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내 헬기장에서 세 대의 청색 UH-1H가 이륙한 것은 이날 오전 10시30분쯤이었다. 3호기에는 보도진, 2호기에는 수석비서관들과 경호실 수행팀이 탔다. 대통령이 탄 공군 1호기는 승무원을 포함하여 정원이 13명이었다. 앞의 네 자리는 조종사, 부조종사, 정비사, 공군연락관 차지였다. 그 뒷자리에 박대통령이 앉았다. 대통령 좌석에는 쌍안경과 큰 지도가 놓여 있었다. 이 지도에는 주요시설, 공장, 공단, 공사장이 표시돼 있었다. 경호실 소속 상황실에서는 이 지도에 새로운 정보사항을 늘 유지하여 대통령이 잘 알아볼 수 있도록 신경을 곤두세웠다.
대통령은 누구보다 공중시찰을 많이 하여 지리에 밝았다. 전에 없던 시설물 같은 것이 보이면 궁금해 하였다. 그럴 때는 수행과장이 지상으로 긴급 무전 연락을 취해 상황을 파악, 보고해야 했다.
이날 대통령 옆자리에는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의 주무장관인 이희일 농수산부장관이 앉았다. 그 뒤로는 김계원, 차지철,서석준 경제수석 비서관 및 천병득 수행과장과 오세림계장이 경호원으로 자리잡았다.
기내에서 박 대통령은 이 장관에게 전날 확정된 추곡매입가 결정에 따른 농민들의 반응을 물었다. 추곡매입가 결정과정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경제기획원에서는 전년대비 10%선의 인상을, 농수산부에선 20%이상의 인상을 주장하여 좀체로 결말이 나지 않았다. 신현확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와 이 농수산부장관이 대통령앞에서도 합의를 보지 못하자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인상률 22%로 결정했다.
'박 대통령이 농민들에게 주는 보너스'라고 표현된 선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통령은 이날 무척 기분이 좋았다. 농촌 시찰에 나서면 언제나 신이 나는 사람이었다.
비행중에 박 대통령은 쌍안경으로 지상을 두루 살폈다. 반월공단 위를 지날 때는 자신이 펼쳐보던 지도와 일일이 대조하기도 했다. 아산 화력발전소 공사장에서 굴뚝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가리키며 "이곳은 공장 입지가 좋은 곳"이라고 설명도 했다. 김계원 실장은 대만 대사로 오래 근무하여 국내 사정에 어두웠다. 박 대통령은 김 실장에게 그동안의 업적을 자랑하듯 지상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경지정리가 잘 돼있고 막 추수가 끝난 농촌지역은 평화로웠다.
헬기가 당진 예산 상공을 지날 때 김실장은 대통령에게 말을 건넸다. "각하, 초가집이 다 없어진 줄 알았는데 저기에는 남아있지 않습니까?" "우선 큰 길가부터 하고 있소.".
대통령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대통령 일행을 태운 세 대의 헬기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장인 당진군 신평면 운정리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2분이었다. 헬기는 새로 닦인 포장도로 위에 착륙했다.
헬기에서 내린 대통령은 도열한 현지주민들로부터 박수를 받자 활짝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답례를 했다. 넓은 공터에 설치된 단상 까지 약 50여m를 걸어가 단상위로 올라섰다. 관계 공무원들과 근로자들이 도열해 있었다. 행사장 앞줄에는 마을 노인들이 한복을 입고 참석했다. 대통령은 방조제 건설 유공자 표창을 한 뒤 약 8분간에 걸친 치사 를 낭독했다.
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국토개발이 국력의 원천"이며 "오는 83년부터는 홍수와 가뭄이 없는 농촌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았다.
