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추기경 정진석] (10) 흙먼지 날린 혜화동 로터리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이땅의 젊은이들
- 6ㆍ25전쟁 때 폭격으로 폐허가 된 서울 중앙청 일대(지금의 광화문광장 인근).
남북 분단에도 한국은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나라는 해방 후 북쪽으로는 소련군이, 남쪽으로는 미군이 진주하여 일본군에게 각각 항복을 받았다. 여기서부터 분단의 아픔이 시작됐다. 북쪽은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체제가, 남쪽은 민주주의 체제가 자리를 잡았다. 남북 분단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대부분 사람들은 한국은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가족이 이남과 이북에 친척이 있고, 어떤 이는 친지 중에 북쪽 공산당에서 일하는 사람, 남한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 모두 있는 경우도 있었다. 38선은 그어졌지만 처음에는 몰래몰래 왕래도 가능했다. 그래서 북한에서 군대가 내려온다고 해서 딱히 겁을 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분위기였다. 공산당도 같은 한국 사람인데 큰 문제가 있겠느냐며 안이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북한은 소련군의 지원을 받아 계속적으로 군비를 늘려나갔고, 6ㆍ25전쟁 직전에는 남쪽과 북쪽이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전력이 비대칭을 이뤘다. 6ㆍ25가 일어나기 전 이미 38선을 중심으로 국지전도 많이 있었다. 국군과 북한군의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은 지속적으로 존재했다. 남한은 1949년 미군이 모두 철수하고 약간 명의 미군이 고문으로 한국 군대를 지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미국은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통일을 위해 전쟁을 할 것이라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미군은 국군에게 무기와 화력을 충분히 지원하지 않았다. 공군과 해군이 변변찮았던 것은 물론 육군도 탱크 하나를 보유하지 못한 군대였다.
전쟁이 시작된 주일 아침에 많은 사람이 단잠에 빠져 있었고 많은 군인도 주말 외출을 즐기고 있었다. 북한군은 새벽에 38선 전체에 걸쳐서 도발을 감행했다. 전쟁 발발 전 며칠 동안 북에서 싸우는 척하다가 후퇴하는 식으로 위장 전술을 펼치고 있었기에 6ㆍ25 전쟁이 터졌을 때도 한두 시간 후에는 전투가 끝난다고 착각을 한 사람도 있었다.
서로 총부리를 겨눈 전쟁이라는 것은
그러나 6월 25일 일요일 새벽의 전투는 전혀 양상이 달랐다. 북한은 오전 4시를 기해 38선 전역에서 무자비한 공격을 시작했다. 전 화력을 집중해 수많은 군인을 전장에 투입하고 병력을 계속 남쪽으로 밀어붙였다. 남측은 아무 준비도 하지 못한 채 당하고 말았다. 전 군이 휴가를 나간 주일 아침에 일어난 전투에 우리 국군은 극심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북한군의 병력은 더 많이 늘어났고 특히 우리 군은 굉음을 내며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는 소련제 T-34 탱크의 실물을 전장에서 처음 보았다. 소총으로 무장한 군대가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을 막는다는 건 달걀로 바위 치기였다. 국군이 포탄을 탱크에 명중시켜도 포탄이 그저 튕겨 나갈 뿐 탱크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몇몇 전선에서는 용감한 국군들이 맨몸으로 폭탄을 메고 탱크로 뛰어들어 폭파를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노력에도 전력이 열세였던 국군은 짧은 시간에 큰 피해를 입고 남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 전쟁으로 수많은 양민이 공산군에게 학살됐다. 사진은 학살된 민간인 시신.
진석은 주일 아침 간간이 들려오는 전투 소식을 듣게 됐다. 처음엔 38선에서 양측이 국지전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후에 혜화동성당에 가서 미사를 보고 나왔는데 혜화동 로터리에서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돈암동에서부터 길가로 흙먼지를 뒤집어쓴 국군 병사들, 전투에서 다친 부상병들이 내려왔다. 마치 전투에서 패배하고 후퇴하는 패잔병들처럼 보였다. 주일 오후에 그 모습을 보고 진석은 처음으로 전쟁을 실감했다.
