요, 목사님!” 이런 분도 있을 겁니다.
딱히 갖고 싶은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면, “당신은 무소유의 철학자가 되셨습니다.”
☻ 물론 뒤로 호박씨 까는 분들도 있겠지만요!
☞ 어렸을 때는 참 갖고 싶은 것도 많았습니다.
<소유욕의 변천>
어릴 때는 참 갖고싶은 것이 많습니다.
유채, 바울이와 함께 있으면 할아버지에게 갖고싶은 것을 해 달라고 경쟁적으로 보챕니다.
“뽑기 해줘요” “무슨무슨 캐릭터 사줘요” 대부분 장난감입니다.
☞ 어제는 캐릭터를 출력해서 코팅해 달래요!
바울이는 포켓몬 캐릭터, 유채는 공주 캐릭터,
할아버지 노트북에서 저희들이 검색해서, 이것저것을 가리키면서 출력해 달라고 합니다.
모처럼 시간을 할애해서 다 출력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코팅해 달래요,
목양실에 코팅하는 기계가 있습니다.
‘너희들이 얼마나 갖고 싶으면 할아버지를 조르겠냐?’
모처럼 코팅을 다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짤라주었습니다.
신바람이 났습니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이 아이들이 자라면서 “갖고 싶은 것”이 점차 바뀔 겁니다. 그렇지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갖고 싶은 것이 지금과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또 달라집니다.
대학교에 입학하면 갖고 싶은 것이 달라집니다.
나중에는 갖고 싶은 것이 “직장”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요,
직장에 이어서 남자친구, 여자친구, 배우자가 생겨서 “가정”을 갖고싶어할 것입니다.
직장과 가정을 갖고나면 “자녀”를 갖고싶을 겁니다.
직장, 가정, 자녀까지 갖고나면, 무엇을 갖고싶을까요?
☞ 돈, 명예, 권세 여기에 외모까지 갖고싶을 테지만, 이보다 차원이 높은 것, 무엇일까요?
직장, 가정, 자녀를 가졌고, 의식주 해결을 위한 기본적인 것도 가졌다칩시다!
건강도 가졌다고 칩시다. 이 단계에서 갖고 싶은 것은 “행복”일 수 있습니다.
물론 행복이란 생애 전반에 걸쳐서 갖고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없이 살다보면, 기본적인 것을 갖기 위해 눈코뜰새가 없지요,
“아, 행복을 갖고싶다!” 이때쯤 되면, 인생을 관조하는 단계입니다.
“아, 소크라테스형, 인생이 왜 이래? 왜 이모양이야?” 인생무상을 절감하는 단계입니다.
직장, 가정, 건강을 가지고 살다가, 나이들면, ‘행복’을 갖고 싶습니다.
☞ 행복 다음으로 갖고 싶은 것의 종착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맨 나중에 갖고 싶은 것>
사람이 태어나 자라 인생을 사는 중, 갖고싶은 것이 점점 바뀝니다.
직장 ⇨ 가정 ⇨ 건강 ⇨ 행복, 변하는 중에 인생에서 최종적으로 갖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뭘까요? ~ 그것은 구원입니다.
살아있을 때도 구원은 물론 중요합니다.
여러 가지 상황의 어려움 속에서 탈출하는 것, 구원은 늘 필요합니다.
삶의 전반적인 측면에서 구원은 늘 필요합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동안의 구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 이후에도 구원이 필요하다는 의식을 갖게 됩니다.
‘살아있을 때 행복했으니, 죽은 이후에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것이 최종적인 구원입니다.
‘살아있을 때 불행했으니, 죽은 이후라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런 경우도 있겠지요?
이것이 “구원”입니다.
사람이 생애 중에서 ‘맨 나중에 갖고 싶은 것’ 그것은 바로 구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갖고싶어합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스스로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 수고하고 노력합니다.
경제활동을 통하여 의식주를 해결합니다.
가정을 이루고 가정의 안정과 행복을 위하여 노력합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까지의 구원은 살아있는 동안의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까지의 구원’을 말하는 곳이 종교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종교를 찾습니다.
자연히 세상에는 종교가 많아졌습니다.
어느 종교가 진짜이고, 어느 종교가 가짜인지 구별이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인생에서 구원, 그중에서도 참구원에 이르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해 보일 지경입니다.
구원을 찾아 헤매는 이들을 유혹하는 사이비, 가짜 종교들의 폐해는 많습니다.
그 중의 한 모습이 본문 2절에 나옵니다.
슥 10:2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하지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그 위로가 헛되므로 백성들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드라빔과 복술자>
2절에서 “드라빔”과 “복술자”가 나왔습니다.
‘드라빔’하면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창세기 31장에 나옵니다.
야곱이 장인에게 20년간 착취당한 끝에 식솔을 이끌고 탈출합니다.