이희일 장관은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쇳소리 나는 특유의 카랑 카랑한 음성이 아니고 그날은 힘이 좀 빠진 듯했어요. 나이를 드신 때문인가 하고 생각했지요"라고 했다. 경호실 수행계장 오세림은 "목감기 때문에 저런가"하고 생각했다고 한다.당시 수행과장 천병득은 "그날 바람이 세게 불었는데 바람소리를 제거하기 위해 방송국에서 오디오 시스 템을 조작한 때문이 아닐까"라고 했다.
박수 속에 치사를 마친 박 대통령은 단상에서 내려와 테이프 절단 식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참석자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그날 맨앞줄에 참석한 노인들 가운데는 갓을 쓴 이들도 보였다. 대통령은 동행하던 측근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 고을의 원로 어른이 어디 계신가. 이런 경사에 같이 모셔야겠지. 가서 모시고 오게.".
천병득 수행과장은 즉시 무전으로 경호원들에게 지시했다. 장우익 충남지사도 부하 공무원들에게 재촉했다. 이들이 마을 이장을 통해 원로를 찾는사이 대통령은 노인들이 서있는 곳에 다가가 "연세가 제일 높으신 분은 나오셔서 저와 함께 테이프를 끊으시지요"라고 직접 말하기도 했다. 테이프 절단식장은 방조제 입구에 마련되어 있었다. 대통령은 가위를 받아 이희일 장관 등 관계 공무원들과 함께 테이프를 자르기 위해 줄을 섰다.
그동안 신정리에 사는 이길순(당시 83세) 노인이 그날 참석한 사람들 중 가장 연로한 사람임이 밝혀졌다.
하얀 턱수염에 돋보기를 끼고 새마을 모자를 쓴 한복차림의 이 노 인은 몸둘 바를 몰라하며 대통령 곁으로 다가와 인사를 했다. 대통령보다 작은 체구의 이 노인은 주위에서 급히 마련해준 흰장갑과 가위를 받아 들었다. 대통령은 한 손으로 이 노인이 자를 오색 테이프의 한 허리 를 들고 미소를 머금은채 잠시 기다렸다.
긴장한 이 노인의 오색 테이프는 좀처럼 잘려지지 않았다. 대통령 은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가위질을 도와 주었다. 주위에서 박수가 터졌다. 대통령은 자리를 뜨지 않고 잠시 이 노인의 등을 어루만지며 "올 농사는 잘 지으셨겠지요. 댁내도 모두 편하시고"라고 안부를 물었다.박 대통령은 "버튼도 같이 누르시죠"하며 이 노인을 끌었다.
박 대통령은 배수갑문을 여는 버튼을 눌렀다. 버튼을 눌러도 쾅 하는 폭발음이 잘 들리지 않았고,삽교호의 막혔던 물이 갑문을 통해서 황해로 쏴 빠져나가는 장면도 둑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대통령은 옆에있던 이희일 장관에게 "어디야, 어디야?"라고 물으면서 두리번거렸다. 이 순간을 잡은 것이 그의 마지막 공식 사진이 되었다.
박 대통령은 배수갑문이 열린 삽교천 방조제 위를 걸어가 갑문 사이로 물이 빠지는 것을 구경했다. 그리고 이희일 장관과 함께 승용차로 3천360m의 방조제 위를 달렸다. 이 장관은 방조제 도로 옆에 자란 잔디가 몇달 전에 씨를 뿌렸던 미국산 '켄터키 블루'라고 설명했다.
건너편 아산군 쪽에 도착한 박 대통령은 담수비를 제막하였다. 물개 세 마리가 하늘을 향해 서있는 모양이었다. 비를 감싼 흰 천이 세찬 바람에 휘감겨 있어 박 대통령이 줄을 잡아당겨도 벗겨지지 않았다. 급기야 수행 경호원들이 비 위로 올라가 천을 벗겨내려야 했다. <계속>.
첫댓글 누구같았으면 마을어른들은 참석못하게 주민등록증 검사하고 60세 넘는 노인은 삽교천행사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을텐데..........
무신 말씀을 그렇게 정확하게 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