국군은 미아리고개를 넘어서 오는 길이었다. 벌써 의정부가 공격당하고 당일에 점령됐다는 소문마저 들려왔다. 밀려 내려오는 국군은 지금의 창경궁 앞 돌아가는 모퉁이, 그러니까 현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이 있는 쪽에 집결해 있었다. 당시 그곳은 우거진 숲이었다. 나중에 들은 소리지만 그곳에 정렬했던 국군들은 서울로 들어오려는 북한군과 미아리고개에서 격렬한 전투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기세를 꺾지는 못했다.
주일에 늦게 집에 들어온 진석은 다음날 월요일 학교에 갈 생각도 못 하고 전쟁 소식 들으러 혜화동 로터리로 다시 나갔다. 온종일 서성이며 전쟁 소식을 주워담던 진석은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심각해짐을 직감했다. 국군 부상병, 패잔병이 자꾸 넘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에 동네에 나가 보니 인민군의 모습이 보였다. 정찰대인지 짐작만 할 뿐이었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진석은 화요일에는 집안에만 있고 바깥에 나가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한 이후 라디오에서는 ‘국군이 이기고 있고 오히려 북진하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방송만 흘러나왔다. 대부분의 서울 시민은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27일 오후 10시 이승만 대통령의 목소리가 방송에서 흘러나왔다. “유엔에서 우리를 도와주기로 했으니 국민은 좀 고생이 되더라도 참고 안심하고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28일 새벽 2시 30분 서울 지역에는 큰 폭발음이 들렸다.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던 것이다. 당시 한강 다리를 폭파하는 과정에서 다리를 건너던 수많은 피난민도 사망했다.
한강을 건널 수 있는 유일한 다리였던 인도교가 폭파되자, 정부의 발표를 믿고 피난을 가지 않았던 수많은 서울 시민이 고립되었다. 그러나 이미 정부의 수뇌부들은 서울을 떠난 상태였고, 시민들은 분노했다. 진석은 한강대교에서 희생된 이들이 오랫동안 생각나 마음이 아팠다. 나란히 놓여 있는 한강 철교는 제대로 폭파되지 않아 공산군의 진군을 늦추지 못했다고 한다. 서울은 완전히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북에 남아 있던 이들의 한강 도하는28일 오후부터 29일 오전 사이에 주로 이뤄졌다. 그러나 한강 이북에는 여전히 국군 병력이 상당 부분 남아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9ㆍ28 수복 후 국군에 복귀했으나 상당수가 북한군에 포로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군이 6ㆍ25 전쟁 동안 수만 명의 국군 포로로 구성된 부대를 운영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국군이 북한군 옷을 입고 북한군이 되어 아군인 국군에 총을 겨누고 싸운 셈이다. 시간이 지나 진석은 그들 대부분이 낙동강 전투에서 무기도 변변히 지급받지 못하고 총알받이가 되어 희생됐다고 들었다. 가장 비인간적인 죄악이 벌어지는 현장 한가운데에 이 땅의 청년들이, 그리고 진석이 있었다.