그때 야곱의 아내 ‘라헬’이 친정아버지의 우상인 드라빔을 훔칩니다.
라헬의 친정 오빠 ‘라반’이 추격해 왔습니다. 라반은 드라빔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이때 라헬이 말 안장밑에 드라빔을 감추고 걸터앉았습니다.
“제가 지금 생리 중이라서 일어날 수 없어요 오빠!”라고 말합니다.
안장 밑에 넣고 깔고 앉을 만큼 드라빔은 깎아 만든 우상 중에서 비교적 작은 것입니다.
드라빔은 깎아 만든 우상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몸에 지니면 잡귀를 물리치고 행운이 온다고 해서 주먹 만하게 깎아 만든 우상입니다.
“복술자”는 점쟁이를 대표하는 말입니다.
쌀이나 엽전 등을 상위에 흩으면서 점괘를 말해주는 이들의 총칭입니다.
동서남북 어느 한 방향을 지목하면서 그쪽에는 액운이 있으니 피하라는 등의 말을 합니다.
한국의 복술자들은 푸닥거리를 권합니다.
수천만 원짜리 푸닥거리를 해야 한다고 겁박합니다.
기가막힌 현실입니다.
☞ 구원을 찾아 헤매는 이들이 드라빔을 만들어 의지하고, 복술자들의 점괘에 의지합니다.
이 현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21세기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진정한 구원이 어디 있는지, 진정한 구원이 무언지 알지 못하는 대중을 미혹합니다.
드라빔과 복술자들의 미혹입니다.
하나님은 드라빔과 복술자들을 벌하리라고 그 다음 구절에서 분명히 말씀합니다.
슥 10:3a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숫염소들을 벌하리라~”
여기서 목자는 거짓 삯군 목자로서 복술자, 점성술가 등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노를 발하시고 ‘숫염소’ 즉, 잘못된 것을 가르치는 이들을 벌하십니다.
하나님은 드라빔과 복술자를 분명히 심판하십니다.
<진정한 구원의 특징>
사람들은 말합니다.
“기독교도 그러한 종교 중의 하나가 아니냐? 기독교만이 진리라고 어떻게 보증하냐?”
이 질문에 오늘 본문 1절이 대답합니다.
슥 10:1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
이 구절 속에는 의미심장한 비유가 스며 있습니다.
① 하나님이 누구신 말씀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구름을 일게 하며, 비를 내려주시는 분입니다.
② 하나님은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봄이면 비를 내려 채소가 자라게 하여 사람들을 먹이십니다.
이것이 으뜸가는 구원이라는 뜻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③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드라빔에 의지하거나, 복술자들을 찾아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구하라는 뜻입니다.
④ 하나님의 구원은 이미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지 않아도, 봄비는 내립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봄비에 채소가 자랍니다. 우리는 그 채소를 먹고 삽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봄비는 내릴 터인데, 굳이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 여기에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경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로 세상을 운행하십니다.
봄비를 내려 곡식을 자라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하십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 오늘 설교 제목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약속된 구원을 구하라!”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구원은 이미 봄비처럼 약속된 구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구해야 합니다.
<약속된 구원을 구하라>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려는지, 하나님은 미리 약속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우리에게 구약~ 오래된 약속, 신약~ 나중 약속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살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실지, 이미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낱낱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찍이 해 주신 약속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그 약속에 따라 간구할 때, 약속된 구원을 받습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예수 믿고 받은 축복은 이미 신.구약 성경 두 권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축복을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있지 않는 독특한 것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리 약속하시고, 그것을 달라 하시면 주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 스가랴 10장 1절 위 파란글씨 제목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구원을 약속하시다” 제목으로 이렇게 예시하십니다.
이미 약속하신 것, 이미 약속되어 있는 것을 구할 때, 우리의 확신과 믿음은 2배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미리 약속하시고, 그것을 우리가 구할 때 주시는 분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이 미리 약속해 주신 구원을 하나님께 구하여 받습니다!
이것이 뭐 그리 중요하고 대단하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고, 왜 대단합니까?
☞ ‘드라빔’과 ‘복술자’가 준다는 복이나 구원과 비교하면 금새 알 수 있습니다.
드라빔같이 깎아 만든 우상, 그것이 우리에게 미리 약속해 준 것이 있습니까?
복술자들의 점괘, 그것이 우리에게 미리 약속해 준 사실이 있습니까?
우상과 점괘는 우리에게 사전에 선포된 적이 없습니다.
우상과 점괘를 믿으면 어떤 복을 어떻게 받게 된다고 사전에 약속된 적이 없습니다.
우상과 점괘는 그때그때, 임시방편으로 적당히 꾸미고 거짓으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것이 거짓이고,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성령님의 인도로 신앙하는,
우리는 성경으로 이미 약속된 구원을 구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받아 영생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