[추기경 정진석] (11) 6·25와 명동성당
전쟁의 여파가 교회에도… 진석은 강제 징집 피해 몸을 숨기고
- 6ㆍ25 전쟁 당시 명동성당(뒤편)과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돼 자유를 되찾았지만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이들에 의해 남과 북으로 분단됐다. 38선으로 남과 북, 미 군정과 소련 군정 지역으로 구분됐지만, 초창기에는 왕래나 활동 등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양쪽 진영의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는 왕래도 쉽지 않게 됐다. 그러나 6ㆍ25 전쟁 발발 후 처음 공산당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는 피란을 가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 이유는 경황도 없었지만 대부분 집에 월북한 젊은이 한두 명씩은 다 있었고, 또 공산당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처음 북한에서 내려온 공산당 정규군들은 민심을 얻기 위해 무리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정부 인사, 지주, 군인 가족, 경찰 등을 반동세력으로 몰아 인민재판을 열어 마음대로 처단했다. 북한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더 큰 문제는 북한군 밑에서 새로 완장을 차고 권력을 얻게 된 일부 동네 사람들이었다. 주로 무시당하던 사람들이 ‘동네 빨갱이’가 돼 평소 자신을 무시하던 이웃들을 상대로 마음대로 복수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948년 남한과 북한 양쪽에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교회 역시 각각의 정치 세력이 지닌 이념에 따라 영향을 받았다. 남한의 천주교회는 미 군정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며 점차 발전해 갔지만, 북한 교회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북한은 천주교회를 미군과의 비밀 연락의 근거지로 의심하며 성직자를 체포하거나 추방했다. 교회 시설물들을 불법으로 폐쇄하고 몰수했다. 이는 6ㆍ25가 발발하기 직전까지 계속됐다. 전쟁 발발 하루 전날인 1950년 6월 24일 밤부터 25일 새벽 사이에 북한군은 미 제국주의자들의 첩자라는 죄목으로 북한에 남아 있던 13명의 한국인 신부를 모두 체포, 구금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38 도선을 넘어 남침했다.
서울대교구, 긴급 참사회 열어
서울대교구는 전쟁 발발 다음날인 6월 26일 긴급 교구 참사회를 열었다. 당시 교구장인 노기남 주교는 유럽 순방 중이었기 때문에 부주교인 이기준 신부, 명동본당 주임 장금구 신부, 교구청 소속 윤형중ㆍ김철규 신부 등이 모여 차후 교회의 행보에 대해 논의했고 빠른 결론을 내 전쟁에 대처했다. 회의 결과 본당 주임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성당에 잔류하고 그 외 보좌신부와 특수 사목에 종사하는 신부들은 가능한 한 피란을 떠나도록 권유하기로 했다. 특히 반공 저술 활동 등으로 북한군의 표적이 되었던 윤형중 신부와 1946년 해주본당 사목 당시 월남을 시도하다 체포돼 해주형무소에 수감된 이력이 있는 김철규 신부는 즉시 피란하도록 했다. 혜화동 신학교는 휴교하고 신학생들을 귀가 조처했다. 6월 27일 저녁에 신학교가 해산하고, 교수 신부와 신학생들은 신자의 집으로 몸을 피하거나 귀가해 있다가 나중에 피난 행렬에 섞여 부산까지 내려갔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7월 6일 도림동본당의 이현종 보좌신부를 총살하는 등 본격적으로 남한 지역 성직자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이들은 우선 외국인 성직자들을 연행하기로 하고, 7월 11일 명동 주교관에 머물던 교황사절 번 주교와 외국 신부ㆍ수녀들을 붙잡아 소공동 삼학빌딩(현 대한항공빌딩 뒤) 지하에 감금했다가 심문을 하고 7월 19일 북한 지역으로 이송한 후 평양 감옥에 수감했다. 성직자들의 체포와 학살과 더불어 일반 신자들에 대한 체포와 학살도 계속해서 진행됐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인민군 사령부는 ‘기독교 민주동맹’에 가입할 것을 강요했으며, 성직자들과 명동본당 회장들에게는 노 주교가 이승만과 공모하여 북침을 계획하고 무고한 인민을 학살했으며, 신부들은 신자들을 착취하고 평신도 지도자들은 제국주의와 결탁해 국가를 멸망의 길로 끌어넣었다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자술서를 쓸 것을 강요했다. 또 신자들을 총출동시켜 궐기대회를 개최할 것과 라디오 방송에 참여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이러한 회유와 이용은 다행히 명동 신부들의 기지로 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명동성당은 상당 기간 본당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적어도 8월 6일까지는 주일마다 미사가 봉헌됐으며, 가정 방문과 성사 집전을 비롯한 본당 신부의 사목 활동이 계속됐다. 북한군은 교회 시설을 강제 점령하고 강제 수용했다. 서울대교구청을 비롯하여 계성학교, 유치원 등 명동성당 구내나 인근에 소재한 대부분의 교회 시설들이 인민군에 점령돼 군사 시설로 활용됐다. 동시에 북한군은 교회에 대한 회유를 시도했고 자신들의 선전선동에 교회를 이용하려 했다. 8월 6일 북한군이 다시 찾아와 신부들이 머물던 기숙사마저 비워 달라고 요청해 명동에 남아 있던 신부들은 제각각 흩어지게 됐다.
그러던 중 당시 북한군 공작대 대장으로 행세하던 김충성(베드로)이라는 평신도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을 찾아와 ‘북한군이 교회 지도급 신자들을 모두 학살하기로 했으니, 신부뿐만 아니라 수녀와 회장까지도 다 피신하라’는 말을 전해 줬다. 고아원의 재산도 교우 집으로 분산시켜 보관하게 하는 등 수녀원의 시설과 물품을 지키는 데에도 큰 공헌을 했다. 그래서 많은 신부와 수녀, 회장들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김충성의 정보 제공과 노력은 신부들의 납북을 비롯한 교회의 인적ㆍ물적 손실을 극소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북한군이 집집마다 수색하며 강제 징집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한 얼마 후 서울 지역의 젊은이들을 북한군 군대로 강제 징집했다. 이들 대부분은 치열했던 낙동강 전선으로 투입돼 북한군의 선봉에서 목숨을 잃었다. 진석은 집에 머물다가 징집을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자 삼선교 친척 집으로 거처를 옮겨 몸을 숨겼다. 서울이 수복되기 전 3개월 동안 삼선교 친척 집에서 친척 동생과 함께 은신처를 만들어 숨어 지냈다. 북한군은 집집마다 수색하고 있었기에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추기경 정진석] (12) 고립된 서울 생활
은신 생활 중 영적 독서와 기도에만 매달려
- 미국의 한국전 참전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사진은 6ㆍ25전쟁 당시 행군하는 미군 모습.
진석은 삼선교 친척 집에 은신처를 마련해 약 3개월을 지냈다. 이때의 서울 생활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우선 기본적인 의식주 모두가 결핍된 생활이었고 19세의 청년에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는 것은 가장 답답하고 큰 고통이었다. 또 한 가지, 기약 없이 이런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불안이 엄습했다. 그러나 인민군에 강제 징집돼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친구들에 비하면 운이 좋은 것이라고 진석은 생각했다. 지금은 무조건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언제라도 인민군의 눈에 띄면 인민군으로 징집돼 최전선에 배치되기 때문이었다. 많은 친구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때로는 부모님과 인사도 못 나누고 바로 전선으로 끌려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진석은 군인으로 징집된다면 어떻게든 국군으로 가야지 인민군으로 간다면 헛된 죽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민군은 처음에는 대학생 등 나이가 있는 청년들을 징집했으나 나중에는 14∼15세의 앳된 중학생들도 마구잡이로 징집했다. 서울은 인민군의 보충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해맑은 이 땅의 소년들은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인민군복을 입은 채 같은 민족이 쏜 총에 쓰러져 갔다.
진석은 온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며칠이 지나면서 점차 이 생활에 적응했다. 진석은 기본적으로 성격이 낙천적이었는데, 이는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신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어떻게든 하실 것이니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는 것이었다. 진석은 지금 처한 상황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숨어 지내며 온종일 영적 독서와 기도에 매달렸다. 또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었다. 밖의 소식이 너무 궁금했지만,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럴수록 진석은 기도에 매달렸다.
북한의 속도전과 미국의 군사적 개입
6ㆍ25 전쟁은 남한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시작됐다. 그럼에도 적화 통일이 되지 않고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유엔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북한이 남침을 계획하고 실행했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변수는 미국이었지만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상당히 늦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북한은 속도전을 벌이면 이른 시일 안에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수 있다고 낙관했다. 북한의 오판을 부추긴 것은 1950년 1월 12일 당시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발표한 이른바 ‘애치슨 라인’이었다. ‘애치슨 라인’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6ㆍ25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즉각 참전했다. 그 중심에는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있었다. 트루먼은 “북한의 전면 남침은 소련의 미국에 대한 시험이다. 따라서 이번의 침략을 방치한다면 공산당의 마수는 아시아 전역으로 미치게 되고, 나아가 제3차 세계대전이 유발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을 지켜내는 데 미국이 적극 나서야 한다”고 판단했다.
1950년 6월 24일(미국 시각)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주말을 고향 인디펜던스(미주리주)에서 보내고 있다가 애치슨 국무장관으로부터 6ㆍ25 전쟁 발발 소식을 전해 들었다. 트루먼은 즉시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도록 지시하고 곧바로 비행기 편으로 워싱턴으로 귀환했다. 그때 트루먼은 백악관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대처 방안을 골똘히 구상했다. 그의 결정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가장 극적인 판단이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6월 27일 백악관에서 열린 제2차 안보회의에서 미국 해ㆍ공군의 참전을 결정하고 지상군 참전에 관한 최종 판단은 맥아더 장군에게 맡겼다. 6월 29일 맥아더는 일본에서 몰래 한국으로 날아와 한강 방어선을 직접 시찰했다. 위험하다는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흑석동과 동작동 사이로 한강이 굽어 보이고 강 건너 용산과 남산이 보이는 지점에 도착했다. 총성이 가까이 들리고 대포의 파편이 떨어지는 것이 보일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직접 쌍안경으로 한강 전선을 관측했다. 이어 참호 속에서 근무 중인 국군 일등병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는 잘 알려진 이야기다.
“자네는 언제까지 그 참호 속에 있을 것인가?”
일등병은 부동자세로 분명하게 대답했다. “예! 저는 대한민국 군인입니다. 군인이란 명령에 따를 뿐이며, 저의 상관으로부터 철수 명령이 내려지지 않으면 죽는 순간까지 이곳을 지킬 것입니다.”
“지금 소원은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맨주먹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무기와 탄약을 보내주십시오. 그것뿐입니다.”
“알겠네. 내가 동경으로 돌아가는 즉시 미국의 지원군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겠네, 그동안 용기를 갖고 싸워주기를 바라네.”
통역을 통해 나눈 대화였지만 당시 주변 사람들은 맥아더 장군이 크게 감동했다고 전한다. 일본으로 돌아간 맥아더는 약속대로 1950년 6월 29일 새벽 3시(워싱턴 시각) 트루먼 대통령에게 급박하게 돌아가는 한국전 상황을 보고하면서 미 지상군 파병을 건의했고 대통령 허가를 받아냈다. 한국전에 대한 미군의 본격적인 개입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미군과 유엔군이 참전하도록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던 인물이 한 명 더 있었다. 당시 미국에 머물고 있던 초대 주미대사 장면(요한) 박사다. 그는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정부의 긴급 훈령을 받아 미국 국무부에 사태의 절박성을 전했다. 6월 25일 저녁 이승만 대통령과 통화한 후 미국의 상ㆍ하원을 찾아다니며 한국 파병을 역설했고, 이후 유엔과 국제사회에 북한군의 남침을 알리고 한국 전쟁에 참전해줄 것을 설득해 미군과 유엔군의 한국 파병을 이끌어냈다.
장면 박사, 한국 파병 위해 동분서주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연설했다. 6월 26일에는 백악관으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찾아가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했고, 6월 27일 미국의 대북한 선전 포고와 유엔군의 한국전 참전 결정을 이끌어냈다. 전쟁 발발 직후 미국의 정치인 중에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 3일 만에 점령당해 가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장면은 미국 정치인들을 찾아다니며 한국에 파병해 줄 것을 계속 설득했다.
디어 7월 7일 개최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군사령부 설치에 대한 결의안이 채택되면서 유엔 역사상 최초로 유엔군사령부가 창설되었다. 이에 따라 맥아더 원수가 초대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됐고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이 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이양함으로써 한반도에서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북한군과 싸우는 아군은 유엔군의 깃발 아래 하나가 됐다. 전쟁은 북한군과 한ㆍ미 연합군 간의 전쟁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던 대한민국에 커다란 힘이 됐다.
|
|
